설교본문 : 계 11장 1-11절
설교제목 : 측량하라
조급함은 모두 마귀에게서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시간이 얼마나 빨리 흘러가는지요! 2024년의 반을 정산해야 할 때가 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시간을 노래하며 춤추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만나는 20대 내담자분들의 다소 공통된 호소가 있습니다. 조급해져 불안해진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빨리 복원해서 보다 높이 날고 싶어합니다. 그때 조급함은 모두 악마에게서 온다고 말하곤 합니다. 조급함과 서두름이 자아를 앞질러가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지극히 작고 사소한 것에서부터 삶을 출발하여 자신을 단단히 세워가지 못하기에 부실한 인생의 건물을 짓기 쉽상입니다. 천천히 하나씩 단단하게 자신의 삶의 기본기를 쌓 아올라가야 합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영혼의 자서전2>에서 들려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산길을 걷다가 올리브나무에 매달린 유충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유충을 떼어 손바닥에 올려놓고는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투명한 꺼풀 속에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생명이 깨어나는 비밀의 과정이 거의 막바지에 이른 것 같았습니다. 그는 아직 고치 속에 갇혀 있는 미래의 나비가 햇빛으로 뚫고 나올 성스러운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보기 원했지만, 그 깨어남의 시간은 너무 더뎠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유충에 따뜻한 입김을 불어 넣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순간 유충의 등이 찢어지더니 연둣빛 나비가 나왔습니다. 나비는 힘겹게 날개를 펴려고 애썼지만, 날개는 겨우 반쯤 펴지다가 멈췄습니다. 조바심을 냈지만 나비는 영영 날개를 펴지 못했습니다. 영원한 법칙을 어기고 서둘렀기에 나비를 죽이고 말았다는 자책감이 아주 오래도록 카잔차키스의 영혼을 사로잡았습니다. 이 이야기 끝에 카잔차키스는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인간은 서두르지만, 신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작품은 불확실하고 불완전하지만, 신의 작품은 결점이 없고 확실하다. 눈물을 글썽이며 나는 영원한 법칙을 다시는 어기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나무처럼 나는 바람에 시달리고, 태양과 비를 맞으며 마음 놓고 기다릴지니. 오랫동안 기다리던 꽃과 열매의 시간이 오리라.”(니코스 카잔차키스, <영혼의 자서전2>, 안정효 옮김, 열린책들, p.647)
조바심과 서두름으로 입금을 불어넣어 빨리 깨어나게 했지만, 나비는 영원히 날지 못했습니다. 나무처럼 바람에 시달리고 햇빛과 비를 맞으면서 마음 놓고 기다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런 인생에는 기다리던 꽃과 열매의 시간이 홀연히 찾아올 것입니다.
측량하라
오늘 본문의 말씀은 여섯 번째 천사가 분 나팔 소리가 나면서 나타나는 재앙의 형국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일곱 번째 나팔 소리가 나기 전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환상중에 요한은 두루마리를 받았고, 그것을 먹으라 하기에 먹었습니다. 그것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배에서는 쓰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언을 해야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지팡이와 같은 측량자 하나를 받았고, “일어서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을 측량하고, 성전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을 세어라(11:1)”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여기에서 중대한 이미지는 측량하는 모습입니다. 지팡이와 같은 측량자는 개역개정에는 갈대로 번역했는데, 원어로는 ‘칼라모스(καλαμος)’로 물건이나 건물 같은 것을 재는 도구로 ‘길고 곧은 장대’를 가리킵니다. 이런 측량의 도구는 일종의 재건의 도구임과 동시에 심판의 도구의 양가적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지팡이와 같은 측량자는 로고스의 기능으로 분별하고 분리하는 용도로 사용됩니다. 이런 분별할 수 있는 기능이야말로 새로운 건축물을 재건하고 경계를 확정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에스겔은 포로로 잡혀간 지 이십오년째 되는 해에 예루살렘이 함락된지 14년 되는 해에 주님의 권능에 사로잡혀 이스라엘 땅으로 갔고 그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납니다.
“그가 나를 그것을 데리고 가셨는데, 그곳에는 어떤 사람이 있었다. 그는 놋쇠와 같이 빛나는 모습이었고, 그의 손에는 삼으로 꼰 줄과 측량하는 막대기가 있었다. 그는 대문에 있었다. 그 때에 그 사람이 내게 말하였다. 사람아, 내가 네게 보여주는 모든 것을 네 눈으로 잘 보고, 네 귀로 잘 듣고, 네 마음에 새겨 두어라. 이것을 네게 보여주려고, 너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네가 보는 모든 것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알려주어라(겔 40:2-4)”
그리고 에스겔은 그 낯선 사람이 모든 성전의 길이를 측량하는 것을 봅니다. 이런 성전의 길이의 측량은 에스겔이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된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또한 주후 70년에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파괴가 되었습니다. 이런 환상의 배경에는 성전의 복원을 겨냥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한이 지금 측량하고 있는 것은 실제의 구체적인 성전이 아니라 환상적 성전입니다. 그렇다면 측량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측량하기는 어떤 실제적 건설을 위해 준비하는데 있어서 주의깊고, 합리적이고 분석적인 절차입니다. 에스겔서에서 등장한 측량은 낯선 자 혹은 천사가 측량한 것이라면 계시록에서는 요한 자신이 주도적으로 자를 들고 측량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신성한 드라마에서 수동적 수신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참여자가 되어적극적인 방식으로 성전짓기를 위한 계획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아는 하나님의 목적을 완성하는데 적극적으로 참여해야만 함을 나타냅니다. 의식이 무의식의 목적을 이해하고 성취하기 위해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만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성전에 건설에 참여해야만 합니다. 자아가 수동적으로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 자기의 성전은 지어질 수 없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거주지 삼아 그분의 성전이 우리 안에 지어지길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측량하라는 메시지는 그 건설을 위해 매우 중대한 요청입니다. 땅의 경계를 구별하고, 길이를 재고, 각종 성전의 구획된 영역들을 측량해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 인생도 이런 측량을 잘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의 인생의 아름다운 건축물이 지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증인
그런데 성전 바깥 뜰은 측량하지 말고 내버려 두라고 합니다. 그것은 이방 사람들에게 내주었고, 그 이방인들이 거룩한 도성을 마흔 두달, 삼년 반 동안 짓밟을 것이라 합니다. 여기에서 성전 바깥 뜰은 이방인의 뜰로서 이방인을 위한 구역이었습니다. 이것은 실제 이방인들을 표상한다기 보다는 교회에 있으면서 교회 밖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성전 깊은 곳에 들어오지 못하며 성전 뜰에서 늘 배회하는 자를 가리키는 듯 보입니다. 이방인들이 성전을 짓밟는 것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을 예고한 것입니다. 마흔 두 달인 삼년 반의 시간은 하나의 변환을 위한 변곡점의 시간임을 표상합니다.
그때 두 증인이 나타나 1260일 동안 상복을 입고 예언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두 증인이 누구냐는 학자들 간의 이견이 많습니다. 1260일, 즉 마흔 두 달, 삼년 반 동안의 정해진 기간 동안 두 명은 증언하는 자의 진실성을 강조한 것을 증인은 증언자로서 교회나 그리스도인 자체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상복을 입고 예언함으로써 회개와 애곡을 표현합니다. 이 두 증인은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하여 겸손히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합니다. 이들은 주님 앞에 서 있는 두 올리브 나무와 두 촛대로 표상합니다. 올리브 나무는 기름과 연결되고, 촛대는 빛과 연결됩니다. 촛대에 기름을 넣을 때 빛을 발산할 수 있습니다. 기름으로 채워진 촛대, 즉 사랑과 성령으로 채워진 교회와 그리스도인이야말로 빛을 밝힐 수 있는 자입니다.
어둠과 고통의 기간 속에서도 올리브 나무와 촛대처럼 사랑과 성령으로 채워진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입으로 옷으로 회개를 촉구하고, 빛을 밝혀 생명의 길을 안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후에 웃는 자
그런데 그 증언자들이 증언을 마칠 때 아비소스(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이 그들과 싸워서 이기고 죽일 것입니다. 그 시체는 도시의 넓은 거리에 내버려지고 시체가 안장되는 되는 것을 허락지 않을 것입니다. 땅 위에 있는 자들은 그 시체를 두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두 예언자가 땅 위에 있는 자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난 뒤에 하나님께서 생명의 기운을 주셔서 그들이 다시 일어섰고 구경꾼(목격한 사람들)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11: 7-11). 우리는 이 예언의 말씀에서 비정함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예언자의 외침이 땅의 사람들을 괴롭게 했기 때문에 그들의 시체를 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인간 안에 무자비함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어떤 사상과 관념, 종교적으로 맹신하게 되면, 어떤 인간적 정도 허락하지 않고 짐승보다 못한 인간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얼마나 폭력성과 공격성이 발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죽음을 당한 두 증언자가 하나님의 영으로 살아나자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도 잠시 이내 불안과 두려움이 인간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일종의 대극의 반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위해 소명을 다하며 살아가는 자는 겉보기에 패배같은 삶이 펼쳐진다할지라도 다시 부활하여 하나님께서 높여주심을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그러나 생명의 말씀을 거부하고 하나님과 등지고 산 자들은 잠시의 승리에 도취되어 있다가 이내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심판을 받음을 우리에게 그림 언어로 일러줍니다. 최후에 웃는 자가 누구인지를 똑똑히 보여줍니다. 이것이 우리가 요한의 환상에서 붙들어야 할 의미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최후에 웃는 자로 우뚝 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