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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추천여행지 스크랩 여강을 지키는 신륵사(0.10.8)
숲길 추천 0 조회 50 10.10.19 16: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여강을 지키는 신륵사(0.10.8)

 

여주신륵사에 가기 위해서는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야 하는데 그 곳에는 생활자기 등 여주특산품을 많이 팔고 있는 것같았다.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까하다가 근처 식당에서 산채비빔밥을 먹었다.

여주 신륵사도 사람들이 많이 방문하는 곳이었다.

여강변에 평화롭게 자리잡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주문 가는 길에 원호장군 전승비가 있었는데 읽어보니 임진왜란 때 여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소수의 병력으로 최초로 승리를 거두고 승리를 거두다가 전사한 분이라는 것이다.

신륵사의 일주문 편액은 봉미산 신륵사인데 새로 지은 것처럼 깔끔했다.

일주문을 지나자 좌측에 템플스테이를 하는 전각들이 새로 지어진 것처럼 보이고 오른쪽에는 기념품을 파는 전각이 보였다.

매표소 옆에는 신륵사 안내문이 있었는데 원효대사가 건립하였다고 전해진다고 하며 다수의 보물이 있었다.

좌측에 비석이 몇 개 있었는데 가보지 않아 내용은 모르겠다.

정자속에 샘이 하나 있는데 세심정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감로수조라는 석조가 하나 있었는데 물은 없고 모래가 넣어 있었다.

먼저 강변 암반위에 있는 정자인 강월헌으로 갔는데 이름을 보니 전당합각재헌루정으로 정자보다 지체가 높은 전각이다.

강월헌과 그 옆 삼층석탑 근처에는 많은 관람객이 와서 구경도 하고 경치도 보고 있었다.

강월헌의 중앙 천정은 우물천정이었고 주위는 연등천정이었다.

강월천 안에는 붉게핀 찔레꽃이라는 시가 걸려 있었는데 시인 석화 강0희로 가운데자는 알 수 없었다.

강월헌에서 보니 여강에는 돛배도 하나 지나가고 있었다.

신륵사 3층석탑에는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는데 고려후기의 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라는 것이다.

3층석탑 위에는 보물 제226호인 다층전탑이 있었는데 원래 전탑의 나라는 중국이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우리나라에는 귀한 전탑이다.

전탑 위에는 대장각기비각이 있었고 그 속에 보물 제230호인 대장각기비가 있었다.

비각에서 내려다 보니 극락보전은 수리공사중이고 요사채에는 장독이 정겹게 보였다.

내려가보니 비석이 하나 있고 비각도 있었는데 송덕비였다.

신륵사의 역사를 말해주는 것은 커다란 은행나무였는데 800년인지 500년인지 되었다고 적혀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극락보전은 공사중이어서 극락보전 앞 누각에 임시로 이전해 놓고 아미타불과 협시보살과 탱화도 있었다.

임시 극락보전 앞에 종각도 있었다.

극락보전 앞에는 보물 제225호인 다층석탑이 있었는데 특이하게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극락보전 오른쪽으로 심검당이 있었는데 차우 김찬균 선생의 글씨이다.

죽으로 시작하는 네글자 편액이 있는데 어느 분의 글씨인지 모르겠는데 상당한 고수로 추정된다.

삼성각 구경을 하였는데 삼성각 앞 축대도 공사중이었다.

금륜당이란 전각이 있었는데 아마도 요사채인가 보다.

조사당으로 갔는데 가운데 한분이 계셨는데 나옹화상으로 추정되는데 화려한 옷을 입으셨다.

조사당 근처에 향나무가 있었는데 500년이 되었다는 것이다.

절에 향나무를 심는 이유가 향을 많이 피우기 때문이니 오래 관리해온 보람이 있다.

조사당 바로 뒤쪽으로 부도탑 2개가 있는데 어떤 스님 것인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명부전을 보고 나서 보제존자 석종, 석등과 탑비를 보러갔다.

계단이 많았는데 이고들빼기도 피어있고 소나무도 아주 많았다.

내려오는 길에 관음전도 들리고 범종각 편액도 보았는데 김어수란 분이 글씨를 썼다고 되어 있었다.

샘물위를 덮고 있는 정자 편액을 보았는데 청자정이었다.

나오는 길에 보니 여기 강변을 걷는 길이 여강길이었고 멀리에는 조포나루라는 입석도 보였다.

그동안 마음에만 두었던 신륵사 구경을 잘 한 것같았다.

아래 내용을 참고하면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진평왕(579~631 재위) 때 원효(元曉)가 창건했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으며, 신륵사라 부르게 된 유래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권7 여주목불우조(驪州牧佛宇條)에 의하면 신륵사는 보은사(報恩寺) 또는 벽사(璧寺)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벽사는 고려시대에 경내의 동쪽 언덕에 벽돌로 된 다층전탑이 세워지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절이 대찰(大刹)이 된 것은 나옹화상(懶翁和尙:혜근)이 입적할 때 기이한 일이 일어난 뒤부터이다. 1379년(우왕 5) 각신(覺信)·각주(覺珠) 등이 절의 북쪽에 사리를 봉안한 부도와 나옹의 초상화를 모신 선각진당(先覺眞堂)을 세우면서 많은 전각을 신축하고 중수했다. 1382년에는 2층의 대장각(大藏閣) 안에 이색과 나옹의 제자들이 발원해 만든 대장경을 봉안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인해 절이 위축되었으나 1469년(예종 1)에 영릉(英陵:세종의 능)의 원찰(願刹)이 되었고, 1472년(성종 3) 절이 확장되고 다음해에 정희왕후가 보은사로 개칭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671년(현종 12)에는 계헌(戒軒)이, 1702년(숙종 28)에는 위학(偉學)·천심(天心) 등이 중수했다. 1858년(철종 9)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내탕전(內帑錢)을 희사해 중수했다. 현존 당우로는 금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조사당(祖師堂:보물 제180호)·명부전·심검당·적묵당·노전(爐殿)·칠성각·종각·구룡루(九龍樓)·시왕전 등이 있다. 또한 다층석탑(보물 제225호)·다층전탑(보물 제226호)·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보물 제228호)·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보물 제230호)·석등(보물 제231호) 등과 같은 문화재들이 있다

 

신륵사다층전탑(神勒寺多層塼塔), 보물 제226호

 

아래로 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다.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 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기는 하나 얇다.

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있다. 조선 영조 2년(1726)을 뜻하지만 이 때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는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보제존자석종(神勒寺普濟尊者石鐘), 보물 제228호

 

신륵사 뒷편에 모셔져 있는 나옹의 사리탑으로,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基壇)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고 앞쪽과 양 옆으로 계단을 두었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운 것으로,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으로 밀양에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니, 그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마련하여 이 탑을 세워 두었다. 고려 후기의 석종형 부도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보물 제228호인 신륵사 보제존자석등은 신륵사에서 입적한 나옹스님의 사리탑이다.

신륵사 보제존자석등은 양식상에 있어 우리나라 석조부도의 전형인 팔각원당형의 형식이 아니라 석종형부도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박석을 깔아 마련한 묘역에 방형의 넓은 기단을 마련하였는데, 상면에도 박석을 깔고 중앙에 2매의 판석으로 기단을 형성한 후 석종형의 탑신을 놓았다.

기단의 전면과 양쪽 면에는 계단을 설치하였는데, 면석에는 문양을 새겨 변화를 주고 있다. 석종의 신부는 위로 갈수록 원만한 타원형을 이루다가 어깨 부분에서 수평이 되게 처리하였는데, 상면에는 보주를 조각하였다.

전체적으로 둔중하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고 있어 당시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후 건립되는 석종형부도의 선구적인 예로 평가된다.

나옹화상의 부도는 회암사와 신륵사에 각각 건립되어 있다. 양 부도의 건립에 대해 ‘선각왕사비’에는 ‘8월 15일 부도를 사(寺)의 북안(北岸)에 세우고, 정골사리는 신륵사에 모시니, 그의 입적하신 곳을 표시하려는 뜻이요, 석종으로 덮었으니 감히 와전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나옹화상의 부도는 회암사와 신륵사 각각 두 곳에 건립되었고, 이 중 신륵사의 것은 석종으로 덮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회암사의 부도는 나옹선사의 입적 후 3개월 만인 1376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신륵사의 부도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인근에 건립되어 있는 ‘보제존자사리석종기’가 1379년(고려 우왕 5)에 ‘각신’, ‘각주’등의 주관으로 건립된 점으로 보아, 이 부도 또한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보제존자의 석종은 외형상 방형의 기단위에 탑신을 안치함으로써 계단탑의 형상을 따르고 있지만, 2층의 방형기단을 구비한 점에서 자장(신라 승려)이 확립한 전통적인 계단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 같은 양식은 진전사지 부도와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서 김제 금산사 계단을 비롯해 불일사지 계단, 달성 용연사 부도로 이어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신륵사 보제존자석종은 통일신라시대에 확립된 팔각원당형의 양식에서 탈피해 통도사 금강계단의 양식을 계승한 부도의 양식이라 하겠다.

아울러 주인공을 알 수 없는 팔각원당형 석조부도 역시 건립시기가 조선 초기로 추정됨에 따라 신라시대 이래 확립된 전형적인 부도가 건립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조선시대에 건립된 석조부도의 주류는 석종형부도가 중심을 이루고 있고,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석조부도의 예가 많지 않음을 볼 때 이 부도는 우리나라 석조미술사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주 신륵사 조사당(驪州 神勒寺 祖師堂), 보물 제180호

 

신륵사는 봉미산 기슭에 있는 조선시대의 절로, 원래는 신라시대에 지었다고 하나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조사당은 절에서 덕이 높은 승려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건물로, 신륵사 조사당에는 불단 뒷벽 중앙에 나옹을, 그 좌우에는 지공과 무학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조선 전기 예종 때 지은 것으로 보이며, 낮은 기단 위에 앞면 1칸·옆면 2칸으로 세웠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장식구조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데, 이러한 구조를 다포 양식이라 한다. 앞면은 6짝의 문을 달아 모두 개방할 수 있게 하고, 옆면은 앞 1칸만 문을 달아 출입구를 만들어 놓았다.

조선 전기의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규모는 작지만 균형이 잘 잡힌 아담한 건물이다

 

신륵사대장각기비(神勒寺大藏閣記碑), 보물 제230호

 

신륵사에 세워져 있는 비로, 극락보전 서쪽 언덕에 있었던 대장각(불경을 만들어 보관하던 곳)의 조성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을 적고 있다.

길쭉한 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운 후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워 비몸을 단단히 지탱하도록 하고 있다. 이렇듯 비몸 양 옆에 돌기둥을 세우는 형식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보이는 현상으로 주목되는 부분이다.

권주(權鑄 )의 글씨로 새긴 비문은 비몸이 크게 파손되어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는 없다. 비문의 뒷면에는 불경(경률론)을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데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우왕 9년(1383)이다. 거북 모양의 비받침, 용의 머리가 새겨진 비머리가 고려 후기로 오면서 사각형 받침과 지붕 모양의 머릿돌로 간략화되는데, 이 비도 그러한 예이다

 

신륵사보제존자석종앞석등(神勒寺普濟尊者石鐘앞石燈), 보물 제231호

 

신륵사 서북쪽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 8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세부분으로 이루어진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에는 표면 전체에 꽃무늬를 가득 새겨 장식하고 있다. 화사석은 각 면에 무지개 모양의 창을 낸 후, 나머지 공간에 비천상(飛天像)과 이무기를 조각했다. 지붕돌은 두꺼우나 여덟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경쾌하여 무거운 느낌을 덜어준다.

고려 우왕 5년(1379) 보제존자석종 및 석비와 함께 세워진 작품으로,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며, 고려 후기의 대표적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신륵사 보제존자 나옹의 탑비/ 보물 제229호

 

보제존자 나옹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였던 승려로, 양주 회암사의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그를 따르던 문도들이 절안에 터를 마련하여 사리를 안치한 석종과 석비를 세워두었다. 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부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몸은 양옆에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끝부분에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의 직함 및 이름에 대해 적고 있는데 글의 맨 앞에 적지 않는 것은 드문 예이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가 글씨를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신륵사 다층석탑 ; 보물 제225호 / 경기 여주군 북내면 천송리 신륵사

 

신륵사 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으로,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한 후, 그 위로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조형방법은 전혀 달라서,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바닥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조각은 형식적이나, 특이하게도 물결무늬를 돋을새김해 두어 눈길을 끈다. 아래층 기단의 맨윗돌을 두껍게 얹어놓아 탑의 안정감을 높이고 있으며,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 꽃 모양을 새긴 기둥을 두고 각 면마다 용무늬를 깊이 판 모습은 능숙한 석공의 솜씨를 드러낸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치켜올려져 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각 부분 아래에 괴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일부분 남기고 있으나, 세부적인 조각양식 등에서 고려 양식을 벗어나려는 여러가지 표현이 돋보인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한층 우아하게 보이게끔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원각사지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돌의 재질, 조각양식이 비슷하다. 신륵사는 조선 성종 3년(1472)에 대규모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이 탑도 이 때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차우 김찬균 (此愚 金瓚均) 1910 ~ ? 호: 차우 此愚

 

주자서체(朱子書體)를 즐겨 썼으며 한반도 지도에 一切惟心造.

통영 미륵산 관음암의 보광루. 한산도 제승당의 한산정

만수산 무량사의 일주문과 천왕문.

설악산 신흥사 천왕문. 태종대 태종사.

수원 용주사 천보루 뒷편 홍제루(弘濟樓)

여주 신륵사 적묵실. 심검당.

조계산 송광사 임경당 주련

양산 통도사 범종루

의성 수정사 부산 온달 웃고가시다.

 

김어수[金魚水, 1909.1.4~1985.1.17]

 

본명은 소석(素石)이며, 1909년 1월 4일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났다. 1934년 《조선일보》에 시조 《곡 영숙아》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하였다. 중앙불교전문학교(지금의 동국대학교)에 다니면서 불경번역사업에 참여하여 《안락국태자경(安樂國太子經)》(1937)을 번역하였다. 재학시절, 김달진·나운경(羅雲卿) 등과 교우지 《룸비니》를 만들어 창작활동을 하였으며, 1938년 졸업하였다. 1966년 한국문인협회 울산지부의 창립 지부장이 되었으며, 1968년 대한불교조계종의 첫 상임 포교사로 선발되었다.

〈낙상(落想)〉 〈산촌한정(山村寒情)〉 등의 시조와 《부처님 오신 날》 등의 찬불가를 작사하였다. 시조집 《회귀선의 꽃구름》, 수필집 《달안개 피는 언덕길》 등의 저서가 있으며, 1980년 정인승과 함께 제5회 노산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사진을 보면서 설명하기로 한다.

강월헌을 먼저 본다.

 

 

여주 신륵사 주차장에 자기 등 기념품을 파는 가게이다.

 

 

원호장군 전승비이다.

 

 

봉미산 신륵사라고 되어 있다.

 

 

비석들이 몇개 있다.

 

 

샘이 있는데 세심정이고 그 뒤가 범종각이다.

 

 

강월헌을 먼저 가본다.

 

 

여강에 돛배가 지나간다.

 

 

삼층석탑이다.

 

 

보물인 다층전탑이다.

 

 

대장각기비각이다.

 

 

전각 지붕과 장독대가 잘 어울린다.

 

 

송덕비가 있다.

 

 

엄첨나게 오래된 은행나무이다.

 

 

이 전각은 원래 강당으로 쓰는 루인데 극락보전을 수리중이어서 임시로 극락보전으로 쓰고 있다.

 

 

극락보전 내부의 모습이다.

 

 

대리석으로 만든 다층석탑이다.

 

 

심검당이다.

 

 

저 편액을 읽을 수가 없다.

 

 

삼성각 내부 모습이다.

 

 

삼성각 앞 축대는 수리중이다.

 

 

금륜당이다.

 

 

조사당이다.

 

 

조사당 내부 모습이다.

 

 

500년된 향나무이다.

 

 

부도탑이 있다.

 

 

명부전이다.

 

 

명부전 내부 모습이다.

 

 

나제존자 석종으로 오는 길의 모습이다.

 

 

나제존자 석종, 석등, 석비이다.

 

 

 

 

 

관음전이다.

 

 

범종각이다.

 

 

관음전 내부 모습이다.

 

 

청자정이라고 되어 있다.

 

 

한강길 여주1코스 여강길이다.

 

 

입구에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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