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 길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3월 28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전북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유적지에서부터 금마면 미륵사지까지 총 16.1킬로미터에서 있었다. 참가자는 일반인과 학생 등 30여명이었다.
이날 행사는 왕궁리 유적전시관, 협조는 원광대학교 마한백제 문화연구소가 했다. 답사경로는 다음과 같다. ▲왕궁리 유적지―제석사지(3.0킬로미터) ▲제석사지―서동생가터(3.2킬로미터) ▲서동생가터―익산쌍릉(2.3킬로미터) ▲익산쌍릉―익산토성(1.9킬로미터) ▲익산토성―미륵사지(2.7킬로미터)
이번 답사는 이동 경로를 도로가 아닌 마을길과 산길을 최대한 활용해 답사를 펼쳐 백제 무왕대 유적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마음의 편안함과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됐다는 평이다.
왕궁리유적 관계자는 "무왕 길을 찾아 떠난 여행은 익산에서 무왕의 생애를 뒤돌아 볼 수 있는 문화유산도 알고 건강도 챙길 수 있는 의미 있는 걷기 코스가 됐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익산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정식 등재되기 위해서 지역민의 문화유산 보존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며 "마한백제문화연구소와 함께 지역민은 물론 국내외 관광객들이 익산 백제왕도의 역사문화를 이해하고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익산은 백제 무왕대의 천도지로서 왕궁터, 국립사찰, 산성, 무왕릉 등 백제 왕도로서 갖추어야할 유적이 모두 확인돼 지난 1월 익산역사유적지구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 목록으로 등재 됐다.
답사에 앞서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리유적전시관(관장 유창숙)은 지난 2월 27일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소장 최완규)와 함께 '무왕 길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는 주제로 사전 답사를 실시했다. 답사는 3월부터 7월까지 매월 4째 주 토요일에 실시된다.
왕궁리유적은 1976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발굴(시굴)조사와 1989년부터 현재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 결과 백제 무왕대에 건립된 왕궁 유적과 후대의 사찰 유적이 같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복합유적으로 확인되었다.
왕궁리유적의 왕궁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고조선 준(準)왕에 의해 건립된 마한의 왕궁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발굴조사 과정에서 마한과 관련된 유적과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고 대부분 백제 후기인 7세기대의 유적과 유물로서 마한시기까지 올라갈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2. 제석사지
제석사지는 왕궁리유적에서 동쪽으로 2km 거리에 위치한 사찰로서 백제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왕실사찰의 역할을 하여 왕궁리유적과는 밀접한 연관이 있는 유적으로 알려졌다. 제석사지는 1993년 시굴조사와 2003년과 2004년에는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의 기록에 보이는 제석사의 화재 후 잔해를 폐기한 폐기장(전 와요지)의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2007년부터는 제석사지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가 시작되었다.
제석사지는 국내 기록은 아니지만 「관세음응험기」의 기록과 제석사지에서 출토된 제석사(帝釋寺)명 기와를 통해 정확한 사찰 이름을 알 수 있으며, 사찰 북측 폐기장은 제석사 화재 이후 폐기된 것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의 하한 연대를 파악할 수 있다. 이들 유물과 비교 연구가 추진된다면 백제시대 유물의 편년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3. 서동생가터(마룡지)
서동생가터(마룡지)는 금마사거리에서 서측으로 500여m 떨어진 연못지로서 삼국유사 무왕조의 기록에서와 같이 서동의 모가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연못속의 용과 통하여 서동을 낳았다고 하는 축실처가 인접해 있다.
이 일대는 정식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삼국유사나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현지 지표조사 과정에서 서동이 태어난 축실처와 마룡지로 확인되었다.
20여년 전 마룡지의 동측에 위치한 구릉을 논으로 개간하는 과정에서 초석과 백제기와편이 다수 수습되어 서동이 태어난 곳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마룡지는 서동이 익산에서 태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는 유적으로서 백제 무왕대에 익산을 경영하게 되었음을 암시하는 유적이며, 삼국유사 무왕조 기록의 정확성을 입증할 수 있는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서동생가터의 서측 가까이에 마를 케어 생업을 삼았다는 오금산이 자리하고 있다.
4. 익산쌍릉
익산쌍릉은 무왕릉과 왕비릉으로 전하고 있는데, 익산시 석왕동에 200여m 거리를 두고 동서로 자리하고 있어서 흔히 쌍릉(雙陵)으로 부르기도 한다. 1917년 谷井濟一에 의해 도굴된 능 내부가 수습조사 되었다.
두 능은 잘 가공된 판석으로 설식과 연도를 만든 백제 말기의 무덤 형태로 석실 안에서는 관대 1개가 있고 주변에서 목관(木棺)의 파편과 목관을 장식했던 관장식과 옥, 토기편, 금동장식 등이 수습되었다.
발굴조사 보고서에는 부여 능산리 왕릉과 비교할 수 있는 왕족의 능묘로 추정하였다. 출토유물은 대왕릉에서 목관(木棺), 토기완, 옥제장신구(玉製裝身具)와 치아(齒牙) 3점이 수습되었고 소왕릉에서는 도금관식(鍍金棺飾), 금교구편(金鉸具片), 관정(棺釘), 금동투각금구(金銅透刻金具) 등이 수습되었다.
5. 익산토성(오금산성)
익산토성은 오금산에 자리하여 오금산성으로, 고구려의 왕족 안승의 일시 거처한 곳이라고 하여 보덕성으로도 불리 운다. 익산토성은 해발 125m의 오금산 정상과 동측 계곡을 둘러싼 백제시대의 전형적인 산성이다. 1980년과 1984년 2차에 거처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의 시굴조사 결과 백제 말기 토성으로 축조한 후 후대에 석성으로 변형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성의 동측에서는 문지와 문지 내부에서 건물지와 우물 등이 조사되었다.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 주변에는 익산토성뿐만 아니라 금마도토성, 미륵산성과 용화산성, 성태봉산성, 선인봉산성, 낭산산성이 자리하고 있으며, 조금 더 먼 위치에는 천호산성, 학현산성, 당치산성이 위치하여 이 지역 방어를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6. 미륵사지
미륵사지와 관련 내용은 『삼국유사』 무왕조에 기록되어 있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로 가는 도중 용화산 아래 큰 연못가에 이르렀을 때 미륵삼존이 연못 속에서 나타나 수레를 멈추고 절을 하였다. 부인이 왕에게 이르기를 이곳에 큰 절을 세우는 것이 내 소원입니다. 왕이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우는 일을 묻자 신통력으로 하루 밤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우고 평지로 만들었다. 이내 미륵삼존을 법상으로 하여 전, 탑, 낭, 무를 각각 세 곳에 만들고 미륵사라는 편액을 달았다. 지금도 그 절이 있다」라고 하여 미륵사의 건립 과정과 사찰 건물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미륵사지는 1960년대 부분적인 시굴조사에 이어 1974년에는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에 의해 동탑지가 조사되었으며, 1980년부터 1995년까지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전면적인 조사가 이루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