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교향곡은 원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헌정하는 것을 의도로 했던, 베토벤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 중 하나이다. 베토벤의 무급 비서였던 안톤 쉰들러의 회고록에 의하면, 유럽의 "해방자"를 기리기 위한 그 아이디어는 1798년 빈에 파견된 프랑스 특사 장밥티스트 쥘 베르나도트, 또는 베르나도트의 측근으로서 방문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9번의 헌정자 루돌프 크로이처에 의해 제안된 것으로 추정된다.[3][4] 하지만 베토벤의 제자 페르디난트 리스에 따르면, 그 아이디어는 작곡가 자신의 것이었다. 리스의 설명처럼 베토벤은 고대 로마의 가장 위대한 집정관처럼 나폴레옹에 대해 높은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1804년 초 악보를 완성했을 때 그는 표지에 Buonaparte ("보나파르트")라고 썼고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원고를 탁자 위에 자랑스럽게 올려놓았다.[5] 보나파르트는 베토벤과 단 1년 차이인, 같은 동시대 사람으로서 베토벤의 감탄을 자아낸 인물이었다. 베토벤은 거의 의식적으로 나폴레옹과 그의 운명 사이에서 수평 관계를 확립하려고 했으며, 보나파르트의 모습으로 구현된 프랑스 혁명의 이상에 감탄했다.
베토벤은 빠르면 1789년에 영웅주의의 교향곡을 쓸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펜을 들지는 않았다. 베토벤은 1801년 자신의 청각 장애를 인식하고 난 후 그 해 여름 빈 기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일리겐슈타트로 이사했다. 그 곳에서 베토벤은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썼다. 그는 유서에서 심지어 "자살까지도 생각했지만, 예술만이 나를 붙잡았다"고 표현했다.[6] 그는 이 단계에서 내면의 투쟁을 선언했고 교향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교향곡의 작곡은 공식적으로 1803년 5월에 시작되었고 1804년 초에 완료되었다. 주된 작업 시기는 베토벤이 바덴바이빈과 되블링에서 보내던 1803년 여름(6월/10월) 즈음이다.
나폴레옹에의 헌정 철회[편집]
일반적으로 알려진 영웅 교향곡이라는 부제는 원래 교향곡에 할당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 베토벤은 그것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헌정하려고 했었으며, 1804년 경 빈에서 파리로 이동할 계획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베토벤은 분노를 참지 못했는데, 잠시 후에 일어난 작곡가와 악보에 관한 일화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작곡가가 제목을 너무 세게 지워서 원고의 제목 페이지에 구멍이 뚫어졌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부러뜨릴 정도의 힘을 가하여 펜으로 제목을 흐리게 했다고 말한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작곡가가 책상으로 뛰어올라가 제목 페이지 윗부분을 움켜잡고 반으로 찢어서 바닥에 던졌다고 말한다.
베토벤의 제자 페르디난트 리스는 1838년의 회고록에서 나폴레옹이 자신을 프랑스의 황제(1804년 5월 14일)로 선포한 것에 대한 그의 스승의 반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 교향곡을 쓰면서 베토벤은 보나파르트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초대 집정관 시절의 보나파르트를 생각했다. 당시 베토벤은 그에 향한 큰 존경을 가졌고, 그를 고대 로마의 가장 위대한 집정관들과 비교했다. 나뿐만 아니라 베토벤의 가까운 친구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의 테이블에서 이 교향곡을 보았는데, 원고를 아름답게 베껴 적었다. 제목 페이지 맨 위쪽에는 Buonaparte ("보나파르트")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었고, 맨 아래에는 Ludwig van Beethoven ("루트비히 반 베토벤")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보나파르트가 스스로 황제를 선포했다는 소식을 그에게 가장 먼저 전했고, 그는 이에 격분하여 소리쳤다. "그렇다면 그는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군! 이제 그도 인간의 모든 권리를 짓밟고, 자신의 야망만을 탐닉할 것이다. 이제 그는 자신이 모든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것이고 폭군이 될 것이다!" 베토벤은 테이블로 가서 제목 페이지 윗부분을 움켜쥐고 반으로 찢어서 바닥에 던졌다. 그 페이지는 다시 만들어야 했고, 교향곡은 영웅 교향곡이라는 다른 제목을 부여받았다.[7]
그러나 베토벤이 영웅 교향곡의 제목 페이지를 찢었다고 하는 일화는 리스의 회고록 이전에 1836년 3월 18일 런던 매거진 The Musical World ("음악계")의 기사와 베토벤과 개인적 연분이 없었던 에른스트 오르틀레프의 1836년 베토벤 소설에서 이미 발견되고 있다:
프랑스 혁명은 베토벤이 "보나파르트"라고 부르는 교향곡을 작곡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인 프랑스 집정관이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을 읽어야 했다. 이것은 그를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교향곡의 제목 페이지를 뜯어내었고 Symphonia ("영웅") 또는 Sinfonia Eroica ("영웅 교향곡")이라는 제목이 있는 다른 페이지를 만들었다.[8]
현존하는 사본의 악보에는 손에 의해 삭제되었지만 흔적을 알 수 있는 두 개의 문구가 나타난다; 먼저 이탈리아어로 된 Intitolata Bonaparte ("제목 보나파르트")가 있고, 두 번째로 독일어로 된 Geschriben auf Bonaparte ( "보나파르트를 위해 씀")가 이탈리아어 부제 아래 네 번째 줄에 있다. 이것은 현재 빈의 Gesellschaft der Musikfreunde ("악우회")에 보관되어 있다. 원본의 자필 원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초연[편집]
1804년 6월 9일 몇 달 동안 공연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를 획득한 로브코비츠 공작의 궁전에서 비공개로 초기 리허설과 사적 연주회가 열렸다. 이것은 일부 오케스트라 음악가의 수수료 청구서에 문서화되어 있으며, 영웅에서만 요구하는 세 번째 호른이 관련되어 있음이 명시되어 있다.[9] 공작의 카펠마스터 안톤 브라니츠키가 제출한 1804년 6월 9일의 기록에 따르면 공작은 두 번의 리허설을 위해 22명의 추가 음악가를 고용했음을 보여준다. 첫 공공 연주회는 1805년 4월 7일 안 데르 빈 극장에서 작곡가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이 연주회에서는 그의 친구 프란츠 클레멘트가 주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출판 및 헌정[편집]
1806년 10월 이 작품이 출판되었을 때, 베토벤은 Sinfonia eroica, composta per festeggiare il sovvenire d' un grand'uomo ("위대한 사람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작곡된 영웅 교향곡")이라는 이탈리어어 부제가 부여되었다. 이 위대한 사람은 이상적이고 존재하지 않는 영웅이었다. 그보다 베토벤이 관심을 가진 것은 영웅주의 정신 그 자체였다. 헌정은 베토벤의 고귀한 후원자였던 로브코비츠 공작에게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