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 시대의 사목관할지역
➀ ‘성모 무염시태’ 지역이라 하던 서울은 조선교구장 베르뇌 장 주교님께서 친히 담당하여 신자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충청도 지역은 4개 지역으로 나누어 담당하였다. 충청도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신자 수가 월등히 많았고 매우 너른 범위로 신자촌이 많이 분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충청도를 담당한 사제들의 그 구획은 다음과 같았다.
➁ ‘성모 성탄’ 지역이라 하는 ‘상부내포’는 부교구장 다블뤼 안 주교님의 담당지역이었는데, 그 지역은 충청 서북부의 홍주(홍성) 일대였다.
그리고 ➂ ‘성모 왕고’라 하는 지역은 랑드르 홍 신부가 담당하는 것으로 하였는데, 그 지역을 ‘하부내포’라 하였다. ‘내포’를 상(上)·하(下)로 구분하여 그 ‘하부’의 지역을 일컬음인데,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 따로 살펴보기로 한다.
그 다음으로 ➃ ‘성모 자헌’ 지역이라는 충청 내륙의 현 공주 사곡 ‘진밧’을 리델 이 신부가 담당하였다.
그리고 충청 중부 내륙과 공주 인근을 ➄ ‘성모 영보’ 구역으로 하여 조안노 오 신부가 맡아 사목하였다.
그 외에 경상 서북부와 충북 내륙을 ➅ ‘성모 승천’ 구역이라 하여 페롱 권 신부가 담당하기로 하고, 경상도의 다른 지역을 ➆ ‘성모 취결례’ 지역이라 하여 칼레 강 신부가 돌보기로 했다. 그리고 별도로, 푸르티에 신 신부와 프티니콜라 박 신부로 하여금 배론의 성 요셉 신학교를 책임지기로 하였다.
박해의 혹독함이 비교적으로 가라앉아있던 그 철종 재위 기간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께서 활동하시던 시기이기도 하다. 최양업 신부님은 서양 선교사들과는 달리 조선인이기 때문에 언어와 외양에 있어서 지장을 받지 않고, 또 그 분 자신의 동포애에 의한 열정으로 한 지역만을 담당하지 않고 전국을 순회하며 신자들을 돌보다가 과로와 병으로 1862년에 순직하였다.
3. 상부내포와 하부내포
위와 같은 사목자들의 활동 영역을 놓고 볼 때, 그 당시에는 조선 땅의 상당히 많은 지역에 신자들이 고루 퍼져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특별히 충청 지역에 집중적으로 사목자들이 여러 구획으로 배치된 것을 보면, 이 충청(남도) 지역에 신자 밀도가 높았음을 추정할 수 있고, 더욱이 상·하로 구획한 ‘내포’ 지방은 교회의 노른자와 같은 지역이었다 할 수 있다.
‘교회의 노른자’라 할 수 있을 만큼 신자가 많았기 때문에 상·하로 나뉘어 사목자가 배치되었던 ‘내포’의 상부지역과 하부지역이 지리적으로 어떤 경계선에 의하여 구획되었는지에 대하여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의 관점으로는 고지대(haut)와 저지대(bas)를 의미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그리하여 비교적 산을 많이 끼고 있는 홍주(홍성) 지역을 ‘상부내포’라 하고, 하천과 평야 지역인 덕산 일대를 ‘하부내포’라 하였다는 견해가 따른다.
그러나 한편, 내륙을 향하여 깊숙이 들어와 있는 ‘안개’를 뜻하여 ‘내포(內浦)’라 하였는데, 실제로 충청 서해안에는 수많은 ‘안개’를 형성하고 있다. 충남의 아산·당진·서산·태안·홍성·보령·서천 지역을 잇는 해안선에는 연안 내륙으로부터 수많은 하천이 흘러나가면서 크고 작은 만(灣)을 형성한다. 그러한 아산만·가로림만·천수만·남포-부사-비인-장구만을 잇는 해안에서 내륙으로 들어가는 곳에 포구를 형성하였는데, 현대에 와서 방조제 축조로 포구 구실을 상실하고 있다. 바다를 향하여 내밀어 형성한 갯가를 ‘밧개(밖개)’라 하고, 바다로부터 들어온 갯가를 ‘안개’라 하던 그 ‘내포’가 많은 지방이라 하여 ‘내포지방’이라 불리었을 것인데, 이에 대해서 옛적부터 고유명으로 일컬었던 내력에 대해서는 별도 논구가 필요하겠다.
여하튼, 옛적 홍주(홍성)를 중심으로 한 ‘내포지방’의 상부와 하부 지역에 관한 행정적 구분은 논란의 여지로 두고, 박해시대의 조선교회 신자들이 너른 지역에 퍼져 살았던 ‘내포’의 윗녘과 아랫녘을 구분함에 있어서 지형의 고저에 따른 명칭으로만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다. 홍주로부터 남쪽으로 금북정맥의 아랫녘(남부지역) 수많은 산간으로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하다가 순교의 길을 갔던 그 많은 신자들의 삶의 터를 총괄하여 ‘하부내포’라 일컬어 무리가 없으리라 믿는다.
그 신자들이 숨어살던 내포 아랫녘의 산간 교우촌들은 추정컨대 이존창 선생이 ‘홍산(鴻山)’ 지방에 피신하여 선교하기 시작한 때(1790년대)로부터 형성된 믿음의 땅이었다. 그리하여 최양업 신부가 귀국하여 우선적으로 신자들을 찾아보기 시작하였던 지역이 곧 내포 아랫녘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전국의 신자들을 찾아 순방한 후 사목보고서를 최초로 작성한 곳이 또한 이 지역의 산골 중 한 곳인 ‘도앙골’이었음은 매우 의미가 있다. 이 지역은 사목자가 일시적으로라도 차분히 문서 작성을 할 수 있으리만치 신자 공동체가 건실했음을 엿보게 한다.
4. 교우촌 ‘도앙골’과 최양업 신부
중국에 가서 14년 만에 사제가 되어 천신만고로 1849년 말에 고국에 돌아온 최양업 신부님께서 한 시도 쉬지 않고 전국의 신자들을 찾아 돌아다니시다가 10개월 만에 자기의 활동 보고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그 보고서는 최양업 신부님께서 귀국한 후 프랑스 파리로 발송한 최초의 편지이다. 그 후에 또 여러 번 써서 발송한 편지들보다도 그 최초의 편지는 가장 길고 자세하게 쓴 보고서이다. 구구절절 자상하고 눈물겨운 그 최초의 편지를 최양업 신부님께서는 ‘도앙골’이라는 곳에서 썼다.
그 ‘도앙골’은 어디 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곳은 지금의 충남 부여군 내산면 금지리 깊은 산골이다.
그 ‘도앙골’은 보령지방과 부여지방과 서천지방이 맞닿은 산 아래 깊은 계곡에 있다. 그 산은 해발 544m의 ‘월명산’인데, 그 아래 해발 250m의 계곡에 신자들이 모여 숨어살던 곳을 ‘도앙골’이라 한다. 이 ‘도앙골’ 계곡을 품고 있는 월명산은 인근 보령 남포와 부여 홍산 지역의 여러 산골 그리고 서천 산간지역에까지 숨어 살던 신자들이 연통하기 수월하게 산길이 맞닿는 산이기도 하다.
전국 수많은 곳의 신자들을 찾아 열 달 동안 고된 순방을 마친 최양업 신부님께서 며칠 안전한 곳에서 피정하시듯이 쉬고 싶으셨을 것이다. 안전하게 쉴 만한 곳, 그 곳이 ‘도앙골’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그분은 자기 은사 신부님께 귀국 후 그간 활동한 보고의 편지를 쓰시게 되었다. 그곳에는 마침 그분의 친척 신자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편안한 마음으로 편지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도앙골’에 최양업 신부님과 동본인 ‘경주 최씨’ 후손이 1970년대까지 살았다.
5. 신자들은 왜 산골에 살았을까?
최양업 신부님께서 길고긴 편지를 그렇게 안전한 집에서 쓸 수 있었던 산골의 ‘도앙골’처럼 신자들이 숨어 살던 산간 교우촌들이 그 근처에 많았다. 그 산간 마을을 이루며 숨어살던 신자들의 모습에 대해서 최양업 신부님께서는 그 첫 편지에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저는 조선에 들어온 후 한 번도 휴식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7월 한 달 동안만 같은 집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고 언제나 시골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습니다. 중국에서 서울까지 여행한 것을 빼고도 1월부터 지금까지 거의 5천 리를 걸어 다녔습니다. 저는 이처럼 길고 고된 순방을 하면서 신자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거의 모두 다 외교인들이 경작할 수 없는 험악한 산속에서 외교인들과 아주 떨어져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신자들은 거의 다 교리에 밝고 천주교 법규도 열심히 잘 지키고 삽니다. 그러나 평야 지대인 고향에서 친척들과 외교인들 사이에 섞여 사는 신자들은 대체로 교리에 무식하고 신앙생활도 열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좀 더 열심한 신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육신과 세속의 모든 관계를 끊고 산속으로 들어가 담배와 조를 심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산속에서도 오래 살 수는 없습니다. 신자로 사노라면 점차 외교인들한테 알려지게 되어 박해가 따라오기 때문입니다.”(최양업 신부가 도앙골에서 작성하여 1850년 10월 1일 르그레주와 신부께 조선에서 올린 최초편지 중 발췌)
최양업 신부님의 편지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열심한 신자들은 외교인들과 함께 살 수 밖에 없는 평야지대의 마을에서는 신앙생활에 지장을 받고, 또 쉬 발각되어 박해를 당하기도 하여, 깊은 산간으로 들어가 움막 짓고 숨어 살면서 조 농사로 연명하며 열심히 살았던 것이다. 그렇게 살다가 끝내 발각되면 치명하게 되었다. 그러한 순교자들이 수없이 많은데, 그 중에 ‘도앙골’ 근처의 ‘홍산’지방 산골에 살던 임 데레사 라는 분에 대해서 치명일기는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다.
양반집 딸인 그분은 아버지와 함께 천주교 입교를 한 후 산중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출가하여 시부모께 효경하고 주일이면 이웃 여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열심히 살았는데, 병인년 어느 날 홍산 관아의 포교들이 들이닥쳐 그 남편을 체포해갔다. 며칠 후 그 남편이 집으로 돌아왔기에 혹 배교하였느냐고 물으니, 관청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 덕분에 풀려나왔다 하는 것이다. 그런지 얼마 후 다시 포교들이 찾아오니 남편은 급히 도망가고 임 데레사만 잡혀 들어갔다. 관원이 남편 도망간 곳을 대고 배교하라면서 문초하였지만, 그분은 “남편이 어디로 도주했는지는 알 수 없고 다만 남편과 함께 열심히 천주님을 믿고 살았는데, 나는 천주님을 만만코 배반하지 못하겠나이다.”하면서 고문을 당하고 공주 감영으로 이송될 때 자기가 입고 있던 치마를 벗어서 가난하고 늙은 시어머니께 드리고 나서 공주에서 교수형으로 치명했다.
6. 그러한 산골 교우촌은 또 어디 어디?
이렇게 임 데레사와 같이 ‘홍산’ 지방의 산골에서 잡혀가 순교한 분들의 명단이 치명일기에서만도 수없이 많다. 그분들이 살다가 잡혀간 산골을 열거하자면, 홍산 지방에 ‘옥가실’ ‘거칠’ ‘내대’ ‘고갈’ ‘도앙골’ ‘뒹골’ ‘삽티’ ‘새재’ ‘안나마리’ ‘안골’ ‘부덕리’, 그리고 인근 서천 쪽의 ‘산막골’ ‘독메’ ‘작은재’, 보령 남포 지역에 ‘서짓골’ ‘판숫골’ ‘쌩계’ ‘자라실’ 등등……
홍산 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산골 마을들은 지금은 거의 폐동되어, 어느 곳은 산간 임업 개발지로, 어느 곳은 이른 바 귀농 빙자의 별장 난립지로, 혹은 개신교회의 기도원으로, 또 순교성인 다블뤼 안 주교님의 주교관 별채 문서고가 있던 곳(판숫골)은 무속인 굿당으로, 안 주교님과 순교성인 네 분을 안장한 곳(서짓골)은 외교인들의 묘지로 되어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현재 이러한 상태로 잊혀져 온 순교성지로서의 수많은 산골 가운데 ‘도앙골’만 최근에 한 필지 땅(570평)을 확보하게 되었다. 한 사이비 스님이 불당을 건립하려던 그 땅을 천재일우로 확보하여 최양업 신부님을 기리는 비석을 세울 수 있었다. 그 ‘도앙골’은 최양업 신부님께서 순직하신 몇 년 후의 병인박해에 체포되어 순교한 많은 분들의 명단이 확인된 곳이다.
7.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렇듯 수많은 신자들의 순교 및 삶의 흔적과 최양업 신부님의 행적을 간직한 곳들이 무관심의 세월 속에 묻혀 있었던 사실에 대하여 안타깝고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간의 부끄러운 무관심의 역사를 되살리기 위해서 대전교구는 만시지탄으로 이 홍산 지방의 순교사적지들에 대하여 ‘하부내포성지’라 선언하고, 순교자들의 후손다운 오늘의 신앙인들이 기도하여 성화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잊어져온 이곳들에서 또한 잊어져 일일이 이름을 알 수도 없는 수많은 순교 선열들의 어렴풋한 모습들을 오늘에 밝혀내는 일이란 그 신앙 후예들이 오늘의 삶으로 되살리는 것이리라!
하여, 성인 명부의 반열에 들어 기억되는 분들의 사적지로 알려진 ‘성지(聖址)들’과 더불어, 시복시성(諡福諡聖)의 자료조차 찾지 못하여 잊혀져갈 사람들의 신앙을 엿볼 수 있는 곳들 또한 ‘성지’로 알아보는 사람들이 곧 오늘도 오로지 신앙으로 묵묵히 살아가는 평범한 그러나 열심한 천주교 신자들일 것이다. 그러한 신자들이 찾아오는 순례의 발걸음은 여기 숨어 살다 목숨을 다한 옛 신앙인들의 기도 소리에 화답함일 것이다. 곧 오늘 우리 자신들일 것이다. 숨어 살다 산골에 묻힌 그 이름들이 곧 오늘의 묵묵한 신자들의 이름이어야겠다. 그리하여 ‘아랫녘 내포’ 곧 ‘하부(下部)내포’라 불리어지는 이곳이다! 해서, 내세울 만한 것 없이 오로지 낮은 처지로 행복한 사람들의 신앙을 엿볼 수 있는 곳이 여기 ‘하부(下部)내포’이리라……! |
첫댓글 김상원 필립보 형제님 좋은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