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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2 강
32. 무슨 권세로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거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막11:27-33).”
가. 예수님의 권세
예수께서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와서 하는 말이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게 되었다. 성전에서 가르치는 것과 성전을 청소하는 일들은 어떤 권세를 누가 주어야 한다.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율법에 따라서 임명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네게 이런 것을 하라고 하였느냐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적인 관념이다. 세상에서는 당연히 이것이 있어야 한다. 무슨 일을 하려면 임명장을 받아 와야 한다. 예루살렘 안에도 많은 권세들이 있는데 예수께서 갑자기 뛰어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느냐?” 고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나도 너에게 한 말을 물으리니 대답하라~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나도 무슨 권세로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이 사람들은 예수의 권세가 어디서 왔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
새로운 눈이 아니면, 다른 관념이 아니면 이 권세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예수님의 권세는 어디서 온 권세일까?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된 권세이다. 하나님이 예수란 사람에게 특별하게 어떤 임명장을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으로 말미암아서 나타난 권세이다.
예수께서 영광의 보좌에 오를 때, “하나는 좌편, 하나는 우편에 앉게 하여 주십시오(막10:37)”라고 제자들이 부탁하였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받겠느냐?” 하니까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니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 사람이 받을 것이다(막10:40).” 하셨다.
내가 그 잔을 받은 것만큼, 내가 그 침례에 참예한 것만큼만 그 권세가 드러난다. 그러므로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것을 안 주십니까?’ 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세상적인 관념과 종교적인 관념 안에서는 어떤 사람을 목사로 임명할 수도 있고, 교황으로 임명할 수도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세계는 그것이 없고 열 고을을 다스리든지 한 고을을 다스리든지 그것은 자기의 잔과 비례한다. 이 권세는 누구에게 받아 와야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이 그런 권세를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누구와 친하다고 줄 수도 없고, 자기가 사랑한다고 더 줄 수도 없다. 이것은 그가 받는 잔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잔이 크면 고을도 크고 잔이 적으면 고을도 적다. 이것은 하나님도 어떻게 할 수 없다. 자기가 받는 잔에 따라서 그 영광이 나타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절대로 불공평할 수가 없다. 등잔에 불을 켜놓으면 그 불이 얼마나 밝은가 하는 문제는 불이 타는 것에 따라서 비례한다. 촛불이 만일 닳아지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 불빛은 조그마할 것이고, 촛불이 많이 닳아진다면 빛은 멀리 가게 될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고 통제할 수도 없고 누구도 주고받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로지 촛불이 타는 것만큼 될 수 있다. 이런 관념으로 바꿔지지 않으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
나. 참 권세는 하나님과 연합함에서 나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우리가 하나님과 어떻게 연합되는가에 따라서 빛이 나기도 하고 나지 않기도 한다. 자기 자신에게서 만일 빛이 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연합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하나님이 자기를 미워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버려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것은 초가 온전히 타지 않아서다. 타기만 하면 바로 된다.
‘하나님, 어째서 나에게는 이렇게 안 주십니까? 왜 안 주십니까?’라고 물으면 하나님이 무어라 대답하시겠는가? ‘온전히 타라. 온전히, 확실히 타라.’고 하실 것이다. ‘왜 나는 권세가 없나?’라고 물으면 하나님께서는 ‘너에게 많은 권세가 있다. 너의 권세를 행사하라.’ 하신다. 권세를 행사하려면 온전히 타야 한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이렇게 묻는 이 사람들은 얼마나 표면적인 사람들이며, 종교적인 사람들인가를 알 수 있다. 예루살렘 안에는 종교적인 모든 것들이 다 있다. 무화과나무에 잎사귀가 무성했던 것처럼 예루살렘 안에는 모든 것이 무성하다. 그렇지만 그런 모든 것들은 열매가 되지 못했다. 우리는 새로운 눈이 필요하다. 죽고 다시 난 눈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새로운 세계가 보인다.
하나님은 우리를 참 권세 안에 두기를 원하신다. 당신과 연합함으로 말미암아 참 권세 안에 있게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과 우리가 연합하는 것은 사람이 연합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사람이 연합하려면 둘이 서로 계약을 해서 한다. 마치 주식처럼 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의 연합은 아주 신비한 방법으로 연합된다. 우리가 그 안에 가서 죽든지, 그가 우리 안에 와서 죽든지 둘 중에 하나다. 그래야 연합이 된다. 하나님이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을 때 얼마나 안심하고 보내셨는지 아는가? 사람 안에 하나님 자신을 두어서 하나님을 맡길 때 얼마나 불안하시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예수에게는 안심하셨다. 왜 그렇게 안식을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우리가 생각하면 그 연합이 어떤 연합인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실 때 왜 안심할 수 있는가? 모양은 다르지만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심한다.
우리가 어떤 형제에게 안심하게 될 때 어떻게 안심하게 되는가? 그 형제가 나이고 내가 그 형제일 때 안심한다.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산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되지를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이 완전한 연합이고, 완전한 권세다.
연합되면 연합된 만큼 권세가 있다. 이 연합이 없으면 절대로 권세가 될 수 없다. 하나님 자신도 어찌할 수 없다. 만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을 하나님이 막으실 수 있다면, 하나님이 막으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도 막으실 수 없었다.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난 것을 하나님도 막을 수 없다는 뜻이다. 어떻게 산 자가 죽은 자 안에 있겠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이다. 예수의 권세도 그와 같은 원리에 의해서 나타난다.
어느 형제에게서 어떤 권세가 드러난다면 누가 그런 권세를 주어서 드러나는가? 그렇지 않다. 그 사람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자기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순종하는 만큼 권세가 나온다. 자기가 하나님과 연합하면 연합한 것만큼 영광이 드러난다.
등은 전기와 연합하면 한 것만큼 빛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유리의 색이 진하다면 그 빛은 잘 드러나지 않을 것은 당연하다. 빛이 비취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완전하게 연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도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한 것이다. 성전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한 것이다. 참 이스라엘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한 것이 바로 참 이스라엘이다. 지금 예루살렘에는 연합되지 않은 형식만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연합된 실체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로 연합된 것을 보아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자기가 가신 곳으로 인도하기를 원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기는 그렇게 갔을지라도 남은 그렇게 안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꼭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 제자들을 하필이면 이 복잡한 예루살렘 안으로 끌고 들어가야 하며, 왜 하필이면 십자가에까지 꼭 데리고 가야 하는지 이유가 있다. 그 길을 통과하지 않으면 그 권세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과정을 겪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바로 영광으로 가는 길이다. 세상적인 관념으로 볼 때는 그것이 망하는 길이지만, 영적인 관념 안에서 볼 때는 영광의 노정이다. 이 노정을 피한다면 다른 길로 가버리고 만다. 다른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게 된다.
최초의 아담이 바로 그 영광의 노정을 이탈해서 치욕의 노정으로 갔다. 그래서 아담에게서 나온 것은 변명과 부끄러움이다. 생명의 노선으로, 영광의 노선 안으로 간 사람은 변명이 없다.
권세는 어디서 나오는가? 돈이 많으면 되는 것인가? 공부 잘한다고 되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다. 이 권세는 하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주님과 연합한 것에 비례한다. 그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불이 빛을 내고 있는 것을 누가 막겠는가? “누가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겠으며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어떻게 숨겨지겠느냐(마5:14-15)”는 것이다. 어찌할 수가 없는 일이다.
이것은 누구라도 거기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형제에게서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보라.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형제에게서 권세가 나타나는 것을 보라.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높고 낮은 문제도 아니고,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다. 참으로 영광의 세계 안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일이 바로 이런 일이다.
우리는 형제 안에서 나타나는 영광을 보면서 그것을 경배하게 된다. 경배란 말은 좀 이상하지만, 그것을 흠모하게 되고 따르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우리 형제들이 참으로 권세 있는 사람이 되어서 세상 앞에 나갈 때 세상 사람들이 그 권세를 부정하지 못하게 되기를 원한다.
‘나는 예수 믿으니까 권세가 있다.’는 것이 아니고 정말로 그 사람의 권세 자체를 부인할 수 없어서 세상이 복종하는 형제들이 되기를 원한다. 그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이고 영광스러운 것인가!
다. 생명 안에 있는 권세
달걀 안에는 흰자와 노른자밖에 없다. 이것을 암탉이 21일 동안 품고 있으면 이상하게 병아리가 주둥이로 껍질을 딱 깨뜨리고 나온다. 저절로 깨고 나오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다. 그런데 병아리가 나오는 것을 도와주려고 밖에서 구멍을 뚫어주면 그 병아리는 살지 못한다고 한다. 안에서 생명이 자라면 저절로 안에서 깨뜨리고 나오도록 되어 있다. 참으로 신기하다.
우리는 병아리가 속에서 터져 나오는 것을 보고 즐거워한다. 이것이 바로 권세이다. 그것이 부활의 권세 아닌가? ‘나는 산 사람입니다. 산 사람입니다.’라고 아무리 해도 소용없다. 죽은 자는 저절로 살게 되어 있다. 하나님도 그를 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세계인데, ‘내가 살았는데 왜 안 알아주느냐?’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살았으면 저절로 터져 나오게 되어 있다. 병아리는 누가 알아주거나 안 알아주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나오면 그냥 팔팔 뛴다. 그러므로 권세도 바로 이런 것이다.
어떤 분들이 우리 교회에 와서 보고 생명은 참 충만한데 지식이 좀 부족한 것 같다고 한다. 성경 지식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지식이 조금 부족한 게 더 낫다. 생명이 앞서가고 지식이 뒤따라가야지, 지식이 앞서고 생명이 따라가면 안 된다. 그러면 다 죽은 것이 된다. 지식이 조금 뒤따라가야지, 앞서가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원래 신학은 어떤 생명이 발생하면 그 발생한 것을 정리하려고 있다. 그런데 요즘은 거꾸로 되었다. 신학이 앞으로 가고 생명이 뒤로 가게 되었다. 그러니까 생명이 되지 않는다. 꼭 마찬가지로 성경을 아는 지식도 그러하다. 그 지식이 내 생명을 앞서버리면 그렇게 된다. 내 생명이 앞서고 그 지식이 따라가야 한다. 우리 생명으로 성경이 보여져서, 자기 것으로 보여야만 한다. 그래야 생명이 자란다.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그리스도가 안 보이면 안 읽는 게 낫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보았는데 그리스도가 안 보였다. 그래서 예수를 죽였다. 우리가 지금 구약성경을 꼭 봐야 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예수가 보이면 보고, 예수가 안 보이면 볼 필요가 없다. 성경 보라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성경을 모른다고 문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 문제가 된다.
구약성경을 보고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신약성경을 보고도 어려운데 구약성경을 보고 안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 아니겠는가? 생명이 적으면 오히려 말려 들어가게 되어 있다. 얼마나 훌륭한 말이 많고 얼마나 좋은 말이 많은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는 말이 다 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왔다 갔다 하다 보면 그리스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나는 단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다니는 사람밖에 안 된다. 이것은 완전히 구약이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생명이 앞서고 지식이 뒤따르는 것이 정상이다.
우리 교회는 정상적인 교회이다. 성경에 대해서 조금 무식하지만 이것이 정상적이다. 아주 무식하면 좀 답답한 데가 있다. 왜냐하면 좀 정확하게 자기 생명을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을 못해서 좀 답답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는 있지만, 그렇다고 생명이 죽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저 아쉬운 대로 살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이 더 많아지면 이상하게 계란을 밖에서 뚫는 것이 된다. 병아리가 나올 때는 20일 만에 나오는 것도 있고 21일 만에 나오는 것도 있다. 그런데 20일째 나온다는 성경을 읽고, 20일 만에 구멍을 뚫어버리면 안 된다. 어떤 것은 23일 만에 나올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뚫을 수 없다. 안에서 뚫고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 자기 생명이 살아 있다면 스스로 뚫고 나온다.
안에서 밖으로 소리 지르지 않아도 스스로 뚫고 나오게 되어 있다. 병아리가 안에서 소리 지르는 병아리는 없다. ‘나를 왜 안 꺼내어 주나? 껍질이 있는데 왜 안 깨주나?’ 하고 있는 병아리는 없다. 저절로 다 뚫고 나오게 되어 있다. 사람이 염려해서 지식이 먼저 앞서다 보니 ‘이러고 있다가는 평생 계란 안에, 계란 껍데기 안에 갇혀 죽겠다.’는 생각을 한다. 살아 있는 병아리는 그렇게 생각하는 병아리가 없다. 그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것이 분명하다.
생명은 지식을 아주 경계해야 한다. 지식이 우리 생명을 표현할 때는 필요한 것이지만, 그 생명을 낳고 자라게 할 때는 아주 방해물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꼭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보통 기독교인들을 만나보면 별것도 아닌 지식이 있어서 그 지식이 가로막고 있다.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고 지식이 있다. 그 지식 때문에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으로 모든 걸 판단한다.
생명의 세계는 미리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지식의 세계는 예측이 가능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미리 예측을 해놓는다. 교회는 이래야 한다는 예측을 해놓는다든지, 형제는 이래야 한다고 딱 예측을 해놓는다. 그 기준을 가지고 보면 맞지 않는다. ‘형제가 되어서 왜 그래?’ 하게 된다. ‘형제가 되어서 왜 그러냐?’가 아니라 형제니까 그렇다. 사실은 하나도 이상한 것이 없다. 그 형제는 그 형제니까 그런 것인데, 자기가 먼저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 지식이 있으면 다른 사람을 바로 볼 수 없게 된다.
항상 기준이 있다. 이것이 율법 세계다. 항상 기준이 먼저 있다. 어느 경우도 이 기준에 맞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어떤 사람도 거기에 맞을 수는 없다. 그 사람을 그 사람대로 그냥 볼 수 있어야지, 기준을 정해 놓고 보면 그 기준도 계속 올라간다. 그대로 있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항상 같이 올라간다. 그런 사람은 한 번도 만족을 느낄 수 없다. 한 번도 완전한 것을 볼 수 없다.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형제가 왜 그런가?’ ‘형제니까 그렇지.’ 그렇게 하면 된다. 간단하다.
병아리는 병아리의 세계가 있고 암탉은 암탉의 세계가 있다. 그대로 잘 살고 있는데, 괜히 ‘왜 그러나? 왜 그러나?’ 이러면 어찌되겠는가?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잘 살고 있다. 그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어떤 것도, 어떤 모습을 먼저 정해 놓고 거기다가 맞추려고 하면 절대로 안 된다. ‘목사님, 목사님 왜 그럽니까?’ 목사니까 그렇다. 그것은 어찌할 수 없다.
엊저녁에도 어떤 형제하고 이야기했다. 너무 답답해서 ‘나는 나대로 그냥 있는데 네가 왜 나보고 그러느냐? 그냥 나대로 봐라. 나대로 보고 나대로 봐서 안 되면 그냥 가버려라.’라고 했다. 그랬더니 ‘이제 알겠다.’라고 한다. 나는 나대로 사는 사람이다. 난 나대로 살다 보니까 지금 이렇게 산다. 그리고 또 그것이 좋아서 오는 사람은 오는 것이고, 또 싫으면 할 수 없다. 어쩌겠는가? 싫다는데 억지로 붙잡겠나? 갈 사람은 가고 올 사람은 온다.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잠잠히 그를 보고, 우리 자신을 조성하시고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예민하게 느껴야 한다. 하나님이 계속 채찍을 때리고 있는데도 모르고 있다든가, 하나님이 계속 귀에다 대고 소곤거리고 있는데 못 듣고 있다든가 하면 문제가 된다.
남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 음성을 듣지 못하면 그것이 문제가 된다. 내 눈에 있는 들보는 생각 안 하고, 남의 눈에 있는 티만 생각하고 있으면 자기 눈에 있는 들보가 언제 빠져나가겠는가?
라. 주님의 권세를 증거함
나는 교회 형제들이 다 권세 있는 사람들이 되어서, 교회 안에서도 권세가 되고 또 세상에 가서도 권세가 되기를 원한다. 나보다 더 권세가 있어서 더 큰 부분을 담당한다면 그것이 나의 영광이다. 나는 밖에 나가서 모르는 사람들을 대할 때 여러분의 권세를 자랑한다. 그것이 만일 내 권세보다도 더 크면 더 좋다. 어차피 나는 세상에 오래 있지 못할 것인데, 더 오래 있을 사람이 권세가 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주의 권세가 세상에 남아야 한다. 나를 십자가에서 구원한 그 권세가 남아야 하고, 세상에서 버린 바 된 나를 구원하신 그 권세가 살아야 한다. 나는 죽어도 그 권세는 살아야 한다. 나는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원한다.
나 자신도 그 영광을 위하여 살고, 다른 형제들도 그 영광을 위해 살아주기를 바란다. 나는 모든 형제들이 그 영광을 위하여 살아주기를 바란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스러운 분으로 살려내는 형제들이 되기를 원한다.
만일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살려내기만 한다면, 세상에서 멸시받은 분을 영광스럽게 해주기만 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의 즐거움이 된다. 우리가 모두 다 그 안에서 발견될 때 즐겁다. 우리가 그 권세 아래서 발견될 때 우리가 영광스럽다. 어떤 형제 안에서 이 권세가 터져 나와서, 십자가의 권세가 터져 나오면 우리는 그만큼 다 같이 향상된다. 우리 세계가 자랑스럽지 않은가!
우리는 당당하게 향상된 그 권세를 가지고 세상에 나가야 한다. 우리가 만일 빌빌거리고 있다면, 세상에 나갔을 때 이상하게도 권세가 없다. 그런데 어떤 형제가 권세가 있으면 이상하게 자기는 아닌 것 같은데도 그것이 자랑스럽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세계의 권세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왜 예수를 증거하기 원했을까? 처음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다른 줄 알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도 자기는 아닌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예수를 핍박하더니 또 자기들을 핍박하더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있을 때는 예수님이 표적이었다. 예수님이 죽고 나니까 베드로가 표적이 되었다. 자기들은 그럴 줄 몰랐다. 예수 죽은 것과 나하고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기 잡으러 갔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큰 쥐 잡고 나면 작은 쥐 잡으러 온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그들이 정신이 확 들었다. ‘이것이 예수 문제가 아니고 내 문제구나.’ 이렇게 알았다. 그래서 그 예수를 살려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예수를 영광스럽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주의 영광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분이라고 그 영광을 드러내게 되었다. 온 구약성경을 전부 다 동원해서 그를 증거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자기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영광을 증거하는 문제가 내 문제이다.
만일 그분이 영광스럽지 않다면 나는 설 자리가 없다. 만일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비참한 분이라면 나도 비참하다. 내가 그 운명 안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그렇다. 나는 어찌하든지 내가 죽을지라도 그를 나타내야 한다. 우리가 죽을지라도 그를 나타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예수 싫어하는 사람은 예수 제자도 싫어한다. 그 운명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예수라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고 그 운명을 싫어한다. 내가 양문회지에 늘 쓰고 있다. 자세히 보면 그것은 내 운명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예수의 운명으로 보인다. 그래서 밝히고 있다. 나는 그 운명을 영광스럽게 살려내기를 원한다. 나는 마리아의 운명과 다말의 운명을 살려내기 원한다. 기생 라합의 운명을 살려내기 원한다. 그것을 더 영광스럽게 살려내고 싶다.
내 눈에는 그것이 참으로 좋게 보인다. 또한 그것이 나 자신이다. 그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그것이 자기 자신의 일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주 예수의 일이 곧 내 일이라고 알게 된다. 아버지의 일이 곧 내 일이라고 알게 된다. 아버지가 일하시니 내가 일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세계 안에 들어온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일로 소모할 필요가 없다. 교제하려 앉아서 딴소리하면 할 필요가 없다. 주님을 영화롭게 할 일이 아니면 교제할 필요가 없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면 할 필요가 없다. 무엇 때문에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겠는가? 그런 소리 하고 있으면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고, 욕을 얻어먹게 된다.
우리는 모일 때마다 주의 영광을 위해서만 모여야 한다. 무엇을 하든지, 농담을 하든지 진담을 하든지 주의 영광만을 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자신이 격하된다. 주님이 영광스러워지면 우리도 영광스러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 말씀이 잘 인식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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