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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거짓교사/멸망
제목 : 확정된 멸망(2)
성경 : 벧후 2:4~8
찬송 : 432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30910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벧후 2:4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벧후 2:5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벧후 2: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벧후 2:7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벧후 2:8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거짓 교사들의 확정된 멸망에 대해서 구약의 판례(case)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타락한 천사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오늘은 노아홍수와 소돔과 고모라 멸망 사건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노아 홍수
√벧후 2:5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사람마다 아끼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새로 산 차를 아끼기도 하고, 명품 가방이나 악서서리를 아끼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소중한 친구를 아끼기도 하고, 혹은 은밀한 죄를 아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아끼실까요? 다른 것들을 다 아끼지 않으셔도 하나님께서 아끼시는 것이 있습니다. 5절에 나오는 대로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끼지 않으신’ 옛 세상을 ‘불경건한 자들의 세상’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끼지 않으셨던 이유는 그들의 불경건 때문이고, 반대로 하나님께서 아끼셔서 구원하신 노아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경건한가 아니면 불경건한가가 최종 구원의 기준인 셈입니다. 구원받는 믿음이란 그래서 경건의 열매가 있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 사람과 삶이 불경건하고 패역하다는 것은 곧 그의 믿음이 거짓된 것임을 증명하는 셈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어떻게 불경건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참된 믿음, 구원받는 믿음,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도 거룩하며 경건함에 이릅니다. 그리고 한 사회 속에서 교회의 경건함, 성도의 경건함은 그들의 구원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성도의 경건에는 그들 자신의 구원, 그 이상의 중차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노아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채영삼목사님이 새롭게 번역한 5절을 다시 봅시다.
√벧후 2:5 또한 옛 세상을 아끼지 않으셨는데, 하지만 여덟 번째 사람 곧 의의 전파자 노아를 불경건한 자들의 세상에 덮친 큰 홍수로부터 지키셨던 것입니다(채영삼 역)
√1)세상을 구하는 ‘경건’
세상을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세상을 위해 가장 복된 행위가 될까요? 농사를 열심히 지어서 곡식을 많이 산출해 굶주린 사람들을 먹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국회 같은 곳에 가서 약자들을 보호하는 좋은 법들을 제정하여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과학을 발달시켜 놀라운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유익하게 할 수도 있고, 이전에 고치지 못하는 병을 고칠 수 있는 신약이나 새로운 의술을 개발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도 세상을 크게 유익하게 하는 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신다면, 이런 방법들 외에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다른 최선의 방법들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물론, 구체적으로 이런 일들을 통해 세상을 실제로 유익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만일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일을 위해 사람을 만드셨다면 사정은 조금 달라집니다. 세상을 대하여 그런 모든 유익한 일들을 하기 전에, 그보다 더 근본적인 해결책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신 것이 맞는다면, 이 세상을 보존하고 잘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그에게 다스림의 권세를 위임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느냐의 여부입니다. 과연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복하여 그의 뜻대로 피조 세계를 대할 것이냐, 그렇지 않을 것이냐 입니다. 이것보다 더 결정적인 문제는 없습니다.
피조 세계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생명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그분께서 생명을 주시지 않으시면,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존재는 아무것도 없습니다(요1:3; 행17:28; 고전 8:6; 골 1:16). 그러므로 피조 세계는 하나님으로부터 거룩을 빚지고 있습니다. 죄로 인해 거룩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기는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의 거룩하심으로, 이 세상의 죄가 완전히 세상을 썩어짐으로 변질시키지 못하도록 은총을 베풀고 계십니다. 이 세상은 허무를 이기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도 무엇인가를 하며 의미를 찾고, 또 역사를 통해 우리 삶의 의미가 후대에도 남을 것을 기대하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붙들고 계시며 최후의 갱신을 통해서 새롭게 하시고 보존하실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다스리는 문제에 있어서는, 생명의 근원이시며 거룩하시고 또한 영원하신 하나님께 속한 대리 통치자들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중생하여 회복된 새로운 인류, 곧 지금의 하나님의 백성이 된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일을 사람들에게 맡기셨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가 결정적입니다. 우리들에게는 늘 이 죄악 되고 부패하고 허무한 ‘세상이 문제’이지만, 하나님께는 그런 세상을 자신의 뜻대로 다스릴 ‘사람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이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범죄 하자(창 3장) 곧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의 결과인 사망이 세상을 지배하여 세상이 허무함의 종노릇하게 된 원인입니다(롬 5:12-21).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시기 위해서는 ‘경건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 그런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자신의 생명과 거룩 그리고 그 영원하심이 그들뿐 아니라 또한 그들을 통해 피조 세계를 회복하고 보존하도록 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고백한 그대로, 모든 피조물들은 허무한 데 굴복하면서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것입니다(롬 8:19~22).
√2)당신도 ‘여덟 번째’ 사람인가?
그래서 경건이 세상을 구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예고된 멸망 직전까지 의인 열 명을 찾으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을 구하는 경건’을 찾으십니다. 노아의 시대가 이와 같았고, 노아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세상을 위해 찾으시는 사람이었습니다.
5절은 하나님께서 홍수에서 건진 사람(들)을 언급하는데, 많은 영어 번역들의 경우처럼(RSV/NRS/NIV) 개역 개정은 ‘노아와 그 일곱 식구’로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원문에는 ‘여덟 번째 사람, 노아’로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20절에서 홍수로부터 구원받은 사람을 ‘여덟 명’이라고 한 표현과 유사한 맥락입니다.
왜 ‘여덟’이라는 숫자가 강조될까요?
베드로의 이런 일관된 강조는, 당시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여덟’이라는 숫자가 제 7일째인 안식일 다음에 일어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며, 그래서 또한 ‘새창조’(NEW CREATION)를 상징하는 숫자였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노아는 당시 옛 세상과 함께 홍수 심판으로 사라졌던 불경건한 사람들과는 달리, 심판 후에 펼쳐졌던 새로운 세상, 새 창조의 세상에 적합했던, 그 새로운 나라를 위한 새사람으로서 ‘여덟 번째’ 사람이라 칭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아의 어떤 특징이 그로 하여금 ‘여덟 번째 사람’ 곧 장차 오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적합한 사람이 되게 했을까요? 베드로는 2:5절에서 노아의 특징을 하나 더 추가합니다. 그는 ‘의의 전파자’(디카이오쉬네스 케루카)였다는 것입니다. 의(義)는 베드로후서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개념입니다. 서신의 인사말에서 언급된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1:1)라는 표현에서 그 ‘의’는 구체적으로 성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과 그 언약을 따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 그리고 그 결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선물로서의 ‘의’를 뜻할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을 통해 이런 ‘의’를 선물로 받은 성도는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덕을 갖추고,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갖춤으로써, 실제로 ‘의로운’ 신적 성품을 갖추어 갑니다(1:1-7). 이런 의미에서 ‘의’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또 재창조하시는 그의 세상을 구성하고 지탱하는 ‘모든 바른 관계’를 의미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말씀하신 모든 바른 관계들, 곧 ‘의’를 이루어 갈 때, 거기에 하나님의 생명과 거룩 그리고 영원한 임재가 함께 하는 화평(샬롬)의 세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5절의 본문이 노아를 묘사할 때, 그가 단지 ‘의를 전파했다’고 말하지 않고, 그를 의의 ‘전파자’(케루카)라고 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성경이 자주 강조하는 바이기는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의 어떤 행위들을 요구한다기보다, 그런 행위들을 항상 행하여 열매 맺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는 것을 요구합니다(참조, 약 1:22, ‘듣기만 하는 사람’, ‘행하는 사람’). 베드로후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는 것을 선포하면서, 최종적으로 ‘너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느냐?’(3:11)라고 묻습니다.
믿음으로 의를 선물로 받아 의롭다하심을 입은 사람은, 그 의로운 관계 안에서 성장해야 하며, 그것이 그로 하여금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 살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확신이 있습니까? 그 의(義)곧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에서 의도하신 그 모든 바른 관계 안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습니까? 하늘에 속한 생명과 경건의 능력을 힘입고 누리며, 그 안에서 실제로 의를 행하며 또한 ‘의로운 사람’으로 성장하고 계십니까?
그 옛날 노아가 의를 전파하면서, 스스로도 그 새 창조의 세계에 적합한 자로 준비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선포하면서 우리 자신도 그 ‘의의 나라’ 즉, 모든 바른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거룩 그리고 그의 임재가 충만한 그 나라에 합당한 백성으로 변모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벧후 2: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벧후 2:7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벧후 2:8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에 결정적으로 개입하시는 순간에는, 그만큼 결정적인 심판과 구원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분 자신의 오심이 불경건한 자들에게는 뜻밖에 닥쳐온 종말이요, 그분을 기다리며 그 말씀에 순종하느라 인내하며 견딘 자들에게는 ‘기어코’ 성취되는 구원의 순간이 됩니다. 그 결정적인 순간까지는 모호함이 증대할 것입니다. 악인들은 계속해서 악을 행하고도 벌 받지 않고, 의인들은 선을 행하고도 오히려 고통을 당하며 기다려야 하는 기간입니다. 거짓교사들은 ‘그것 봐라. 아무 일도 없지 않느냐? 그저 손해 보는 일은 피하고 적극적으로 네 탐욕을 채우라’고 선전하고 가르치는 기간입니다. 의의 전파자들은 듣기에 괴롭기만 한 의의 길과 인내, 그리고 올 것 같지 않은 새 하늘과 새 땅 곧 의의 거하는 바 새 세상을 준비하라고 설교하는 기간입니다.
악인이 자신의 코앞에 닥쳐오는 심판의 날을 보지도 못하고 준비하지도 못하는 이유는, 그의 심령이 그만큼 죄와 악에 더럽혀지고 부패하여 아주 어두워지기 때문입니다(1:8-9).
소돔과 고모라에 살았던 사람들도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6-8절은, 하나님께서 결코 불경건한 자들을 간과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또 하나의 판례를 보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말씀의 배경은 창세기 18~19장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의 활동과 그들에 대한 심판이라는 2장 전체의 주제 아래서 살펴보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과 함께 롯의 역할에 대한 진지한 질문이 생깁니다.
√벧후 2:6 또한 잿더미가 된 도시들인 소돔과 고모라에 파멸을 선고하심으로써, 장차 있을 불경건한자들에게 표본으로 남게 하셨고
벧후 2:7 한편, 의로운 롯은 하나님은 없는 자들의 방종한 행실들에 의해 고통당하던 중에 건져 냄을 받은 것입니다.
벧후 2:8 이는, 그 의인이 그들 가운데 처하여, 날이면 날마다 보여지고 또 들리는 것들에 의해, 그 의로운 영혼이 그들의 무법한 행위들로 시달렸기 때문입니다. (채영삼 역)
√1)심판의 원인?
6절은,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성읍들을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셨다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끔찍한 결과입니다. 그 풍요한 도시에서 별일 없이 살고 있었던 그들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재앙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선고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의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성벽이 튼튼하지 않아서였을까요? 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없었던 것일까요? 소돔과 고모라는 그 지역 자체가 비옥하여 부유한 도시들이었습니다(창 13:10). 성읍들을 안전하게 지키기에 재력이나 군사력이 부족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불타 버렸던 원인은, 오히려 그들의 ‘불경건’이었습니다(2:6).
여러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통해서 받아야 하는 교훈이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 사람들의 ‘불경건’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전에 의인들을 찾으셨습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에는 의와 공평을 행하는 사람 열 명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로 소돔과 고모라는 불의와 불공평이 가득한 패역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저들의 불경건의 내용 중 하나입니다.
오늘날, 소돔과 고모라가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는 그 안에서 행해졌다고 하는 ‘동성애’ 때문입니다. 남자들끼리의 성행위를 뜻하는 ‘남색’(아르세노코이테스,유7절)이라 하는데 이를 영어로 ‘소돔 사람’(SODOMY)로 불려왔던 것도,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오랫동안 소돔과 고모라를 동성애와 연관 지어 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창 19:1-2,11-12).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원인이 동성애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종종 에스겔 16:49~50절에 호소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은 그들의 ‘교만함’에 있으며 양식의 풍족함과 태평함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도와주지 아니한 데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의와 공평함을 시행하지 않고 가난한 자들을 억압한 죄입니다.
이처럼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의 원인에는 저들이 가난한 자들을 핍박하고 나그네를 폭행했던 불의와 불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불의와 불법한 행위들 가운데 심각한 한 사례로서 ‘동성애적’ 관행이 언급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창 19:1-11).
심판과 멸망을 부른 소돔의 죄악은 단지 사회-경제적 이유나 혹은 도덕적-성적 타락만이 아니라 총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소돔의 두 가지 죄악 곧 그들의 ‘불의한 폭압’과 ‘동성애적인 타락상’은 동전의 양면처럼 짝을 이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 다 가증한 우상 숭배의 경우처럼 탐욕의 발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골 3:5).
흥미롭게도 베드로후서에 나타난 거짓 교사들의 죄의 본질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저들은 재물에 대한 탐욕으로 거짓을 지어 만들어 가르칠 만큼 탐욕에 연단된 자들입니다(2:3, 14). 동시에 음란과 방탕도 그들의 부패한 행실의 특징입니다(2:2,14,18). 그리고 그들의 거짓 가르침은 진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들의 세속적 정욕을 섬기기 위한 가증한 짓이었습니다. 결국 거짓 교사들도 그들의 탐욕과 방탕, 가증한 거짓으로 인해 멸망 받을 것입니다. 그들의 심판과 멸망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소돔이 그 증거입니다.
√2)롯, ‘길에 버려진 소금’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도 의를 전하던 노아와 일곱 식구가 방주로 구원받았던 것처럼,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에서 살아남은 사람으로 이번에는 ‘롯’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의문이 생깁니다. 노아는 확실한 의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롯의 경우는 의구심이 듭니다. 그는 정말 의인이었을까요? 확실히 롯은 노아의 경우처럼 적극적으로 ‘의’를 전파하거나 장차 오는 심판을 대비하여 무슨 조치를 강구한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롯이 자신의 사위들에게 장차 임하는 소돔의 심판에 대해서 말했을 때, 사위들이 장인인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을 만큼 그의 말은 가벼웠습니다(창 19:14). 아마도 평소에 롯 자신의 행실이 그의 말을 뒷받침해 주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구나 롯이 천사들의 강권에 못 이겨 자신의 아내와 두 딸들에게 경고하고 그들을 이끌어 내야 하는 상황에도, 롯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지체하였고, 결국 롯을 포함해서 그의 아내와 두 딸을 무너지는 소돔 성 밖으로 간신히 끌어낸 것은 천사들의 손이었습니다(창 19:15-16). 말하자면 롯은 심판을 받아 멸망하는 소돔 성을 제 발로 걸어 나온 것도 아닌 셈입니다. 천사들에 이끌려 나왔는데, 그것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간구를 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창 18:22-33, 19:29).
하지만 7절은 분명히 롯에게 ‘의로운’이라는 형용사를 붙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롯은 어떤 점에서 의롭다고 평가를 받았을까요?
7-8절을 보면 그가 소돔 성 사람들의 불경건하고 방탕한 행실을 보면서 고통당했고, 이로 인해 그의 심령이 날마다 시달렸다는 것입니다. 롯은 그들의 죄에 동조하지 않았고 확실히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다서의 ‘의로운 롯’이라는 평가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종합적으로 평가하면, 롯은 영향력은 없었지만 당대의 불경건과 불의를 애통하는 성도였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소돔의 불의와 패역에 동조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불경건한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의의 심판을 선포할 만큼 적극적이지는 못했습니다.
노아는 최대치의 영향력 있는 경건한 의인이었다고 말한다면, 롯은 최저치의 수준에서 겨우 자신의 목숨만 건지는 성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롯은 확실히 소돔의 심판과 멸망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베드로후서의 표현은 예리하고 섬세합니다. 하나님께서 롯을 ‘건져 내셨다’는 표현은 ‘구원받았다’는 말이지만 그 뉘앙스가 다소 다릅니다. 마치 장작불 속에서 타들어가는 장작을 꺼내는 것 같은 경우이지 그 타다 만 장작이 온전한 조각품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건재내심 뿐만 아니라 회복하심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롯의 경우는 건져내심만 두드러집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쌓은 것들은 모두 불타 버리고, 겨우 자신만 그 불 가운데서 구원을 얻은 것 같은 구원인 셈입니다(고전 3:13-15).
한편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롯은 그들 가운데서 짠 ‘소금’이 되지 못했습니다. 맛 잃은 소금이 되어 결국 길에 버려진 소금이 되었습니다. 롯의 아내는 저주와 황폐함의 상징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아는 ‘여덟 번째 사람’, 새 하늘과 새 땅의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롯은 불 가운데서 겨우 건짐을 받았지만, 세상 속에서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롯의 애통은 그 울림이 큽니다. 그는 무엇을 위해 울었을까요? 오늘날 하나님과 그의 거룩한 영원한 나라를 알지만, 더럽고 썩어지고 허무한 세상에 대하여 아무런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교회를 위하여 울어야 합니다. 그런 우리 자신을 향해 울어야 합니다. 오늘날 롯과 같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맛 잃은 소금, 길에 버려지기 직전에 놓인 자신들의 운명 앞에, 깊이깊이 통곡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어서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제사장 나라입니다. 이러한 사명을 회복하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