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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병
키에르케고르. So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
[해설]
Soren Aabye Kierkegaard는 1813년 덴마크의 스도 코펜하겐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서유틀란트 반도의 황야 가운데 세딩이라는 작은 부락의 가난한 농부였다. 그곳 교회에는 목사가 상주하지 않아 가족은 목사관을 빌어서 살았다. 사람들은 목사관에서 사는 키에르케고르의 선조를 키르케고르Kirkegaard라고 불렀다.
덴마크어의 Kirhe는 독일어의 Kirch, 영어의 Church에 해당하는 말이고 gaard는 독일어의 Garten, 영어의 garden에 해당하는 말이다. 따라서 키르케고르는 교회의 정원 또는 교회의 저택(이것은 때로 묘지를 의미하기도 한다)이라는 뜻으로서 교회 저택에 살고 있는 일가를 마을 사람들이 키르케고르라고 부른 것이 그대로 가명이 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생애는 외면적으로는 비교적 단조로웠다. 키에르케고르가 태어났을 당시 그의 가정은 코펜하겐에서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 미카엘 페더센 키에르케고르는 첫 부인이 죽은 후 하녀였던 안네 쇠렌스닷터 룬과 결혼한 후 5개월 만에 맏아들을 얻었다. 도덕적으로 엄격한 미카엘은 자신의 이 과실을 일생 동안 잊지 못하고 고뇌하였으며 이것이 아들 쇠렌의 생애에도 영향을 미쳤다.
부친은 여러 가지 학문 중에서도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때때로 친지들을 초대하여 철학적인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기를 즐겼다. 그는 변증의 재주로 좌중을 압도하곤 했는데 이것을 보는 일은 쇠렌의 큰 즐거움의 하나였다. 결국 이렇게 하여 아버지 미카엘은 쇠렌에게 풍부한 상상력과 날카로운 변증을 심어주게 되었다.
1830년 쇠렌은 코펜하겐 대학에 입학하여 부친의 희망대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834년부터 세계의 문학사상 가장 귀중하고 방대한 자료인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짤막한 내용이었으나 점차 신학에서 문학으로 그리고 철학으로 옮겨진 관심의 변천을 보여준다.
이십사 세가 되던 해 그는 레기네라는 한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 사랑은 불행으로 끝나게 될 운명이었지만 키에르케고르의 생애를 좌우할 정도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레기네는 이미 약혼한 처지였으나 키에르케고르는 가까스로 구애에 성공하여 이십칠 세 때 그녀와 약혼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다음해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그는 일방적으로 약혼을 파기했다. 그 후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사람이 전 세계를 얻는다 해도 스스로 혼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다. 키에르케고르의 전 생애는 그리스도의 이 말씀의 19세기 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생애는 오직 자신의 혼에 대한 문제를 파헤치는 고투의 역사였다.
자기라고 하는 개체로서의 작은 인간, 둘도 없는 오직 하나의 인간, 이것이 그에게 가장 큰 문제였던 것이다. 그는 헤겔 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동시에 그것의 철저한 비판자로서 일어섰다. ~~~이십이 세 때의 일기에 그는 “근본적인 것은 나에게 있어서의 진리를 찾아내는 일이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살고 죽을 수 있는 그런 이념을 ..... 이른바 객관적인 진리 따위를 발견한들 그것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라고 썼다.
예외자라는 말은 키에르케고르와 니체에게서 비롯되어 오늘날 실존 철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개념이 되었다. 예를 들어 열 명의 사람이 손을 마주잡고 춤을 추며 즐기고 있다고 하자. 그 무리에서 떨어져 나무 그늘에 혼자 서 있는 열한 번째의 사람이 있다면 그가 예외적이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보편적인 장면,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장면 밖에 내던져져 혼자 고독한 생애를 더듬도록 운명 지어져 있는 듯 한 인간이 예외자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소년 시절부터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는 자의식으로 괴로워했다.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얼마나 괴로웠던가. 그때 누군가가 아주 잠깐 동안만이라도 나를 다른 사람들과 같을 수 있게 해 주었다면 나는 그에게 무엇이든 주었을 것이다.” 라고 그는 후년에 쓰고 있다. 그에게는 무언가 신체상의 결함이 있었다. 그는 때때로 ‘육체의 가시’에 대해 말했다. 그것이 무엇인가는 그 자신 확실히 말하고 있지 않지만 최근의 연구 결과는 그가 곱추였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원래 ‘육체의 가시’라는 말은 사도 바울에게서 유래하는데 그 바울도 전설에 의하면 곱추이고 못생긴 사람이었다고 한다. 등에 다른 사람들이 갖지 않은 장식을 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예외자적 자의식에 쫓길 만하다.
더욱이 그의 가계에는 우울증의 혈통이라고 할 수 있는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아버지에 대해 그토록 우울한 사람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때로 소년 케에르케고르 앞에 멈춰 서서 아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가엾은 아들아, 너는 결국 조용한 절망 속에 빠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형제는 모두 7남매였는데 그 중 다섯 명은 일찍 죽고 장수한 큰형은 말년에 정신병 증세가 있어서 사교직(司敎織)에서 물러났다. 그의 아들인 키에르케고르의 조카는 오랫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하였으며 그곳에서. “나의 숙부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이고, 나의 아버지는 이것도 저것도이고, 그리고 나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고 중얼거렸다 한다. 그의 조카들 중에는 정신병적 경향이 현저했던 사람도 있고 자살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삼십 세 때 <이것이냐 저것이냐>로 덴마크의 사상계에 데뷔한 이래 많은 저서를 발표한 그의 생애는 결과적으로 ‘저술가’ 그것이었다. 만년에는 그리스도 수난의 의의를 강조하고 일어나 안이하게 세상과 타협하며 살고 있는 교회를 공격했다. 교회와의 시가전(市街戰)이 한창일 때 그는 거리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바로 죽었다. 그의 나이 사십 이세였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에 대하여]
<죽음에 이르는 병>을 처음 구상한 것은 1848년 2월이나 3월쯤으로 추측된다. 이 무렵 그는 일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새로운 책을 쓰려고 한다. 그 표제는 ‘근본적인 치료를 하는 사상 기독교적 약제’. 여기서는 속죄의 교리가 다루어질 것이다. 제일 먼저 도대체 어떤 점에 병이 죄가 존재하는가를 나타내야 한다. 제1부 죄의 의식에 관하여: 죽음에 이르는 병 -기독교적 담화, 제2부 근본 치료 :기독교적 약제 -속죄.” 이 글로 미루어 보아 제1부에 해당하는 부분만이 독립하여 이 책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구상의 제2부에 해당하는 부분은 <기독교의 실천적 입문>이라는 표제로 그 다음해에 같은 안티 클리막스라는 필명으로 발표되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서의 절망은 그의 처음의 계획으로는, 그리고 그의 실존적 사색의 근본은 어디까지나 구제(救濟)와의 근본적인 연관에서 포착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에 의하면 절망은 참으로 변증법적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통해서만 인간은 진실로 구제될 수 있는 것이다.
단 이 책에 있어서는 머리말에서도 확실히 말한 것처럼 절망은 어디까지나 병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약으로서 이해되고 있지는 않다. 여기서 한 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면 자칫 죽을 병, 즉 그것으로 죽어 버리는 병처럼 이해하기 쉬운데 결코 그런 의미의 병이 아니라는 것이다. 좀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그것으로는 결코 죽지 않는 병, 죽으려야 죽을 수 없는 병이다. 절망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죽어서 또는 자살해서 묘지에 안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직 절망의 극치라고 할 수 없다. 죽으려야 죽을 수 없는 것, 아니 영원히 죽음을 죽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이것이 절망자의, 또는 가장 불행한 자의 참모습이다. “가장 불행한 자의 무덤은 하늘일 것이다.” 라고 그는 말했다.
키에르케르고가 묘사하는 기독교의 이상형으로부터 거리가 먼 키에르케르고 자신을 포함한 현실의 기독교계를 신랄한 논리로써 비판했다는 점, 절망이라는 병에 대한 모든 증세를 분석하고 진단하여 치유에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유례없는 철학서이다.
오늘날의 실존주의는 이 책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하이데커나 야스퍼스의 실존 개념도 이 책의 영향이 컸으며 사르트르나 까뮈가 말하는 ‘부조리 개념’도 절망의 한 형태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절망이란 일상적인 용어와는 달리 ‘인간의 자아가 신을 떠나서 신을 상실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자기소외인 것이다. 이 상태를 철저히 규명하고 현대인에게 두려움을 주는 병에 대하여 진단을 내리고 각성을 촉구했다는 것에 이 책의 가장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서론]
이 병은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 (요 제11장 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사로는 죽었다. ~~~설령 나사로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살아났다고 해도 결국은 또 죽음으로 종국을 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면 그것이 나사로에게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나사로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살아났다고 해서 우리가 이 병은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그곳에 있음으로 해서 이 병은 죽음에 이르지 않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다. ~~~그런데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죽음은 결코 모든 것의 끝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의 내부에 있어서, 즉 영원한 생명 안에서 하나의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기독교적인 의미에서는 단순히 인간적인 의미에서의 생명에서보다 무한히 많은 희망이 죽음 안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적인 의미에서는 죽음조차도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다. 하물며 지상적이며 시간적인 고뇌, 즉 곤궁, 질병, 비참, 고난, 재해, 고통, 번민, 비애, 통한 따위로 불리는 어느 것이 그러하겠는가! 이런 것들이 아무리 참기 힘든 고통이고 우리 인간, 아니 고뇌하는 사람 자신이 죽음보다 더 괴롭다고 호소할 정도라 하더라도 그 모든 것들은 -그것들을 병에다 비유하면 - 기독교적인 의미로는 결코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다.
기독교는 기독교인에게 모든 지상적인 것, 현세적인 것뿐만 아니라 죽음 자체에 대해서조차 초연하도록 가르친다. 인간이 보통 가장 불행한 재앙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을 기독교인이 뽐내는 듯 눈 아래로 내려다볼 때 그는 교만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그때 기독교는 다시금 인간이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비참을 발견한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그것이다.
인간은 더욱 큰 위험을 두려워할 때 언제나 작은 위험 속에 뛰어들 용기를 갖는다. 만약 인간이 위험을 무한히 두려워한다면 그 밖의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독교인이 배워서 알게 되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제1편]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Ⅰ.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사실
A. 절망은 정신, 즉 자기에게 있어서의 병이며 세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 절망하여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비 본래적인 절망),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경우,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경우.
인간은 정신이다.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이란 자아이다. 자아란 무엇인가? 자아란 자신이 스스로에게 관계하는 관계이다. ~~~인간이 영(靈)이라고 하는 경우 영과 육의 관계가 그런 관계이다. 그와 반대로 관계가 그 자신에 대하여 관계할 때 이 관계야말로 적극적인 제삼자이며 이것이 바로 자아인 것이다.
본래적인 절망에는 두 가지 형태가 존재하게 된다. 인간의 자아가 스스로 자기를 정립했다고 하면 절망의 첫째 형태, 즉 절망하여 자기 스스로 있기를 바라지 않고 자신으로부터 탈출하려는 형태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절망하여 자기 자신으로 있기를 원하는 형태는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자아가 절망하여 자기 자신으로 있기를 원하는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자아라는 전체 관계가 완전히 의존적인 것으로 스스로가 자신에 의해 평형 내지 평안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또 전체 관계를 정립한 것에 대하여 관계함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절망의 제2형태, 절망하여 자기 자신으로 있기를 바라는 형태는 단순히 절망의 한 특수한 종류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로 모든 절망을 그 안에 해소시키고 다시 그것에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절망한 어떤 사람이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음을 알고서 절망이 어디에선가 자기에게로 떨어지는 재난 같은 것으로 말하거나 하는 따위의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고 -그것은 현기증을 일으키고 있는 사람이 신경 착각으로 무언가가 자기 머리 위에 올라타고 있다든가 자기 위로 떨어진다든가 하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무게나 압박은 전혀 외적인 것이 아닌 내면적인 것이 거꾸로 반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혼자서 온 힘을 다하여 절망을 제거해 버리려 한다면, 그는 아직 절망 가운데 있는 것이며 아무리 강한 결심으로 절망과 싸울 작정을 해도 그 고투 자체가 그를 점점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끌고 들어가 버린다.
절망에 있어서 분열 관계는 결코 단순한 분열 관계가 아니고 자기 자신에 관계함과 동시에 타자에 의해 정립된 관계에서의 분열 관계이다. 따라서 그 자기만의 관계 속에서의 분열 관계는 동시에 이 관계를 정립한 힘과의 관계 속에서 무한히 자기를 반성하게 한다.
그래서 절망이 완전히 없어진 경우의 자아의 상태를 서술하는 정식은 자아는 자기 자신에 관계하면서 자신으로 있기를 바라는 동시에 자기를 정립한 힘 안에 자각적으로 자아를 확고히 하는 것이다.
B.절망의 가능성과 현실성
절망은 우월일까, 그렇지 않으면 결함일까? 순수하게 변증법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양쪽 모두이다. 절망 상태에 있는 사람을 생각 하지 않고 추상적으로 절망을 생각하면 절망은 대단히 우월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한 점이다.
이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한 점이며 이 병에 착안할 수 있음이 기독교인이 자연인보다 뛰어난 점이며 이 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이 기독교인의 행복이다. 절망할 수 있다는 것은 무한한 우월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절망한다는 것은 가장 큰 불행이고 비참일 뿐만 아니라 최대의 타락이기조차 하다. 일반적으로 가능성과 현실성은 이런 관계로는 성립하지 않는다.
인간이란 존재 가능에서 존재로 상승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절망에 있어서는 거꾸로 존재 가능에서 존재로 하강한다. 가능성이라는 우월의 무한한 높이에 현실적인 하강이라는 무한한 깊이가 대응한다. 절망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면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실은 상승인 것이다. 그런데 규정 또한 애매하다.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절름발이가 아니라든가 장님이 아니라든가 하는 것과는 사정이 다르다.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경우에는 그것이 오히려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절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한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가령 한 사람이 실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절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모든 순간에 있어서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능성과 현실성 간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다. 많은 철학자들이 현실성은 부정된 가능성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진리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성은 성취된 현세적인 가능성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반대로 현실성(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 즉 하나의 부정)이란 무력한 부정된 가능성이다. 일반적으로 현실성이라 하면 가능성에 힘을 불어넣는 것이지만 여기서 그것은 오히려 가능성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절망이란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관계로서의 자기(종합)에 있어서 분열 관계이다. 그렇지만 종합 그 자체는 분열 관계가 아니다. 단지 그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종합 속에 분열 관계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종합 자체가 분열 관계라고 한다면 절망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리라.
절망은 가능성으로서 인간 속에 숨어 있다. 만약 인간이 종합이 아니라면 절망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또 종합이 신의 손에 의해 근원적으로 올바른 관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 경우에도 인간이 절망하는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절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종합이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그 관계에서 온다. 인간을 관계되게 한 신은 인간을 그의 손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관계가 되었다. 그런데 그 관계가 정신이며 자아라고 하는 점에 책임이 있기 때문에 모든 절망은 이런 책임 밑에 있으며 절망이 지속되는 순간순간마다 이런 책임 밑에 있다.
절망의 모든 현실적인 순간에 절망한 사람은 일체의 과거적인 것을 가능한 한 현재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절망하는 것이 정신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인간 안의 영원한 것에 관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영원한 것에서 탈출할 수 없다. 아니 그것은 영원히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해도 영원한 것을 내던져 버릴 수는 없다. 그보다 불가능한 일은 없다. 인간이 영원한 것을 소유하지 않는 순간이 있다면 그는 그 영원한 것을 지금 막 던져 버렸거나 던져 버리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곧 다시 돌아온다. 그래서 인간은 절망하고 있는 모든 순간에 절망을 스스로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다. 절망은 분열 관계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관계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자아로부터 탈출할 수 없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에서도 탈출할 수 없다. 양자는 동일한 것이며 자아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를 뜻하기 때문이다.
C.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이 개념은 특별한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보통 그것은 그 종국과 결말이 죽음이라는 병을 의미하고 있다. 사람들은 치명적인 병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한다. 이런 의미로서 절망은 결코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할 수 없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란 그 자체가 생(生)으로의 이행이다. 따라서 기독교에 있어서 지상적 육체적인 의미로서의 죽음에 이르는 병 따위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물론 죽음이 병의 종국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죽음이 최후는 아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것을 가장 엄밀한 의미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종국이 죽음이고 죽음이 종국이 되는 그런 병이어야 한다. 절망이 바로 그런 병이다.
그런데 절망은 또 다른 의미에서 한층 더 명확하게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이 병으로 사람이 죽는 일은 없다.(보통 죽는다고 하는 의미에서는) 다시 말해 이 병은 육체적인 죽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반대로 절망의 고뇌는 인간이 죽을 수 없다는 바로 그 점에 존재하는 것이다.
절망한 사람은 죽을병에 걸려 있는 사람과 비슷하다. 이 사람은 길게 누워 죽을 지경에 이르러 있기는 하나 죽을 수가 없다. 이렇게 죽을 정도로 알고 있다는 것은 죽을 수 없다는 의미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살 희망이 아직 그곳에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니 죽음이라는 최후의 희망조차도 이룰 수 없을 만큼 모든 희망을 잃고 있는 것이다.
죽음이 최대의 위험일 때 사람은 생을 원한다. 그렇지만 더 두려워할 만한 위험을 알게 되면 죽음을 원한다. 죽음이 희망의 대상이 될 정도로 위험이 증대된 그때 절망은 죽을 수 있다는 희망까지도 잃는 것이다.
절망이란 자기 자신을 삼켜 버리는 바로 그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삼켜 버리려는 열정뿐이지 자기 자신을 삼켜 버릴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이 무력성 안에서 자기 자신을 삼켜 버리고자 하는 새로운 형태가 만들어지는데 여기서도 절망은 자기를 삼켜 버릴 수 없다.
절망한 사람에게는 절망이 그 자신을 사며 버릴 수 없다는 사실이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 위안이 벌레도 죽지 않는 그의 고뇌인 것이다(※막 9:48). 자기 자신을 삼켜 버릴 수도, 자기 자신에게서 탈출할 수도, 무로 돌아갈 수도 없기 때문에 그는 절망한 것이다. 아니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지배욕이 있는 자 - 이 사람의 표어는 제왕이 아니면 무(無)이다 -가 제왕이 되지 못한 경우 그는 그것에 대해 절망한다. 그런데 그 절망의 진짜 의미는 다른 곳에 있다. 즉 그는 제왕이 되지 못한 까닭에 그 자신으로 있는 것이 견딜 수 없다. 그는 자기가 제왕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해 절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왕이 되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자기, 제왕이 되었더라면 그의 큰 기쁨이었을(어떤 의미로는 이 역시 마찬가지로 절망 상태) 자기가 지금의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사실 그는 제왕이 되지 못한 것이 견딜 수 없는 게 아니라 제왕이 되지 못한 자기가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견딜 수 없다. 만약 그가 제왕이 되었다면 그는 절망하는 자기로부터 벗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제왕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절망하여 자기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그는 제왕이 되지 못한 것이 견딜 수 없는 게 아니라 제왕이 되지 못한 자기가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견딜 수 없다. 만약 그가 제왕이 되었다면 그는 절망하는 자기로부터 벗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제왕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절망하여 자기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인간 안에 영원자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절망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절망이 인간의 자아를 삼켜 버릴 수 있다면 인간은 절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절망하는 자아에 있어서 이 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절망한 사람은 죽을병에 걸려 있다. 사람들이 보통 병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이 병은 인간의 가장 귀중한 부분을 침식한다. 그런데도 이 병에 걸려 있는 사람은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절망이라는 병에서 죽음은 병의 종국이 아니라 오히려 끝남이 없는 종국이다. 죽음으로 이 병에서 구제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병과 고뇌 그리고 죽음 - 아아, 여기서의 죽음이란 죽을 수조차 없다는 바로 그것인 것이다.
Ⅱ 절망의 보편성
아마 의사는 완벽하게 건강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하리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조금이라도 절망하지 않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깊은 내면에 동요, 알력, 분열, 불안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 인간은 한 사람도 없다. -불안, 미지에 대한 불안, 그것을 알려 하는 것조차도 왠지 두려운 느낌이 드는 것에 대한 불안, 생존의 가능성에 대한 불안,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불안, 이런 불안을 가지지 않은 인간은 한 사람도 없다.
이렇게 의사가 인간은 자기 안에 병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인간은 정신의 병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어서 병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 때때로 번개처럼 자기 자신에게도 불가해한 불안 속에 또는 불안과 함께 나타나는 것이다.
어쨌든 기독교 세계의 외부에는 절망한 일이 없는 인간은 한 사람도 산 일이 없었고 또 살고 있지도 않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의 내부에도 진실한 기독교인을 빼면 마찬가지로 없다. 완전한 기독교인이 되지 않는 한 기독교 세계 안의 인간도 역시 무엇엔가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고찰은 틀림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역설적인 과장 또는 사람들을 낙심시키는 어두운 견해로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어둠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사람이 흔히 어느 정도의 어둠 속에 스스로를 버려두고 싶어 하는 것을 빛 가운데로 끌어올리려 노력하는 것이다. 그것은 낙심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의 기분을 앙양시키는 것이다.
절망은 사실 아주 일상적인 것이다. 인간이 절망하고 있는 것이 드문 것이 아니라 진실로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드문 것이다. ~~~절망하지 않았다는 것, 다시 말하면 자신이 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도 진실로 절망의 한 형태라는 것을. 통속적인 견해를 취하는 사람들은 절망에 대해 고찰할 때 그들이 병이나 건강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 범하는 것과 똑같은 오류를 좀 더 깊은 의미에 있어서 범하는 것이다. 좀 더 깊은 의미에 있어서라고 말한 것은 통속적인 견해를 취하는 사람들에 있어서 정신에 관한 이해(이것 없이는 절망을 이해할 수 없다)는 병이나 건강에 관한 이해보다 아주 적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통 어떤 사람이 자신이 병자라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사실 건강하다고 생각하며 더군다나 본인 스스로 자기는 건강하다고 말하면 그야말로 그대로 믿어버린다. 그런데 의사는 병을 좀 더 다른 눈으로 본다. 왜일까? 의사는 건강에 관하여 명료하고 투철한 의견을 가지고 있고 그에 따라 인간의 상태를 음미하기 때문이다.
절망은 정신의 한 규정이다. 따라서 그것은 영원자에 관계하고 있다. 그러므로 절망의 변증법 안에는 영원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다. 절망은 보통 병과는 전혀 다른 변증법을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징후가 변증법적이다. 그래서 파상적인 관찰은 절망의 존재 여부를 잘못 판단하기 쉽다. 즉 절망적일 수 없는 것이 오히려 절망 상태를 의미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결코 앓고 있음이 아니다. 그런데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절망하고 있다는 것일 수 있다. 절망은 병의 경우처럼 나쁘다고 생각되는 곳과 아픈 데가 일치 하는 게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더욱 변증법적인 것이다. 나쁘다고 생각하는 마음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이 오히려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행복의 아득히 먼 안쪽에 깊이깊이 숨겨져 있는 행복의 비밀 가장 안쪽에도 역시 불안이, 다시 말해 절망이 깃들어 있다. 절망이 가장 즐겁게 둥지를 트는 장소는 바로 그런 곳, 행복의 한가운데이다. 행복은 정신이 아니다. 그것은 직접성이다. 그리고 모든 직접성은 그것이 아무리 평화스럽고 안전한 것이라고 생각되더라도 삶은 불안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헛되이 보내고 있는가. 따위의 말을 자주 한다. 그런데 오직 다음과 같은 사람들만이 자기의 인생을 헛되이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기쁨이나 걱정에 마음을 빼앗겨 영원한 결단으로 자기 자신을 정신, 즉 자아로서 의식하지 못하고 나날을 지내고 있는 사람, 결국은 마찬가지이나 신이 거기에 존재하고 그(그 자신, 그의 자아)가 이 신 앞에 현존하고 있음을 깨달아 가장 깊은 의미로 결코 그것을 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들이다.
Ⅲ 절망의 모든 형태
절망은 주로 그것의 의식성이라는 관점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절망을 의식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지가 절망과 절망 사이의 질적 차이를 형성한다.
A. 절망을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않거나를 문제 삼지 않고 고찰되는 경우의 절망. 따라서 여기서는 종합의 모든 계기만이 문제가 된다.
a. 유한성과 무한성의 규정 하에 볼 수 있는 절망
자아는 무한성과 유한성의 의식적인 종합이고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것의 종합이다. 자아의 과제는 자기 자신이 되는 데 있다. 이것은 신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구체적이 된다는 뜻이다. 구체적이 된다는 것은 유한적이 되는 것도 무한적이 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구체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실로 종합이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발전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어야 한다. 자아를 무한화 함으로써 자이를 무한히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시킴과 동시에 자아를 유한화 함으로써 자아를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게 하는 것. 자아가 그런 방법으로 자기 자신이 되지 않는 한 자아는 절망 상태에 있다. 자아가 그것을 알든 모르든 관계없이.
그런데 자아는 그것이 현존하고 있는 모든 순간에 생성되는 것이다. ~~~자아가 그 자신이 되지 않는 한 자기는 그 자신이 아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 바로 절망인 것이다.
• 무한성의 절망은 유한성의 결핍에 존재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근거는 자아가 서로 지양하는 두 계기의 종합이고 그 때문에 한쪽은 언제나 동시에 그 반대라고 하는 변증법적인 것 안에 존재한다. 어떠한 절망의 형태도 결코 직접적으로, 즉 변증법적으로 규정되어질 수는 없다. 그것은 언제나 동시에 그 반대를 생각함으로써만 규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시인이 실제로 시험해 보고 있는 것처럼 절망한 사람 스스로 말하게 하여 절망한 상태를 직접적으로 그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절망을 규정하는 일은 오직 그 반대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절망의 시적 표현이 시적인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표현의 채색 안에 변증법적인 대립을 반영하고 있어야 한다. 때문에 무한이 된, 혹은 오직 무한이려고 하는 모든 인간적 실존은(그렇다, 인간적 실존이 무한이 되었거나 또는 오직 무한이려고 하는 모든 순간) 절망이다. 왜냐하면 자아는 종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유한한 것은 한정하는 것이고 무한한 것은 확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한성의 절망은 공상적인 것, 무한계적인 것이다. 절망의 경험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자각적으로 신(神) 안에 기초를 둘 때에만 자아는 건강하고 절망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상은 일반적으로 인간을 무한자로 이끌어 간다. 그때 그것은 인간을 단순히 자기로부터 이끌어 갈 뿐이므로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 환귀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감정이 공상적이 되면 자아는 점점 희박해진다. 그것은 마침내 일종의 추상적 감상성에 빠져 버려 인간은 어느새 현실적인 것에 대해서는 감수성을 움직이는 일 없이 오히려 비인간적인 방법, 예를 들면 추상적인 인류 일반이라는 식으로 여러 가지 추상체의 운명에 과감한 생각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류머티즘 환자가 자기의 감각적인 지각을 지배하지 못하고 바람의 상태나 날씨에 좌우되어 대기의 변동 등이 일어날 때 무의식중에 그것을 자기 몸에 느끼듯 감정이 공상적이 된 사람에게서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 어느 정도까지 무한이 되기는 하나 그것 때문에 점차로 그 자신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점차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것이다.
인식에 있어서도 그것이 공상적이 되면 이와 마찬가지다. 인식의 관점에서 본 자아의 발전 법칙은 - 자아가 진실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경우에는 -이러하다. 인식의 상승도는 자기 인식의 도에 대응하여 따라서 자아는 그 인식이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그만큼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인식은 그것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점점 일종의 비인간적인 인식으로 변하는 것으로서 그런 인식을 획득하기 위해 인간의 자아가 낭비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피라미드를 건설하기 위하여 인간이 낭비된 것과 같은 것이다.
신과의 관계는 우리를 무한한 것으로 만든다. 그런데 이런 무한화가 자칫하면 인간을 지나치게 공상적이 되게 하여 인간의 마음을 빼앗아 가 버린다. 그 결과 그것은 단순히 도취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때로 신 앞에 현존해 있는 것이 견딜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런 경우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 즉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공상적인 종교가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그의 말에 의해 그 특색을 보인다면) “참새가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참새는 지금 자기가 신 앞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러나 일단 자기가 지금 신 앞에 있다는 사실을 안 인간이 어떻게 그 순간 미치지도 않고 파멸하지도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그런 식으로 공상적인 존재가 되어 절망할 경우에도 겉으로는 완벽하게 보통 인간으로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다. 그는 이 세상의 일에 종사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명예로운 위치에 설 수 있다. 그리고 보다 깊은 의미에서 그에게 자아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것이다.
자아라는 것ㅇ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결코 문제 삼지 않는다. 자아라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문제되지 않는 것이고 또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깨닫게 되면 그만큼 위험한 것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잃는다는 정말로 가장 위험한 일이 세상에서는 아무 일도 아닌 양 지극히 조용하게 일어날 수 있다. 만약 무언가 다른 것, 팔 하나, 다리 하나, 금 다섯 탈렌트, 아내 등을 잃었다고 하면 그것을 모르고 있을 수 있을까?
• 유한성의 절망은 무한성의 결핍에 존재한다.
세상에서의 견해는 언제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구별에만 집착하고 있으므로 자연 또는 필연의 유일한 것(※눅10:38~42 ;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에 대한 이해(이것을 정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가 부족하게 된다.
절망한 편협성은 근원성의 결핍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자기의 근원성을 빼앗겨 버린, 즉 정신적인 의미에서 거세 당한 상태이다. 대개 모든 인간은 근원적으로 자기 자신이 되도록 정해져 있고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그의 사명이다. 물론 자아는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는 모가 나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EFKG아 없어져야 할 것은 아니고 단지 매끄럽게 다듬어져야 한다.
인간은 인간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기 자신이기를 포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물며 단지 타인에 대한 공포 때문에 자아가 그 본질적인 우연성(이것이야말로 마멸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대로의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는 용기를 포기하거나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이런 본질적인 우연성 안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에 대하여 참으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인간은 절망의 한 방법으로 무한자 안에 미혹되어 들어가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수가 있고 또 절망의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자아를 타인에게 편취당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인간은 자기의 주위에 있는 많은 인간의 무지를 보고 현세적인 사물과의 관계 속에 뒤섞여 세상이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게 됨으로써 자기 자신을 망각하고 자기가 어떤 이름 - 이 말의 신적인 의미에 있어서 -이었던가는 전부 잊어버리고 스스로를 믿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따위는 너무 엄청난 일이며 타인처럼 지내는 쪽이 훨씬 편하고 안전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군집 속에서 하나의 단위, 하나의 숫자, 하나의 이미테이션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절망의 이런 형태에 대해 세상에서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세상의 흥정을 자신 있게 해치우는 요령, 아니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잇는 요령을 체득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의 자아와 무한성에 대한 자신의 노력이 그를 방해하거나 그에게 괴로움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는 자갈처럼 매끄럽게 마멸되어 있어 현재 유통되고 있는 화폐와 같이 잘 통한다. 세상은 그를 절망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인간은 모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주 당연한 일이지만 일반적으로 세상은 진실로 두려운 것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다. 생활에 아무런 불편도 가져오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 사람의 생활을 안이 하고 유쾌하게 해 주는 절망이 절망으로 간주되지 않ㅅ는 것은 차라리 당연하다.
세상의 생각이 이렇다는 것은 거의 모든 격언 - 대개 처세 교훈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 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면 떠들고 나서는 열 번의 침묵 뒤에는 한 번의 후회가 있다고 말한다. 왜일까? 입 밖에 내어 말한다는 것은 하나의 외적인 사실이고 그 자체가 하나의 현실이기 때문에 사람을 여러 가지 번거로움 가운데로 말려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입 밖에 내어 말하지 않았다고 하면 어떨까? 실은 이것이 더욱 위험한 일이다. 침묵에 있어서는 인간은 완전히 자기 자신 안에 고립된 상태로 있게 되며 현실이 그를 도우러 오는 일이 결코 없다. 현실이 그가 말한 결과를 그에게 가져와 그를 벌하는 따위의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침묵은 결코 위험하지 않다.
그런데 두려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내부로 파고들 뿐 밖으로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죄와 과오를 무엇보다도 두려워 한다. 그리고 또 세상의 눈으로 보면 모험은 위험한 것이다. 왜일까? 모험에는 실패의 가능성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험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모험을 하면 쉽게 잃지 않는 것(비록 다른 많은 것을 잃는다 해도)을 오히려 모험하지 않기 때문에 무서울 정도로 쉽게 잃는 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적어도 모험을 하면 이렇게도 쉽게, 마치 아무것도 잃지 않는 것처럼 쉽게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다.
나의 모험이 잘못되어 있다면 그런 대로 인생이 형벌로써 나를 구원해 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전혀 모험을 시도해 보지 않았다면 대체 누가 나를 구원해 줄 것인가? 특히 최고의 의미에서는 모험(최고의 의미에서는 모험이란 바로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것이다)을 피한 비겁함 때문에 자신의 모든 이익을 획득할 수 있었을지언정 자기 자신을 상실했다면 어찌하겠는가?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P91
유한성의 절망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절망해 있는 사람은 그 때문에 오히려 더 좋게(본래 절망해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더 좋은 것이다)세상 속에서 나날을 보내고 사람들에게서 칭찬 받고 그들 사이에서 중요시되고 명예로운 위치에 있게 되며 또한 이 세상의 모든 일에 종사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나친 말이 될지 모르나 세상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세상에 몸을 팔고 있는 듯한 사람만으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재능을 이용하고 부를 축적하고 세속적인 일을 영위하고 현명하게 타산하고 그밖에 여러 가지 일을 성취하고 어쩌면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도 하리라. 그렇지만 그들은 그들 자신이 아니다. 그들이 그 밖의 점에서 아무리 이기적일지라도 정신적인 의미에서는 아무런 자아 - 그것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자아, 신 앞에 있어서의 자아 -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
b. 가능성과 필연성의 규정 하에 볼 수 있는 절망
자아에는 무한성과 유한성이 귀속되어 있는 것처럼 가능성과 필연성이 귀속되어 있다. 아무런 가능성도 가지지 못한 자아는 절망해 있다. 아무런 필연성도 가지지 못한 자아도 역시 절망해 있다.
• 가능성의 절망은 필연성의 결핍에 존재한다.
이런 관계가 성립하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그 관계가 변증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무한성이 유한성에 의해 제한되는 것처럼 가능성은 필연성에 의해 견제된다. 자아가 유한성과 무한성의 종합으로 정립되어 바야흐로 생성이 가능하게 된 경우 그것은 자아를 상상력이라는 매체 안에서 반성하는 것인데 그때 거기에 무한의 가능성이 나타난다.
가능성 면에서 말하면 자아란 가능적인 것임과 동시에 필연적인 것이다. 자아란 물론 자신이지만 또 그것은 그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 자신일 때에는 필연적인 것이고 그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일 때에는 그것은 가능성이다. 그런데 가능성이 필연성을 포기하고 그 결과 자아가 가능성 안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나가 다시 자신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아무런 필연적인 것을 가지지 않을 경우 이것이 가능성의 절망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장소에 있어서의 운동 바로 그것이다. 생성은 장소로부터의 운동이고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은 장소에 있어서의 운동이다. 그런데 필연성을 가지지 않은 자아에 대해서는 가능성이 점점 확대되어 그 영역은 어디까지라도 확대될 듯이 생각된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현실적으로는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떤 것이라도 가능한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을 때에는 심연이 이미 자아를 삼켜 버리고 만다. 아무리 낮은 가능성이라도 그것이 현실성이 되려면 얼마만큼의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런데도 여기서는 마지막으로 현실성을 위하여 소비하는 시간이 점점 짧아져 간다.
모든 것이 점점 순간적인 일들이 되고 가능성은 더욱 강렬해진다. 현실성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가능성의 의미에 있어서이다. ~~~진정한 의미로 결핍되어 있는 것은 자신의 자아 안에 존재하는 필연적인 것(자기 자신의 한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머리를 숙이는 복종의 힘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행한 것은 그런 인간이 이 세상에서 뛰어난 인물이 되지 못한 것이 아니다. 아니 그가 자기 자신에(그의 자아가 특정지어진 어떤 것이며 따라서 필연적인 것이라는 사실에) 착안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불행이다. 그는 스스로의 자아를 공상적으로 가능성의 거울에 비춰 봄으로써 자기 자신을 상실한 것이다.
가능성이라는 것은 어린이가 무언가의 유희에 참가하도록 꾀어내는 경우와 흡사하다. 어린이는 언제든 유희에 참가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문제는 부모가 그것을 허락하느냐 하지 않느냐이다. 이 부모가 필연성에 해당하는 것이다.
가능성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사람은 가능성 안에서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방황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그 형태는 두 가지이다. 즉 추구적인 동경의 형태(희망)와 공상적인 우수의 형태(공포 내지는 불안)이다.
동화나 전설 속에 때때로 한 사람의 기사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기사가 뜻밖에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새를 발견했다. 처음에 새는 바로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보여 기사는 그 새를 손으로 잡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기사는 새를 쫓아갔다. 새는 일정한 거리만큼 날아갔다. 기사는 언제까지고 그 새의 뒤를 쫓아갔다. 마침내 밤이 되고 일행에게서 멀리 떨어진 그는 자신이 헤맨 숲속에서 이미 귀로를 발견할 수 없게 되었다. 동경적인 가능성이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가능성을 필연성 안에 회복하는 대신 그는 가능성의 뒤를 쫓는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 자신에로의 귀로를 발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방향이 반대이기는 하나 우수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곳에서 인간은 사랑의 우수에 사로잡혀 불안의 가능성을 추구한다. 그래서 마침내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그 불안 속에서 몸을 망치기에 이른다. 또는 거기에서 몸을 망쳐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 그 자체 속에서 몸을 망치기에 이르는 것이다.
• 필연성의 절망은 가능성의 결핍에 존재한다.
※[가능성(Possibility): 이는 어떤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상태로, 구체적인 현실성에 도달하기 전의 잠재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헤겔은 가능성을 단순히 잠재적인 상태로 보지 않고, 내재적으로 현실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현실성(Actuality): 헤겔은 현실성을 가능성이 구체화되어 실제로 존재하게 되는 단계로 봅니다. 여기서 현실성은 가능성의 실현이며, 이는 가능성이 현실화될 때 그 자체가 하나의 진리로서 완전성을 획득한다고 해석됩니다.]
※[필연성(Necessity): 가능성과 현실성이 상호작용하여 최종적으로 필연성에 도달하게 됩니다. 헤겔은 필연성을 자유의 필연적 실현 과정으로 해석하며, 이는 개체가 자신의 본질을 구현하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진리로 나아가는 과정을 뜻합니다.]
이상과 같은 가능성 안으로 헤매어 들어가는 것을 어린이가 떠듬거리며 내는 모음에 비유한다면 가능성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은 즉 소리를 내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필연적인 것은 자음만의 계열과 흡사하다. 그것을 발음할 수 있으려면 가능성이 더해져야 한다. 그 가능성이 결핍되는 경우, 다시 말해 인간적 실존이 가능성이 결핍되는 데까지 끌려가는 경우 그것이 절망 상태이다. 가능성이 결핍되어 있는 순간마다 절망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특정 연령에서는 희망이 풍부하다고 생각 하고 있다. 혹은 자신의 생애 가운데 특정 시기나 특정 순간에 희망과 가능성이 대단히 풍부했던 것처럼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모두 인간적인 이야기일 뿐 진리는 아니다. 이런 모든 희망이나 절망은 아직 참된 희망도 아니고 절망도 아니다.
결정적인 것은 신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마19:26). 이것은 영원한 진리이며 따라서 모든 순간의 진리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태연하게 그런 말을 한다. 그런데 인간이 막다른 곳까지 몰리면 그에게는 이미 -인간적인 의미로서는 - 어떤 가능성도 존재 하지 않게 된다. 그때 비로소 지금 말한 것이 진실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신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 의지가 있는지 없는지가 그때 문제된다.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공식대로 ‘제정신을 잃는 것’이 되어 버리지 않는가? 그렇다! 신을 믿는 다는 것은 실로 신을 획득하기 위해 제정신을 잃는 것이다.
보통 인간은 이러이러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란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그에게 일어나는 경우에는 파멸하고 만다. 앞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포함한 위험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데 그 위험이 실제로 나타난 경우에는 절망하여 파멸한다. 신앙인은 자기에게 부딪쳐 오는 일 또는 자기가 감행하는 일이 인간적인 계산에 의하면 자신의 파멸이 된다는 것을 보고 또 안다. 그러나 그는 믿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파멸을 면한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신에게 전부 맡겨 버린다. 그는 오직 신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파멸을 믿는 일은 불가능하다. 인간적으로는 그것이 자신의 파멸이라는 것을 이해한 다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가능성을 믿는 다는 것. 그것이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때 신 또한 그를 돕는다. 그를 두려운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함으로써 - 예기할 수 없는 기적적인 신적 구원의 출현에 의해 - 그를 돕는 것이다.
신앙인은 절망에 대해 영원하면서도 확실한 해독제, 즉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신에게는 모든 순간에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앙의 건강이다. 건강이란 모순을 해소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때 모순이란 인간적으로는 파멸이 확실한 것임에도 아직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바로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건강이란 모순을 해소할 수 있는 능력이다. 예를 들어 육체적 혹은 생리적으로 말한다면 호흡은 모순이다. 호흡은 분리된 그리고 비변증법적인 냉(冷)과 온(溫)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강한 신체는 이 모순을 해소하고 있으므로 호흡을 의식하지 않는다. 신앙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인간은 가능성과 필연성의 종합이다. 그러므로 그런 인간의 존속은 등리쉬는 숨과 내쉬는 숨으로 형성된 호흡 작용에 비할 수 있으리라. 결정론자의 자아는 호흡할 수가 없다. 필연적인 것만을 호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만일 가능하다 하더라도 필연적인 것만을 뽑아내어 호흡한다면 인간의 자아는 질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숙명론자는 절망하고 신을 상실하고 그래서 자기 자신을 상실하고 잇다. 신을 가지지 않은 자는 역시 자아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숙명론자는 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에게 신이 있다면 그것은 필연성이다.
숙명론자의 예배는 기껏해야 하나의 감탄사이며 본질적으로는 침묵의 복종이다. 숙명론자는 기도할 수 없다. 기도하는 것도 역시 하나의 호흡이다. 가능성과 자아와의 관계는 산소와 호흡의 관계 같은 것이다.
B.의식의 규정 하에 볼 수 있는 절망
• 자신이 절망 상태에 있음을 모르고 있는 절망. 다시 말해 자신이 자아라는 것을, 그것도 영원적인 자아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절망적인 무지
대부분의 인간은 감성적인 것이 지성보다 훨씬 더 우세하다. 그래서 진리의 빛에 비추어 보면 실제로는 불행한데도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대체로 이런 오류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
•자신이 절망 상태에 잇음을 알고 있는 절망. 그래서 여기에서는 사람은 자신이 자아(어떤 영원적인 것)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한다. 그리고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 하지 않든가 또는 자기 자신이려 한다.
자신의 절망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이 과연 절망에 대한 참된 관념을 가지고 있는가 가지고 있지 않은가를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가 가지고 있는 관념에 따라 스스로 절망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절망해 있다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절망에 대한 참된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절망에 대한 참된 관념에 따라 그의 생활을 고찰한다면 우리는 그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절망하고 있다. 너의 절망은 더욱 깊은 곳에 숨어 있다.”
절망자는 대체로 자기 자신의 상태에 대해 여러 가지 뉘앙스를 가진 반쯤 몽롱한 의식 속에서 살고 있다. 그는 어느 정도까지는 자신이 절망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마치 병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절망을 스스로 알아차린다. 그렇지만 그는 그 병이 본래 무엇인가 하는 것을 명백히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한 순간에는 자신이 절망해 있다는 사실이 명백하지만 다음 순간에는 자신의 상태가 나쁜 원인이 어딘가 자기 외적인 것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 그것만 제거하면 절망하지 않아도 되리라고 생각한다. 혹은 기분 전환 내지 그 수단으로서의 일이나 활동에 열중함으로써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분명히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나 그때 그는 자기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단순히 의식을 흐리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거의 깨닫지 못한다.
자신이 절망이라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또한 절망에 대한 진실한 관념을 품고 있으면서 자살하는 절망은 자살이 절망이라는 사실에 대한 진실한 관념을 가지지 않고 자살하는 절망보다 그 도가 강하다. 이에 반하여 자살에 대한 그 사람의 관념이 진실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절망의 도는 그만큼 약해지는 것이다. 한편 자살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의식(자기의식)이 명료하면 할수록 그 정신이 좀 더 몽롱하여 혼란 상태에 잇는 사람의 그것에 비하면 절망의 도가 강해진다.
절망의 반대는 신앙이다. 그러므로 앞서 절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 대하여 제시한 정식(正式)은 그대로 신앙의 정식이 될 수도 잇다. 자아는 자기 자신과 관계하면서 자기 자신으로 있으려 원하는 동시에 자기를 정립한 힘 가운데 자기 자신을 의식적으로 기초 두어 확고하게 한다.
•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 하지 않는 경우 - 약함의 절망.
이 형태의 절망이 ‘약함의 절망’이라고 이름 붙여진다면 그 안에는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 하는 또 하나의 절망의 형태에 대한 반성이 포함되어 있다. ~~~사실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 속에는 이미 반항이 포함되어 있다. 한편 절망의 가장 심한 반항 그 자체에도 약함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1. 지상적인 것 또는 지상적인 어떤 것에 대한 절망
절망이란 수동적인 고난(외부로부터의 압박에 굴종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결코 내부로부터의 행위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직접성의 용어 가운데 ‘자아’라든가 ‘절망’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말하자면 언어의 악의 없는 남용이다.
청년은 희망의 환영을 지니고 노인은 추억의 환영을 지닌다. 그런데 노인은 환영 t고에서 살고 잇기 때문에 환영에 대해 한쪽에 치우친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희망의 환영만이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노인은 희망의 환영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일은 없다. 그 대신 노인은 환영이 없는 높은 곳 - 노인 스스로 그렇게 믿고 있다. -에서 청년의 환영을 내려다본다는 기묘한 환영에 고통당하고 있는 것이다.
청년이 인생 및 자기 자신에 대해 이상한 희망을 품고 잇을 때 그는 환영 가운데 있는 것이다. 노인은 노인대로 자신의 청년기를 회상하면서 때때로 환영에 사로잡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신은 지금 환영을 포기했다고 믿고 있는 나이 든 부인이 소녀 시대를 회상하면서 마치 젊은 아가씨처럼 공상적인 환영 속에 사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처녀 적에는 자신이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얼마나 예뻤는지 등등.
노인에게서 흔히 듣는 이 과거형은 청년의 미래형과 마찬가지로 큰 환영이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절망은 단지 청년기에만 있는 것이라고 하는 오류는 다른 의미에서 정말 절망적이다.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며 정신이 무엇인가에 대한 몰이해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신적인 면에 있어서 인간은 나이와 함께 저절로 무엇인가에 도달하는 일은 없다. ~~~인간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가장 진부한 종류의 절망 속에 떨어진다는 것이 필연은 아니라 하더라도 절망이 단지 청년기에만 있다는 결론은 거기서 끌어낼 수 없다. 만약 인간이 실제로 나이와 함께 발전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본질적인 의식으로 성숙해 간다면 그와 더불어 더욱 높은 형태의 절망의 가능성도 발생하게 된다. 만약 그가 나이가 들면서 본질적으로 발전하지도 않고 아주 진부한 상태로 떨어지지도 않았다고 하자. 그가 어른이 되고 아버지가 되고 백발이 되어도 거의 청년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하면, 그래서 청년의 좋은 점을 얼마쯤 가지고 있다면 그는 청년처럼 지상적인 것 내지 지상적인 어떤 것에 대해 절망할 가능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노인은 자신이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 과거적인 것에 대해 마치 과거적 현재처럼 절망한다. 그는 과거를 완벽하게 잊어버릴 정도로 절망해 있지 않기 때문이ㅐ다. 이 과거란 어쩌면 참회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무엇일는지도 모른다. 정말로 참회해야 하는 과거라면 우선 근본부터 철저히 절망해야 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정신생활은 근본부터 깨질 것이다. 그렇지만 비록 절망해 있더라도 감히 그런 결단을 내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같은 장소에 머물러 있게 되며 그렇게 시간이 흘러간다. 그가 또다시 절망적이 되어 망각의 힘을 빌려 그 과거를 피하는데 성공하지 못하는 한은 그렇다. 그런데 과거를 피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는 참회자가 되는 대신 자기 자신의 은닉자가 될 것이다.
아무튼 청년의 절망과 노인의 절망은 본질적으로 같다. 이들 양자의 어느 경우에도 그 형태의 전환(이런 전환에 의해 자기 내부의 영원자에 대한 의식이 발현되어 절망을 좀 더 높은 형태로 높이든가 그렇지 않으면 신앙에까지 이르든가 하는 싸움이 시작된다)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2. 영원적인 것에 대한 절망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
지상적인 것 또는 지상적인 어떤 것에 관한 절망은 그것이 절망인 한 사실은 영원적인 것에 대한 절망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이다. 이것이 실로 모든 절망에 대한 전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절망자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자기의 등 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는 자기가 지상적인 어떤 것에 대해 절망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늘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실은 영원적인 것에 대해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지상적인 어떤 것에 대해 절망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늘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실은 영원적인 것에 대해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지상적인 것에 그렇게 큰 가치를 두어 첫째, 그것을 지상적인 전부처럼 생각하는 것, 둘째 지상적인 것 자체에 대단히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 등이 곧 영원적인 것에 대해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 하는 절망 -고집
제2편
절망은 죄이다
죄란 인간이 신 앞에서 신의 관념을 가지고 있으면서 절망하여 자기 자신으로 있으려 하지 않는 것, 또는 절망하여 자기 자신으로 있으려 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죄는 약함이나 반항의 도가 강화된 것, 다시 말해 절망의 도가 강회된 것으로 신 앞에서 라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신의 관념이 죄의 개념과 함께 있다는 사실로 인해 죄를 변증법적, 윤리적으로 법학자가 ‘가중된 절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제1장 자아의식의 여러 단계 (신 앞에서라는 규정하에 있어서)
전편에서 자아의식의 끊임없는 상승을 입증해 보였다. 처음에는 인간이 영원한 자아를 소유한다는 것에 관한 지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다음에 인간은 자아를 소유하고 있으며 자아 안에는 확실히 영원적인 것이 잠재해 있다는 지식이 생겼다. 그리고 이 지식의 내부에서 다시 여러 가지 상승을 입증해 보였다.
아 자아는 단순해ㅣ 인간적인 자아가 아니라 신학적인 자아 또는 신 앞에서의 자아(이 의미가 오해되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이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신 앞에 현존해 있다는 것을 자아가 의식할 때, 자아가 신을 척도로 하는 바의 인간적 자아가 될 때 자아는 무한한 실재성을 갖게 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자아가 신의 관념을 가지면서도 신의 의지를 자신의 의지로 하지 않는다는 점. 신에 대하여 순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교도와 자연인은 단지 인간적 자아만을 척도로 한다. 그러므로 더욱 높은 관점에서 이교 세계가 죄 가운데 잠겨 있다고 보는 것은 정당한 일일 것이다. 단 이교 세계의 죄는 본래 신에 대하여 신 앞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절망적인 무지였으며, 그들은 세상에 존재하면서도 신 없는 자들이었다.※(엡 2:12; 그때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아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라~~) 따라서 다른 면에서 보면 이교도가 엄밀한 의미에서는 죄를 범한 일이 없다는 것 또한 참인 것이다. 그가 신 앞에서 죄를 범한 것이 아니고 모든 죄는 신 앞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란 인간이 신 앞에 절망하여 그 자신이려 하지 않는 것 또는 인간이 신 앞에 절망하여 그 자신이려 하는 것이다.
인간이 기독교에 좌절하는 것은 기독교가 너무나 어둡고 음울하기 때문이라든가 너무나 엄격하기 때문이라고 흔히 일컬어진다. 그래서 인간이 어째서 기독교에 좌절하는가에 대한 본래의 이유를 여기서 밝혀 보려 한다.
좌절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관한 아주 단순한 심리학적 서술로써 이것을 설명해 보자. ~~~그리스도는 때때로 마음 아파하면서 좌절하는 일이 없도록 제자들에게 경고하였다. 즉 좌절의 가능성이 거기에 있으며 또 거기에 있어야 함을 그리스도 자신이 시사했던 것이다. 좌절의 가능성이 거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영원적, 본질적으로 기독교적인 것에 귀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가 그것을 제거해 버리지 않고 마음 아파하면서 좌절하지 않도록 경고한 것은 ‘신인(神人)’이신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인간적 난센스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 가난한 날품팔이꾼과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강대한 권력을 가진 제왕이 있다고 하자. 이 더할 나위 없는 권력을 가진 제왕이 갑자기 사자(使者)를 이 날품팔이꾼에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날품팔이꾼은 제왕이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것은 ‘그 마음이 아직 생각지 못한 바였다. ※(고전 2:9: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제왕을 단 한 번만이라도 우러러볼 수 있다면 이 남자는 자신을 무한히 행복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사건으로 삼아 자손 대대로 전하게 할 것이다. 그런데 제왕이 이 날품팔이꾼에게 사자를 보내어 그를 사위로 삼고 싶다는 생각을 전했다고 하자,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날품팔이꾼은 당황하여 어쩐지 부끄러운 듯하고 난처한 듯한 기분이 될 것이다. ~~~~자연인은 신이 그에게 주려는 엄청난 선물을 자신의 좁은 마음 때문에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리하여 그는 좌절하는 것이다.
좌절의 도는 사람이 경탄에 대해 열정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공상도 열정도 가지지 않은 산문적인 인간, 즉 진정한 의미로 경탄할 수 없는 인간도 좌절하는 일은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나는 이런 일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그런 일에는 관계하지 않는다고 할 뿐 그 이상으로 진전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회의론자이다. 그런데 인간이 열정과 상상력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따라서 어떤 의미로 신앙인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좌절도 그만큼 열정적이 된다. 그리하여 최후에는 그것을 뿌리채 뽑고 파괴하고 진흙 속에 짓밟아 버리기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좌절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싶다면 인간의 질투심을 연구함이 좋다.
질투란 숨겨진 경탄이다. 경탄자가 헌신에 의하여 행복해질 수 없다고 느끼게 되면 경탄의 대상을 질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도 달라진다. 이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그가 본래 경탄하던 것)은 실로 시시한 것이다. 우둔하고 얼빠지고 기묘하고 엉뚱한 것이다” 진실로 경탄이란 행복한 자기 상실이고 질시는 불행한 자기주장이다. 좌절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경탄이고 질투인 것이 신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예배이고 좌절이다. 모든 인간적인 지혜의 총결산은 도를 넘지 말라고 하는 금언이다.
제2장 죄의 소크라테스적 정의
제3장 죄는 소극성이 아니고 적극성이다
Ⅱ 죄의 계속
죄 안에 머물러 있는 어떠한 상태도 새로운 죄이다. 다시 말해 -이에 대해서는 좀더 자세히 이야기할 필요가 있어 다음에 설명할 것이나 - 일반적으로 죄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는 새로운 죄이며 죄 그 자체이다.
영원은 오직 두 개의 난(欄) 만을 가지고 있다. 신앙에 의하지 않는 모든 일은 죄이다.(롬 14:23). 회개하지 않는 모든 죄는 새로운 죄이며 죄가 회개되지 않고 있는 순간순간이 새로운 죄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에 일관성(연속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인간은 대부분 순간적으로 오직 보통 이상의 결딴 할 때에만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가진다. 그때는 일상적인 일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이렇게 일주일에 한 번 그것도 한 시간쯤 그들도 의식이 된다.
죄인은 죄의 힘 밑에 있으므로 죄의 전체적인 성격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는 멸망의 길로 치닫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오직 개개의 새로운 죄만을 계산하고 있다. 그는 멸망 도상에서 새로운 죄에 의해 새로이 한 발짝씩 정진한다. 그러나 그는 선행적인 죄의 추진력으로 인해 이 멸망의 길을 한 발짝씩 나아가고 있었음을 전혀 모르고 있다.
죄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는 개개의 죄보다 더욱 악한 죄이다. 그것은 죄 자체이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죄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죄의 계속이고 새로운 죄라는 것은 진실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이것을 다른 방법으로 이해한다. 즉 하나의 죄는 또 다른 새로운 죄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아주 깊은 근거가 있다. 죄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새로운 죄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A. 자기의 죄에 대하여 절망하는 죄
죄란 절망이다. 그 도가 강화된 것이 자기의 죄에 절망한다고 하는 새로운 죄이다. 이것이 강화된 성질의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다. 자기의 죄에 절망한다는 것은 하나의 죄를 반복한다는 의미로서 새로운 죄는 아니다. (예를 들면 앞서 백 달러를 훔친 사람이 다음에 천 달러를 훔치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는 개개의 죄를 문제 삼고 있지 않다. 죄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죄이며 이 죄는 새로운 의식 상태 안에서 그 도를 강화한다.
자기의 죄에 절망한다는 것은 죄가 일관적으로 되었거나 되려는 것의 표현이다. 그것은 선과는 아무 관계도 가지려 하지 않고 가끔이라도 다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정도로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오직 자기 자신의 말만을 들으려 하며 오직 자기 자신만을 문제 삼고 자기 자신 안에 틀어박힌다.
죄는 그 자체가 선으로부터의 단절이다. 죄에 관한 절망은 선으로부터 제2의 더욱 심각한 단절이다. 물론 그것은 죄 안으로부터 악마적인 것의 마지막 힘까지 짜내어 무신적인 냉혹과 완고함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이렇게 시종일관 회개라고 불리는 것과 은총이라고 불리는 것을 단지 공허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들릴 뿐만 아니라 이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마치 선이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과 같이 이들을 경계를 요하는 최대의 적으로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파우스트 중의 메피스토텔레스가 “악마가 절망한 것만큼 비참한 것은 없다” 라고 한 말은 아주 정당하다. 여기서 절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회개나 은총의 이야기를 듣고 싶을 정도로 악마가 약해져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에서부터 죄에 관한 절망에까지 이르는 상승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죄는 선과의 절교이고 죄에 대한 절망은 회개와의 절교이다.
죄는 그 자체가 절망과의 싸움이다. 그러나 싸움에 지쳐 기진했을 때에는 죄를 새롭게 강화함으로써 악마적인 힘으로 더욱 자신을 굳게 폐쇄함으로써 다시 말해 자기 죄에 절망한다는 바로 그 사실에 의해 구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전진이며 악마적인 것에 있어서의 상승이다. 그리고 물론 이것은 죄 안에 더욱 깊이 빠지는 것이다. 그것은 회개나 은총에 관해서는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겠다고 결심을 함으로써 하나의 힘으로 죄에 새롭게 지지와 이득을 주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럼에도 자기의 죄에 절망하는 자는 자기 자신의 공허함을 잘 의식하고 있다. 자신은 생명의 양식이 되는 그 무엇을 조금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 자신의 자아에 관한 관념조차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의식하고 있다.
세익스피어가 멕베드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절규했을 때(제2막2장)과연 인간 영혼의 깊은 이해자였다는 것이 잘 나타나 있다. 그가 제왕을 살해한 뒤 자신의 죄에 절망하고 있을 때. “이제부터 인생에는 아무런 진실도 없다. 모든 것이 허무하다. 명예도 은총도 사라져 버렸다.” 라고 한 거장적인 필치는 “명예와 은총”이라는 마지막 두 단어 속에 약동하고 있다. 죄 때문에, 즉 죄에 대한 절망 때문에 그는 은총과의 모든 관계를 상실했으며 동시에 자기 자신과의 모든 관계까지도 상실하고 말았다. 그의 이기적인 자아는 명예욕의 절정에 달한다. 그는 이제 제왕이 되었다. 그렇지만 자기의 죄에 회개의 현실성과 은총에 절망해 있으므로 그는 자기 자신까지도 상실한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조차도 자아를 주장할 수 없다. 은총을 붙들 수 없는 것처럼 명예욕을 충족할 자신의 자아를 향락할 수도 없는 것이다.
자기의 죄에 절망해 있는 인간은 자기 자신 또는 자아의 의의에 관하여 혼란하고 불투명한 의식밖에 가지고 있지 않든가 그렇지 않으면 위선자다. 또는 절망한 사람이 가진 교활함과 궤변의 도움을 빌어 자신을 선환 자로 가장하기를 좋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깊은 본성을 가지고 있고 그 때문에 자신의 죄에 대해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는 사실이 나타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예를 들어 예전에 죄에 빠져 있던 사람이 그 후 얼마 동안 죄의 유혹에 저항하여 그에 이겼으나 다시금 유혹의 포로가 되었다고 하자. 이 경우에 볼 수 있는 인간의 우울은 반드시 죄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가 우울한 것은 다른 여러 이유에서일 수 있다. 그것은 섭리에 대한 분노일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이 유혹의 포로가 된 것을 운명의 탓으로 생각한다. 이제까지 오랫동안 유혹과 싸워 왔고 그리고 이겨 왔는데 자신이 이와 같은 꼴이 된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과 함께 섭리에 대한 분노를 느끼는 것이다. 어찌 됐든 그런 비탄을 선인의 징후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너무나 부녀자 같은 짓이다.
이제 결코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신이 그를 용서하려 하신다면 그도 자기 자신을 용서할 만한 아량을 가져도 좋지 않을까? 그런 죄를 범하다니, 이제 결코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하는 식으로 그가 점점 더 격정적으로 말하면 말할수록 (도대체 이런 식으로 말한다는 것은 신에게 간절히 용서를 비는 참회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행위이다)오히려 자신의 정체를 폭로하게 될 뿐이다. 즉 죄 때문에 그의 절망은 선의 규정으로부터 아득히 멀어졌다는 것, 오히려 한층 더 강화된 성격의 죄이며 죄에 더욱 깊이 빠지는 것, 오히려 한층 더 강화된 성격의 죄이며 죄에 더욱 깊이 빠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사실은 이렇다. 그가 유혹에 저항하여 이겼을 때 그의 눈에는 실제 이상으로 자신이 내면적으로 훌륭한 인간이 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을 자랑하기에 이르렀다. 이 자랑의 기분에서 볼 때 자신을 완전히 과거로 돌리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다시 죄를 범한으로써 그의 과거는 갑자기 현재가 된다. 그의 교만은 이 회상을 참을 수가 없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것 같은 깊은 비판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비판은 틀림없이 그 자신을 신으로부터 이탈시킨다는 점에서 위장된 자기애와 교만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그처럼 오랫동안 유혹에 저항할 수 있도록 자신을 도와 준 신에 대하여 겸손하게 감사하면서도 새로 출발하려 하지 않는다. 또 그 일이 자신의 능력 이상의 것이었음을 신과 자기 자신 앞에 고백하려 하지 않으며 자신이 예전에 어떠했던가를 회고하면서 겸허한 마음이 되는 일도 없다.
B. 죄의 용서에 대하여 절망하는 죄 ※(단절)
자아의식의 강화는 여기에서는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일어난다. 다시 말해 인간이 그리스도에 대한 자아가 됨으로써 일어난다. 처음에는 (제1편에서)인간이 영원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무지가 나타났고 다음에는 영원적인 것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자아에 대한 지식이 나타났다. 다시 (제 2편으로 옮아갈 즈음) 이상의 구별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아직 자기 자신에 관한 인간적인 관념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다시 말해 자기의 표준은 인간이라는 사실이 나타났다. 그 반대는 신에 대한 자아이다. 그리고 이것이 죄의 정의의 기초가 되었다.
이번에는 그리스도 앞에 있어서의 자아가 나타난다. 단 그것은 절망하여 자기 자신으로 있으려 하지 않는, 또는 절망하여 자기 자신으로 있으려 하는 자아이다.
C.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폐기하며 그것을 거짓이라고 말하는 죄
이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이다. 이 단계에서는 자아가 절망적으로 강화되어 있다. 자아는 기독교 전체를 자신으로부터 내던져 버릴 뿐만 아니라 그것을 기만과 허위라고 단정 지어 버린다. 이런 자아는 자기 자신에 관하여 그 얼마나 무서운 절망적 관념을 갖게 되는 것일까!
성령에 거역하는 죄는 좌절의 적극적인 형태이다.
[Review]
교회의 예배 형식 중 하나인 간증은 절망 중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한 경험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결론은 생각의 변화이며, 과거에는 이러이러한 생각이 하나님을 만남으로 이러이러하게 바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심리학에서 ‘인지’는 생각 또는 지각이다. 다르게 말하면, 인지는 사물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다. 이런 생각은 매 순간,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마음속에서 자동으로 소용돌이쳐 흐르는데, 흔히 우리 기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창조적이라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공동체에는 오랜 기간을 걸쳐 형성된 인지가 있다. 인지왜곡은 현실을 잘못 인지(인식)하게 하는 사고이며 이로 인해 자아와의 갈등을 일으키고 심할 경우 병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인지 왜곡 중 하나는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이분법적 오류다. 어떤 사람 또는 상황에서 이분법적 편견에 강하게 집착하면 결과적으로 부정적 결론에 이르고 심리적 우울감에 빠지게 된다.
이 책은’절망‘이라는 생각이 어떻게 인간을 죽음으로 이끌게 되는지 변증학적으로 해설한 내용이다. 여기에서 죽음은 육체적 종말이 아니라 자아가 신성(신의 성품)을 상실하는 것을 말한다. 제1편에서는 일반적 절망이 자아의 유한성과 무한성 사이에서 서로 다르게, 한편 새로운 희망 또는 자아 상실로 이어지는가를 기술했다. 제2편에서는 죄에 대한 절망으로, 특별히 신앙인들을 대상으로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은총에서 나타나는 자아의 상이함을 다루었다. 어떤 사람은 죄악 가운데서 다시 소망으로 이어지지만, 또 다른 사람은 파멸(자아 상실. 신의 성품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결론적으로 절망은 유한한 인간에게는 자아의 상실에서 자기부정 자기 소멸로 이어지지만, 건전한 신앙 안에서는 깨달음을 통해 새로운 생명(신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
“절망은 참으로 변증법적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통해서만 인간은 진실로 구제될 수 있는 것이다.” (본문)
“절망이란 일상적인 용어와는 달리 ‘인간의 자아가 신을 떠나서 신을 상실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자기소외인 것이다. ”(본문)
이 책은 기독교적 교리의 바탕에서 쓴 글이기 때문에 신앙인이 아닌 일반 독자들이 간단하게 이해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란 그 자체가 또 다른 생(生)으로의 이행이다. 따라서 지상적 육체적인 의미로서의 죽음과는 다르다. 물론 죽음이 육체의 종국임은 틀림없지만 그 죽음이 최후는 아니다. 이 책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것은 종국이 죽음이고 죽음이 종국이 되는 그런 병을 말한다. 종말적 절망이 바로 그런 병이다.
"절망한 사람은 죽을병에 걸려 있는 사람과 비슷하다. 이 사람은 길게 누워 죽을 지경에 이르러 있기는 하나 죽을 수가 없다. 이렇게 죽을 정도로 알고 있다는 것은 죽을 수 없다는 의미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살 희망이 아직 그곳에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니 죽음이라는 최후의 희망조차도 이룰 수 없을 만큼 모든 희망을 잃고 있는 것이다." (본문)
키에르케고르(1813~1855년)는 이 책을, 1849년에 발표했다. 이십사 세가 되던 해 그는 레기네라는 한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져서 약혼까지 하였으나 후에 일방적으로 약혼을 파기한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기독교적 진리의 문제를 파헤치는 학자로서 안이하게 세상과 타협하며 살고 있는 교회를 비판했다. 이 책의 내용은 오늘날의 실존주의 철학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본문)
“인간은 더욱 큰 위험을 두려워할 때 언제나 작은 위험 속에 뛰어들 용기를 갖는다. 만약 인간이 위험을 무한히 두려워한다면 그 밖의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독교인이 배워서 알게 되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절망은 정신, 즉 자기에게 있어서의 병이며 세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 절망하여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비 본래적인 절망),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경우,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경우.”
“본래적인 절망에는 두 가지 형태가 존재하게 된다. 인간의 자아가 스스로 자기를 정립했다고 하면 절망의 첫째 형태, 즉 절망하여 자기 스스로 있기를 바라지 않고 자신으로부터 탈출하려는 형태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절망하여 자기 자신으로 있기를 원하는 형태는 문제가 될 수 없다.”
“절망하여 자기 자신으로 있기를 바라는 형태는 단순히 절망의 한 특수한 종류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로 모든 절망을 그 안에 해소시키고 다시 그것에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자아의식의 강화는 여기에서는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일어난다. 다시 말해 인간이 그리스도에 대한 자아가 됨으로써 일어난다.”
"절망은 또 다른 의미에서 한층 더 명확하게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이 병으로 사람이 죽는 일은 없다.(보통 죽는다고 하는 의미에서는) 다시 말해 이 병은 육체적인 죽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반대로 절망의 고뇌는 인간이 죽을 수 없다는 바로 그 점에 존재하는 것이다."
"죽음이 최대의 위험일 때 사람은 생을 원한다. 그렇지만 더 두려워할 만한 위험을 알게 되면 죽음을 원한다. 죽음이 희망의 대상이 될 정도로 위험이 증대된 그때 절망은 죽을 수 있다는 희망까지도 잃는 것이다. "
"절망이란 자기 자신을 삼켜 버리는 바로 그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삼켜 버리려는 열정뿐이지 자기 자신을 삼켜 버릴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이 무력성 안에서 자기 자신을 삼켜 버리고자 하는 새로운 형태가 만들어지는데 여기서도 절망은 자기를 삼켜 버릴 수 없다."
“어쨌든 기독교 세계의 외부에는 절망한 일이 없는 인간은 한 사람도 산 일이 없었고 또 살고 있지도 않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의 내부에도 진실한 기독교인을 빼면 마찬가지로 없다. 완전한 기독교인이 되지 않는 한 기독교 세계 안의 인간도 역시 무엇엔가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절망은 사실 아주 일상적인 것이다. 인간이 절망하고 있는 것이 드문 것이 아니라 진실로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드문 것이다.”
“절망은 가능성으로서 인간 속에 숨어 있다. 만약 인간이 종합이 아니라면 절망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또 종합이 신의 손에 의해 근원적으로 올바른 관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 경우에도 인간이 절망하는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절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종합이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그 관계에서 온다. 인간을 관계되게 한 신은 인간을 그의 손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관계가 되었다. 그런데 그 관계가 정신이며 자아라고 하는 점에 책임이 있기 때문에 모든 절망은 이런 책임 밑에 있으며 절망이 지속되는 순간순간마다 이런 책임 밑에 있다. ”
“만약 인간 안에 영원자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절망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절망이 인간의 자아를 삼켜 버릴 수 있다면 인간은 절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절망하는 자아에 있어서 이 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절망이란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관계로서의 자기(종합)에 있어서 분열 관계이다. 그렇지만 종합 그 자체는 분열 관계가 아니다. 단지 그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종합 속에 분열 관계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종합 자체가 분열 관계라고 한다면 절망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리라.”
“인간이 자신의 파멸을 믿는 일은 불가능하다. 인간적으로는 그것이 자신의 파멸이라는 것을 이해한 다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가능성을 믿는 다는 것. 그것이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때 신 또한 그를 돕는다. 그를 두려운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함으로써 - 예기할 수 없는 기적적인 신적 구원의 출현에 의해 - 그를 돕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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