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로, <그리스도 왕>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주일입니다.
“그리스도 왕”이라는 말은 생소할지 모르지만, 그리스도교 교리를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생각할 때, 그리스도의 <삼중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을 훌륭한 “예언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의 역할로 표현하는데, 예수님은 자기자신을 제물로 바친 “대사제”의 역할을 하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바로 “왕직”입니다. 그런데 왜 왕이라고 했을까요?
로마제국에서는 로마황제가 지상의 최고의 권위를 가진 왕으로 통용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초대교회를 중심으로 하느님과 예수님을 왕이라고 칭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십자가 위에 붙였던 것에서도 이것이 유래합니다.
당시는 온 세계가 로마황제에게 굴복하고 그 신하로 살아가야 하는 시절이었습니다만,
디모데 전서 6장 15절에 사도 바울은 예수를 진정한 <왕중왕>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나오는 성경에서 모두 그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요한묵시록에 천년왕국론이 나오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이 지상의 가혹한 통치와 흑암의 권세로부터 벗어나서 어떻게 살아야하느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자기의 실제적인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는 기도 속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라고 불렸던 것도, 왕가의 혈통을 가진 메시아라는 염원을 담은 호칭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비록 목수로 가난하게 살고 있었지만, 다윗왕의 후손인 요셉의 혈통을 가지고 태어난 것으로 기록됩니다.
세례 요한은 “사제(사독)”집안의 출신의 대표로 태어났고, 이 보다 더욱 훌륭하신 다윗 후손의 메시아에 대한 군중들의 기대가 극에 달했을 때, 예수님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분이 우리를 구원하실 <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제자들까지도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즉, 로마제국을 밀어내고, 성전국가인 유대인 국가의 부활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왕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의 꿈, 실제적인 가치를 끌어내는 것을 현대 용어로 <정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 정치입니다. 따라서 현대 신학은 정치적 언어로 설명되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왕이라고 부르는 그리스도인들의 꿈은 하느님나라의 꿈을 실현시켜주시는 분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를 어떻게 이룩하였는가를 보여주는 것,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가 신앙고백입니다.
누군가가 글을 잘 쓰거나 그림을 잘 그리거나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가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늘나라의 꿈을 그리면서 현실의 흑암의 세계에서 어떻게 견디며, 예수그리스도를 섬기는 신앙으로 다시 태어날까? 이런 것을 찾는 것이 <그리스도왕>이라고 부르는 신앙전통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어떤 세상을 꿈꾸어야 하는지 모를 때, 그에 대한 확신을 보여주시고, 어둠에 무릎 꿇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는 분을 <그리스도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권세를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백성들에게 다가오셔서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어떻게 이룩하여야 하는지 가르쳐주시는 왕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꿈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가 그러한 왕이시라는 것이고 이는 초대교회시절부터 믿어 왔습니다.
이를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요한 묵시록(계시록)입니다.
가장 박해가 심할 때, 살아남은 제자 요한이 기록한 것으로, 이러한 암흑과 어떻게 투쟁하여 나갈 것인가를 기록한 것으로 이를 묵시록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이 어떤 방식으로, 또는 예수님이 우리를 어떠한 방법으로 이끌어 주실지에 대한 암시를 주는 것입니다.
이는 상당히 정치적인 언어로 되어 있는데, 신앙적인 의미로 풀어보면, 흑암의 권세가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신앙을 잃지 않고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를 기록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어 천년통치를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겪어야 하는 고난이 기록되어 있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사탄과의 마지막 싸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묵시록은 이단들이 많이 왜곡해 써먹어 왔고, 성공회에서는 아예 거론하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그리스도를 믿었던 신자들이 당했던 고난들이 요한 묵시록 6장에서 8장까지 나옵니다. 일곱 봉인을 떼는 장면이 나오는데, 네 번째 봉인을 떼었을 대, 하느님 일을 하다 순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하느님의 일을 하다가 억울하게 순교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외침이 나옵니다.
이에 대해 거의 마지막에 “너희들이 흘린 피를 보상해주겠다”는 이야기(21장)가 나옵니다.
잘못된 것에 대해 목숨을 걸고 싸워 온 것이 그리스도교의 역사입니다.
지상의 나라가 잘 못되어 가고 있을 때, 하늘나라가 이를 뒤집어엎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왕>은 선하고, 정의롭고 아름다운 나라 건설의 꿈을 꾸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가 서 있는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왕국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 현장에서 찾아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 사회에서, 내 삶의 질서, 사회의 질서를 바꾸어 예수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세상을 이룩해 나갈 수 있도록 정진해나가는 것이 그리스도교 집단의 의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 지도자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모르겠습니다.
하느님 통치의 두려움을 알고 그리스도왕국을 이룩하여 나갈 수 있기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댓글 이지영 교우님의 두 친구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