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시대, 아픈 역사의 흔적을 우리나라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그러한 근대문화유산들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 군산입니다. 이곳은 첫 방문이었는데 군산이 왜 이런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또 어떤 역사를 지닌 곳인지 무척 궁금했어요. 군산근대역사박물관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알아갔습니다. 이곳은 제가 알던 것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지닌 도시였어요. 아픈 역사의 흔적을 마주할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군산과 곳곳에 있는 근대문화유산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역사를 돌아보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만약 군산 첫 방문이라면 가장 먼저 이곳을 방문해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 이 글의 내용은 <군산근대역사박물관>과 군산 곳곳에 있는 <문화유산 안내문>을 참고로 하여 작성하였습니다.
■ 주소: 전북 군산시 해망로 240
■ 운영시간: 09:00 - 18:00 (1월 1일, 매주 월요일 휴무)
■ 공식사이트
▼ 군산근대역사박물관
근대역사 속의 군산
① 근대 생활관 (1930년대 군산의 거리)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 채만식의 탁류 中』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 <탁류>의 한 구절로 시작되는 근대 생활관은 일제의 강압적 통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치열한 삶을 살았던 군산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한 공간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군산의 조계지를 건축 모형을 통해 살펴볼 수 있었어요. ‘조계지’는 개항장에서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지역을 말합니다. 군산 조계지는 1899에 형성되어 1914년까지 존속되었는데 이때 한국인들의 가옥과 묘지는 철거되고 대부분의 지역이 경매로 거래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일본 도시의 가로명을 붙이며 도시를 형성해 갔습니다.
▼ 조계지, 맨 아래쪽 집들이 위치한 거리가 본정통(혼마찌)이며, 현재 군산의 ‘해망로’를 말합니다.
위 사진의 가장 아래쪽에 있는 거리가 ‘본정통(本町, 혼마찌)’인데요. 본정통은 일제시대 행정구역의 이름으로 중심이 되는 도로, 즉 중심가를 의미합니다. (현재 군산 내항 근처의 ‘해망로’) 본정통을 중심으로 상업 · 업무지구가 형성되었는데 오늘날 해망로 근처에 (구) 군산세관, (구) 조선은행, 일본식 가옥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개항 초기 생계형 이주로 군산에 온 일본인들이 1910년 일제 강점 이후 가족단위의 영구 거주가 많아졌다고 합니다. 특히 농장을 운영하는 지주들의 이주가 많았고,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일제의 식민지 농업정책)의 실시에 따라 미곡 수탈량이 급증하면서 일본인들은 커다란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반면, 조선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이 되었습니다. 농촌에서 쫓겨난 농민들은 조계지 밖의 둔율동, 개복동 등의 산등성이로 밀려나 ‘토담집(토막집)’이라는 움막 형태의 흙집(청동기시대 반지하 주거형태와 비슷)을 짓고 살게 됩니다.
소설 <탁류>에서 이 모습을 묘사한 구절이 나옵니다.
『급하게 경사진 강 언덕 비탈에 게딱지 같은 초가집이며 다닥다닥 주어 박혀 언덕이거니 짐작이나 할 뿐이다. 이러한 몇 곳이 군산의 인구 7만 명 가운데 6만 명쯤 되는 조선 사람의 거의 대부분이 어깨를 비비면서 옴닥옴닥 모여 사는 곳이다. - 채만식의 탁류 中』
▼ 토담집(토막집)
남자는 부둣가에서 막노동을 하고 여자는 일본인 집에서 식모살이와 미선공(좋은 쌀을 가려내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생활을 하는 빈민이 되었다고 합니다.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군산이 쌀의 수탈항으로 성장하면서 정미업이 크게 발달했는데 정미소들은 쌀을 가공해서 배로 실어 나를 수 있도록 철도변이나 해안가에 위치해 있으며 대부분 일본인 소유였습니다. 쌀을 가공하는 도정기 외에도 미선소를 갖추어 좋은 쌀을 가려내어 품질을 높였는데요. 정미소와 미선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임금을 낮추는 방식으로 이윤을 추구하려 하여 노동자들의 항쟁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부잔교>
군산 내항에서 볼 수 있는 부잔교(뜬다리 부두)는 일제가 전라도 곡창지역에서 수탈한 쌀을 일본으로 수탈하기 위해 설치한 항만시설로 서해안의 자연 특징을 고려하여 고안한 다리입니다. 부두에서 정박시설 사이에 다리를 만들어 조석 간만의 차에 의해 물 수위가 변함에 따라 상하로 움직이며 선착장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설치되었습니다.
▼ 부잔교 모형
▼ 미곡수탈현장
▼ 군산 내항에 있는 부잔교
1930년대 군산에 존재했던 11채의 건물을 재현한 공간으로 근대의 거리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당시 상점의 모습, 사용된 물건, 유행 등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어릴 적 할머니 댁에 가면 가지런히 놓여있던 고무신이 기억납니다. 1920년대 초에 등장한 고무신은 우리나라의 전통적 갖신(가죽으로 만든 신의 총칭)과 일본의 호모화(밑창은 고무이고 그 외는 가죽이나 천)를 한국의 생활과 풍토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고무신의 등장은 신발의 혁명이라 할 정도로 생활상을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1932년 설립된 경성고무공업주식회사는 해방 이후, 만월표 고무신을 생산하였는데 특히 검정 고무신의 인기는 대단하였다고 합니다.
▼ 고무신, 나막신 등 다양한 신을 신어볼 수 있습니다.
군산의 양조산업은 일본에서 양조업을 하던 일본인들이 쌀의 가격이 저렴한 군산에 눈독을 들이고 공장을 건립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나무 책걸상, 칠판, 오르간, 난롯가와 도시락통, 정겨운 학교의 모습을 재현해 둔 공간입니다. 벽에는 독립영웅관에서 보게 될 애국지사 송원 심재순 선생님과 춘고 이인식 선생님을 소개하는 내용이 부착되어 있습니다.
▼ 학교
▼ 추억의 도시락
② 독립영웅관
독립영웅관은 군산지역 독립운동가 74분을 기리기 위한 공간입니다. 이 관은 『자랑스러운 군산의 독립영웅들』, 『민족의 영웅들』, 『8인의 의병장』, 『호남 최초의 3.1만세운동』, 『국내 독립유공자들』, 『옥구농민 항일항쟁』, 『해외 독립유공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제의 강압적 통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항쟁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소개와 유품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군산 곳곳에 남아있는 일본의 잔재들을 그저 독특한 분위기라고 가볍게 넘기기엔 너무나 아픈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이곳에 남아있는 문화유산들을 둘러보며 이곳이 어떤 장소였는지 알고 바라본다면 더욱 의미있는 여행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