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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된 날 잠잠하고 있도다 / 은혜목회정보
1917년 10월 소련의 볼세비키 혁명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당시 제정 러시아는 희랍 정교회가 국교였습니다. 이러한 나라가 어찌하여 공산주의 나라가 되어버렸을까요?
그 이유는 희랍 정교회란? 러시아의 귀족 사회에서만 존재하였을 뿐 자기가 고용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복음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혁명의 천재인 레닌이라는 자가 나타나 그 노동자 농민들에게 가서 혁명의 바람을 불어넣어 버렸고, 그로 인해 러시아의 희랍 정교회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공산화가 쉽게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신자들인 우리에게 오히려 화가 미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고하자"고 합니다.
B.C.600년경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예언자로 활동하고 있을 때 이웃 나라 아람의 왕인 벤하닷은 이스라엘 공격을 여러번 시도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이번에는 아람 군대를 총 동원하여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성을 공격했고, 성을 완전히 포위하여 모든 보급노선을 차단하고, 원정군을 청할 수 있는 기회도 주지 않고서 스스로 손을 들고 항복하기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군사적으로 워낙 비교가 되지 않는 이스라엘은 사마리아 성안에 완전히 갇혀서 어찌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처참한 현상들이 성내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성안에는 양식이란 양식은 다 떨어졌고, 나귀 뼈다귀까지 삶고 또 삶아 먹어도 배를 채우지 못했습니다.
급기야 오늘은 내 아들 내일은 네 아들, 돌아가며 자식을 잡아먹는 기아의 극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눈은 짐승처럼 충혈되어 있었고, 임금은 베옷을 입고 통곡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엘리사 선지자는 "내일 이맘때부터 사마리아 성내에서 마음 놓고 싼값으로 양식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기아에 허덕이며 절망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엘리사가 외친 이 메시지보다 더 위대한 복음, 더 아름다운 소식, 더 복된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복된 소식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구원의 약속이었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이 복음에 대한 한 사람의 응답이 나옵니다.
그는 왕의 총애를 한 몸에 지닌 재경부 장관쯤 되었던 모양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사 선지자를 통하여 내일 이맘때쯤이면 성밖에 기적이 일어날 것이고, 기근이 물러갈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습니다.
엘리사의 말은 굶주림에 허덕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희망의 말, 구원의 선언이었습니다.
또한 엘리사의 이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었기에 이 말에 대한 가능성은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적을 창조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장관은 그런 일은 하늘에 구멍이 뚫리고 창문이 나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일축해 버리고 불신해 버렸습니다.
본문의 장관은 똑똑하고 계산에 빠르고 영악하긴 하지만, 그의 사고나 계산 속에는 하나님께서 간섭하실 틈이 없고 약속된 말씀을 도무지 믿지 않는 불신앙적인 현대인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현실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 안타가운 환경에 대해서 탄식하고 비판하고 고발하기를 좋아하지만, 신앙적인 안목이 없어 믿음을 가지지 못한 채 그곳에 주저앉아 얼마나 처절히 절망하고 있습니까?
또 이러한 그들의 모습이 오늘 나의 모습은 아닐런지요?
이러한 사람에 대해서 엘리사는 불신앙의 대가가 어떠한가를 알려 주십니다.
"네가 네 눈으로 그 장면을 보리라 그러나 너는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고 단호하게 말해 주었습니다.
과연 이틑 날 이와 같은 기적적인 상황은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나 장관은 성문을 지키다가 물밀듯이 몰려나오는 굶주린 사람들 틈에 밟혀서 죽고야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구원의 도리를 비웃는 자는 사람들의 발바닥에 밟힌 이스라엘 장관과도 같은 처절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깽깽이를 켜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어찌나 신나게 연주를 하는지 그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길을 가다가도 한결같이 어깨춤을 출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는 그들을 보고 사람들이 다 돌았다고 비웃더랍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믿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듣지 못하는 음악을 듣고 춤을 추는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성으로 모셔 들여올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너무나도 크고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그때 사울의 딸 미갈이 그것을 보고 "왕이 백성들 앞에서 체통 없이 그게 무엇이냐?" 책망하며 업신여겼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미갈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을 허락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십시오.
"성문 어귀에 문둥이 네 사람이 있더니"
본문의 배경이 성안에서 성 바깥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2절과 3절 사이엔 많은 이야기가 생략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성문 안에 있는 다른 백성들의 반응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재경부 장관의 부정적인 담화 내용을 듣고 온 백성들이 한결같이 엘리사의 복음을 받지 못하고 부정적인 사고와 절망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한 사람의 부정적인 말이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력을 미치는가?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고 성공하기를 원하신다면 부정적인 생각이나 언어를 삼가 하시고 "안된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나 혼자 패망하는 것이 아니고 이 부정적인 언어는 염병처럼 이웃에 오염되어 가족을 죽이고 교회에 손상을 주며 사회와 국가를 병들게 만듭니다.
전도를 해도 "나는 못해! 나는 안돼"하는 사람은 절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전도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자는 사단밖에 없습니다.
사단의 도구가 되지 마십시오.
자 그러면 성문 밖 문둥이들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이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받아 성안에서 살지 못하고, 성밖으로 쫓겨난 사람들이었고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금지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배고픈 것은 그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성을 멀리 떠났던 그들은 배고픔을 견딜 수 없게 되자 결단을 내렸습니다.
본문 3-4절을 보십시오.
"성문 어귀에 문둥이 네 사람이 있더니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우리가 성에 들어가자고 할지라도 성중은 주리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여기 앉아 있어도 죽을지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저희가 우리를 살려두면 살려니와 우리를 죽이면 죽을 따름이라 하고"
저들은 마침내 포위하고 있던 적군의 진지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아람 군대의 천막에 당도해 보니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수많은 양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간밤에 하나님께서 한 사건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아람 사람들의 귓전에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무수한 군대가 쳐들어오는 굉장한 소리를 들려 주셨습니다.
함성소리와 기병대의 말발굽소리와 바퀴소리가 갑자기 아람진영을 뒤흔들었습니다.
아람군인들은 바로 이 소리가 이스라엘과 헷군인과 애굽군인이 연합전선을 펴고 공격해 오는 소리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옷가지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몸만 빠져나와 허겁지겁 도망한 것입니다.
이게 웬 떡입니까?
너무나 오랫동안 굶주려 왔던 문둥이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장막에 들어가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니라"
그들은 큰 부자가 되었고 잘 먹고 잘 살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이것을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사건이 여기서 멈추어진다면 그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일 수가 없습니다.
만약 오늘 본문이 성안의 많은 사람들은 굶어 죽어갔으나, 이 문둥이들은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었다 라고 전개되었다면 얼마나 허무한 결론이 되겠습니까?
여러분, 축복이 무엇입니까?
저희들이 신학교 시절 교재로 사용했던 전경연 박사님의 <예수의 교훈과 윤리>라는 책에 의하면 "축복은 종말과 관련되어 있어서 먹고 마시고 감추고 쌓는 부귀영화가 아니라 적절히 나누어 줄 수 있는 여유와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지혜를 얻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네 문둥이들은 한참이나 먹고 마시고 감추다가 불현듯 하나의 생각이 그들의 폐부를 찔렀습니다.
문둥이들은 우리만 이렇게 먹고 마시고 즐기는 동안 저 성안에 있는 수많은 내 동족들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이 시간에도 굶주림에 허덕이고 괴로워하는 내 이웃이 있지 않은가? 하는 놀라운 각성을 했습니다.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9절 下).
지금도 저 성중에는 한 톨의 보리가 없고 한 톨의 밀이 없어 얼마나 많은 우리의 동족들이, 가족들이 굶주림과 절망 속에서 한숨과 탄식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우리만 이렇게 먹고 마시고 잘 살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무관심한 행동으로 이웃을 등지고 외면하는 일을 내일 아침까지 계속한다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 것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일어나자 저 성중에 가서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자!
새로운 사명을 깨닫기 시작한 이 네 문둥이들은 성안에 있는 내 형제, 동포들에게 이 사실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9절上)고 말하면서 사마리아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하여 굶주린 자, 절망속에서 허덕이는 성안의 사람들에게 구원의 즐거움을 전하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우리를 축복하셨습니다.
이 한국 땅을 축복하셨고, 이 땅의 교회를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이야기의 전부일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잘 먹고 잘살았다. 그리고 죽어 천당 갔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일수야 없지 않습니까?
아름다운 날, 복된 소식이 있는데 우리가 이렇게 잠잠해도 좋단 말입니까?
이제 우리는 침묵의 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무관심과 이기주의와 안일주의의 죄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입술을 열어 이 손과 발로 하나님의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오래 전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던 <로베데 장군>이란 영화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영화 중에 나치에 저항했던 많은 레지스땅트 즉 저항운동가들이 감옥에서 처형당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저항운동에 참가한 일이 없는데도 잘못 잡혀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처형당하는 것은 억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저항 운동에 가담했다가 붙잡혔으니까 처형당하는 것이 마땅할지 몰라도 자기는 장사나 하고 돈이나 벌며 살다가 잘못 잡혀온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온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저항운동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이때 그와 함께 붙어있던 한 사람이 말합니다.
"당신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잘못이다. 당신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 그것 하나로 죽어 마땅하다. 전쟁은 5년이나 계속되었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무참하게 피를 흘렸고 수많은 도시들이 파괴되어 버렸다. 조국과 민족이 멸망 직전에 놓여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가? 그것 하나라도 죽어 마땅하다"
주님은 우리가 소리치지 않으면 돌을 들어서라도 소리 지르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우리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가장 부끄럽고 죄스런 모습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함에 있습니다.
받은 축복, 이웃을 위해 나누지 못했고, 받은 구원의 은혜를 내 이웃에게 전하지 못함에 있습니다.
숱한 사람들이 지옥을 향하여 죽어 가고 있음에도 외면하고 있었던 우리의 신앙생활이 책망 받을 신앙의 모습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117 복음 축제일을 정하고서 온 성도가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 수요일, 목요일 함께 전도하기 위해서 교회에 10시에 나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오신 분은 15명이 채 되지 못했습니다.
그 다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움직이시는 섭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필이면 버림받은 문둥이를 뽑아서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놀라운 소식을 한 나라의 장관이나 대변인의 입술을 통해 선포하지 않으시고, 소외되고 버림받고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 전하셨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흥미롭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시길 좋아하십니다.
"나는 힘이 없어요"
힘없는 당신을 들어 능력 있게 하시고 사용코자 하십니다.
"나는 자격이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자격 없는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를 더 즐겨하십니다.
"나는 약하고 무식합니다."
아니요!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들어 강하게 하시고 무식한 자를 들어 지혜롭게 하십니다.
누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누가 이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까?
"너"가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저는 열매맺는 이 가을에 117복음축제를 기도로 준비하면서 교역자, 안수집사, 권사 등 중직자는 30명을 이 복음축제에 초청하고, 목자, 부목자, 교사들은 20명을, 서리 집사들은 10명. 일반 성도는 5명 이상에게 이 복된 소식을 전하여 초청하기로 했습니다.
원하옵고 바라옵기는 이 복되고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 잠잠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배를 타고 각 나라 항구를 돌면서 선교를 <둘로스>라는 선교선이 있습니다.
이 돌로스가 필립핀에서 선교를 하다가 폭탄이 터져서 꽃다운 나이의 처녀 둘이 숨졌습니다.
그 중에 다이아나라는 뉴질랜드의 소녀가 죽었다는 소식이 집에 전해졌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언니가 소식을 전하는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 이제는 내 차례야!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100% 나아갈 차례야"
그리고는 지금 <둘로스> 선에 승선해서 순교한 동생을 대신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되고 아름다운 날, 잠잠하지 맙시다.
가서 구원의 소식을 전합시다.
18세기에 혜성과 같이 나타난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 있는데 그는 휫필드라는 미국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없었다면, 18세기의 미국의 영적 대각성 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미국이 영적으로 부흥을 맞지 못했으면, 외국에 그처럼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또 우리나라에도 아펜셀러나 언더우드 같은 훌륭한 선교사를 파송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나라에 100년 전에 이런 훌륭한 선교사들이 와서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복음을 모른 지금 우리의 형편은 너무나 뻔한 것이 아닙니까?
이처럼 한 사람이 어떻게 활동을 했느냐? 가 그 후손을 두고두고 영광스럽게 하는 것을 봅니다.
휫필드는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너무 좋아서 30여 년 동안 자기 몸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초인적으로 헌신했습니다.
보통 일주일에 40시간-60시간을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를 해 본 사람만이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중노동인 줄을 압니다.
인간적으로 판단한다면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습니다.
한 주에 그 정도로 설교하면 오래 살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설교를 한 다음에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기도하고 자신을 초청한 집에 가면 함께 찬양하고 중보 기도하는 것을 잊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녹이 슬어서 없어지느니 닳아서 없어지는 목사가 되고 싶다"
1770년 9월 29일 전도집회를 마치고 보스턴으로 돌아가던 중 엑스터라는 작은 마을에 잠깐 들렸습니다.
그 곳을 그냥 지나치려다가 휫필드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설교해 달라고 막무가내로 요청을 했습니다.
들판에 임시강단이 마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거기에 올라섰습니다.
이 때 휫필드를 지켜보던 한 노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생님, 당신은 설교하는 것보다 침대에 가서 눕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만큼 그는 지쳐 있었고, 환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단에서 눈을 감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의 일에 지쳐 있기는 하지만, 그 일에 실증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제가 아직 갈 길을 다 가지 못했다면 다시 한번 들판에 서서 주님의 복음을 말하게 하시고, 주님의 진리로 모든 사람에 마음에 인치에 하옵시고, 그 다음에 죽어 주님이 품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하고 전도를 했습니다.
그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가 생전한 설교 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인 설교 중의 하나였다고 평가가 됩니다.
그 다음날이 주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휫필드의 방에 찾아가 보니 그는 이미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다음이었습니다.
얼마나 기막힌 그리고 멋있는 인생을 살다가 갔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왜 그는 그렇게 자기 몸을 도보지 않고 쇠붙이처럼 닳아 없어지는 생을 살기를 원했을까요?
지옥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불쌍했기에, 그리고 그가 만난 주님의 복음이 너무나도 귀하기에 그는 그의 생애를 복음을 위해 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 하나님은 이렇게 복음을 위해 헌신된 자들을 찾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아멘.
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