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중도(中道)는 유교의 중도(中庸)와 다르다. 중용이 유교철학의 오덕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 머물러 있다면, 불교의 중도는 열려있는 세상의 열려 있는 진리와 한 몸임을 걸을 일깨워주고 있다. 흔히 중도에서 중(中)자를 가운데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중은 정(正)이다. 중(中)자는 가운데 뜻도 있고 누리다의 뜻도 있다. 내가 중심을 잡고 흔들리지 않으면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하다. 중(中)에는 버려야 할 변두리가 없고 모서리가 없다. 발길 닿은 곳이 세상의 중심이요 앉아 있는 곳이 정토의 극락세계이다.
그러므로 중도는 좌와 우로 기우는 것을 경계하는 양변불락(兩邊不落:두 끝에서 떨어지지 않다)이 아닌 것이다. 이르는 곳이 세상의 중심인 무변중심(無邊中心)이자 양변무애(兩邊無碍: 양변에서 자유롭다)이다. 내가 동서남북의 중심에 서 있으면 나에게는 경계해야 할 모서리가 없고 버려야할 양 변두리가 없다.
임제 선사의 수처작주(隨處作主)처럼 이르는 곳마다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용수 스님의 팔불주도(八不中道)처럼, 생김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는 것이다. 같음과 다름도 없고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닌 것이다. 불교의 중도는 진정한 의미에서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선 오늘의 주인공임을 일깨우는 인간선언이다.
중(中)자는 가운데 중으로 읽지 말고 정(正)으로 인식해야 한다. 누리는 중(中)으로 받아들여 이 마음이 곧 부처임을 사무치게 살필 일이다. 탄생의 첫 외침인 천상천아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存) 또 다른 중도의 외침임을 살피고 또 살펴야 한다. 상대와 변두리에서 자유로운 중(中)이라면 미(迷)와 사(邪)에 얽매임이 없는 게 정(正)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미혹(迷惑)과 사(邪: 삿됨)가 낄 수 없는, 우월과 열등의 높낮음 없이 유(有)와 무(無)의 차별과 집착도 없이 범성(凡聖)이 둘이 아니요 거래(去來)와 생멸(生滅) 단상(斷常) 등이 둘이 아닌 하나로 어우러진 세계입니다. 이는 팔불중도(八不中道)의 평등성을 강조해 부쳐진 이름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오늘이, 금생이 제일 중요하다. 불교는 오늘의 종교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살아있는 나」다. 내가 죽으면 끝이다. 우울하다거나, 돈 없다고 불평하면 안 된다. 살아있다는 자체가 ‘나’는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현명하게 생각하며 살아야 참다운 사람이다.
출처 : 조현 TV <향봉 스님 인터뷰>, 현대불교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