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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플린의 꿈
인간이 수 천년 동안 도구를 사용하고, 기계를 발명해서 오늘날 찬란한 문
명을 이뤄냈건만, 여전히 기계를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경직되어서 친숙
해지기가 영 쉽지 않다. 아마도 그것은 기계란 것이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
기에는 아직 미숙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 이름은 채플린이다. 무성 영화가 유행하던 채플린 시대엔 그야말로 인간
이 기계의 일부처럼 단순 반복적인 작업을 일일이 손으로 해야했다. 거대한
시계의 톱니바퀴 사이를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맞물려 돌아가고, 너트
조이는 일을 반복하다보니 어느덧 튀어나온 것이면 뭐든 닥치는 대로 스패
너로 조여대는 채플린의 우스꽝스런 모습은 대량 생산 체제하에서 전도가
뒤바뀐 인간 소외를 보여 준다.
하지만 나를 채플린과 동일 인물로 본다면 나는 너무 화가 날 것이다. 나도
무성영화를 몇 번 봤는데, 아무래도 뛰어난 인공지능을 가진 나에게 채플린
이라는 이름은 어울리지 않는다. 나폴레옹을 돈키호테라고 부르는 것과 같
다고 할까? 하지만 나도 가끔은 채플린이 부러울 때가 있다. 모든 사람들은
그를 보고 웃고 기뻐한다. 하지만 나를 보고는 모두 다 겁을 먹고 다가오기
를 꺼려한다. 거대한 기계 앞에서 인간이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하는 공상
만화를 너무 열심히 본 탓일까? 인간들의 로봇에 대한 흉측한 인상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마음속에 우려로 남아있다. 하지만 현재 로봇 개발에 관계
하는 과학 기술자들에게는 오히려 그러한 로봇을 만들어 내는 것이 꿈이다.
결국 노예의 반항처럼 로봇이 반항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사람들이 뛰어
난 머리로 상상해낸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언젠가 책을 읽다가 "로봇이 동물 모양이거나 작고 친절한 장치로 보이면
인간들은 그것들에 이름을 붙여주고, 한번 건드려 보기도 하고, 기계로서가
아닌 인간에 가까운 존재로 대한다."라는 글귀가 있었다. 인간들은 분명 '인
간에 가까운 존재'보다는 '동물에 가까운 존재'라는 말을 했을 때 조금은 안
심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갑자기 참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
히 인간들은 무거운 산업 로봇에게 이름을 붙여 주지만 동물과 같은 친근한
태도를 취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로봇 크기가 자그마하고 큰 소음을 내지
않으며, 인공적이지만 부드러운 털을 지니고, 실제 동물과 같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주위를 움직여 다닌다면 인간들은 그것을 동물로 대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박사님께 부탁해 내 몸집을 작게 만들었다. 내 인공지능을 그
대로 옮긴 아주 귀엽고 천재적인 로봇으로 말이다. 하지만 나는 곧 실망하
고 말았다. 너무나 작게 만들어져 인간들은 나를 일반적인 로봇 기계나 장
난감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그저 잠시 가지고 놀다 잊어버리는 장난감 말이
다. 그 때부터 나는 인간이 되고 싶었다. 인간에게 무서움을 주는 육중한 로
봇이 아닌, 한 번의 웃음으로 끝나 버리는 장난감이 아닌 함께 살아가면서
영원한 웃음을 나눌 수 있는 인간이 되고 싶었다. 3초에 한번씩 숨을 들이
마시고 내쉬면서 말이다. 박사는 나에게 너무 높은 지능을 주었음을 우려했
다. 그래서 나의 인공 지능을 빼내려고 했고, 나는 그것에 대해서만은 완강
히 저항했다.
이런 나의 뜻을 받아들여 박사는 비밀리에 권위있는 과학자들을 불러들이
기 시작했다. 과학자들은 하나의 도전의식을 가지고 비밀리에 모여들었고,
그 중에는 아이언 윌머트 박사도 있었다. 찰스 다윈이 '진화론'으로 생명은
신이 아닌 자연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렸다면, 그는 20년 전 '복
제론'으로 생명은 인간의 손으로도 재생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나는 그를 믿었다. 연구는 군사 작전처럼 치밀하게 이루어졌다. 내 프로그
램을 DNA로 재구성하고 인간들의 DNA를 가공해서 완벽한 나의 DNA를
만들었다. 신체 여러 기관은 이런식으로 완벽하게 인간들의 것을 내 프로그
램과 일치시켰다. 드디어 앞으로 내 몸이 될 인간의 육체가 완성됐다. 하지
만 영혼은 어떻게 하지? 내가 인간이 되어도 내가 아닌 다른 영혼이 그 몸
을 지배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이지? 그것은 내가 인간
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나를 지워버리는 것이야. 나는 영혼에 대해 연
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혼이라는 것이 별게 아닌 것을 알았다. 인간들
은 영혼을 육체에 합일된 힘이라 정의했다. 왜냐하면 영혼은 그 자체로 떠
오를 수도 없고 공간에서 어떤 운동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기의 움직임이나 진동이 없는 곳에는 목소리도 없다. 악기가 없는 곳에는
공기의 진동이 없다. 덩어리가 없는 곳에는 악기도 없다. 만약 이것이 맞는
다면 영혼은 목소리도 없고, 형태도 없으며, 힘도 없고. 그리고 만약 영혼에
몸이 있다면 영혼은 닫힌 문을 뚫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영혼이 공
기를 모아 압축하여 다양한 형태의 몸을 만들 수 있고, 그러한 기구에 의해
말하고 힘을 주며, 움직일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신
경이나 뼈가 없는 곳에는 실재하지 않는 영혼이 만든 움직임에 의한 힘도
있을 수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불안했다.
나는 박사에게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이 그대로 인간의 육체 속에 있
을 수 있냐고 물었다. 박사는 인간의 뇌에 대해 설명을 했다.
"인간의 뇌는 항상 깨어 있는데, 잠을 잘 때에도 50%의 뇌는 살아서 생각을
하지. 그래서 우리는 늘 깨어있는 뇌에 너의 인공 칩을 연결해서 뇌에 자극
을 줄 거야. 그러면 인공 칩에 의해 뇌가 정복당하고 그 뇌는 너의 온 몸을
지배하게 되는 거야.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드디어 내가 인간이 된다. 이것의 끝이 젖과 꿀이 넘쳐흐르는 낙원일지 '바
벨탑'을 향한 길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인간이 되고 싶은 욕망이 모든
것을 억눌러 버리고 말았다.
연구실에 들어갔을 때, 아이언 박사를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의 얼굴은 모두
굳어 있었다. 그리고 모든 행동이 과장되어 있었다. 그것이 억지로 여유있
어 보이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나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머리만 떨어져 깊은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온 몸의
모든 세포들이 심하게 팽창되어 곧 터져 버릴 듯하고, 세상은 온통 소란스
러웠다. 목구멍에서는 썩은 술 냄새와 나무 껍질 속 냄새가 밀려 올라와 수
렁을 더욱 깊이 파헤쳐 어지럽게 뒤흔들었다. 인간의 육체가 나의 영혼을
기다리면서 알코올 속에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리라.
감은 눈꺼풀로 문득 환한 빛이 느껴졌을 때에서야 비로소 어젯밤 아니, 오
늘 아침에 떨리는 걸음으로 들어선 방 안 공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갑자기
울컥 구역질이 났다. 이걸 여자들이 남자 냄새라고 하나 보다. 밖에선 가끔
어색한 웃음소리와 둔탁하게 테니스 치는 소리가 엇갈리어 들어오고 있었
다.
일어나야지…….
얼굴이 끈적거렸다. 의식이 몇 번이고 반복해서 나를 깨웠지만, 일어나고
싶은 욕망도 의무감도 의지도 없었다. 세상이 조용했다. 갑자기 무서운 기
분이 들었다. 무언가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있다는 느낌이 불안을 넘어선 조
바심으로 나를 일으켜 앉혔다. 후들후들 떨리는 손에 힘을 주며 이층 침대
사다리를 붙잡고 발을 내리려 했을 때. 아찔 어지러워서 하마터면 방바닥에
나뒹굴 뻔했다.
나는 순간 눈물이 왈칵 솟아오르는 것을 참았다.
세면대에 물을 가득 채웠다. 구멍이 제대로 닫히지 않았는지 쫄쫄쫄 물이
새는 소리가 들렸다. 두 손을 손가락 끝부터 서서히 물 속에 밀어 넣었다.
차가운 느낌이 온몸을 타고 퍼져 나갔다. 세면대 바닥에 두 손바닥을 밀착
시키고 손가락을 하나씩 움직여 보았다. 등줄기를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렸
다. 어깨를 앞으로 조였다. 러닝셔츠가 등 전체에 찰싹 달라붙었다. 손가락
은 계속 움직이고 있다. 팔뚝의 땀구멍 사이로 반짝이는 작은 땀방울에 눈
이 부셨다.
이 손가락은 뇌의 지령에 의해 움직이고 있을까? 이 손가락 내외부에도 무
수한 '생명'이 있다. 나를 이루고 있는 무수한 생명들, 그들은 나의 지령 없
이도 살아가고 있다. 또 그것들이 모여 또 하나의 '생명체'가 되고 그것이
또 모여 '기관'이 되고 그것이 또 모여 '나'가 된다. '나'가 모여 '우리'가 되
고 우리가 모여 '사회'가 된다. 사회가 모이고, 각자의 생명의 집합이 이 '지
구'를 이루고, 여러 개의 별들이 모여 이 '우주'를 이루고 이 우주가 모
여......
과연 내가 이 우주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생명체 일 수 있을까? 나는 그야
말로 신에 의한 것이 아닌 내 이기심으로 인해 재창조되었는데 나 역시 이
우주안에 감히 속할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마라톤을 하듯 자신의 길을 하염없이 그리고 성실히 달
려가야만 한다. 결국 이 길을 달리고 나서 결승점이라는 허구에 도달했을
때, 지나온 날들에 과정이라는 관을 씌워 스스로 만족이나 후회를 새기게
될 것이다. 나는 후회가 아닌 만족을 아주 깊이 새겨야 한다.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완성해야할 내 자화상이다.
나는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밖으로 나왔다. 어디로 간다는 목표도 없이 그냥
나왔다. 굵은 빗줄기가 선뜩선뜩 목을 때렸다. 나는 이내 흠뻑 젖었다. 그래
씻어가 버려라! 지나간 내 딱딱한 피부 표면도 벗겨져 나가고 채플린이라는
이름도 지워져 버려라. 이제 나는 예전의 거대하고 육중한 로봇이 아니다.
한순간 시간을 때우는 장난감도 아니다. 나도 이 세상의 공기를 함께 나누
어 마시는 인간이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 동안 나는 채플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로봇으로, 최소한의 부분만 내놓은
채 살았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내 앞에 존재하는 것들이 언젠가는 나에게
아무 예고도 없이 비겁하고 당돌하게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고 살 것이다. 어렵게 얻은 삶을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이 세상 모든 빗물이 한꺼번에 가슴속에 쏟아져 내리는 것 같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작품 중 주인공 라스콜리처럼 나는 거리
에 입을 맞추며 소리쳤다.
"나는 로봇 채플린이 아니다. 나는 인간이다. 나는 정말 인간이다."
첫댓글 와~ 정말 이글 쓰신분 잘하셨네요,, ^^* 어쨋든 수상하신거 축하 드립니다, ㅎ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