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 다녀왔다.
연재선생님은 회봉 증조부님의 스승님이다.
연재선생은 충남 회덕에서 송시열선생님의 9대손으로 태어나 민족지성으로 남은 분이다.
가학의 깊이 있는 학문을 기반으로 의리사상에 입각하여 위정척사사상을 종립하고 외세에 대한 사상적 무장에 적극 힘썼다.
특히 개항이후 무분별한 개화정책을 비판하며 20여차례의 상소를 통해 내수정비와 군사력배양의 부국강병책을 제안하였다.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조약파기와 을사 5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고 나아가 고종의 면담을 요구하자 강제로 선생을 1905년 12월 28일 대전으로 압송해버린다.
이에 일이 허망하게 됨을 안타까이 여긴 선생은 자결을 결심하였다.
제자들이 같이 자결할 것을 논의 하자 선생은
"우리가 이렇게 당하는 것은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너희들은 살아 남아서 향리에서 가르쳐라, 그것이 나를 위한 일이고 나라를 위하는 일이다."는 유지를 남기셨다고 전한다.
그렇게 제자들을 살려 보내고 연재선생님은 1905년 12월 30일 자결을 하신다.
그분이 바로세우고자 하였던 나라!
회봉은 선생의 장례를 치르고 내려오며 적상산 사고에 들러 배향하고 한말 술을 드시고서도 정신을 잃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에 회봉은 복내면 원봉마을 당신이 사시던 사랑채를 개방하여 <원봉서숙>이라는 서당을 열었다.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배우고 싶은 사람은 자기 먹을 것만 들고 와서 배워라"
회봉이 서당을 열자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학생들이 쪽잠을 잘 정도로 많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원봉서숙에서는 날마다 학생들의 글 읽는 소리로 밝았단다.
그런데 1920년 원봉 서숙 바로 앞에 국민학교를 세웠다. 학생들이 학교로 가지 않고 원봉서숙으로 들어가자 헌병들을 앞세워
학생들을 잡아 학교로 보내고 회봉에게는 서당 허가를 받으라는 명령이 내려 온다.
회봉은 그들을 피해 원봉서숙을 파하고 현재의 죽곡정사(전남지방문화재 279호)를 설립하여 문을 연다.
책을 구할 수 없는 형편을 알고 목판(전남지방문화재 330호)을 만들어 책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주며 공부할 수 있게 하였다.
<“오늘에 이르러 나라가 망하게 되고 백성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일제가 만일 기필코 제멋대로 무례하게 군다면 300개의 고을 안에 어찌 얼굴에 피 칠을 하고 닥치는 난을 막을 사람이 없겠습니까.”
- 송병선의 을사조약 파기 상소 중에서>
<특히 전북 임피 낙영당에서의 강회 때에는 화서학파의 거두이자 태인의병을 이끌었던 최익현(崔益鉉)이 참석하여 송병선의 영향력을 과시하기도 하였고, 이외에 임피향약(1891.4), 회덕향약(1905.5) 등 향약을 통해 지역사회의 결집을 주도하였다. 송병선은 1867년 옥천 이지당에서의 강회활동을 시작으로 1905년까지 충청지역은 물론 전라, 경상도 등지에서 유림들과의 접촉을 통해 위정척사운동의 여론 확산을 도모하면서 문인들을 규합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았다. 그 결과 송병선은 143명의 사우들과 1,100여 명의 문인들을 규합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전국규모의 문인분포는 송병선의 영향력이 일부 지역에만 국한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대개 유학자는 거주지 또는 출생지를 중심으로 문인들이 형성되었지만, 송병선의 경우에는 전국에 걸쳐 문인들이 다수 분포하는 현상을 보였다. 이처럼 그가 전국적으로 제자들을 양성하였던 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을 규합하여 일제의 침략에 대응할 수 있는 인력보급과 국권회복의 토대마련을 위한 준비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송병선은 전국 각지에서 정기연(鄭璣淵, 경산)․이병운(李柄運, 대구)․안규용(安圭容, 보성)․박병하(朴炳夏, 고부)․노종용(盧種龍, 광주)․조종덕(趙鍾悳, 순천)․장기홍(張基洪, 동복)·조용승(趙鏞昇, 풍천), 이학순(李學純)․이내수(李來修, 연산) 등의 항일투사들을 양성하였다. 이들은 송병선의 을사조약 파기운동에 참여하거나 자결 및 의병, 의열투쟁 등으로 일제에 항거하였다. 정기연과 이병운은 송병선의 을사조약 파기운동에 함께 참여하였고, 박병하는 자결·순국하였으며, 안규용․장기홍․노종용․조종덕은 후학을 양성하는데 주력하였고, 조용승은 대한광복회 황해도지부에 참여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외에 의병을 이끌었던 노응규(盧應奎), 3·1운동을 주도하였던 송홍(宋鴻) 등이 제자로 확인되며, 아우인 송병순(宋秉珣)을 비롯하여 이학순(李學純)․조장하(趙章夏) 등은 송병선과 교유하면서 그의 영향을 받아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자결하였다.
<신사봉사 8개조>
제1조 성학에 힘써 마음과 뜻을 바로잡을 것.
제2조 말이 들어오는 길을 열어 과실을 듣는 것.
제3조 세자를 보좌함으로써 나라의 근본을 굳건히 할 것.
제4조 상과 벌을 미덥게 하여 기강을 세울 것.
제5조 검소한 덕을 밝혀서 재용을 절약할 것.
제6조 벼슬자리를 중시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킬 것.
제7조 공물의 진상을 정지하여 일의 근본을 보존할 것.
제8조 왜국과의 화의를 배척하고 예수교를 단절할 것.
이상 8조목으로 이루어진 신사봉사를 통해 송병선은 국가의 기강확립과 민생안정으로 대내적 안정을 도모하고, 일제를 비롯한 외세를 철저히 배격하여 국권회복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884년 정부의 의복제도 변경에 송병선은 귀추를 기울이며 ‘기본질서인 의복제도가 변화된다면, 나라의 기본질서 또한 보장될 수 없다’고 하여, 갑신변복령(甲申變服令)을 유교질서의 붕괴로 여기면서 위정의 신념을 보다 강력히 표출하였다. 즉 외세의 영향으로 의복제도가 변화된다면, 나라의 기본질서와 국권 또한 보장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송병선의 끊임없는 노력은 그의 문인과 당대 지식인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고 여론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실례로 화서학파의 김평묵(金平黙)은 “송병선의 「신사봉사」가 윤리강상(倫理綱常)을 부지하게 하였고, 서양의 오랑캐들이 경각심을 갖게 하였다”라고 하면서 그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결국 송병선이 20여 차례 이상의 상소를 통해 추구하였던 것은 대대적인 국정운영 정비를 통한 내수강화와 외세로부터의 주권보호와 독립이었던 것이다.
2) 을사조약 파기운동
을사조약이 늑결(勒結)되자 송병선은 즉각 조약의 파기와 5적의 처단을 제기하였다. 그는 을사조약의 늑결로 종사(宗社)는 망하고 나라는 위급한 지경에 이르러 결국 노예의 지경에 빠질 것을 지적하면서, 조약의 파기 및 을사 5적의 처단을 통해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기울어져 가는 국가의 운명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또한 송병선은 일제의 위협 속에서 늑결된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이것으로 인해 일본에 예속될 것임을 통찰하면서, 이러한 위기의 책임이 내부의 간신배들과 이를 간파하지 못한 국왕에게 있음을 지적하였다. 나아가 비판에 머물지 않고 모든 국민들의 동참으로 국난을 극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을사조약을 파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우선 외교적 관계를 이용한 국제여론의 형성으로 조약의 무효화를 꾀하였다. 각국의 사신들에게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것임을 알리고자 하였으며, 또 조약의 체결이 나라의 공적인 행정절차에 의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여 여러 나라에 그 평가를 의뢰하고 조약을 무효화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송병선의 노력은 이미 일제에게 종속된 정치권에 더 이상 영향력을 끼칠 수 없었다. 이에 그는 국왕을 직접 만나 의지를 펼치고, 국권회복의 대명제를 천명하도록 설득시키고자 70세의 노구를 이끌고 서울로 향했다. 수십 차례 관직제수를 거부하면서 한 평생을 재야의 선비로 고민하고 행동하였던 그로서는 큰 결단이었다.
이때 함께 을사조약 파기운동에 참여하였던 인물로는 송병선의 제자 가운데 정기연․이병운 등이 있었다. 정기연은 송병선의 문인들이 스승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자정(自靖)하게 될 것을 염려하자, “한번 나아가 간(諫)하다가 죽는 자리인데 어찌 자정으로 자처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문인들의 동요를 막고, 송병선의 을사조약 파기 운동을 적극 지지하면서 동참하였다. 이병운은 스승의 을사조약 파기 운동에 동참하였다가, 그 후 송병선이 자결하자 망국의 한을 개탄하면서 고향인 대구에 채국정(採菊亭)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주력하였다.
이들과 함께 서울에 상경한 송병선은 드디어 국왕을 직접 대면한 자리에서 국망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대책으로서 10가지의 시책을 제시하였다.
첫째, 모든 적(賊)을 참(斬)하여 왕법을 바로잡을 것.
둘째, 현자(賢者)를 등용하여 각 부에 임용할 것.
셋째, 의(義)로써 각국 공사관에 변론할 것.
넷째, 기강을 세워 명분을 바로잡을 것.
다섯째, 어사를 파견하여 민정을 순찰할 것.
여섯째, 재정을 정비하여 국력을 배양할 것.
일곱째, 학문을 바로잡아 인재를 기를 것.
여덟째, 사설(邪說)을 금지하여 적당(賊黨)을 물리칠 것.
아홉째, 법률을 밝혀 사송(詞訟)을 정비할 것.
열번째, 군력을 배양하여 비상시에 대비할 것.
송병선은 당시의 긴박하고 처절했던 상황을 마지막 남긴 유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시골에 파묻혀 있는 신 송병선은 이제 목숨을 끊겠습니다. 삼가 북쪽을 향하여 피눈물을 흘리며 성상(聖上)께 영결을 고합니다. 신은 역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폐지하는 데 대한 일로써 상소문과 차자문(箚子文)을 올리고 처분을 기다린 지 며칠이 되었는데, 그간 여러 번 접견을 청하였으나 폐하의 몸이 편치 않다고 하기에 대궐문에서 명(命)을 기다렸습니다. 경무사 윤철규가 신에게 와서 권고하기를, ‘합문(閤門)에 들어가 엎드려 있자면 앓은 몸으로는 근력이 허락 치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더니 신의 몸을 억지로 부축하여 교자에 태웠습니다. 교자의 문이 내려지고 눈 깜짝할 사이에 성 밖에 당도하였는데 순검과 일본순사들이 황제의 지시로 보호한다는 핑계를 대고 신의 몸을 수색하고 갖은 욕을 보이더니 강제로 기차에 태워 곧장 신을 고향으로 쫓아버렸습니다. 그 당시에는 죽을래야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 자신이 모욕을 당한 것은 진실로 애석하지 않으나 조정에 치욕을 끼친 것은 어떠하며 산림(山林)들에게 끼친 부끄러움은 어떠하겠습니까?
12월 28일 대전으로 압송되어 온 다음날 송병선은 70세의 노구로 조국을 위하여, 후세를 위하여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고민하다가 끝내 유소(遺疏)를 써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상소이자 제자들에 대한 행동 지침이 되었다.
그리고 음독한 후, 후손과 제자들을 모아 ‘도(道)의 수호를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는 마지막 유지와 함께 다음날 숨을 거두었다. 이때 송병선이 의미하였던 ‘도’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이미 이 나라를 지탱하는 국민이요, 민족이요, 바로 조국인 것이었다.
1906년 2월 문충공(文忠公)이란 시호가 추서되었고,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그의 순절을 “산장순의(山丈殉義)”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송병선은 유문(儒門)의 숙덕(宿德)이오 사림의 영유(領袖)이다. 국권이 상실하자 통석해하여 상경하여서 임금을 청대하고 시사를 의론한 후 … 산림의 선비가 나라를 위하여 순의(殉義)하는 것은 가히 이르되 생(生)을 버리고 의(義)를 취하는 것이다.”
위 신문 1906년 2월 2일자 논설에서는 ‘송병선은 유림의 종장(宗匠)으로 국가의 사표가 된지 20여년이 되었다’라고 하여 그가 차지하였던 명망과 위치와 역할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호서지역의 유생 수백 명이 윤철규의 처벌을 격렬히 요구하였으며, 1917년 이관구(李觀求)는 황해도 유림의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하여 삼현묘(三賢廟) 건립을 추진하면서 최익현(崔益鉉)·유인석(柳麟錫)과 더불어 송병선(宋秉璿)을 3현 중 하나로 배향하기도 하는 등 송병선은 독립운동가들의 마음속의 인물로 자리 잡았다.
송병선은 죽음으로 삶을 끝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으로 승화한 독립운동가인 것이다. <인터넷 검색> >
어느 해이던가?
봉산조부님을 모시고 있던 우리 집에 최익현선생의 증손이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역사적인 사건들 속에서 그 분들이 행하였던 조국에 대한 사랑, 최익현선생이 누구시던가? 그 분의 종손은 봉산조부님을 왜 찾았을까? 연재선생의 기록을 찾으며 보니 이제 이해가 갔다.
그런 인연으로 회봉의 후손들은 해마다 제향일에는 대전을 방문하여 스승님의 정신을 기렸다.
그 동안에는 남편이 향교유림들과 함께 가더니 올해는 그분들이 연세 있고 이이 겹치는 바람에 혼자가게 되었단다.
마침 대전에 살고 있는 친구가 문충사 문화재돌봄으로 청소를 나가 있다는 문자가 왔다.
그러자 남편은 같이 갈까라며 은근히 동행을 바랬다.
몇 년전에 가져다 놓은 백송이 궁금하기도 하여 동행하기로 했다.
친구도 남편과 동행하여 나왔다.
그렇게 우리는 문충사를 배경으로 또 만났다.
그러고 보니 친구와는 사진 한장도 같이 찍지 못하고 아쉽게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