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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9. 29. 소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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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묵상하는 삶의 토양
2. 묵상하는 삶의 열매
출처 : 『묵상하는 삶』 켄 가이어 / 두란노 2021년 개정 37쇄
1. 묵상하는 삶의 토양
출처 : 『묵상하는 삶』 켄 가이어 / 두란노 2021년 개정 37쇄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배울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뿌리는 자가 아무리 훌륭하고 씨가 아무리 좋아도 작황을 결정짓는 것은 토양의 상태라는 것이다(마 13:1-23). 비유에 나타난 것처럼 씨는 딱딱하게 굳어진 영혼에 떨어질 수 있다. 너무 급해 걸음을 멈추고 씨앗이 가져다 줄 모든 것을 묵상할 여유가 없다.
씨는 깨달음이 얕은 영혼에 떨어질 수 있다. 불가피한 땡볕의 힘든 시기를 견뎌 낼 만큼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한다. 씨는 지나치게 산만한 영혼에 떨어질 수 있다. 처음에는 해로울 것이 없어 보이지만 종래에는 숨이 막혀 자라지 못한다. 그러나 씨가 준비된 영혼에 떨어지면 수확이 있다. 30배, 60배, 때로 100배까지.
인생이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창고가 가득하고 뒤주가 흘러 넘쳐 '우리' 식구는 물론 남은 것으로 남들까지 거둘 수 있는 풍요. 정말 '놀라운' 삶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가능케 하는 토양은 좀 다를 것이다.
그런 수확을 내려면 땅을 갈아야 하고, 흙덩어리를 부수어야 하고, 성장을 저해하는 숨은 돌멩이를 하나하나 제거해야 하며, 양분을 빼앗는 잡초를 일일이 뽑아 내야 한다. 과실에 필요한 무기물을 공급하려면 토양 내부와 주변의 어떤 것들은 목숨을 바쳐야 한다. 나뭇잎, 잔가지, 나무 껍질, 저마다 제때 제 방식대로 찢기어 땅에 떨어져야 한다. 죽어 퇴비가 되어야 한다. 지나가는 동물들이 남긴 거름과 섞여야 한다. 습기와 곰팡이에 썩어야 한다. 벌레에 덮여야 한다. 세균에게 먹혀야 한다. 지렁이에게 느릿느릿 파여야 한다.
누구나 풍성한 삶을 원한다. 하지만 그 삶을 위해 '이런' 과정을 거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토양을 비옥케 하는 분해된 유기물을 '부식토'라고 한다. ‘겸손’이라는 말도 그것과 상관이 있다. 겸손이란 ‘낮아진다’는 뜻이다. 이는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과정이다. 그분은 우리를 낮추신다. 직접 밑바닥에 데려다 놓으실 때도 있다.
공자는 겸손이란 모든 덕목의 기초라 했다. '심령이 가난한 자'를 산상수훈 목록 중에서 맨 앞에 두신 예수님의 말씀도 본질상 같은 뜻이다. 유대인 청중들의 마음에 그 문구는 누군가 버림받은 절망적인 사람의 모습을 떠오르게 했을 것이다.
그런 처지란 과연 어떤 것일까? 거리의 뜨네기와 같을 것이다. 다음 끼니가 어디서 생길지 모르는 것이다. 오늘 밤 잘 곳이 어디며 그 곳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심한 거부와 슬픔과 배고픔과 고통말고도 또 어떤 것이 닥칠지 모르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그런 삶을 원하겠는가? 나는 아니다.
나는 머리 위에 지붕을 원한다. 30년 간 보증되고 집주인이 법적으로 책임지는 집. 또 외부와 차단시켜 주는 문을 원한다. 문에 자물쇠, 자물쇠에 보조 열쇠, 보조 열쇠에 안전 장치까지. 하나님과의 관계도 위험 없는 것을 원한다. 부부 관계도 신앙의 기적을 원하지 매일 노력해야 하는 것은 싫다. 신앙도 간단한 요약집을 원하지 장편 소설은 원하지 않는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 누군들 찐빵의 앙꼬를 핥고 싶지 않으랴? 누군들 딱딱한 부분을 잘라 낸 샌드위치를 원하지 않으랴? 누군들 기독교의 모든 달콤하고 부드러운 면을 바라지 않으랴. 사랑, 기쁨, 평안. 뉘라서 슬픔의 사람, 질고를 아는 자가 되고 싶으랴.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기나 하는 것일까? 없어지지 않는 고통을 안고 산다는 것. 어디를 가든 마음에 상처를 품고 산다는 것. 슬픔에 싸인다는 것. 일자리도, 일자리에 필요한 기술도 그 기술을 가르쳐 줄 사람도 없다는 것. 은행이나 침대 밑이나 어디든 돈 한푼 없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알까? 재산이 없다는 것, 담보 잡힐 것이 없다는 것, 구걸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알까? 부탁도 아니고, 빌리는 것도 아니다. 구걸이다.
1) 낮고 연약한 자
예수님 당시의 거지는 거리를 장식하던 인간 사회의 미결 부분이었다. 저는 자, 눈먼 자, 정신 이상자. 이들은 쓰레기 더미처럼 모퉁이에 내버려진 나사로들이었다. 후회만 남은 더러운 걸레 신세로 망가진 과거에 눈물을 짜던 마리아들이었다. 주님의 발을 씻을 그 눈물을. 바로 그들이 예수께서 당신의 가장 유명한 설교인 산상수훈을 들려주신 사람들이다.
마태는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사 가르치기 시작하셨다고 말한다(마 5:1-2). 이 무리는 어디서 온 것일까? 조금만 위로 올라가 4장 끝절을 보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마 4:25).
그렇다면 이들 무리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몇 절만 더 위로 올라가 보라.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마 4:23-24).
설교를 들으려고 맨 앞줄을 채웠던 자들은 예수님이 고쳐 주시고 구해 주신 자들이었다. 문둥병자, 귀신들린 자, 간질에 걸린 자, 감히 회당의 문을 더럽힐 수 없던 자, 버림받은 자, 부정한 자, 밑바닥 인생, 강도 만난 자, 건강을 빼앗긴 자, 자존감을 노락당한 자, 죽도록 두들겨 맞고 길가에 버려진 자. '이들'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었다. 일용할 양식을 얻으려면 구걸하는 길밖에 없음을 깨닫는 지경까지 가난해진 사람들. 그래서 그들은 하늘로 깡통을 쳐들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한 일이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에게 이 생수를 주소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들은 위쪽말고는 더 바라볼 데가 없을 정도로 밑바닥까지 철저히 낮아졌다. 우리도 그렇게 텅 빈손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구걸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향해 내밀 때, 하늘은 우리에게 주님과 더불어 먹고 주님이 우리와 더불어 먹는 은혜를 내릴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바로 그런 사람들, 낮아져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한다(약 4:6).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겸손케 하는 일들은 장기적으로 볼 때 유익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길을 닦아 주기 때문이다.
2) 높고 강한 자
야고보는 똑같은 구절에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고 말한다. 교만한 자는 은혜의 분배에서 단순히 간과되는 것이 아니다. 물리침을 당한다. 그것도 아무한테나 당하는 물리침이 아니다. 하나님한테 당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신 분과 싸우는 인생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겠나 생각해 보라.
이제 이것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가장 대적하시는 교만은 종교적 교만이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율법학자들을 잠시 생각해 보라. 그들의 교만을 생각해 보라. 진리의 수호자라는 교만, 하나님의 언약의 소유자라는 교만. 기준을 붙들고 버티어 선, 백성의 기둥이라는 교만, 순종과 충성과 선행에 대한 교만, 성전에서 기도하던 바리새인을 기억하는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12).
이번에는 같은 장소에서 드려지던 다른 기도를 들어 보라.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인생이 어디가 어떻게 무너졌길래 감히 우러러볼 수도 없을 만큼 낮아진 것일까. 사연이야 어찌됐든 거기서 비롯된 겸손이 주님의 인정을 받는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8:14).
야고보는 말한다.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겸손하게) 받으라"(약 1:21). 역순(영어 원문)으로 생각해 보라.
영혼의 구원.
마음에 심긴 도(道).
그 도(道)를 받음.
겸손.
맨 밑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 겸손이다. 토양의 수용력을 준비시키는 것이 겸손이다. 마음에 심긴 말씀을 간절히 붙들게 하기 위함이다. 토양과 씨앗이 만나면 발아 과정이 시작된다. 영혼이 말씀을 받아들여 어두운 땅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할 때, 말씀은 거기 있는 것을 취하여 변화시키되 생명을 줄 뿐 아니라 열매까지 맺게 한다. 잠깐 멈추고 생각해 보라. 우리 영혼의 행복, 단순히 일상의 행복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이 우리 마음의 겸손에 의존하고 있다.
기막힌 일이요. 심지어 두렵기까지 한 일이다. 토양에 그런 힘이 있다니. 하늘의 말씀이 인간의 마음의 처분에 달려 있다니, 받아들일 것인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지, 뿌리에 양분을 줄 것인지 주려 죽게 할 것인지, 잘 자라게 키울 것인지 말라죽게 할 것인지, 천국의 추수가 이 땅의 수용에 달려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겸손의 한 그림이다.
교만한 자는 그 그림을 보지 못한다. 하늘에서 뭔가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 된 것이다. 일례로 바리새인 시몬을 보라(눅 7:36-50). 주님 발 앞에서 울고 있는 창녀를 그는 점잖게 가슴에 팔짱을 낀 채 콧등 너머로 내려다보았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예수님은 그 생각을 가로막으셨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은 대답했다.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네 판단이 옳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뒤 시몬의 시선을 방금 그가 그릇 판단한 여자에게로 돌리셨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내 생각에, 우리는 대부분 진심으로 겸손을 원한다. 그러나 겸손을 얻기 위해 굴욕당할 각오가 되어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이 여자를 은혜 받는 자리에 있게 한 것은 바로 도덕적 실패의 굴욕이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우리가 그 말씀을 듣는 곳은 예수님의 발 아랫니다. 겸손이 우리를 그 곳에 데려다 준다.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도 겸손이다. 겸손은 말씀을 우리 마음의 옥토에 놓아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결실을 맺게 하는 것이다. 그 추수가 얼마나 풍성한 것이며 평생 다른 이들의 삶 속에 또 얼마나 많은 추수의 씨앗을 뿌릴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2. 묵상하는 삶의 열매
출처 : 『묵상하는 삶』 켄 가이어 / 두란노 2021년 개정 37쇄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라디아서 5:22-23)
우리 마음에 심긴 씨앗이 진정 하늘에서 온 씨앗이며 성령에 의해 발아되었다면 언젠가 열매 볼 것을 기대해도 좋다. 그 열매의 모양은 사랑을, 그 냄새는 희락을, 그 감촉은 화평을, 그 맛은 인내를 빼닮은 것이라야 한다. 묵상하는 삶의 열매는 변화된 삶이라야 한다. 변화는 우리의 존재뿐 아니라 삶의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쳐야 한다. 영혼에서 스케줄로 가지를 뻗으며,
열매 맺는 스케줄은 반드시 분주한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사람들을 사랑하려면 만사. 만인이 다 내가 사랑할 몫인 양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야 하는가?” 토마스 켈리가 <헌신의 약속>이란 책에서 묻는 말이다. 이어 그는 말한다.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무수한 사랑의 대상을 한 묶음씩 분배해 우리 각인의 몫으로 나누어 주신다.
그분은 절대로 우리를 정신없이 헐떡거려야 하는 감당 못할 일더미 속으로 인도하시지 않는다. 세상에서 일하시는 분은 결국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그분의 인내가 곧 우리의 인내가 되어야 한다. 우리 혼자 일하는 것이 아니다. 미친 듯 끝마쳐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삶은 서두르지 않는 평안과 능력의 삶이다. 단순한 삶이다. 침착한 삶이다. …. 미친 듯 서두를 필요가 없다. 그분이 키를 잡고 조종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작은 하루가 끝날 때마다 우리는 편안히 자리에 누울 수 있다. 모든 것이 잘되고 있기에.”
1) 우리 아버지의 마음
토마스 켈리가 글로 쓴 것을 시편 131편은 그림으로 보여 준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1-2절).
이 그림은 내 애틋한 추억 하나를 떠오르게 한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퇴근하시면 으레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으신 후 신문을 읽곤 하셨다. '진짜' 읽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면도, 스포츠면도, 경제면도, 심지어 항목별 광고면까지. 아버지가 앞에 신문을 펼쳐 들고 계시는 동안 나는 아버지가 꼬고 앉으신 다리 밑 공간을 기어서 왔다갔다하곤 했다.
다리를 더 바짝 꼬아 공간이 좁아지면 아버지 발 위에 앉아 다리를 붙잡고 말타기 놀이를 했다. 그래도 아직 신문을 다 읽지 않으셨으면 이번에는 옆으로 기어올라가 아버지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앉았다. 어떤 때는 신문의 글자나 그림을 쳐다보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냥 눈감고 쉬기도 했다. 자주 거기 그렇게 앉아 아버지의 넓은 가슴에 귀를 대고 아버지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듣던 일이 기억난다. 그렇게 쉬면서 나는 호흡조차 아버지를 따라하려 했다. 아버지가 들이쉴 때 나도 들이쉬고 아버지가 내쉴 때 나도 내쉬는 것이다. 가슴이 작은 어린아이로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끝까지 따라하려 했다. 뭐라고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따라 하면 기분이 정말 좋았다.
버드(Byrd) 장군의 일기에 비슷한 느낌이 기록되어 있다. 1934년 겨울, 남극을 탐험할 때였다. 4월 14일. “동작을 멈추고 침묵에 귀기울였다. …. 낮이 스러지고 밤이 태어나고 있었다. 놀라운 평화와 함께. 헤아릴 수 없는 우주의 흐름과 힘이 있었다. 소리 없는 조화 속에, 조화, 바로 그것이었다! 침묵에서 나온 것은 바로 조화였다. 부드러운 리듬, 완벽한 현(絃)의 긴장, 천체의 음악이라 할까. 그 리듬을 따라잡는 것만으로 족했다. 순간 순간 나 자신 그 리듬의 일부가 되면서. 그 순간 인간과 우주의 합일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서 아버지의 호흡에 리듬을 맞춰 숨쉬던 내 기분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아버지와 하나가 된 느낌. 시원한 저녁나절 아버지와 함께 가로등이 켜진 동네 거리를 걸을 때도 매번 똑같이 하나 된 느낌을 느꼈다. 그때도 나는 아버지의 걸음 폭을 그대로 흉내내려 했다. 간신히 보폭을 따라잡아 아버지의 발자국을 그대로 밟으며 걸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이유는 잘 모른다. 시간을 보내려는 어린아이 장난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보도 블록 숫자를 세는 것처럼. 하지만 뭔가 그 이상의 것이 있었을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이런 글을 남겼다. “동료들과 보조를 맞추어 걷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듣고 있는 북소리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박자가 어떻든, 아무리 멀리서 들리든 사람은 누구나 자기한테 들리는 음악에 걸음을 맞춰야 한다.”
음악과 리듬을 맞추면 왠지 모자란 부분이 채워진 듯 기분이 좋고, 나보다 큰 뭔가와 이어진 듯한 느낌이 든다. 어린 내가 아버지 발자국을 따라가며 느낀 기분도 바로 그랬을 것이다.
무엇을 하든 우리는 리듬에 맞춰 한다. 음악적으로 하는 것이다. 걸을 때도 보조라는 것이 있다. 춤추는 동작에도 음악이 있다. 공을 던질 때도 리듬이 있다. 먼저 몸을 뒤로 젖힌 다음 공을 던지고 나면 몸이 앞으로 기우는 식이다. 야구 선수가 공을 던지든 발레리나가 춤을 추든 관리인이 청소를 하든, 그 무엇이든 제대로 하는 사람은 일정한 리듬에 맞춰서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협화음의 정도가 높아지고 그와 더불어 실패할 확률도 높아진다. 발레리나가 아무리 우아하게 공중으로 날아올라도 내려오는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면 바닥에 얼굴을 처박을 수 있다. 농부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파종기를 잘 맞추어도 수확할 때를 놓치면 소용없다. 밭에 늦게 나가면 작물을 버리고 만다. 우리도 하나님이 정하신 순리대로 우주와 조화를 이루며 살기 원한다면 이런 우주의 리듬에 반응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우주에 작용하는 리듬은 그것 말고 또 있다. 가장 강력한 리듬인 사랑의 리듬이 하나님의 심장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 울려 퍼지지 않는 한 무슨 일을 하든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신세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인간 마음의 과제란 그 음악을 듣고 그 리듬에 맞추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노먼 매클린(Norman Maclean)은 자전적 소설 A River Runs Through It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스코틀랜드인이요, 장로교 목사인 그의 아버지에 대해서 말하였는데, 그의 아버지는 인간이란 최초의 은혜의 상태에서 타락한 본성상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리듬을 찾음으로써만 힘과 아름다움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다윗 왕의 삶은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녀의 남편을 살해하면서부터 완전 엉망이 되었다. 한때 음악을 지어 사울의 괴로운 영혼을 안위하던 다윗이 불협화음의 삶에 빠진 것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이는 하나님의 리듬에 맞는 삶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부르짖음이었다.
2) 우리 아버지의 뜻
예수님은 그 음악을 듣고 그 리듬에 맞추어 사셨다. 생의 시작부터 죽음까지, 그분은 언제나 아버지와 보조를 맞추어 걸으셨다. 한걸음 한걸음 같은 보폭으로, 복음서의 예수님을 따라가
보면 그 보폭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몇 장만 그분을 좇아가 보라. 4장의 사마리아 여자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은 수가 성 변두리의 한 우물에서 여자를 만나셨고 그 여자로 인하여 많은 동네 사람들이 신자가 되었다. 다음 장에서 예수님은 베데스다라는 못에 가셨다. 윗부분에 장식이 달린 다섯 개의 기둥이 있고, 그 주위로 온갖 부류의 병자들이 모여 있는 아주 널따란 곳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38년 동안 병을 앓던 사람 딱 한 명만 고쳐 주셨다.
4장에서는 예수님으로 인해 많은 무리의 삶이 변화되었다. 다음 장에서는 한 명뿐이다. 이유는? 사마리아에서는 아버지께서 아주 큰일을 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베데스다에서는 아버지께서 아주 작은 일을 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성공관은 숫자, 업적, 인간의 기준 도달 따위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분의 성공관은 단순히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들으신 북소리는 달랐다는 것이다. 박자가 어떻든, 아무리 멀리서 들리든, 그분은 당신께 들려 오는 음악에 걸음을 맞추셨다. 그것은 남의 성공행 발자국을 따라서는 살 수 없는 삶이다. 아버지의 발자국을 따를 때에만 가능한 삶이다.
예수님이 베데스다 못에서 불구자를 고치신 사건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날은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그 치유가 노동의 요건에 해당되며 따라서 자신들의 종교법을 어긴 것이라 보았다. 이렇게 비난하는 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반응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예수님의 삶의 발걸음은 아버지의 발걸음과 보조를 맞추었다. 자연히 동료들의 걸음과는 맞지 않았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절대 그 이하가 아니다. 오리를 가게 하는 자와 십 리를 동행하라는 말씀은 곧 세상의 보조를 벗어나 멀리 하늘에서 들려 오는 북소리에 걸음을 맞추라는 뜻이다. 오른쪽 뺨을 치는 자에게 왼쪽 뺨도 돌려 대고, 송사를 당했을 때 겉옷까지 주라는 말씀은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을 아버지의 심장에서 고동쳐 나오는 영원한 리듬에 맞추어 살게 하시고자 함이다.
예수님이 시종일관 분명히 들으셨던 음악이 간혹 우리에게도 조금씩 들려 올 때가 있다. 어떻게? 성령님이 마치 잘 조율된 악기의 현(絃)처럼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그 악기에서 음악이 울려 나온다. 가사와 곡이 같이 흘러 나올 때도 있다. 때로는 곡만 들릴 때도 있지만, 우리 안의 성령님은 그것을 감지하신다. 그리고 말의 힘을 뛰어넘는 확신을 심어 주신다.
3) 우리 아버지의 부르심
C. S. 루이스는 이 음악의 찰나적 특성을 이렇게 포착했다. “한때 우리의 영혼을 깊이 소유한 모든 것들도 그것에 비하면 기껏해야 힌트 - 감질나는 눈요기, 제대로 지켜진 적이 없는 약속, 귀에 잡히는가 싶게 사라져 버린 메아리 - 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정말 제대로 오기만 하면 사라지지 않고 커져 마침내 소리 자체가 되는 메아리가 언제고 오지만 하면-누구나 대번 알아볼 수 있다. 그때는 전혀 의심 없이 고백하게 된다. 나는 바로 이것을 위해 지음받은 존재이다.”
젖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같이 안연한 마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아버지와의 연합은 물론 우리 삶에 대한 그분의 뜻까지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느꼈다. 그러나 그 확신은 오랜 세월의 묵상 후에야 온 것이다.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이 나에게 주는 숨은 뜻을 찾고자 벌써부더 부단히 노력해 왔다. 그 답을 이제야 찾았다. 이제 외적인 행복뿐 아니라 내면의 행복을 찾은 것이다. 내 앞날을 위해 계획된 활동의 특성은 아직 내게 분명치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직접 사람을 섬기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혀 드러나지 않는 지역이라도 상관없다.”
슈바이처는 자신이 유럽의 학계를 떠나 아프리카 야생의 정글로 가야 한다는 것을 오랜 기도와 묵상 끝에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것이 부르심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제 목숨을 잃는 것이 하나님이 그에게 원하신 것이었다. 아프리카가 하나님이 원하신, 그의 목숨을 잃을 장소였다. 거기서 그는 드러나지 않는 사랑으로 섬겼다. 그의 삶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자라날 공간이 주어질 때 맺힐 수 있는 열매의 모본이 되었다.
자신의 은사와 부르심, 자신이 지음받은 목적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 효율적으로 섬길 수 있다. 낭비하는 활동이 그만큼 적기 때문이다. 사랑, 희락, 화평은 열매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은 아버지의 품에 기대어 쉴 때 오는 것이다.
희락은 아버지의 심장의 리듬을 잡을 때 오는 것이다.
화평은 그 리듬에 맞추어 살 때 오는 것이다.
바로 그 친밀하고 따뜻한 관계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지금 하나님이 뜻하신 바대로 인생을 살고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이 어머니의 삶인지 성인(聖人)의 삶인지 하나님만 아신다. 그러나 그분의 무릎에 기어올라 그 가슴에 머리를 누이고 귀기울일 때 … 그분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