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학입문 하권
발문 1
모든 수행은 육바라밀을 벗어나지 않으니, 선문禪門은 이 여섯 가지 중 하나의 문일 뿐이다.
삼지三止ㆍ 삼관三觀을 핵심 종지로 삼는 것은 천태선天台禪이요,
문자를 내세우지 않고 직지인심直指人心ㆍ견성성불見性成佛을 경전의 가르침 밖 종지로 삼는 것은 달마선達磨禪이라 한다.
무릇 설산 높은 곳에 있는 근원의 샘을 살핀다면 어찌 두 가지라 하겠는가. 하지만 나날이 아래로 흐르다 보면 성난 물결로 또 고요한 못으로 갈래가 나뉘고 달라지기도 한다.
저 후대의 학자들이 뿔뿔이 갈라진 것을 당연하다 한다면, 심지어 서로 질시하면서 창을 들기에 이른다 한들 어찌 괴이하다 하겠는가.
그러니 그 문을 얻으면 천태와 달마가 똑같이 한 시대의 바른 종사로서 봄 난초와 가을 국화처럼 제각기 그윽한 향기를 풍길 것이요,
그 길을 잃어버리면 천태도 달마도 집안을 망치는 머리 깎은 도적을 면치 못해 성안의 여우나 사당의 쥐처럼 보기만 해도 미울 것이다.
그렇다면 소위 선禪이라는 것은 과연 문과 길이 있는 것일까? 있다면 “학이 둥지를 튼 소나무가 가장 늙고, 독룡이 서린 자리가 유독 맑다.”고 하겠다.
아니면 과연 문과 길이 없는 것일까? 없다면 “유월에 눈이 내려도 무방하고, 쇠로 된 나무에서도 꽃이 핀다.”고 하겠다.
저 달마 문하에 이를 것 같으면 허황된 ‘할’과 장님의 ‘방’이 어찌 그리도 많은가? 어리석음을 익히는 것이 가풍이 되어 이른바 미치광이나 백치가 엄숙한 표정에 눈을 부릅뜨고서 불자를 세우고는 큰 선지식이라고들 하고 있으니, 도리어 천태 문하만 못하다.
문자로 뜻을 온전히 표현하고 뜻으로 이치를 밝혀 오히려 뜻과 이치를 잃지 않으니, 선을 닦는 제자들에게는 (천태선이) 훨씬 낫다는 것을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천태선의 방편은 말세의 학인들을 굽어살펴 간곡하게 난관을 뚫어 주고 있으니, 하류의 학인들을 완전히 매몰시키는 달마선보다 뛰어난 점이 하늘과 땅 차이다.
우리 동방에서는 신라 중엽에 고승 법융法融ㆍ이응理應ㆍ순영純英이 석장을 나란히 하고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함께 천태 대사의 3세인 좌계 동양左谿東陽 대사의 묘법을 얻었고, 그 꽃과 향으로 우리 근역槿域의 창생들에게 공양한 세월이 무려 수백 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한양에 도읍을 정한 후로는 꽃도 시들고 향기도 사라져 사방을 둘러봐도 텅 빈 산뿐이니, 그 누가 좇아 치자꽃 향기를 맡을 수 있겠는가.
청신사 김병룡金秉龍은 선학을 매우 좋아하였지만 그 들어가는 문이 없음을 심히 개탄하였었다. 그러던 중 월창月窓 거사가 요점을 편찬한 『선학입문』을 얻고는 보시용으로 간행하여 세상에 널리 유포하고자 하였다.
하루는 나에게 발문을 써 달라고 부탁하기에 내 비록 글재주는 없지만 천태선학이 오늘날 되살아난 것이 너무도 기뻐 굳이 사양치 않았다. 그러나 두 선(二禪)의 득실만 서술했을 뿐이니, 그 입문의 차례가 본래의 서문에 다 실려 있어 어쩔 수 없이 생략하였다.
무오년(1918) 오월(榴花月) 상순(上浣)에 우산㝢山 사문沙門 정호鼎鎬 삼가 쓰다.
후기
선에는 두 종이 있으니, 천태와 달마이다. 달마선達磨禪은 마음이 곧 부처라는 종지를 가리켜 상근기의 돈오를 인가한다.
따라서 이름과 형상을 쓸어 없애고 자취를 남기지 않으니, 진실로 그런 사람이 아니면 계합하기가 어렵다.
천태선天台禪은 불성에 악이 갖춰져 있다는 의리를 세워 중생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문을 열고 길을 넓혀 그 방향을 정해 주니, 인식능력만 있다면 반드시 귀결처를 알 수 있다.
이로써 살펴본다면 달마선의 종지는 준엄하다 할 수 있고 천태선의 의리는 원만하다 할 수 있으니, 불법을 천명함에 있어 어느 하나를 빠뜨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세간에서 달마선을 위주로 하는 자는 형상에 집착한다며 천태를 배척하고, 천태선을 위주로 하는 자는 악법을 모른다며 달마를 배척해 양쪽 종도가 서로 다툼을 그치지 않았고,
결국은 모두 본래의 종지와 본래의 의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그리하여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참된 불자가 있다는 소리를 다시는 들을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옳은 일이라 하겠는가.
무릇 선이니 악이니 하는 것은 큰 깨달음 가운데서 허망하게 생긴 분별이요, 언설만 있을 뿐 본래 공적한 것이니, 이를 집착해 불성이라 여겨서도 안 되고 이를 집착해 불성이 아니라고 여겨서도 안 된다.
만약 불성이라 여긴다면 이는 중생으로 하여금 허망을 오인해 진실이라 여기게 하는 것이니, 끝내 본래의 면목을 알지 못한 채 미혹에 빠질 것이다.
만일 불성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이는 중생으로 하여금 허망을 버리고 진실을 구하게 하는 것이니, 부처는 분별이 없는 자라 하며 수행하지 않을 게 분명하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모두 부처의 종자를 단절시키고 소멸시킬 우려가 있다. 그래서 달마는 마음이 곧 부처라는 종지를 가리켜 진실은 허망이 아님을 드러내고,
천태는 불성에 악이 갖춰져 있다는 의리를 세워 허망이 곧 진실임을 밝혔던 것이다. 과연 그 종도들이 이것을 본다면 어찌 용렬하게 싸움을 일삼겠는가.
천태에서 수행하는 방편은 지관止觀으로 종을 삼고 호흡(息)과 색色으로 문을 삼으니, 사선ㆍ팔정이 그 안에 포섭된다. 이는 임시로 마음을 조절하는 것이지, 이것으로 궁극의 법칙을 삼는 것은 아니다. 깊이 연구한 자는 그렇다는 것을 충분히 알 것이다.
달마는 벽관壁觀으로 마음을 편안히 하는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쳤으니, 그 의도가 천태와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달마도 적임자가 없을 땐 자신의 뜻을 오로지 주장하지 않고 병에 따라 치료하는 약을 사용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니 지금의 학자들은 어느 종인지 따질 필요 없이 그저 양종의 근본 바탕을 궁구해 도달해야 옳다.
월창 거사가 찬술한 이 『선학입문』은 천태 대사의 『선바라밀』을 요약하여 초학자들의 지침서로 만든 것이다.
김병룡 군이 이 책을 보고서 기뻐하고는 자타에게 모두 이롭게 하고자 인쇄하고 장차 이를 배포하려고 하면서 나 역시 함께 기뻐해 줄 사람이라 여겨 굳이 한마디 해 달라고 청하였다. 내가 이를 사양할 수 없어 외람됨을 잊고 일찍이 스승들에게 들었던 것을 책 끝머리에 적는다.
무오년(1918) 오월(榴月) 하순(下浣)에 학인 오철호吳徹浩 삼가 쓰다.
발문 2
옛 사람 가운데 한 마디 반 구절만 듣고도 몰록 초월한 상근기가 있었던 것은 대개 숙세의 연이 촉발시킨 것이다. 이제 계산桂山에 우거하던 김병룡 군이 월창 거사가 간추린 천태선의 종지를 얻고는 마음에 깊이 계합하여 여러 인쇄인들에게 부탁해 세상에 널리 배포함으로써 바다를 건너는 자비의 배로 삼으니 참으로 큰 지혜라 하겠다.
그 옛날 양자운楊子雲이 『태현경太玄經』과 『법언法言』을 기초하여 천년 뒤의 자운을 기다렸듯이 병룡秉龍이 바로 천년 뒤의 자운이라, 월창月窓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사람을 만난 게 아니겠는가.
이 책을 보는 이가 병룡의 마음으로 자기 마음을 삼는다면 그도 장차 차례로 똑같이 한량없는 삼매에 들리라. 나는 선지禪旨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병룡의 마음은 알 듯하다. 그저 선문에 이름을 올린다는 기쁨에 이렇게 한마디 적는다.
무오년(1918) 오월(中夏)에 최남선崔南善 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