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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전쟁의 그늘 덮인 동작촌
흑석동(黑石洞)은 용산(龍山)에서 노들섬을 뚫고 노량진(鷺梁津)으로 나가는 한강대교와 이촌동(移村洞*二村洞)에서
반포동(盤浦洞)을 잇는 동작대교 사이 중앙대학교를 품고 있는 분지(盆地)와도 같은 마을이다.
이곳에서 나는 돌 빛깔이 검정이어서 마을 이름을 검은돌이라 불렀다.
검은돌에서 비개고개를 넘어가면 곧장 동작동(銅雀洞)인데 이곳에 동재기나루라 부르던 동작진(銅雀津)이 있고 배물
다리라 부르던 이수교(梨水橋)가 나온다.
동재기나루는 한양에서 과천, 수원을 잇는 포구(浦口)로 조선시대 때 병선(兵船) 6척을 배치하여 치안 질서를 유지할
만큼 번화한 시장을 이루었다.
화가 장시흥(張始興 1730무렵-1789이후)의 작품 <동작촌(銅雀村)>은 바로 그 곳을 멋지게 묘사한 그림이다.
오늘도 한강은 여전히 흐르고 또 흑석동, 동작동 그대로지만 저 모습 찿을 길 없다.
기껏 40년전인 1967년 12월 서울시장 김현옥(金玄玉 1926-1977)이 시작한 한강종합개발이 그 풍경 지워버렸다.
그래도 이촌동 강건너 흑석동 쪽 바라보면 제법 높은 절벽 있어 짐작할뿐 그저 그림 속 가만히 살펴 보는데 두 개의
솟구친 검은 바위를 화폭 아래 한쪽으로 치우쳐 세워놓은 것이 기묘하다.
벌어진 틈 사이 계단 길 내놓고서 양쪽으로 반듯한 기와 집 쌓아 올렸으니 가파른데도 아늑하다.
이런게 바로 그릇 안쪽 분지렸다. 그대로 두면 휑할 뻔 했는데 화가의 감각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저 멀리 졸고 있는 소와 같다 하여 이름지은 우면산(牛眠山)을 뚜껑처럼 덮어 놓았던 게다.
아마도 여기서 그쳤다면 답답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화가는 세 척과 여덟 척으로 나눠 모두 열 두 척 돛배를 강
아래 옹기종기 늘어두었으니 땅과 물 사이 숨길 터놓았다.
동작나루는 경강상인(京江商人)이 드나들던 포구의 하나였다.
이곳에서 한양 상권을 나눠쥐었던 칠패(七牌) 상인과 거래를 텄는데 대개 18세기 전반 어느 무렵이었다.
<<각전기사(各廛記事)>> 1746년 11월자에는 남대문 밖 칠패에서 허가받지 않은 시장[亂廛]을 설치하고 조금도 거리
낌 없이 거래한다 하였는데 이 때 칠패상인이 수입하는 물품 절반이 모두 동작진에서 나온다 하였다.
거대 도시 한양을 나와 나루터의 번화함을 누비던 화가 장시흥은 번영의 주인인 경강상인은 물론 거대한 사상도고
(私商都賈)의 성장을 목격했고 누군가 이곳 동작진을 그려달라하자 겁 없이 치솟아 오르는 상인들의 기세를 두 갈래
절벽같은 검은돌에 아로새겼음이 분명하다.
18세기 중엽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 장시흥은 그 출신과 행장을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국가 기록화 사업인 의궤(儀軌) 제작 업무에 숱하게 참여했음을 알 수 있을 뿐인데 다만 17세기 장자성(張子晟 1664-)
으로부터 비롯하는 화원명가 인동장씨(仁同張氏) 가문 출신이 아닐까 싶지만 이것도 막연한 짐작일 뿐이다.
또 뒷날 연구자 들은 장시흥이 정선(鄭敾 1676-1759)이나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화풍을 되풀이 하고 있어서
주목할만한 화가가 아니라고 낮춰보고 있지만 기껏 열 점 밖에 남지 않았고 또 명가 중심의 관점으로 헤아리는 판단일
뿐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그림은 모두 도성 명승지를 그린 것으로 당대 세가(勢家)의 주문에 따른 제작이었을 터이다.
하지만 어찌 화가의 눈길과 감흥을 감출 수 있겠는가. 화폭에 쓴 대로 그 아호(雅號)가 방호자(方壺子)라, 네모진 항아리
란 뜻인데 이처럼 기이하여 알 수 없는 말을 제 것으로 삼는 인물이라면 특별한 세계 갖춘 이였을 게다.
중앙대 앞 한강가엔 1954년 김석원(金錫源) 장군이 사재를 털고 국방부, 학도호국단의 협력을 얻어 학도의용병(學徒義
勇兵)과 육탄십용사(肉彈十勇士) 현충비(顯忠碑)를 세웠다. 전쟁의 그늘이 검은돌의 위용을 덮었던 것인데 이 때 검은돌
옆마을 동작촌에서도 국립묘지 현충원(顯忠園)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 이십년 뒤인 1978년부터 1984년 사이 완공한 동작대교로 말미암아 동재기나루며 배물다리는 사라졌다.
물길 깊어 잉어가 뛰놀던 곳, 이제 다시 볼 수 없지만 땅 위로 올라간 물고기들이 그 혼령의 누리 지키고 있을까.
사립미술관 표롱각(縹礱閣)의 주인이자 빼어난 문인 홍길주(洪吉周 1786-1841)가 1830년 8월 어느날 군수(郡守)로 부임
하러 충청도 보은(報恩) 향해 배타고 동작나루 건널제 부른 노래 <동작나루 배 안>에서 민인(民人)의 고단한 삶 읊조리니
얼마 전 별세한 대통령 김대중(金大中) 묘소까지 아울러 근심 흐르는데 저 장시흥이 보았던 부자들 화려함과는 너무도
다르고 또 다르다.
(10)노량진의 사육신 노래
노량진(鷺梁津)은 용산(龍山)에서 한강대교를 잇는 포구(浦口)로 정조(正祖) 시절엔 배다리를 설치하는 곳이었고 또한
경강(京江)의 3대포구의 하나였으니 사람도 물건도 가장 많이 몰려드는 곳이었다.
그래서였을 게다. 누구나 쉬쉬했으되 노량진엔 다섯 무덤이 모여있었고 사람들은 사육신묘(死六臣墓)라 하였다.
생육신(生六臣) 남효온(南孝溫1454-1492)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에도 나오지 않는 묘역이지만 인구에 회자되어
오다가 박팽년(朴彭年)의 6대손이 봉분(封墳)하고서 1651년 허목(許穆1595-1682)에게 묘비명(墓碑銘)을 쓰게하였으니
육신총(六臣塚)이‘노량진 아래 강 언덕 위’에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조야(朝野)에 사육신을 추모하는 분위기가 분분하자 숙종(肅宗)은 1679년 무덤을 가꾸게 하였고 1682년에는
동작진(銅雀津)에 육대사(六臺祠)를 세웠다가 1691년 12월 노량진 다섯 무덤 윗쪽에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창건하여
추숭(追崇)하였다.
화가 장시흥(張始興1730무렵-1789이후)이 그린 <노량진>에는가파른듯 둥그런 봉우리에 기와집이 즐비하여 상업
포구(商業浦口)의 성세(盛世)를 말해주고 있지만 그림엔 서원도 묘역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1776년 왕위에 오른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 원묘(園墓)를 향해갈제 배다리 건너 잠시 쉬곤 하던
용양봉저정( )이 화폭 왼쪽에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그로부터 300년전인 1453년 10월 수양대군(首陽大君1417-1468)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당대 집정자 김종서
(金宗瑞1390-1453) 장군을 격살(擊殺)하고 집권에 성공했다.
새로운 집정자수양은 정권을 잡은지 두 해가 채 지나지 않은 1455년 윤6월 겨우 15살의 조카이자 어린 왕 단종(端宗)
이홍위(李弘暐1441-1457.10.21)를 강제로 내몰고서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한 해 뒤인 1456년 6월 2일 성삼문(成三問1418-1456), 박팽년(朴彭年1417-1456), 이개(李塏1417-1456), 하위지(河緯地
1387-1456), 유성원(柳誠源?-1456),김문기(金文起1399-1456), 유응부(兪應孚?-1456)를 비롯한 이들이 단종, 세조(世祖), 세자가 한 자리에 모인 창덕궁 연회(宴會)에서 왕을 죽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하였다.
거사 직전 밀고(密告)에 따라 세조는 곧장 일당을 모조리 체포하여 국문(鞠問)을 벌였다.
쇠꼬챙이를 달구어 다리를 뚫게 하고, 팔을자르는 고문(拷問)에도 성삼문은 얼굴 빛조차 바뀌지 않았는데 마침 신숙주
(申叔舟1417-1475)가 세조 앞에 서 있었다. 이에 성삼문은“나와 네가 집현전(集賢殿)에 있을 때 세종(世宗)께서 날마다
왕손(王孫·단종)을 안으시고 거닐면서 이르시길‘과인(寡人)의 천수만세(天壽萬歲) 뒤에 경(卿)들은 모름지기 이 아이를
보호하라’하시던 말이 아직 귀에 쟁쟁한 터, 너는 홀로 이를 잊었는가. 너의 극악함이 이 지경일 줄은 생각조차 못했구나”
라고 호령(號令)하였다.
또 세조는 무장 유응부의 살 가죽을 벗기고 물었지만 입을 다물자 불에 달군 쇳덩이를 가져다 배 아래를 지져댔다.
얼굴 빛조차 변함 없다가“이 쇳덩이는 식었다. 다시 달구어 가져 오너라”고 호령하여 무서운 기개를 보이더니 사형 당하
던 날 울음을 터뜨리며“살아서도 가질 것 없었는데 죽을 때에야 큰 재난[禍]을 얻었도다”라고 하였다.
그렇게 참혹스레 죽어간 사육신(死六臣)의 삶은 무거운 시절엔“삶이또한 큰 보람[生亦大]”이지만 가벼운 시절엔“죽는
것이 오히려 영광[死猶榮]”이라 읊었던 이개의 노래 그대로였다. 이렇게 스러져간 피해자가 모두 70명이었다.
얼핏 보면 그림은 이 모든 비참과는 동떨어진 풍경이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바람조차 잠든 날의 화폭임에도 다섯
그루 버드나무가 폭풍우 만나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데 어인 일일까.
화가가 그릴 당시 박(朴), 유(兪), 이(李) 셋과 성(成)씨 부자 둘 하여 모두 다섯 무덤만 있었으므로 모진 바람 견디는
다섯그루만 그렸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주 지나던 정조가 1782년 이곳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고 1977년 하(河), 유(柳), 김(金)의 묘를 만들어 비로소 일곱
무덤이 완성되었다.
문득 노량진 수산시장(水産市場) 들를 때면 혹여 죽어간 귀신이라도 만날까 두리번 거리는데 아득한 옛 박팽년의 서글픈
노래만 들려올 뿐이다.
그 노래는 수양대군이 베푼 궁중 연회에 참석하여 어지러운 시절을 노래한 가락인데 대군이 좋아하여 여러 벌 베껴 곳곳에 붙여두게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몇해뒤에일어날죽이고죽는 참화를 짐작조차 했겠는가.
수양의 왕위 찬탈과 박팽년이 세조를격살하려는 계획 말이다.
(12)봉홧불 타오르는 질마재
정선(鄭敾 1676-1759)이 양천현령(陽川縣令)으로 재직하던 시절 강건너 도성(都城) 쪽에 피어오르는 봉홧불을 바라보곤
하였으니 <<경교명승첩 京郊名勝帖>>을 제작할제 그 풍경 빼놓을 수 없었다.
65살이 넘어 한양을 떠난 정선은 양천현(陽川縣) 관아(官衙)에 머물며 강건너 양화진(楊花津)을 건너오는 이들을 맞이
하곤 할 때마다 저 멀리 인왕산(仁王山) 넘어 한양 시절을 추억하곤 했을 것이다.
정선은 한강 건너 소식 전하는 봉수대(烽燧臺)가 있는 안현(鞍峴ㆍ질마재) 봉우리를 한 복판에 배치한 다음 그 바로 뒤
어깨너머로 인왕산을 채워두었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인왕산은 우람한 위용(偉容)인데 웬일인가 그림의 인왕산은 무척이나 부드럽고 푸근하니 아마도
십여년 전인 1728년 봄부터 이사하여 살고 있던 인왕산 자락인 탓에 그렇게 그렸나 보다.
살림집이니 어깨 넓어 믿음직하긴 해도 역시 어머니가 아이를 품은듯 따스하게 느끼지 않았을까.
하지만 복판의 안현은 가파르게 치솟아 추종을 불허하는 형상이다. 꼭대기에 붉은 봉홧불이 타오르니 오늘 저녁 전국이
안녕하다는 소식이다.
서대문 밖 금화산(金華山) 서쪽엔 이화여자대학교(梨花女子大學校)가 있고 굴(窟)을 뚫고 나가는 터널(tunnel) 오른쪽엔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와 도선(道詵 827-898)이 889년에 창건하였다는 봉원사(奉元寺)가 있는데 그 뒷산이 질마재다.
삼십 년전이니까 군부독재 시절인 1980년대라 가끔 질마재를 넘나들곤했는데 시위대가 경찰에 해산당할 때면 이 산속
으로 쫒겨 숨어들다가 연세대 교정으로 나아가곤 했던 것이다.
그 때만해도 이 재에 봉수대가 있는줄 몰랐었는데 알았다면 그 봉홧불을 민주주의 횃불의 상징이라고 이름지어주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국토의 평안함 전해주고 재난도 알려주는 불꽃 봉우리였으니까 평화나 민주를 떠올린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을 것같다.
질마재 아래 와우산(臥牛山)은 소가 누워 편안하고 그 왼쪽으로 솟아오른 강변 봉우리는 아마도 홍제천(弘濟川)을 끼고
솟은 성산(城山)인 것 같다. 그렇게 보면 강 줄기 아래 화폭 하단 왼쪽과 오른쪽 사이는 이미 알려진대로 가양동(加陽洞)
의 파산(巴山)과 탑산(塔山) 사이일 수도 있고 아니면 염창동(鹽倉洞) 증산(甑山)과 양평동(楊坪洞) 염창산 사이 안양천
(安養川)이 한강과 만나는 곳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려면 어떤가. 한강의 기적이니 민족의 예술이니 하는 구호를 내세운 1968년 한강종합개발과 더불어 강변제방도로
(江邊堤防道路) 사업으로 벼락을 맞은듯 워낙 바뀌고 또 바뀌어 안양천 제방(堤防)과 염창교, 양화교같은 다리가 들어
서고 또한 쥐처럼 생겼다 하여 쥐산이라 부르던 염창산과 그 앞 고양이처럼 생겨 굉이산이라 했다던 선유봉(仙遊峯)도
흔적 있는 듯 없으니 다만 근래 만든 인공폭포만 덩그러니 옛 가승처(佳勝處) 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림 속엔 이곳이 강화도(江華島)로 나아가는 교통요지이자 세곡선(稅穀船)과 경강상인(京江商人)이 몰려들던 번화한
상업지구였음을 알려주지도, 또한 명사들이 즐겨 찿던 승경(勝景) 지대였음을 알려주지도 않는다.
한가한 초옥(草屋)에 그저 돗단배 몇 척이 여유로워 거울같이 광활한 서호(西湖)임을 드러낼뿐.
그래서 화가는 성산 아래 망원동(望遠洞) 강 가까이 자리하여 이름난 건물도 소나무와 버드나무 숲으로 가려버린 것일
게다.
아우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그윽한 생활을 누렸던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 1396-1486)가 1424년 성산 아래 별서
(別墅)인 망원정(望遠亭)을 짓자 다음해 아우이자 임금인 세종(世宗 1397-ㆍ재위1419-1450)이 비내리던 날 그 정자에
올랐다.
농사철 들판을 적시는 비에 흡족하여 그 정자에 희우정(喜雨亭)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감격한 대군은 당대 문장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문형(文衡) 대제학(大提學) 변계량(卞季良 1396-1430)으로 하여금
기문(記文)을 짓게 하였다.
변계량은 “백악산(白嶽山ㆍ華岳)이 뒤에서 굽어보고 한강이 앞에서 흐르며 서남쪽 여러 산은 넓고 멀어 아득하니[蒼茫]
구름과 하늘과 연기가 물 밖으로 저 멀리 보일듯, 굽어보면 물고기며 새우까지 뚜렷하게 셀 수 있는데 바람 실은 돛과
모래 위 새들은 바로 자리 아래 오가고 천여 그루 소나무 푸르고 울창하여 술상 위 어른대는구나”라고 묘사였다.
한 세대 뒷 사람으로 사림종장(士林宗匠)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왕명을 받아 망원정을 읊었는데 ‘세상의 어느
화가가 끝내 저 광경 그려낼 수 있겠느냐’고 묻고서 스스로는 다음같은 문자로 그려냈다.
(13)흔적도 없는 풍경 . 정선-이수정(二水亭)
여의도 서쪽 끝에서 노들길 따라 선유도를 바라보며 가다가 염창교 아래 인공폭포를 지나 양화교를 건너면 이수정
(二水亭) 길이 있고 조그만 이수공원이 있다. 지하철 염창역 바로 북쪽이다.
지금 그렇게 이름만 남아 흔적조차 찾을 길 없는데도 정선(鄭敾 1676-1759)의 <이수정> 풍경은 어찌 저리도 뚜렷한가.
화가는 한강 가운데 새처럼 허공을 나르며 남쪽을 보았다. 맨 먼저 두 폭 돛을 단 나룻배가 보이고 강가엔 네 그루 버드
나무 건너 마을이 옹기종기 숨어있다.
오른쪽 골따라 계단 길 숨가쁘게 걸어 오르니 반듯한 기와집이라 그게 바로 이수정이다.
정작 봉우리는 얕으막한 도당산(都堂山)인데 정자를 가파른 절벽 위에 올려놓아 깊은 산중 절집처럼 묘사하고 보니 과장
이 지나치다. 그래서였을까. 화가는 멀리 남쪽 관악산(冠岳山) 줄기를 푸른빛으로 그려 넣고 도당산 바로 뒤엔 치솟은
봉우리를 배치해 두었다.
아마도 봉천동과 상도동 경계를 이루는 국사봉(國思峰)일 게다. 국사봉은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세자를 물려
주고 이곳에 올라 경복궁을 바라보며 아우 세종(世宗)의 치세를 걱정해 주었다는 곳이므로 화가가 그 사실 알고 저토록
우뚝 솟은 모습으로 그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양녕대군의 아우 효령대군(孝寧大君)은 형 양녕대군을 따라 다시 아우 세종에게 세자를 물려주고 전국 각지의 사찰을
새로 지으며 생애를 아름답게 가꾸어간 왕자였다.
어디 그뿐인가. 1424년 홍제천을 끼고 솟은 성산 아래터에 망원정(望遠亭)을 지은 효령은 다시 강 건너 남쪽에 안양천
(安養川)을 끼고 솟은 도당산에 바로 정자를 지어 한강을 건너갔다 건너오는 절정의 풍류도 누렸다.
효령은 언젠가 안양천이 흘러들어 한강과 부딪히는 염창탄(鹽倉灘) 옆 도당산 꼭대기에 정자를 짓고 한가할 때를 만들어
여울지는 물결을 누리곤 했다.
효령은 외동 딸에게 정자를 물려주었는데 그렇게 이덕연(李德演 1555-1636) 가문의 소유가 되었고 이덕연은 안양천과
한강이 합치는 두 물길을 지켜 보며 정자 이름을 이수정이라 하였던 것이다. 1618년 1월 광해 왕이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또 대북당(大北黨)이 집권하자 소북당(小北黨)인 이덕연은 강원도 철원으로 물러나 은거하였다.
하지만 아우 이덕형(李德泂 1566-1645)은 왕의 뜻에 충실한 신하로 거듭 승진하여 어느덧 도승지에 이르렀을 때인 1623
년 3월 서인당(西人黨)이 능양군(綾陽君)을 앞세워 정변을 일으켰다.
이덕형은 광해의 신하답게도 능양군에게 ‘옛 군주를 죽이지 말 것’을 주청함에 능양군은 충신이라 이르고 이에 다시
이덕형은 정변을 의심하는 인목대비에게 보고하여 능양군에게 어보(御寶)를 내리도록 하였다.
옛 군주와 새 군주 모두에게 공훈을 세운 슬기로움에 한성부판윤으로 재직하던 1624년 1월 이괄의 난을 진압할 때 공을
세웠으니 이덕형은 서인정권 아래서도 인조(仁祖)의 비호를 얻어 관직을 이어갈 수 있었다.
정변 뒤 은거를 끝내고 관직에 복귀한 이덕연은 다시 이곳 도당산에 이르러 정자를 새로 고쳐 이수정이라 하였다.
한가할 때면 아우 이덕형도 이곳에 어울렸을게다. 형제가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던 어느날 이덕형은 그 풍경 노래하기를
‘베개 밖 먼 종소리 절집은 가까운데 문 앞 큰 나무엔 물새가 둥지를 트고 넓은 땅엔 여염집 가득한데 아득한 천년 그대로
구나’라 하였다.
그로부터 일백년이 흐른 1742년 화가 정선이 이곳 이수정을 지날 때에도 그 풍경 그대로였지만 다시 백년이 흘러 1876년
개항을 앞 뒤로 한 언젠가 낡은 정자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도당(都堂)을 지었다.
지금은 그도 저도 흔적조차 없으니 천년은 무슨, 순식간에 부숴버리는데 4대강 파헤치는 힘이 그런 것이려니 사람의 힘
이란 이처럼 두려운 것이다.
소북 명문가 출신으로 당대 예원의 총수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자라면서 이덕연, 이덕형 형제를 먼발치에서 봤
을지도 모르겠다. 같은 당파에 속한 인물이니 더욱 그러할지 모르겠거니와 처가가 있는 경기도 안산에 다닐 때면 혹
이곳 양화나루 건너는 길에 이수정에 들렀을지도 모른다.
(14)공암나루에 사라진 소요정
강서구 양평동 염창산에서 한강을 따라 서쪽으로 증산(甑山)을 지나가면 양천향교가 있던 궁산(宮山)을 다 가지 못해
가운데 탑산(塔山)이 있다. 탑산은 지금은 허준(許浚 1546-1615)의 아호를 딴 구암공원(龜巖公園)이다.
탑산엔 구멍이 있는 바위 공암(孔岩)이 있고 여기서 한강으로 빠져 나가면 작은 섬이 솟아 있어 이 바위를 광주바위
[廣州岩]이라고 하였다.
지금은 강변에 올림픽대로가 들어서서 풍경을 모두 망쳐버렸지만 이곳 탑산 앞이 나루터인 공암진이었다.
강 건너 북쪽에 마주한 나루터인 행주나루가 있어 남과 북을 잇는 유통지구였고 고려시대 땐 개성에서 남도를 잇는 교통
요충지였으며 조선시대 땐 한양 사람이 양화나루를 통해 강화도로 나아갈 때 공암나루로 건너다녔다.
그런데 광주바위 섬은 아주 오랜 옛날 큰 홍수가 지자 한강 위쪽 광주에서 떠내려 오다가 하필 이곳 공암 앞에 멈추었다.
비가 그친 뒤 소식을 들은 광주 관아는 섬을 자기 관할 땅이라고 하여 양천현(陽川縣)으로 하여금 세금을 내라고 하였다.
이렇다 할 작물도 없으므로 섬에서 나는 싸리나무를 베어 싸리비 세 자루를 만들어 보내다가 양천 현령은 매번 귀찮기도
하여 ‘바위 섬도 소용 없으니 가져가 달라’고 통보하였다.
섬을 떼갈 수도 없어 어려워진 광주는 관할을 포기하고 소유권을 양천에 넘겨주고 말았다.
자꾸 일본이 동해의 독도를 제 것이라고 하는데 이익이 없으면 저럴리 없건만 독도 주위 엄청난 넓이 바다를 제 관할
아래 둘 수 있고 거기 잠겨 지천으로 널린 자원을 차지할 욕심이라 아마도 광주바위 섬 주위를 강까지 관할 할 수 있었
다면 광주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익 없이 움직이는 일은 없는 모양이다.
화가 정선(鄭敾 1676-1759)은 이곳 공암과 광주암을 그려놓고 정작 제목은 소요정(逍遙亭)이라 하였다.
소요정이란 중종반정(中宗反正) 공신 심정(沈貞 1471-1531)의 아호인데 1518년 형조판서 물망에 올랐을 때 신진사류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반대로 임명받지 못하자 물러나 이곳 탑산 위에 정자를 짓고 울분을 달래던 시절의 것이다.
다음 해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사류를 일망타진하고 권력을 전횡하다가 동궁(東宮) 저주사건에 연루되었음이
드러나 유배지인 평안도 강서에서 기묘삼간(己卯三奸)으로 지목당해 사약을 받아 죽고 말았다.
뒷날 다른 이들이 명예를 회복하였음에도 심정만은 소인배로 간주당해 비아냥의 대상이었지만 살았을 때는 꾀주머니
라고 하여 지낭(智囊)이란 별명으로 불리웠다.
그러니까 아득히 거닌다는 아름다운 뜻의 소요정을 세우고 그윽한 은일군자 행세를 하면서도 뒤로는 정적을 꺼뚜러뜨
릴려는 추악한 음모로 꾸미며 부지런한 발걸음을 재촉하였던 것이니 저 소요정이란 이름이 오히려 부끄럽다.
아마도 정선이 그림 그릴 무렵엔 저 심정의 음모처인 소요정이란 간곳 없었을지 모르겠으되 그래도 제목만은 소요정
이라 했던 뜻이 있을게다. 이 곳 풍경이 그대로 하나의 그윽한 정자요, 장자가 <<남화경>>에서 읊조린 바 저 소요유
(逍遙遊)할 만한 땅이므로 그랬을지 모르겠다. 심정의 흔적 따위는 지워버린 뒤 있는 풍경 그냥 그대로 천연스러움을
그린 게다. 또한 바위 섬은 마치 꽃봉오리처럼 봉긋하게 하고 탑산의 공암은 마치 정선이 즐겨 그리던 금강산 숱한
봉우리와도 같게 하였으니 깊고 깊은 심산유곡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이곳이 그곳이라, 소요하기에 너무도 좋은
곳 아닌가.
바로 그 공암은 ‘허가바위’라고도 불렸는데 양천허씨(陽川許氏)의 시조 허선문(許宣文)이 이 바위에서 나왔으므로 그렇게
부르는데 허선문은 견훤 정벌을 가던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 공암나루를 건널 때 도강과 군량미를 협력하여 공암촌 주인
으로 임명받았다.
700년 뒤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허준은 어의(御醫)로 당상관(堂上官)에 이르렀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엔 선조를 끝까지 모심에 공신으로 책봉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허준은 긴장의 끈을 풀지 않았다. 내의원에 봉직하는 가운데서도 10년의
뼈를깎는 노력 끝에 1610년 드디어 위대한 의학서인 <<동의보감>>을 완성하였다.
광해 또한 모셨는데 일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광해는 허준에게 부원군을 제수하였다. 더러운 짓을 거듭한 심정은
사라지고 아름다운 업적을 쌓은 허준만이 살아남았거니 뒷날 뛰어난 재사 박제가(朴齊家 1750-1805)가 광흥창(廣興倉)
을 출발해 공암나루 지나 동쪽으로 궁산을 지나칠 때 배 위에서 부르던 노래 지금도 들려온다.
(15)영웅과 슬픔 흐르는 행주나루
서울에서 자유로를 타고 고양(高陽)으로 가다보면 방화대교 북쪽 끝에 행주산성(幸州山城)이 나타난다.
그렇게 지나가버리면 그만이지만 잠시 발길 옮겨보면 뜻밖에 감동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 권율(權慄 1537-1599) 장군 동상으로 시작해 사당이며 정자에 기념관과 기념탑을 두루
갖추었는데 정상에 우뚝 선 기념 비까지 그만 역사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양을 점령당한 상태였던 1593년 2월 권율 장군은 군사를 이끌고 이곳 덕양산(德陽山)에 진을 베풀었다.
이곳은 수도 방위의 전략 요충지로서 돌 성벽이 없더라도 공격과 방어가 완벽한 천연 요새였다.
위협을 깨우친 일본 3만대군이 파도처럼 권율의 행주진으로 쳐들어왔다. 권율의 병력은 겨우 2,300명일뿐이었다.
2월 12일 새벽의 일이다. 일본군은 3개로 나누어 번갈아 하루종일 아홉 차례나 공격을 해댔다. 그 때마다 절묘한 방법
으로 방어에 성공했거니 무엇보다도 여성들이 치마폭에 돌을 주워 나르는 ‘행주치마’에 또한 슬기롭게도 ‘재주머니
던지기’라는 비상한 전법은 지금까지 전해내려오는 신화 그대로다. 완전한 승리였다.
패배한 일본군의 시체가 너무도 많아 태우는 냄새가 십리 밖까지 퍼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기세를 잃어버린 일본은
얼마 뒤 한양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임진왜란 3대 전투로 평가받은 이 승전의 통쾌함도 어느덧 아득한 역사가 된 1741년. 일백 오십년의 세월이 흐른 뒤
이 덕양산 행주산성은 사대부의 별장지대로 바뀌었다.
연구자 최완수의 지적에 따르면 화폭 왼쪽 끝자락 절벽 위가 김동필(金東弼 1678-1737)의 낙건정(樂健亭), 가운데가
송인명(宋寅明 1689-1746)의 장밀헌(藏密軒), 오른쪽 끝이 김광욱(金光煜 1580-1656)의 귀래정(歸來亭)이란다.
모두 집권 노론당의 명문세가(名門勢家)로 전승지가 어느덧 귀족의 유원지로 변해버렸던 게다.
게다가 이곳 강변은 웅어(위어葦魚)와 황복어(하돈河豚)가 잡히는 곳으로 유명해 귀족의 입맛을 만족케 하였다는데
마침 화가 정선은 그 고기잡이 장면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고기잡이 배가 양쪽으로 나란히 포진한 모습이 마치 전투를 위한 군대의 진법처럼 보이는 것은 아마도 전쟁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전쟁과 평화가 번갈아 가며 땅에 끼치는 영향이 그토록 큰 것인 모양이다.
그로부터 일백년이 지난 1841년 헌종이 서삼릉(西三陵)에 왔다가 권율의 공적을 기리는 건물 한 채 없음을 보고 애석
하여 조인영(趙寅永 1782-1850)으로 하여금 행주기공사(幸州紀功祠)를 창건하게 하고 또 1845년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기념비석이 너무도 낡아 이를 대신하여 새로운 대첩비(大捷碑)를 건립하게 하였다. 아름다운 일이다.
유원지의 부끄러움을 씻어냈으니 말이다. 또 일백년이 흐른 1950년 6월 28일 서울을 조선공화국 군대에게 내준 대한
민국 육군 제1사단은 이곳 행주산성으로 집결해 한강을 도하해 후퇴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김포(金浦)를 점령한 조선공화국 군대로 말미암아 포기해야 했고 그 뒤 9월 한미 해병대가 서울수복을 위해
상륙한 곳이 바로 이곳 행주산성이다.
1963년에 15미터짜리 기념비를 다시 세웠는데 두 해 전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장군이 쓴 글씨를 새겨
넣었다. 일본군대를 물리친 행주대첩 비문을 일본군대 출신 군인이 새긴 이 희안한 사건은 어이없지만 그저 그렇게
권력과 역사가 뒤엉키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준다.
정선이 양천현(陽川縣) 현감으로 재직할 때 그린 <행호관어(杏湖觀漁)>는 사실 행주대첩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그저 생업과 유희의 표현일 뿐이다.
그래서 행주(幸州)라 하지 않고 행호(杏湖)라고 써넣었고 또 절친한 벗이자 시인인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은 이
그림을 보고 ‘늦봄이니 복어국이요, 초여름이니 웅어회라, 복사꽃 가득 떠내려오면 그물을 행호 밖에서 잃겠구나’
라고 읊조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계절의 진미요, 별미를 생각하며 군침 흘렸던 그림일뿐이었던 게다. 어쩌면 이곳 행주에서 태어나 문득
농사를 지었던 생육신(生六臣) 남효온(南孝溫 1454-1492)도 그윽한 때르 f만나면 그런 정서에 빠졌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것같다. 스스로 이 행호를 추강(秋江)이라 하고 그 이름을 취해 아호로 삼았으니 부도덕한
세상과 맞서 싸우는 아픔을 베풀어 놓았던 것이다.
정변을 일으켜 조카를 내쫒고 왕위를 차지한 세조(世祖)를 능멸함에 망설임 없던 남효온은 죽어 묻힌 뒤 1504년에도
또 죽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이곳 행주산성을 지나칠 때면 정선의 별미 그림이나 권율의 영웅담만이 아니라 남효온의 슬픈 노래를
떠올리곤 한다.
(17)경희궁의 추억, 북일영
1593년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때 명나라 낙상지(駱尙支) 장군이 조선 조정에 도움말을 주었다.
이에 따라 조정은 군대를 5군영(五軍營)으로 재편하였다.
그 가운데 수도경비를 책임질 군영의 하나가 훈련도감(訓練都監)이다.
훈련도감은 3수군(三手軍)을 양성하였는데 포수(砲手), 살수(殺手), 사수(射手)였다.
총과 대포를 쏘는 포수, 창검을 휘두르는 살수, 활을 날리는 사수로 나누어 기르고 보니 비로소 강력한 무위를 떨칠
수 있었을 게다.
훈련도감은 지금 신문로 1가인 서부 여경방에 사백여명의 인원을 수용하는197칸의 큰 청사를 두었다.
수도 방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창덕궁 서쪽 공북문 밖에 무려 235칸에 이르는 최대 규모의 북영(北營)을 설치하고
또 돈화문 밖 동쪽으로는 32칸의 남영(南營)을 두었다.
종묘가 있는 동부 연화방에 동별영(東別營)을, 마포에는 서별영(西別營)을 두었으며, 15칸의 아담한 북일영(北一營)은
사직단이 있는 인왕산 자락 끝에 두었다.
사직단 남쪽으로 경희궁(慶熙宮)이 있었는데 북일영은 경희궁 북쪽 무덕문 밖에 있었고 또 그곳엔 큰 활터가 있었다.
훈련도감은 1882년 그 사명을 다한 끝에 폐지되었고 산하의 북영은 무관학교로 바뀌었다가 1923년 <경성 시가지 개
수령> 이후 주택지구로 바뀌어 오늘날 북촌지역으로 빨려들어갔다.
북영이 있던 그곳은 오늘날 원서동(苑饍)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식민지 시대 때 창덕궁을 비원(秘苑)으로 격하시
킴에 따라 비원 서쪽이라고 해서 원서동이라 했던 것이니 그곳이 수도를 호위하는 군대의 본영이라는 기억조차 지워
지고 말았다.
북일영의 운명은 더욱 쓸쓸하다. 바로 아래 자리한 경희궁의 운명 때문이다.
경희궁은 광해(光海 1575-1641 *재위1608-1623)가 1617년부터 1623년 사이에 새로 지은 궁궐이다.
처음 이름은 경덕궁(慶德宮)이었는데 1760년에 경희궁으로 바꾼 것이다.
인조(仁祖 1595-1649 *재위1623-1649)의 아버지 시호가 경덕(敬德)인데 소리가 같으므로 피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광해를 내쫒고서 왕위를 차지한 인조 아버지를 내세워 궁궐 이름을 바꾼 데에는 광해의 기억을 지워버리려는 당시
집권세력의 뜻이 발동했었을 것이다.
이괄(李适 1587-1624)의 반란으로 말미암아 광해가 세워놓은 경덕궁에 들어가 9년 동안이나 통치했던 인조였음에도
그 공덕은 잊어버린채 광해가 지은 이름마저 없애려 하였으니 조잡스런 역사 훼손이었음을 기억해 두어야겠다.
창덕궁을 비원으로,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훼손했던 저들과 다를 바 없음을.
김홍도(金弘道 1745-1806이후)는 어린 시절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을 만나 후원을 얻어 화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고 21살 때인 1765년 이전 도화서 화원으로 출세할 수 있었다.
또한 아직 왕위에 오르기 이전 잠저에 머무르던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의 초상을 그린 인연으로
말미암아 32살 때인 1776년 정조가 즉위함에 이 때부터 이른바 ‘왕의 화가’가 되어 남다른 삶을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군영과 관련된 인물이 베푼 어떤 행사가 열렸다. 이곳 훈련도감 소속 북일영 활터에서 활을 쏜 뒤
어영청(御營廳) 소속 남소영(南小營)으로 옮겨 연회를 열었다.
김홍도가 불려 가 이 행사를 그렸는데 바로 이 <북일영도>는 그 기록화의 하나이다.
이 그림은 활터와 북일영을 한 화폭에 담으려고 사선으로 화폭을 가르고 위로는 북일영을, 아래로는 활터를 배치했다.
이상한 것은 북일영 건물이 어이없이 커다란데 아마도 행사의 주인이 북일영과 깊은 인연이 있으므로 그렇게 키워
잘 보이게 한 것이겠다. 하단에 활쏘는 인물들은 무술을 갖춘 이로 대개 무관이며 여기저기 섞여 앉은 세 명의 선전관
(宣傳官)은 모두 노란색 초립(草笠) 모자를 쓰고 있다.
복판에 버들가지가 휘날리는데 멀리 과녁이 뚜렷하고, 가파르게 치솟은 산자락이며, 울창한 소나무와 계곡 사이 우람한
바위가 매우 역동하는 풍경은 오늘날 온데간데 없다. 지금은 온통 옛 무비(武備)의 위용은커녕 매연으로 흐뿌옇다.
경희궁은 일본 침략자들의 손에 거침없이 침탈당해 지금은 겨우 손바닥만큼만 남았고 또 궁궐에 잇닿아 위용을 과시
하던 사직단은 초라한 폐허 그대로다.
아직 그 모습 그대로일 때 <경희궁지>를 지었던 정조는 궁궐이란 ‘그 거처를 호사스럽게 하고, 외관을 화려하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근래 지방자치단체장 따위들이 분수넘치는 아방궁(阿房宮)을 짓고 있음을 보면 그저
부끄럽고 미안할 뿐이다. 그런 정조대왕의 당부가 있었으니, 어리석은 관료를 향한 호령이렸다.
(19)혜화문 밖 꽃장수
노원에서 종로로 갈라치면 월계를 지나 되너미고개[狄逾嶺]를 넘어 혜화문(惠化門)을 지나쳐야 한다.
1990년부터 노원에서 살기 시작했던 나는 그로부터 지금까지 스무 해동안 그 길을 다녔다. 처음엔 혜화문이 없었다.
1994년 도로 옆 성곽에 석문을 내고 그위에 문루를 세우고서야 내가 다니던 그 길에그 문이 있었음을 알았다.
혜화문은 모두들 동소문(東小門)이라 불렀는데 이 문이 없어진 때는 그리 오래지 않았다.
먼저 조선을 강제 점거하고 있던 조선총독부는 1928년에 문루가 퇴락했다며 철거했다.
이 문루는 1744년에 어영청(御營廳)에서 건축한 건물이었으므로 2백년이 흐르며 자연스레 퇴락하였으니 보수하면
그만인 것을 아예 파괴한 이유는 알 길이 없다.
십 년이 지난 1939년에는 다시 석문조차 철거하고 시원스런 도로를 뚫어버렸다. 교통의 효율을 높이는 조치였지만
산줄기를 흐르는 기운을 끊는가 하면, 조선왕조의 흔적 지우기에 열광했던 일본의 야만스런 소행임엔 틀림 없다.
50년만에 복원한 이 혜화문 또는 동소문은 어떤 문인가.
태조이성계(李成桂1335-1408)가 즉위한지 세 해만인 1394년 10월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고서 궁궐과 성곽 공사를
독려하여 1396년에 모두 완공했는데 도성을 둘러싼 성곽에는 네 개의 대문과 그 사이네 개의 소문을 뚫어 사방팔방
으로 통하는 도로를 갖추었다. 이 때 함께 만든 동소문은 완공 당시엔 홍화문(弘化門)으로 불렀는데『증보문헌비고
(增補文獻備考)』를 보니 1511년에 혜화문으로 고쳐 불렀다.
혜화문의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국토의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6대 간선도로(幹線道路) 가운데 하나였다는데 있었다.
혜화문을 통해 한양에서 동북쪽으로 의정부를 거쳐 함경도 경흥에 이르는 제2대 간선도로 관문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북대문인 숙정문(肅靖門)을 항상 닫아두었기 때문에 동소문은 북대문의 역할을 함께 아울렀던 게다.
혜화문 밖으로 나가면 성북에서 세 선녀의 놀이터나 세 화랑(花郞)의 훈련터인 삼선(三仙)을 거쳐 돈암, 안암으로
흐르는 냇가를 따라 마을이 널리 펼쳐져있고 또 이제구(李齊九)란 사람의 말처럼 개울이며 숲이‘서로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이루었다’고 할 만큼 아름다웠다.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다. 뽕나무며 복숭아에 능금밭이 냇물을 따라 구비 구비 즐비하였고 또 소나무와 대나무가 울창
하여 온갖 새들이 제집인냥 모여들던 평화로운 땅이었다.
그래서 혜화문 석문의 위쪽 둥근 월단(月團) 천정에봉황(鳳凰)을 그려놓았다고 한다.
다른 대문과 소문에는 모두 용(龍)을 그렸었으므로 이 문에만 남달리 봉황을 앉힌 뜻이야 아마도 새의 왕 봉황으로
하여금 군림하여 다스리고자했던 것일 게다.
그리고 혹 모를 일이다. 지금 돈암에서 미아로 넘어가는 미아리고개 이름이 저 병자호란 때 여진족(女眞族)인‘되놈
(오랑캐)’이 침입해 온 고개라고 해서 되너미고개 또는 적유령(狄逾嶺)이라 불렀으니 오랑캐와 봉황이 무슨 상관이라
도 있을지는.
정선(鄭敾1676-1759)은 69살 때인 1744년 혜화문에 문루를 세우는 모습을 보았을 터인데 정작 <동소문>에 문루를
그려넣지 않았다. 1744년 이전의 모습을 그린 셈인데 지금과 달리 높고 험한 고개 위에 성문을 배치해 두었다.
일본 사람들이 도시계획 한답시고 고개를 헐어내고 평지를 만들어 높은 산성의 정취는 사라졌지만 그림을 보노라면
북한산에서 낙산(駱山)으로 흐르는 줄기의 흐름 이어지는 모습 그대로다.
혜화문 안으로 굽어들면 내리막이 끝나는 곳에 네 거리를 만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네 거리는 고가도로에 갇혀 제
모습 잃어버린 채였지만 1929년 12월 9일 이곳은 역사의 거리였다.
광주학생사건에 호응한 경신학교 학생 300명이 광주학생 지원연설 직후 교문을 나와 저 네 거리로 진출하자 곧 이웃
보성고보 학생 400명이 합류해 종로 진출을 목표로 1대는 지금 대학로의 경성제대, 2대는 창경궁을 향해 행진하였고
일부는 창덕궁 뒷켠 중앙고보학생 400명과 합세하였다.
오랑캐 침입 300년 뒤 또 다른 오랑캐 일본이 동소문을 파괴한 다음 해에 벌어진 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200년전 성균관과 가까운 곳 도성에 아름답기 으뜸인 돌다리 장경교(長慶橋) 근처 요란한 시장터를
거닐던 박제가(朴齊家1750-1805)가 어느덧 혜화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삼선에서 성북으로 오르며 마주친 꽃파는 매화인(賣花人)을 보고 문득시 한 수를 읊조렸다.
(21)경복궁 밖 남대문 (南大門)
대은암(大隱岩)에서 샘이 솟아나와 경복궁 서쪽으로 흘러 냇가를 이루었는데 이 냇가는 또 삼청동에서 시작해 경복궁
동쪽으로 흐르는물과 만나 지금의 동십자각(東十字閣)을 거쳐 청계천으로 흘러들어갔다.
정선의 <은암동록>은 바로 그 대은암 동쪽 기슭에서 경복궁 담장넘어 양쪽으로 펼쳐진 남산과 남대문을 바라보고
그린작품이다.
하단 뜰에 네모난 바위가 있고 오른쪽 산기슭 아래 굴뚝같은 두 개의 기둥이 서 있는 모습도 이채로운데 긴 담장이
늘어선 너머엔 소나무가 울창하다. 어디 그뿐인가. 멀리 남산 꼭대기엔 소나무가 외로이 솟아있고 남대문 너머한강
저편의 관악산이 희미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그림에서 눈길을 끄는것은 화폭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담벼락이다.
이 담장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두 군데가 허물어진채 방치되어있는 까닭이다. 왜 허물어졌던 것인가.
1592년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이 질풍처럼 북상해 5월 3일 한양을점령했다. 일본군대가 입성하여 처음 경복궁에 침입
할 당시 종군한 일본인 석시탁(釋是琢)은《조선일기》에 경복궁을“북악(北岳) 아래 남면한 자궁(紫宮)이 있는데 돌을
깎아서 사방 벽을 둘렀다”고 묘사하고서“진정 다섯 발자욱마다 한 루[一樓]가 있고 열 발자욱마다 한 각[一閣]이라,
곽랑(廓廊)이 빙둘러있고 첨아(簷牙)는 높게 조각되어있는데 어느 것이 무슨전(殿)이고 어느 것이 무슨각(閣)인지 알
수가 없다”고하였다.
그 장엄한 규모와 화려한 장식에 감탄을 감추지 못한 석시탁은 또“이곳이용계(龍界)인지선계(仙界)인지 보통사람으로
서는 볼 수 없는 곳이다”라고 그려놓았다.
<그 뒤 1593년 4월 19일 한양을 버린채 남쪽으로 후퇴할 때 일본군은 남산쪽 일부를제외한 도성전역에 불을 질렀음은
물론 경복궁마저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한양을 수복한 선조일행은 황량한 경복궁을 버리고 창덕궁으로 가야했다.
그로부터 150년뒤 정선이 그릴때에도 여전히 경복궁은 담벼락과 소나무만 무성한 숲이었는데 고종이 1865년 4월부터
1867년 10월까지 복원할 때까지도 마찬가지로 살벌한 풍경 그대로였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1910년경 술늑약(庚戌勒約)
으로 조선전역을 장악한 일본은 경복궁 4,000여 칸을 헐어내고 또 1917년에도 숱한 전각을 헐고서 겨우 근정전이며
경회루를 비롯한 몇 개의 건물만을 남겨둔채 복판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드높이 지어, 백악과 궁궐 모두를 뒤켠으로
몰아 가려버렸다.
저 멀리보이는 남대문은 남쪽을 상징하는 문자가 예(禮)이므로 숭례문(崇禮門)이란 이름을 갖추었는데 도성의 정문
으로 어떤 문보다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어서 뒷날 국보제1호로 지정하였다.
그 이름‘숭례문’을 세종의 형양녕대군(讓寧大君)이 쓴 멋진글자로 새긴현판(懸板)을 세로로 세운 까닭은 화재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저 멀리 보이는 관악산이 불을 뿜는 화산(火山)이므로 남대문이 불기운을 막는 역할을 해야 했으므로
관악산으로 하여금 경의를 표시하도록 세로로 세운 것이고 또 나아가 경복궁앞에 물을 뿜는 해태(海陀)를 만들어 두었
던 것이다. 그런데2006년부터 광화문을 다시 짓는다고 해태상을 가려버린 2008년 2월 관악의 불기운을 견디지 못 한
채순식간에 타오르고 말았다.
임진왜란직후, 일본군대가 떼버린 현판이 남대문 밖 청파동만 초천(蔓草川*넝쿨내) 아래 배다리[舟橋] 웅덩이에서
찾아걸었던 일도 이젠 추억이라 영원히 양녕대군의글씨를 볼 수 없어졌으니가슴이 저려온다.
가슴 시린 이야기는 더 있다. 일본 통감부(統監府)가 압력을 가해 1907년 8월 1일 훈련원에서 조선군대를 해산함에
정부의 해산명령을 거부한채 해산식에 참석치 않은시위대(侍衛隊)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1869-1907)이
“대한제국만세”를외친다음, 대대장실에서 권총자결을 감행하였다.
이를 지켜 본 장병이 소식을 전하니 격분하여 탄약고를 부수고 무장봉기를 개시하였다.
제2연대 제2대대도 함께 봉기하여 남대문 일대를 무대로 일본군대와 격렬한시가전을 전개하여 비록 200여 사상자를
냈지만 적군에게도 100여 사상자를 냈으며 전투 참가자는 그 뒤 의병(義兵)으로 전환함으로써 굴복하지 않는 의지를
천명하였다. 이 날의 무장봉기로 말미암아 전적지로 변모한 남대문 일대의 기억이 불편했을통감부는 1908년 일본
황태자방문을 핑계삼아 철거하고자 하였고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남쪽성벽을 파괴해버려 외롭게 만들었다.
지금도 남대문곁으로 난도로를따라가노라면 울부짓음이 들려온다. 저 박승환대장의 사자울음 소리일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