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당 바댕이 예봉산 양수리 두물머리
두물머리 저쪽에 예를 갖춘 산 하나
- 산 아래 바댕이 마을 앞엔 이름처럼 바다같은 호수가 -
한국땅이름학회 회장 배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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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재촉하나 보다. 하늘이 뿌옇다. 비가 내릴 것 같았지만, 오늘은 꼭 서울 근교의 어디라도 발길을 돌려보리라며 아무 준비도 없이 집을 나섰다.
사색을 하며 걸을 수 있는 강가, 그 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 바댕이쪽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적지로 잡았다. 바댕이. 경기도 남양주시 팔당(八堂)의 토박이 이름이다.
전철을 탔다. 한 시간 이상을 달렸는데, 딴 생각을 하다 보니 내려야 할 팔당역을 지나쳐 버렸다.
결국 한 정거를 더 가 운길산역에서 내렸다.
월요일이라 그렇겠지. 등산객을 별로 볼 수 없다. 처음 온 길. 헤맬 것도 같아 같은 역에서 내린 등산복 차림의 두 아낙네를 따라갔다. 운길산의 산행을 하려는 걸까?
아무래도 팔당 일대를 돌아보는 것은 틀린 것 같다. 그래도 저들만 따라가면 후회 없는 산행은 되려니 하며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 운길산역 근처의 옛 마을 이름들
운길산(雲吉山)이라.
이 산과 예봉산은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양수리)를 내려다보면서 솟아있는 산이다. 쭈욱 뻗어나간 두물머리 언덕 능내리를 사이에 두고 이 두 산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일찍이 이태조가 이 산에 구름이 많다 하여 운길산이라 이름지었단다. 운길산역에서 북서쪽으로 높이 솟아 있는 산이지만, 이 날은 날씨가 안 좋아 정상을 볼 수 없었다. 산의 7부 능선쯤에 있는 절이 바로 유명한 수종사(水鐘寺)다. 이 산은 1890년(고종 27)에 지은 <수종사 중수기>에는 운길(雲吉)로 나오고, 그보다 오래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조곡산(朝谷山)이라고 나온다.
운길산역 근처는 남양주시 조안면 진중리(鎭中里). 일제 강점기에 진촌(鎭村)과 중리(中里)를 합쳐 만든 이름이다. 진촌은 '진말'이라고 불렸는데, 옛날에 군사들이 진(鎭)을 쳤대서 나온 이름이란다. 중리는 중말로도 불리는데, 가운데의 마을이라 해서 나온 이름이고.
진말에서 산쪽으로 난 진말길을 따라 서쪽의 산비탈쪽으로 다가가니 '맏뜰길'이란 표지판이 보이고, 예봉산 산행길로 들어서는 작은 산길이 나왔다. 맏뜰은 옛날에 말을 매는 들이어서 나온 이름이라는데, '마들'이나 '맛들'이 아니고 왜 '맏뜰'일까?
마침 앞서 가던 두 아낙이 작은 산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예봉산을 가는 것이겠지.
뒤를 따르면서 오늘의 '목적 기행'이 딴 방향으로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저들도 가는데 하면서 발길을 옮겼다. 평지길 같았으면 내가 미행하는 괴남자 정도로 보였을성도 싶다. 날씨는 구름에 잔뜩 덮여 침침했고, 안개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 한정승 묘가 있는 능내 마을도 보지 못하고
한 30분은 올랐을까? 두 아낙이 쉬고 있었다. 몹시 목이 말라 물을 청하고 싶었지만, 말이 안 나와 참았다.
"예봉산 올라가십니까?"
그렇다고 했다. 산행을 자주 하는데, 서울 중랑구 상봉동에서 왔단다. 예봉산 정상까지의 거리는 한 두어 시간 더 가야 한단다. 두어 시간? 놀라 버렸다. 많이 올라왔다 싶었는데, 두 시간도 더? 올라온 시간 빼고 한 시간 반쯤만 가면 될 거라며 용기를 준다.
이들은 예봉산 산길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날씨도 안 좋은데 포기하고 전철이라도 타고 팔당쪽으로 돌아가서 그 곳 일대만 돌아볼까 생각했지만, 벼르고 나온 것이 아까와 계속 올라갔다. 바람도 불지 않고, 하늘은 안개비를 뿌리고... 후텁지근해 온 몸은 땀 범벅이었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산행 준비를 잘 했어야 하는데.
주머니에 꼬기꼬기 접어 넣은 지도가 젖어 있었다 펼쳐 보니 예봉산까지는 계속 능선. 중간중간에 봉우리가 많아 오르내리기를 반복해야 한다고 지도는 가르쳐 주고 있었다. 한 30분 정도 더 오르다가 지쳐 길 옆에 누워 버렸더니 채 5분도 안 돼서 그 여자들이 따라왔다.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이라고 했더니 정상에 가면 막걸리나 빈대떡 같은 것을 팔 거라며 빨리 올라가란다.
배낭도 안 매고 등산 조끼만 입고 온 내가 이상했던지 어디서 왔고 왜 왔느냐고 묻는다. 글쓰는 사람인데, 두물머리 합수(合水) 모습 등을 찍으러 왔다니까 처음부터 왜 이쪽 코스로 잡았느냔다. 날씨도 안 좋아 사진 촬영도 불가능할 거라면서 날짜를 잘못 잡았다며 웃는다.
목이 워낙 말라서 막걸리 생각이 몹시 났다. 골짜기가 아니고 능선이니 물도 없고...
정상까지는 아직도 4킬로미터. 안개인지 구름인지가 주위를 싸안았다. 날씨가 맑았다면 저 아래 능내리의 마을들이 보이련만 전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능내(陵內)는 '능안'이라고도 하는데, 세조 때의 정승 한확(韓確)의 묘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다산 정약용의 생가도 바로 근처에 있는데, 그 마을은 따로 '마재', 마현(馬峴)이라고 한다.
587미터의 율리봉이 나왔다. 이 봉우리 옆이 바로 율리고개이다. 밤나무가 많아 붙은 이름.
힘이 몹시 부쳤지만,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정상을 향했다. 입에선 가쁜 숨이 몰아 나왔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날씨가 맑아 예봉산 봉우리가 보였다면 아마 이렇게 사투나 다름없는 산행을 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득하게 멀리 보이는 산마루, 또 산행 초입에서 본 안내판 '정상 5킬로미터'를 보고 지레 겁먹고 하산했을지도 모른다. 이 날, 나를 예봉산 산정으로 발길을 계속 옮기게 한 것은 먼 길을 감춰 준 안개와 비구름이었고, 목마름이었고, 배고픔이었다. 짙은 안개 때문에 앞이 멀리 보이지 않아 도리어 지루함이 없었다. 목적지에 있을 것이라는 그 무엇(먹을거리)도 발걸음을 재촉하게 만들어 주었다.
입산한 지 두어 시간이 지나서 산마루까지 거의 왔지만, 몸은 반죽음이 되어 있었다. 산정 바로 밑은 비탈이 더 심했는데, 목적지에 다 왔다는 생각에 힘을 얻고 기다시피 하여 정상에 올랐다.
□ 한양 떠날 때 성비들이 예를 갖추었다는 예봉산
'예봉산(禮峯山). 683미터'.이라는 정상 표지석. 아, 얼마나 반갑던가? 그 표석을 보고 또 보았다. 날씨도 궂은 데다가 월요일어서인지 정상에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뿌연 안개를 헤집고 보니 한켠에 여자 둘, 남자 하나,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목이 마르기에 먹을 것을 파는 곳을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실망한 일이? 일요일만 그런 걸 판단다. 목도 추기고 요기도 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일행 중 한 여자가 배낭 속에서 따라 물을 따라 주었다. 두어 시간을 달려와 지쳐 버린 나에겐 그 물은 생명수나 다름없었다. 그들의 호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가져온 음식이 많으니 식사도 함께 하잔다.
예봉산은 인근 주민들이 '사랑산'이라고 불러 왔다. 산에 아름드리 나무가 많았는데, 조선시대의 손님을 맡아 보던 관아인 예빈시(禮賓寺)에 나무 벌채권이 있었기에 예빈산으로도 불렸다.
또, 예봉산은 옛날에 사람들이 한양을 떠날 때 임금님에게 예(禮)를 갖춘 곳이라는 뜻으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고, 영서지방을 오가던 길손들이 삼각산이 보이는 이 곳에서 임금에게 예를 갖추어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산자락 근처에서 실학의 선구자 정약용 등 많은 인재들이 태어난 것도 이 이름과 관련이 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뿌옇게 뒤덮은 하늘 아래 안개비까지 내리는 산, 주위의 경치를 전혀 볼 수 없는 산마루는 우리를 오래 머물지 못하게 했다. 날씨가 맑았다면 산 동쪽의 운길산, 산 서쪽 바로 아래 바댕이 마을, 그리고 조금 멀리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 그 아래쪽에 넓게 펼쳐진 팔당호도 시원스레 볼 수 있었을 것을. 날씨가 원망스러웠다.
□ 바댕이를 한자로 옮긴 것이 팔당
일행을 따라 팔당쪽을 향해 하산길로 들어섰다. 올라온 길에 비하여 거리가 짧은 만큼 비탈이 급했다. 올라올 때 워낙 많은 힘이 빠져서 다리가 많이 떨리고 힘이 없어 자주 넘어졌다. 빗방울이 제법 커지면서 옷을 적셔서 좀 춥기까지 했다. 중간쯤 내려온 지점에서 그들과 함께 비를 맞으며 식사를 했다. 공짜 물에 공짜 밥까지, 이 날 나는 하늘이 주신 은인을 만난 것이었다.
팔당 마을로 내려오니 마을이 완전히 비에 씻겨 있었다. 경춘선 전철 개통으로 새 역이 생겨 동네가 전에 와 보았을 때보다는 훨씬 번화해진 느낌이다.
팔당(八堂). 이 곳에 여덟 개의 당(堂)이 있어서?
그게 아니다. 팔당은 '바댕이'란 토박이 마을 이름을 한자로 음차한 것이다. 한자로 '바'자가 없어 이 음에 가까운 '팔(八)'자를 취한 것. 바댕이는 '바다나루'라고도 부른다. 한강가의 넓은 나루이기에 이 이름이 붙었다. 강의 양쪽 산세가 수려해서 여덟 선녀가 내려와 놀던 곳인데, 그 자리에 여덟 개의 당을 지어 놓았다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지만, 믿을 만한 얘기는 아니다.
팔당 근처에는 조개울 마을도 있다. 조개가 많이 나서가 아니라 좁은 골짜기가 있어서 나온 이름이다. '조개울'은 '조배울(좁의울)' 또는 '조게울(족의울)'이 변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좁(족)'은 바로 '작음'이나 '좁음'을 뜻한다. '울'은 '골짜기' 또는 '골짜기 마을'의 뜻이다. 이 조개울 마을 뒤쪽으로 들어서서 예봉산을 오르는 길도 있는데, 이름처럼 골짜기가 아주 좁다.
비구름 속의 예봉산은 그런 대로 운치가 있었다. 또 비에 씻긴 바댕이(팔당) 마을의 모습도 색다른 데가 있었다. 꼭 보고픈 두물머리가 저만치 있지만, 흠뻑 젖은 옷과 축 쳐진 발은 어느 틈에 팔당역쪽으로 몸을 나르고 있었다. /// (글. 배우리)
토지공사 사보(엘플러스) 배우리 땅이름 기행 `예봉산 `팔당 091000
www.travelevent.net (한국땅이름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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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물머리 근처의 땅이름
능내리(陵內里) [능안, 능내] (리)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본래 양주군 초부면의 지역. 서원부원군 한확의 묘가 있어서 능안 또는 능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봉안리, 마현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능내리라 해서 와부면(읍)에 편입되고, 1963년 조안출장소의 관할이 되었는데, 1980년 남양주군(현 님양주시)에 편입됨.
노루목 (목)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
능안 동쪽에 있는 목. 노루의 목처럼 생겼음.
다래골 (골)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
능내리에 있는 골짜기. 다래가 많음.
마재 [두척, 마현] (마을)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
비선골 남쪽에 있는 마을.
막은데미 (골)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
비선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서원부원군묘를 쓸 때 사성을 높이 하였는데, 풍수의 말이 금까마귀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데, 사성이 높아서 알이 곯는다 하여 막은 사성을 없앴다 함.
서원부원군묘(西原府院君墓) (묘)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
능안 북쪽에 있는 서원 부원군 한 확의 무덤. 금까마귀가 알을 품은 형국이라 함.
소내나루 [우천도선장] (나루)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
마재 앞에 있는 나루터. 광주군 남종면 우천리 소내로 건너감.
움앞나루 (나루)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
움앞에 있는 나루터. 광주군 동부읍으로 건너감.
장승배기 (골)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
능내리에 있는 골자기. 장승이 박혀 있었음.
정다산묘(丁茶山墓) (묘)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
능내리에 있는 다산 정 약용의 무덤.
두물머리 (강)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진중리
진중리 동남쪽에 있는 강.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침.
팔야리(八夜里) [여덟밤이, 팔야] (리)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본래 양주군 진벌면의 지역으로서, 조선 태조가 함흥에 있다가 서울로 돌아오는데, 이곳에 이르니 여덟 밤이 되므로 태조가 '아, 여덟 밤이로구나' 하였다 하여 여덟밤이 또는 팔야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검단리 일부를 병합하여 팔야리라 해서 진접면에 편입되고, 1980년 남양주군(현 님양주시)에 편입됨.
내각리(內閣里) (리)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본래 양주군 종동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현창리, 바각리, 봉현리, 내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조선 태조가 함흥에서 돌아올 때 풍양궁에서 머루르는데, 내각이 맞이하러 와 있었으므로 내각리라 하여 진접면에 편입되고, 1980년 남양주군(현 님양주시)에 편입됨.
외솔무덤 [최현배묘] (묘)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한힌샘무덤 북서쪽에 있는한글 학자 외솔 최현배 박사의 무덤.
한힌샘무덤 [주시경묘] (터)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
한글산에 있는 한힌샘 주 시경의 무덤. 1960년에 서울시 신사동 고탯골에서 이곳으로 이장하였다가, 1981년 국립 묘지로 다시 옮기고 비와 상석만 남아 있음.
팔당 근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