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조부모, 조부모, 부모*
나는 증조부모님, 조부님을 뵌 적은 없지만 증조부님은 자손이 없어서 형제 중 둘쨰 할아버님의 둘째 아들를 양자로 두셨다고 한다.
조부모님 사이에 1남 1녀를 두셨는데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재가를 하셨는데 딸을 낳으셨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약간 떨어진 상주극장 옆에 분가하셨다.
할아버지는 워낙 부지런하시고 이재(理財)에 밝으셔서 재산을 증식하여 부자 소리를 들었다.
두집 살림살이는 할아버지가 관장하셔서 아버지는 오로지 공부만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16세에 18세의 큰어머니와 일찍 결혼을 하셔서 1남 3녀를 두셨다.
아버지 17세 때 4대 독자인 큰형님이 태어나셔서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머리가 총명하고 영특한 큰 형님은 경성제대 의과대학을 졸업 후 개인병원 개원을 앞두고 한강에서 익사하는 바람에 불행한 가족사를 남겼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자랑스럽던 4대 독자를 잃었으니 황망함이야 이루 표현할 수 없었다.
학생신분으로 결혼했던 큰형님은 분가해서 딸도 있었다고 한다.
소문에 의하면 상주 고향에 있는 구 여성인 형수님 외에 사귀는 신 여성이 있는데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다.
*아버지, 큰어머니, 어머니*
만학도이신 아버지는 중학교 3학년 때 큰 형이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니 부끄러워 자퇴를 하시고 집에서 한자공부를 하셨다. 불혹의 나이에 보배같은 자식을 잃은 슬픔에 아버지는 술로 세월을 보냈다.
몇 년후 할아버지 주선으로 아버지 나이 43세에 어려운 처지의 처녀를 후실로 맞으셨다.그 처녀가 내 어머니시다. 당시 18세에 시집을 와서 19세에 딸을 낳으니 할아버지가 마음 편히 살라고 문경 산양면 신전리로 이주해 그곳에서 아들둘이 태어났다. 아버지는 슬하에 총 3남 4녀를 두셨다. 어릴 때 기억은 아버지, 어머니, 큰어머니, 큰어머니 막내딸, 우리 삼남매와 외할머니, 이렇게 8식구가 살았다. 외할머니는 딸집에서 농사일을 돕다가 내가 3살 때 돌아가셔서 우리 선산에 묻히셨다. 남매를 두셨는데 외삼촌은 몸이 허약하여 자주 아팠는데 아버지가 도움을 주신 듯 하다. 나는 어머니가 문맹인 것을 고등학교 때 알았다. 외삼촌은 겨우 결혼을 하고 외숙모 친정과 합가해서 5남매를 낳아 출가시키고 바로 돌아가셨다.
큰 어머니는 내 나이 6살 되던 해 앓고 있던 페병으로 돌아가셨다. 매섭게 춥던 한 겨울, 9살 형이 상주복을 입고 상여를 뒤따랐고 일가친척들이 그 뒤를 따르며 눈시울을 적셨다. 큰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제 비로소 어머니는 거처하던 골방에서 안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어 큰어머니 막내딸이 중매로 영등포 전매청에 근무하는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 이제 아버지 어머니 우리 삼남매
5식구가 오붓이 살게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재야의 한학자셨다.
사랑방에서 서책 읽으시는 소리가 낭랑하셨고 장정들에게 천자문도 가르치셨다. 경제적으로 뒷받침이 되니 서툰 농사일은 머슴에게 맡기셨다. 어머니가 곱게 차려주신 두루마기와 중절모, 또는 갓을 쓰시고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로 다니시며 한학자들 모임("동도회"?)에 참석하시며 며칠을 출타하셨다. 대구 경북사무소는 약전골목의 덕흥당 한약방이었다 그런데 이 못난 자식들은 아버지의 학문을 계승하지 못하고 깊이도 알지 못한 터라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 뵈올 면목이 없다.
*큰어머니와 4남매*
아버지는 16세에 두 살 더 많은 창녕조씨 큰어머니와 결혼하셨죠.
차례로 1남 3녀를 두셨습니다.
17세에 큰형님이 태어났고 연이어 딸 셋을 두셨습니다.
큰형님은 앞에서 소개한 대로 천재로 단명하셨고,
첫째 누님은 선산 심00 자형에게 출가했습니다.
시아버지는 왜정 때 선산 경찰서장을 하신 분이고,
자형은 6·25 때 북한군한테 경찰 가족이라고 고문당해서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렵게 3남매 키위 내서 출가시켰습니다.
둘째 누님은 딸 중에서 유일하게 상주중학교를 졸업 했습니다.
청리 이00 자형을 만나서 결혼 했습니다. 우리 가족 중에 큰형님, 둘째 누님이 엘리트죠.
이00 자형은 청주와 인천교대에서 교수로 재직하셨습니다.
셋째 누님은 내가 6살 때 우망골 정00 자형과 결혼 했습니다.
내가 아기일 때 제일 많이 따르던 누님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누님의 혼수를 잘 안 해 준다고 누님이 툇마루를 잡고 울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나도 따라서 울었죠.
지금은 첫째 누님은 진즉에 돌아가셨고(어머니보다 연상) 선산에 안장하셨습니다.
둘째 누님도 청리 앞산에 안장됐습니다.
두 자형도 돌아가셨습니다.
셋째 누님은 영등포 신길동에 사십니다.
남매지간이지만 나이 차이가 크게 나고 대면한 일 수가 적으니, 친밀도는 조금 약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올봄에는 영등포 누님이 생각나서 판교에서 사는 아들놈한테 대신 좀 찾아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용돈도 드렸습니다. 다들 그립습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기대*
아버지가 나에게 "언제나 어느 때나 성실하게 살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고향 집에 들렀을 때다.
아들 사랑이 엄청나게 크신 분인데 표현을 전연 안 하신다.
아기 때도 안아 주지도 기저귀 한번 갈아주지도 "공부해라" "차 조심해라" 등등 이런 말씀을 전연 안 하셨다.
표현을 전연 안 하셨다고 지금 생각해 보니 이해 불가이다.
내가 아버지가 되고 자식이 커가고 같이 생활해 보니 더욱더 그렇다.
생각났을 때는 갑자기 뇌졸중으로 말문을 닫고 병환에 계시니 물어 볼 수도 없었다.
어머니가 간병 중에 주말에 이틀씩 뵈러 갔었다.
그때 대소변을 몇 번 갈아드렸었다.
엄청나게 거부를 하시면서 싫어하셨었다.
어머니한테도 다른 식구들 일상적인 대화 외에는 다정한 말씀은 일절 없으셨다.
부끄럽고 민망해서 그러신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은 든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런 성격에 적응하신 듯,
오로지 아버지가 술만 드시면 생각 이상으로 화를 내셨다.
반대로 어머니는 모든 일은 네가 잘 알아서 하라고 하고 말씀을 자주 하신다.
모든 부모처럼 모든 부모 처처럼 자식 챙기고….
그런데 알게 모르게 큰아들 더 챙기는 것이 눈에 보인다.
불행한 미혼 시절을 보내고 아버지의 후처로 들어와서 4대 독자인 형을 낳았을 당시에 할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의 면을 세워줬다는 큰 기쁨에 형에게 더 애착이 갔으리라는 나의 짐작이 맞지 싶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큰아들을 챙기셨다.
나는 그 마음을 이해했고 어머니 마음 편하도록 행동했었다.
*어머니 내 어머니*
어머니!
이 단어만 봐도 눈물이 납니다.
불행한 어린 시절,
정착 못하고 떠돌며 문맹일 수밖에 없었던 소녀 시절,
18세 처녀 적에 자식 낳아 주려고 26살 많은 아버지의 후처로 들어가서
고된 농사일 하시고 자식 뒷바라지로 늙어가신 어머니!
말년에는 중풍으로 6년을 투병하시느라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불쌍한 우리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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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떠나보내 드리며*
아버지는 소천 하신 지 40년이 되었다.
향년 86 세셨고 내 나이 36세 때이다.
매우 건강하셨는데 어머니와 다투시다가 뇌출혈로 중풍이 오셔서 일 년을 못 넘기고 돌아가셨다.
술을 자주 드셨고 주사가 약간 있으셔서…. 평소 술을 드시면 마음속의 화를 주체하지 못하시고 한탄도 하시고, 우시는 경우도, 어머니한테 막말도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격노해서 맞대꾸도 하십니다.
그날도 부부가 말다툼하시다가 아버지가 쓰러지셔서 119로 문경병원으로 가셨습니다!
말문도 닫고…. 두 달 후 퇴원하셨는데~
의식은 있는 거 같으나 의사소통이 안 됐습니다.
집에서 어머니가 간병하셨고 끝내 말씀을 못하시고 거동을 못하시더니 식사량이 줄고 야위어서 4달 후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의 일생*
어머니의 인생살이는 불우한 삶이었다.
18세 이전에는 외할머니와 남동생, 3식구가 살기가 어려워서 정착도 못 하고 떠돌아다니시다가 할아버지의 소개로 아버지의 후처로 들어와서 외할머니와 같이 집안 살림을 맡았다.
어머니의 남동생(외삼촌)은 같이 살기가 힘들 것 같아서 대전 친척 집으로 갔다.
어머니는 대(大)식구 부엌살림을 맡았다.
이듬해에 누님이 태어나고, 8식구가 문경시 산양면 신전리 2구(장잠)로 이주를 해서 새살 터울로 연달아 아들을 낳았다.
내가 막내다.
안채와 사랑채가 있었고,
사랑채는 사랑방과 뒤마루 옆엔 마구간이 있고, 옆에 창고 그 위에는 곡식 보관하는 다락방 있고 또 그 옆엔 디딜방앗간이 있는 4칸 집이었다.
안체는 부엌과 부엌 뒷방, 안방과 안방 뒷방, 겹 마루, 상방과 상방 뒷방 옆에 툇마루로 된 4칸 겹집이었다.
사랑방은 아버지가, 안방은 큰어머니가, 어머니는 상방에, 외할머니는 상방 뒷방을 썼다.
내 나이 6살 때 외할머니와 큰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외할머니는 노환으로, 큰어머니는 않고 게시던 폐병으로 돌아가셨다.
같은 해 누님(큰어머니의 막내)이 시집을 가셨다.
이제 어머니의 다섯 식구가 되었다. 어머니는 비로소 안방으로 몸을 옮기셨다.
식사 때는 사랑방엔 머슴 밥상을 한 상 차렸고, 안방에는 아버지 한상 우리 세 남매 한 상을 차리셨다.
자신은 남은 밥이나 반찬들로 상 밑에서 드셨습니다.
논농사는 머슴이 지었고, 밭갈이 빼고는 어머니가 파종, 김매기, 수확 다 하셨다.
나중에 땅이 줄어들고, 일부 밭이 논으로 바뀌고 해서 두 마지기 정도를 말년까지 지으셨다.
아버지가 1984년에 돌아가시고 46년을 혼자 사셨다.
고향에서 40년, 병석에서 6년을 사셨다. 아버지와는 30년을 사셨다.
2019년 겨울에 운명하셨다.
*어머니의 마지막 외출*
어머니께서는 병석에 계신 지 여러 해가 되었고, 2018년 4월은 어머니의 생애 마지막 외출이 될 것임을 우리 세 자식은 알고 있었습니다. 누님, 형, 그리고 나는 어머니께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드리고자 마음을 모았습니다. 오랜 병상 생활로 몸이 많이 약해지신 어머니를 모시고 떠난 여행은 경주였습니다. 벚꽃이 만개하고 그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한 시기를 지나고 있었지만, 경주의 벚꽃길은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습니다.
경주로의 여정은 우리에게도 어머니에게도 매우 특별한 순간이었습니다. 휠체어에 모신 어머니와 함께 벚꽃이 흩날리는 길을 천천히 걸으며, 우리는 어머니의 얼굴에 드리운 미소를 보았습니다. 벚꽃의 아름다움에 어머니께서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어머니의 생애 마지막 여행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우리는 어머니께서 느낄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경주의 블루원 리조트에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곳에서의 밤은 어머니와 함께한 시간을 더욱 소중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감포해변으로 향했습니다. 바다를 바라보며 어머니와 함께한 그 순간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감포해변에서의 시간뿐만 아니라, 경주의 여러 명소를 드라이브하며 어머니와 함께한 그 하루가 얼마나 귀중한 시간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어머니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다시는 고향을 방문할 수 없으셨고, 결국 이듬해 겨울, 어머니는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 여행은 어머니와 함께한 마지막 시간이었고, 우리는 그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경주의 벚꽃은 어머니와의 마지막 순간을 더욱 아름답고 특별하게 만들어 준 선물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그 벚꽃 길에서 보여주셨던 미소는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남아, 어머니를 추억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