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천(嵇瀳)스님의 유행 편지81 (불기 2558/5/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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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혜선우님
대청봉의 봄은 잠에서는 깨어났지만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었지요.
구룡령을 향하는 길에는 흰아카시꽃이 산을 품어 안고 연분홍 치마를 입고
봄날을 만끽하던 추억을 <봄날은 간다>의 가락에 실어 들려주고 있었지요.
그 가락에 맞추어 산의 생명들은 신경림 선생의 <농무>의 시를 낭송하며
시어에 담겨있는 풍물가락에 몸을 맡기고 있는지 손과 발이 춤추고 있습니다.
아카시는 한 때 숲을 황폐화시키는 공적으로 간주되어
몸이 잘리어 나가 사화를 겪었지요.
자신들이 심어놓고, 자신들이 숲을 망치는 나무라는 고깔을 뒤집어 씌웠으니
아카시 입장에서야 사화를 당한 선비보다도 더 억울하였겠지요.
아카시는 밀원 식물로 꿀의 보고입니다.
어린 날 아카시꽃을 따서 향기롭고 달콤한 꽃을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지금처럼 몸의 세포에 저장돼 있지요.
꽃은 꿀의 채집은 말할 것도 없이 튀김도 만들 수 있고
찹쌀 풀을 발라 말려 부각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필요에 따라 쓰고 버리기를 마다하지 않지요.
그러면서 늘 이번이 마지막이니 조금만 참고 기다려 달라고 말하지요.
그 와중에도 그들의 욕망을 채우는 일만은 멈추지 않고 지속합니다.
먹어도먹어도 허기에 시달리는 불가사리도 그들보다는 탐욕이 적습니다.
경에는 한 발우의 짜파티로 슈라바스티 사람을 다 먹이고도
발우의 짜파티는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고 합니다.
붓다께서 한 발우의 짜파티로 온 도시의 사람들에게 먹이고도 남았다는 그 뜻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한 발우의 짜파티로도 한 도시의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은
모두가 그 이익을 함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만의 세상이 아니라 우리들의 세계이기에
한 발우의 짜파티로도 먹을 수 있습니다.
난 한 발우의 짜피티로도 먹을 수 있는 그런 붓다의 세계를 지향합니다.
나의 뜻을 꿈속에 꿈을 잠꼬대하는,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정신 차려 이친구야 하고 질책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실현 불가능하다고 하겠지요.
불가능하기에 그것을 가능케 하려는 노력이 서원행입니다.
처음부터 가능하다면 서원행은 필요 없습니다. 바로 실행하면 됩니다.
붓다께서 매의 가능성을 보고 비둘기를 대신해 저울 위에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저울에 올라가는 것이 자신의 해야 할 서원행이었기에
기꺼이 저울 위에 던져 올린 것입니다.
이미 불가능과 가능을 염두에 두고 계량하고 있다면
그것은 서원행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서원행은 가능과 불가능조차 넘어서는 실천입니다.
바로 그 시점에서 아파마나의 꽂이 피어납니다.
송천 떡마을에서 아주머니가 추천해 주는 떡 세 개를 들고 길을 걸으니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이 작아졌습니다.
그런데 떡이 맛있어 한 입, 한 입 먹고 가다 “정작 호랑이를 만났을 때
호랑이 줄 떡이 남아있지 않으면 어쩔거나”를 연발하며
입에 떡을 넣고 있는 나는 호랑이보다 맛있는 떡을 더 무서워하는 떡보입니다.
아카시 향기 가득한 아카시꽃밭에서 혜천 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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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무(農舞)
-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괭가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조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 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 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 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 친들 무엇 하랴.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이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이거나?
고개 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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