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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진실 된 일본의 모습은 무엇인가?
일본의 진실 된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역사학자들이 취하는 입장에 서서 살펴보려고 한다. 일본은 어떠한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그 땅위에 어떤 사람들이 살아 왔는가를 먼저 아는 것이 일본의 모습을 잘 그려 낼 수 있다고 믿는다. 일본 땅과 일본 사람들이 일본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설명하려고 한다.
일본은 홋카이도(北海道), 혼슈(本州), 시코쿠(四國) 그리고 규슈(九州)의 4개의 큰 섬과 6,850여개의 작은 섬으로 구성된 나라다. 큰 4개의 섬은 현재 지하 터널과 교량으로 연결되어 있어 모두 자동차로 다닐 수 있다. 그 영토의 크기는 38만 평방킬로미터로 한국의 1,7배가량의 크기로 된 나라이다.
일본은 화산으로 된 나라이기 때문의 지금도 활화산이 많으며 이따금 지진과 태풍의 피해를 늘 받아온 나라로서 국민의 심리적 불안은 늘 있어 왔다. 한국에 비하면 2000미터가 넘는 높은 산이 많고 약 70여개나 되기 때문에 국토가 산맥으로 많이 갈라져 있어 강도 많고 사람들의 자유로운 움직임이 어려웠었다. 국토의 약 15%정도에 사람이 살거나 농사를 질 수 있다. 아무래도 쌀농사를 짓던 농부들은 얼마 안 되는 논을 이용하기 때문에 아주 고생을 많이 했다. 그들이 쌀농사에 대한 집착은 우리네만큼 보다 더 강했으며 명치유신 이후 비료가 나오기 전 까지는 농민들이 많이 고생한 나라이다. 그래서 일본 농촌 사람들은 민족자본 축적의 원천이었고 아주 많이 고생하고 착취당한 농민이었다.
일본사람의 기원에 관해서는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민족이다. 얼굴이 한국인과 비슷한 사람이 많고 언어가 비슷한 구조로 되어 있어 이런 이들은 대체로 고구려이후 대륙에서 옮겨 간 사람들일 것이라고 한다. 이들은 한반도와 만주에 살던 몽고족과 거란족과 같은 인종적 기원을 가진 것으로 인정된다. 특히 니이가타현(新潟県)과 그 보다 북쪽 지방의 주민들은 체구가 일반적으로 훨씬 크고 생김세가 우리의 함경도 사람들과 같아 보인다. 그리고 원래 일본의 열도 북쪽에 많이 살던 아이누 족이라는 원주민으로 간주되는 인종이 있었으나 지금은 홋카이도에 주로 집중되어 소수만 남아 있다.
아시아 대륙의 끝자락에 위치하여 태평양을 향하여 길게 늘어선 섬나라이기 때문에 남방의 다른 섬사람이 이주했을 가능성을 많이 인정하고 있다. 남방계통의 말레이-폴리네시아 인종으로 간주되는 종족이 많게 보인다. 이들의 풍습이나 거주 양태를 보면 일본사람들의 원래 농촌의 거주형태가 그러하고 농어민이 걸치고 입고 다니는 풀로 된 옷이나 속옷의 빈곤함을 보면 남방 종족임에 틀림없는 종족이 많다. 태평양 연안을 향한 지방의 많은 사람이 키가 작고 얼굴과 몸에 털이 많으며, 턱을 포함한 얼굴의 골상 때문에 치아가 고르지 못한 사람이 많아 남방의 종족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특히 치아가 고르지 못한 것은 남방계통의 특징이고 수염이 많은 것은 아이누 족의 특성을 가진 때문이다.
16세기가 되어 유럽 사람들이 처음으로 말레이 반도를 넘어서 소위 “극동(極東: Far East)"으로 진출하였을 때 이지역의 문화형태는 인도나 서남아시아의 문화와 아주 다른 것을 발견했다. 인도지나 반도의 동해안으로부터 한반도의 남단인 일본에 이르기까지의 문화 유형은 그 근원이 중국문화에 있었으며 중국이 국제적 세력 구조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고 의식구조의 원천이 중국의 문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은 정도와 특성은 시간과 장소의 차이에 따라서 달랐다.
(주) W. G. Beasley, The Modern History of Japan (New York: Frederick A. Praeger, Publisher, 1963), p. 1.
그런데 일본민족이 형성되는 문화적 의식적 측면에서 보면, 이는 대게 5세기 이후로서 아직 통일 권력이 일본의 섬에 등장하지는 못했지만 점차 통일권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조선반도에서는 가야가 백제에 의하여 멸망하고 상당한 왕족이 규슈로 이주하였으며 이들은 100여년 뒤에 또 다시 백제가 망하여 그 왕족이 다시 다수의 백제인과 함께 규슈로 이전 하게 됨에 따라 통일 왕족을 이끌고 있던 세력이 일본의 내해를 거처 지금의 관서지방으로 옮겨 갔다.
기본적으로 한일간에 역사인식을 공유하지 못하는 부분은 이 고대사의 설명이다. 한반도의 삼국사기(三國史記: 1145년 김부식 편찬)와 중국사기(中國史記: 사마천의 기록, 기원전 2세기), 그리고 일본서기(日本書記: 720년 완성)에 실려 있는 역사적 기록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역사적 과거가 거론된다. 이 기록물들은 우리의 이두문자(吏讀文字)를 어떻게 읽고 해석하는가에 따라서 다양한 이론을 제시한다. 한 가지 일본 학계에서 인정하고 수긍하지 못하는 것은 백제의 왕실과 일본천황의 가계가 동일한 집안이라는 역사적 사실의 주장이다.
(주) 예를 들면 비류백제의 이야기나 백제왕의 아들이 규슈와 관서지방(오사카 근처) 그리고 관동지방인 동경근처의 이세(伊勢)반도에 백제인의 정착지가 있었다는 한국 학자의 주장이다. 결국 백제와 왜국(倭國)이 같은 왕실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일본서기에 나오는 현 함안(咸安)지역의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일본사람들이 차지했던 땅이라는 주장 같은 것이다.
다음의 비디오에 실린 주장을 볼 필요가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zLAtbwRRKsM (천황이 된 백제의 왕자들 - 김용운 교수); http://www.youtube.com/watch?v=pn17aWV69IM (일본 건국 비화의 비밀 - 소설가 최인호의 역사의 추적 “제4의 제국”); http://www.youtube.com/watch?v=GWvFNVTZJQE (백제의 다무로 (영토)였던 왜나라 이야기 - 김한빈 교수)
일본의 고대사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일본민족이 형성되는 시기는 대게 3세기 이후로 추정하고 있다. 이 시대는 고분시대(古墳時代)라고 하는데 백제 사람이 정착했었다는 지역에 큰 무덤을 많이 축조하였는데 그 무덤의 유물이 백제나 가야의 그 것과 같은 유물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일본에는 통일세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통일 왕조인 야마도 조정(大和朝廷)이 이루어진 것은 고분시대보다 100년 이상 후인 7세기 초에 고도쿠덴노(孝德天皇)가 중앙정부를 세우고 모든 일본사람은 농사에 종사하게 했다. 그리고 중국의 형식을 따라 도시를 건설하였고 사회개혁을 하였는데 마침내 쇼토쿠태자(聖德太子)가 17조의 헌법을 제정 선포하여 국가의 기틀을 만들기 시작 했다. 이를 대화개혁(大化改革)이라고 하며 당시 연호를 다이가(大化)라고 하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의 중앙정부의 정비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잘 기술된 것으로 보아 일본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역사적 사실이다.
(주) 飯倉晴武, 工藤雅樹 編著, 豊田 武 監修 『日本の歷史』小學館の學習百科図鑑6 (東京: 小學館, 1974), pp. 22-30. 이 책은 일본정부의 “新指導要領”에 準據하여 만들어진 책으로 그 책의 초두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이것이 바로 일본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관과 문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가를 잘 표현하고 있다. 즉 “이 도감의 사용 요령: ....역사는 마음의 고향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선조의 일을 찾아서 현재에 그 것이 어떻게 되어 있었는지를 올바르게 이해하게 되는 것이 일본을 정말 사랑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이 도감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 만든 것입니다. 잘 그 역할을 하게 되길 바랍니다.”
일본 사람들은 여러 가지 외부의 영향을 오랜 기간 거처서 일본민족을 형성하였다. 문화적으로는 대륙의 문화를 받아들여 일본문화의 지배적인 것으로 삼아 그 민족문화를 이룬 것이다. 현재 일본 사람들은 1억 2천 7백 만 명이 그 열도 안에 살고 있으나 최근의 여러 가지 인구 발전 조건에 따라 년 간 29만 명 가량의 감소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풍토와 지리적 조건 속에서 살고 있는 일본사람들이 일본의 역사적 전개과정에 어떤 특성을 들어내고 있는 가를 다음에 살펴보려고 한다.
가. 일본의 풍토적 배경
일본은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머리에 길게 화살모양으로 늘어선 섬나라로서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어 내지 못했고 밖에서 들어온 문화를 받아서 자기 문화로 만들어 왔다. 그래서 왜래 문화에 대해서 늘 종속적이고 수용적인 입장을 지녀왔다. 지금도 일본의 지도자들은 원치 않는 외래문화의 수입을 두려워하고 여러 가지 요령을 가지고 이를 걸러내는데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일본의 고대문화는 가야, 백제, 그리고 신라를 통해서 한반도로부터 일본으로 전해졌거나 중국과의 직접적 교섭을 통하여 새로운 선진문화를 받아드렸다. 앞서 백제와 일본 황실의 씨족 관계와 당나라로부터 직접 국가의 기틀마련에 대한 제도의 수입을 소개한 것은 일본역사의 중요한 문화적 종속임을 증명한다.
일본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이렇게 문화를 받아드리는데 여러 가지 전략적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 필요한 문화적 내용은 필요에 따라 받아들이기도 하고 필요하지 않으면 자연의 장벽인 바다를 장벽으로 문화의 수용을 절제하고 조절하여 왔다. 일본의 근대사를 평생 연구해온 서울대학교의 김용덕(金容德)교수는 일본의 고대 문화수입 양상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일본의 고대국가 형성과정에서 볼 때 국가 경영에 요구되는 기본지식을 다 받아들여 충분해졌다고 생각되면, 그 문화적 내용을 소화하려고 이 지리적인 장벽을 이용하였다. 아시아 대륙에 있는 중국이나 한국 같은 선진외국이 바다 멀리 떨어져있는 일본을 개명(開明) 시키겠다는 의도가 없을 경우에는 일본은 자기들의 필요에 의해, 대륙에 건너와서 배울 수밖에 없었다.
백제와 신라의 승려들이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고 그 사회를 개명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일본에 건너가서 문화를 전파한 3-7세기 간의 일을 제외하고는 스스로 일본의 유학생들이 수(隨)나라와 당(唐)나라에 와서 7세기에 수백 명 씩 약 15회에 결처 견당사(遣唐使)라는 공식적 사신들이 파견되었었다. 이들이 습득한 선진문화는 당시 일본국가가 건국초기에 필요했던 제도와 지식을 가져갔다. 이렇게 일본 사람들은 중국문화를 배웠으며 9세기 중반까지 이런 식으로 문화를 수입했다.
9세기에 이르러 수입된 대륙 문화를 일본 안에서 자체적으로 수용하고 발전시키기 시작 했다. 이 시기에 생긴 새로운 문화적 유산을 “헤이안(平安) 문화”라고 한다. 헤이안은 지금의 교토(京都)를 가리키며 일본의 천황가가 이 도시로 옮기고서 새롭게 꽃핀 문화를 말한다. 그래서 헤이안 문화를 일본의 고유문화라고 일본사람들이 흔히들 말한다. 이 시기에 쓰인 『만요슈(万葉集)』와 같은 작품은 대륙문화의 흔적이 많이 들어 있고 유교와 도교의 가르침과 불교의 색체가 강하다. 이 같은 문화적 내용은 헤이안 문화가 생기기 전 일본 고대문화가 한반도와 중국 대륙 등을 통해서 건너온 문화가 기본이 된 때문이다. 일본 안에서 “헤이안 문화”로 꽃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지리적 단절을 이용하여 스스로 다른 문화를 소화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오래 동안 섬나라 안에서 고립되어 살아오던 일본이 근대적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은 10시기 이후 아시아 대륙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살다가 17세기 이후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쇄국정치로 긴 시간 동안 외국의 문화와 접촉을 거부하였었다. 그 기간 동안 국내의 토착적 영주의 활거와 그 통치체제를 이끌어온 쇼군(將軍) 중심의 군사정권이 교토(京都)에 천황을 모시고 에도(江戶)에서 절대적인 군권으로 일반 농민과 상공인을 지배하면서 섬나라의 문을 250년간 완전히 닫고 살았다. 이 긴 기간에 이미 일본으로 유입된 문화는 완전히 일본적인 “사무라이”(武士)문화로 만들어졌으며 독자적인 특수한 문화를 만들어 내었다. 오늘의 일본 문화의 기본은 정신적으로나 평상시의 삶 자체가 이런 특수한 문화에 근거하고 있다.
19세기의 중반에 서유럽의 문화와 군사력이 아시아대륙의 끝자락에 까지 이르러 일본을 위협하게 되자 정체성의 혼란을 일으킨 일본의 지도자들은 국가의 안보를 지키기 위하여 또 다시 서구 여러 문화를 받아드리기 시작 했다. 명치유신이후 많은 사람들이 독일과 영국, 그리고 불란서에 가서 국가건설을 위한 여러 가지 제도와 기능을 직접 배워 왔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독일식 헌법제도의 수입과 영국의 의회제도인 내각제 수용이 바로 그런 것이며, 야마가타 아리도모(山形有朋) 같은 지도자의 불란서 육군제도를 수입하는 것이 나라가 필요로 하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위한 제도이며 이를 해외에 나아가 들여왔다.
1945년 2차 대전으로 미국에 폐전한 뒤에 7년 반 동안 미국의 점령군이 주둔하고 그 통치를 경험했다. 이는 일본 역사상 외국의 군대가 국내로 직접 들어와 일본사회를 완전히 개혁한 것으로 그 이전에는 전혀 없었던 일이었다. 전후 지난 70여 년 동안 민주주의 제도를 받아드렸고 그 후 경제 재건을 위한 미국의 지원을 통해서 외래 기술과 문화를 전폭적으로 수입하게 되었다. 서유럽과 미국으로부터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빠른 산업발전과 기술 축적을 하여 세계에서 둘째, 또는 셋째 번가는 부강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런 변혁을 경험한 일본 지도자들은 또 다시 일본 나름의 국수적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서 21세기의 일본은 아베 신조(安倍晉三)를 앞장 세워 스스로의 길을 지금 찾고 있다.
지리적 배경을 감안해서 한국과 일본을 비교 해 보면 한반도에서는 독자적 문화를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일본 보다 적었다. 한반도는 만주를 통해 직접 육지로 연결되어 있어, 중국에서 왕조가 바뀐다든지, 특별한 지방 세력이 생긴다든지 또는 새로운 정치사상이 왕조 교체와 함께 일어난다고 할 때 그 것이 한반도로 직접 밀려왔다. 한국의 문화 형성 과정에서는 이런 대륙의 영향을 끊고 일본과 같은 지리적 고립을 향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중국 문화의 영향이 빠르고 적극적으로 한국 문화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됐다. 그래서 한국 문화의 토착화는 그 여유가 일본 만큼 시간적 사정을 향유하지 못했다.
중국대륙의 정치 문화적 변화는 한반도에 곧바로 밀려왔다. 일본이 향유하는 섬나라로서의 특성(insularity)과 반도에 살아 온 우리 한민족이 지금까지 향유해온 반도로서의 특성(peninsularity)이 지닌 문화형성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것이 문화수용의 편협성과 개방성을 말하기도 한다. 이런 지리적 조건이 한일 두 나라의 문화 내용과 사람들이 결코 같은 성격을 지니지 못하는 것으로 안다. 감정적 대립이기 이전에 사물을 인지하는 과정에 그 순서나 규모에 있어서 아주 커다란 개인적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섬나라 일본이 누린 지리적 여건으로 외국 세력이 쉽게 밀려오거나 외부세력의 무력침략으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역사상 일본은 외국 군대가 섬 안으로 직접 들어와 지배를 한 일은 없었다. 태평양전쟁에서 폐전한 뒤 7년 반 동안 맥아더 사령부가 일본을 군정으로 다스린 기간을 빼놓고서는 외국군이 들어와 일본을 지배한 일이 없었다. 그래도 일본은 하마터면 원자폭탄의 세례를 받아 완전히 폐허가 될 번 하였으나 일본천황은 히로시마(広島)와 나가사키(長崎)에 투하된 폭탄으로 20만 명이 한꺼번에 죽게 되자 황급하게 무조건 항복을 수락하였다. 그래서 미국의 지상군이 일본열도에 상륙하여 작전할 것을 막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180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66개 도시의 건물 40%가 파괴되었으며 30%의 산업 기반이 파괴되었다. 결국 일본은 처음으로 나라의 모든 것이 전쟁을 통해서 부서져 버린 경험을 했다.
섬나라의 특성 때문에 일본문화와 이를 향유하는 일본인들의 사고는 다른 개방적인 문화에서 사는 사람들과 비교하여 볼 때 대단히 폐쇄적인 성향을 갖게 되었다. 외국 문화로부터 고립되었기 때문에 국민의 사고 유형이나 가치관이 대단히 동질적인 측면을 나타내고 있지만, 그 동질성이 이따금 배타적인 특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이 같은 특성을 일본 사람 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민족성이라고 찬양하고 주장하지만 이는 지리적 환경 때문에 오랜 기간에 만들어진 생각이고 그들의 믿음인 것이다.
일본역사의 신성화(神聖化)로 까지 미화시키고 있으며 외국에 대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시각을 왜곡하는 경향이 강하게 들어나고 있다. 때문에 일본에서는 외국 문화를 모방하고 수입하여 일본화 시키는 경향이 농후하다.
(주) 金容德,『앞의 책』, p. 12 - 13. 저자인 김용덕 교수는 천황제 이론 때문에 불교와 유교가 본래의 사상과 이론을 벗어나서 “신불습합(神佛習合)” 이나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천황“ 이라는 일본적 개념을 만들어 내어, 일본의 독특성을 강조한 나머지 외국에서 받아드린 것을 일본 형으로 변질 시키고 있다고 본다.
예컨대 일본 정치체제의 기본인 천황제에 관한 이론과 신화적 요소는 일본 국가의 독특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것은 중국과 한국의 영향을 받아 일본의 고대국가가 만들어 질 때 아시아 대륙의 국가가 만들어 질 때에 있었던 비슷한 관념이었고 국가건설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신화이기도 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이런 관렴에 근거하여 일본 내에 단절된 상태 속에서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권력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천황의 위치를 승격시킨 것이라고 생각된다.
(주) 필자는 일본 천황제 이론을 연구하면서 북한의 주체사상과 김씨일가의 권력 계승에 관한 이론을 만든 황장엽 비서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가 1943년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할 당시 일본의 조선총독부는 한민족을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이념 교육을 철저하게 시켰다. 황비서가 받은 일본 천황의 이론적 전개와 주체사상의 북한 권력의 신성화가 동일한 근거를 가지게 된 것 으로 판단하게 되었다.
이 점은 일본 학자가 절대로 받아 드리려고 하지 않을 것이지만 이론적 근거와 전개 과정이 아주 비슷하다는 것을 저자는 알게 된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앞의 본문에서 인용한 산게이 신문에 실렸던 기고문에 이런 주장이 실렸었으나 이 점에 대하여 아무도 항의하는 것을 받아보지 못했다. 고립된 환경에서 김씨일가의 통치에 대한 정당성의 확보를 위하여 절대 존엄의 신성화는 불가피할 것으로 보았다.
또 한 가지 풍토적 특성이 일본 사람들에게 미치고 있는 영향을 보면 이렇다. 일본은 지진과 태풍이 잦은 자연의 두려운 엄습을 늘 경험하기 때문에 일본사람들의 생활 심리에 자연 환경이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심리적인 불안이 현세의 허무적인 관념으로 팽배해 있다.
우리에게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본사람들은 단순히 삶과 죽음은 두 개의 갈림길을 가는 것으로 죽음을 미화하여 “자살”을 아름다운 것으로 승화시켜본다. 지난 전쟁 중에 “가미가제(神風) 조정사”는 아름다운 죽음으로 어차피 갈림길에서 죽음을 택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라고 미화한다.
일본에서는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서 이런 불안에 대비하려고 보통 사는 데도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그래서 지진에 덜 피해가 생기는 가벼운 목조 주택을 짓고 살지만 우리와 같이 흙을 개어서 짓거나, 석조 또는 벽돌로 된 주택을 짓지 않는다. 일반 주택은 아직도 대부분 목조 건물을 주로 짓고 산다. 이는 목조가 건축기술상 지진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진 피해에서 오는 자연환경에 대한 일본 사람 나름대로의 대응책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쓰나미(해일)”가 생기면 집이 통째로 물에 떠서 흘러내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불안에서 생기는 강박관념으로 생긴 또 한 가지의 일상생활에서 남다른 태도가 있다. 불안한 심리에서 생겨나는 잠재적 선택일 찌 모르지만 언제 재난이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저축을 해서 장래의 재난에 대비하려고 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좀 잘 살아보자는 경제적 이유보다도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돈을 아껴 쓰고 비축 한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상당한 저축을 은행에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하여 종교적으로 깊은 명상을 하거나 수행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비하여 일본 사람들은 현세적인 복을 기원하는 민간신앙의 행태가 많이 보인다. 마을의 귀퉁이나 일본절의 입구에는 복을 비는 글귀나 표 말이 가득하게 있고 작은 부처에게 소원을 써서 옷 입히기도 한다. 물론 각 집마다 가장 중요한 방 한 벽에 가미 다나(神棚)를 설치하고 그 선반 위 장 안에 신도(神道)의 여러 가지 표지물을 보관하기도 하지만 부모의 사진이나 다른 종교의 상징적 물건을 모시고 매일 아침에 복을 받기를 기원하는 현세 긍정적인 예식을 집행한다.
지형적으로 일본에는 높은 산이 많아 자연히 깊은 계곡 안에서 옆 동네와 항상 관계를 유지하면서 왕래하고 살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계곡에서 흐르는 강 때문에 살고 있는 한 지역은 다른 지역과 확실한 구분이 된다. 따라서 근대에 와서 교통수단이 발달해서 편리하게 서로 왕래 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각 지역은 서로 다른 사회조직이나 풍습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고대국가가 형성된 10세기 이후에도 별개의 고구(國)라는 서로 다른 통치 형태를 가진 65개의 지역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같은 특수한 지리적 조건에 따라 일정한 땅을 중심으로 생겨진 영주(領主) 중심의 봉건제도는 17세기부터 도쿠가와(德川) 군사통치 체제를 유지하게 되었으며 그 영주에 충성하는 사무라이가 나뉜 지역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하여 각 지방의 특수한 문화가 생겼다. 정치적인 편의를 위해서 모두 260개의 영주의 관할 하에 한(藩)으로 갈라진 행정구역을 설치하고 있었으며 그 연합체의 성격을 띠고 있는 바쿠후(幕府)가 중앙정부의 역할을 하면서 여러 한(藩)을 관리 조정하였다. 그 조정자는 천황이 임명하는 쇼군(將軍)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1868년 명치 신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획일적인 중앙집권제가 일본에는 생기지 않았다. 그 때까지 분할 된 지역사회는 중앙의 공권력에 의하여 완전하게 통합되지 못했고 이 같은 현상은 일본의 지리적 조건과 풍토적 특성에서 그 근원을 찾아 볼 수 있다.
나. 일본의 사회문화적 특징
지리적 특성과 더불어 일본의 기본적인 사회 문화적 특징을 갖게 된 것은 일본 사람이 우리와 달리 인종적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같은 문화권에서 유래 된 일본 사회가 대륙에서 생긴 국가와 다른 문화적 배경을 만들게 된 것은 오래 전부터 남방계열의 인종이 일본열도 안에 이주하여 살아서 또 다른 일본적 특성을 들어내게 되었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와 아주 다른 문화를 가진 것 가운데 그들은 근친혼을 한다. 물론 친 남매간은 아니지만 삼촌이나 사촌 간에도 결혼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와 같이 성씨가 처음 생겼을 때는 같은 성씨끼리 결혼을 하기위한 것이었으나 뒤에 유교적 생활 관념이 들어와서는 동성 동본 의 결혼을 금기시하였으며 지금까지도 이런 결혼은 피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 사람의 성씨(姓氏)는 혈연과 아무런 관계없이 주어진 이름이다. 같은 성을 가지고 있어도 혈연적인 연관성은 전혀 없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성씨가 6세기경부터 주어진 사람이 있지만 대체로 명치유신 이후 일본의 호적법이 실행 되면서부터 모든 농민들이 성씨를 가지고 집안의 호적으로 등록하였다. 대체로 살고 있는 지역과 지형에 따라서 성씨를 붙이기도 했다.
고베와 교도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는 다게사다 (武貞)라는 성씨를 갖은 이가 있는데 이 집안의 설명으로는 전라남도 담양군 무정면(武貞面)에서 일본으로 간 집안이라고 한다. 이런 경우가 있을 수도 있지만 다나카(田中), 야마모토(山本), 니시무라(西村) 등 농토의 가운데 집을 가진 사람이라던가. 산 밑에 사는 사람이라던가, 혹은 서쪽 마을 사람이라던가. 그 주거지의 위치에 따라서 성씨를 정한 것이다. 이밖에도 아베(安倍․安陪), 와타나베(渡陪․渡辺)와 같이 황실의 기능직을 맡았던 집안의 자손에게 붙여진 성씨도 있다. 말을 관리하던 집안이나 다른 지역과 무역 거래를 하던 집안의 사람들에게 붙여 진 성씨였다.
일본에서는 양자를 받아드리는 경우에도 혈연과는 상관없이 특별한 기능을 계승한다던가, 개인의 능력을 감안한다든가, 이런 능력 본위로 양자를 들인다. 전통적인 가무를 배우기 위해서 스승으로 모시는 집안으로 그 성씨를 받아 양자로 들어가거나, 기업이나 특수 직능을 가업으로 계승하기 위해서 능력 있는 사람을 성씨를 주어가면서 양자로 드린다.
일본사람들에게 가문(家門) 이라는 것은 피로 연결된 것이 아니다. 특히 그들이 쓰는 말로 “이에”(家: 집안)라고 하는 개념은 한국에서의 혈연으로 얽힌 관계보다도 집안의 명예나 전통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어떤 면에서는 일본과 한국이 중국의 유교적 사상과 생활 습관에 많은 영향을 받아 왔는데 그 실천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