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_류근홍
풀은 녹색의 피를 가졌다
사내가 마지막 잔디를 깎는다
예초기에 파편처럼 흩어지는 풀잎들
소박한 일생을 꿈꾸던 푸른 살들 허무하게 사라진다
무수히 밟혀도 오뚝이처럼 일어서던 고집이
날카로운 칼날에 잘리고
풀이 토해놓은 풀 비린내가 질펀하다
풀은 녹색의 피를 가졌다
풀밭에 앉았다 일어설 때 바지에 묻었던 풀물도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그 푸른 얼룩은 풀이 내질렀던 비명인 줄도 모르고
아무 생각 없이 투덜거렸다
그 하찮은 풀도 품어 기르는 것이 있다
벌레도 나비도 개미도 메뚜기도
모두 풀이 키우는 가족이었다
덕지덕지 붙어 있는 잡초들 온 힘을 다해 떼어냈을 때
나는 그들의 집을 허물었던 것이다
십자가에서 몸을 허물어 인류에게 봄이 된 사내처럼
봄이 오면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을
풀은 기억한다
네 개의 암에 잡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처럼
바늘
귀 하나에 외발이다
한 발 한 발 촘촘히 앞으로 걸어가면
구멍 난 허공도 함께 묶인다
옷의 색깔에 보호색처럼 실을 맞추면
가위는 구멍의 크기만큼 천을 오린다
뛰놀다 넘어진 구멍
나뭇가지에 찢어진 구멍
얼룩진 옷들, 해진 옷들이 반짇고리를 뒤지고
오색 실뭉치를 꺼낸다
미간을 찌푸리며 바늘귀를 찾고
오물오물 실 끝에 침을 바르고
기름진 머리에 몇 번을 문질러
한 땀 한 땀 가난을 꿰매던 어머니
물 빠진 빈티지 구제 옷들이 유행을 만드는 시대
여전히 찢어진 시간을 수선하며
느슨해진 단추를 칭칭 감는다
실밥이 풀려 떨어져 나간 단추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발을 묻고 듣는 이야기
겨울밤
아랫목에 발을 묻고 둘러앉으면
할머니가 옛날이야기를 묵은 주머니에서 꺼내셨다
무섭고 재미있고 오싹 소름이 돋던 귀신이야기
이야기 길목마다
무서운 귀신이 나타나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그 많던 도깨비와 처녀 귀신은 어디로 갔을까
어둑한 호롱 불빛이 환한 led 불빛으로 바뀐 탓인가
21세기 멀티미디어 시대
초 단위로 쏟아져 나오는 찬란한 문명의 불빛에
그들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햇빛과 달빛, 별과 구름, 귀신과 하나님
모두가 하늘의 이야기인 것을
우리들은 늘 닿지 않는 하늘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