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0장 17- 23절. 고넬료의 종들이 베드로를 청함. 요약설교
17-18절.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
1. 베드로는 세 번이나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이 깨끗하게 했는데 네가 왜 더럽다고 하느냐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부정한 음식에 대한 전통을 버리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물론 신앙적으로는 제사를 드려서는 절대 안 되지만, 실제적으로 안 믿는 어른들을 모신 가정에서 제사를 드려야 되는냐 말아야 하느냐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수 천 년 동안 해왔던 전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전통을 따라야 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느냐 심각한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한참을 고민하고 있었을 때 고넬료의 종들이 베드로의 집의 문을 두드린 것입니다.
얼마나 절묘한 성령의 역사입니까?
19절.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1. 베드로가 고민합니다.
그 때 고넬료의 종들이 노크합니다.
바로 그 때 성령님이 말씀합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신앙 생활의 모습입니다.
우리들도 여기까지 오면서 성령님의 이런 강력한 인도하심을 여러 번 느낍니다.
여러분에게도 여러분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시간에 성령님이 여러분에게 말씀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20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21-22절.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 대
1. 일반적으로 성도들은 말하기를 <목사님 그런 음성을 안 듣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안 들리는 것이 문제지요>라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엎드려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는 것은 마치 땀 흘리지 않고 돈을 벌려고 하는 불한당(?)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엎드려 기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 유명한 분이 조용기 목사와 김하중 대사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세요.
창세기 12장부터 22장까지 아브라함은 25년의 생애에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은 열 몇 번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때는 아브라함이 십 년을 기다렸습니다.
2. 베드로는 성령의 음성 앞에 모든 전통과 모든 문화와 모든 선입관을 포기하고 순종을 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환상을 보았을 때는 전통을 포기하지 못 했지만 성령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가 포기했습니다.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은 항상 모든 사람 앞에 있기 마련입니다.
즉 졸병에게 없는 고민이 장군에게 있고, 장군에게 없는 고민이 졸병에게 있는 것입니다.
또한 부자에게 없는 고민이 가난한 자에게 있고, 가난한 자에게 없는 고민이 부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만 고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 사람은 누구든지 불가능 앞에 서 있는 것이고, 죽음 앞에 서 있는 것이고, 한계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님 모시고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다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안 되는 것 같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되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지 않을 것 같으나 일곱 번째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다 되는 것 같으나 마지막 순간에 안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또한 일은 성공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령님 모시고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또 한 가지는 종들의 태도입니다.
종들이 베드로에게 찾아가서 22절에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종입니다.
그런데 좋은 주인을 모시고 있어서 자부심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멋있고 좋은 남편과 사는 그런 부인은 행복이 있습니다.
콩나물을 먹어도 배고파도 자기의 남편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내 아내는 정말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남자는 행복한 남자입니다.
자기의 주인에 대해서 ‘이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종들은 역시 경건한 종들입니다.
그래서 이 종들은 주인에 대해서 존경심을 가지고 주인이 시킨 일을 충심으로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밤을 새라면 새고, 몇십 리를 가라고 해도 갑니다.
바로 이 종에게서 그것을 봅니다.
이 종들 가만히 보면 그 종들이 “우리 주인은 의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구제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이런 사람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신분은 종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하고 있는 이 사람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자유와 기쁨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상관 그런 부하 그런 남편 그런 아내와 사는 집은 행복한 집입니다.
고생이라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보람이 있고 행복이 있다면 내가 죽도록 충성합니다.
희생도 하고 손해도 봅니다.
사랑하는데 시간이 문제입니까? 내가 밤을 샙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이 종과 같은 마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주님의 음성에 순종을 했는데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는 그런 축복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처럼 기도하고 성령님의 감동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고, 복된 생활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