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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선 지연전투(영동-김천 전투)
1. 작전개요
가. 작전개요
영동-김천 전투는 미 제1기병사단이 미 제24사단을 증원하여 영동 일대에 투입된 7월 22일부터 7월 31일 김천에서 철수 할 때까지 북한군 제3사단의 공격을 지연하기 위해 경부국도 축선을 중심으로 실시한 지연전을 실시하여 미 제8군의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는데 기여한 전투다.
미 제1기병사단은 원래는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 작전에 활용하려 했으나 미 제24사단의 지연전이 신통치 않음으로써 이를 증원하기 위해 7월 18일 포항에 상륙하여 영동으로 이동한다.
7월 22일 영동지역으로 진출한 미 제1기병사단은 25일까지 영동에서 버티다 철수를 개시하며 북한군이 26일 영동을 점령한후에 26일 새벽부터 29일 사이에 경부 국도 축선을 따라 공격했으나 미 공군의 강력한 폭격과 미 제1기병사단 및 제25사단 일부부대의 적시적 지연전으로 속전속결로 전국토를 유린하려던 북한군의 의도는 차질을 가져오고 황간 북서방의 제25사단 제27연대가 적 제2사단의공격으로 철수하고 김천 남서쪽의 지레의 제5기병연대 지역에 북한군의 기동이 감지되어 이에 미 제8군사령관 워커중장은 1950년 8월 1일 15시경에 차후작전을 고려하여 전군에 "낙동강 선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하게 된다.
나. 피. 아 작전계획
(1). 북한군의 작전기도
북한군은 대담한 기동과 포위소멸로 조기에 전쟁을 종료한다는 타격계획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우회기동으로 미군의 후방지역을 교란하여 전방부대를 철수하게 하는 전법으로 대전지구 전투이후에 전략적 수정을 가져온다.
그 이유는 간단하게 말해서 유엔군의 비행기 폭격이 너무 무서웠고 이미 종심타격으로 많은 군수시설이 파괴 되었으며 함포사격에 이르기까지 북한의 후방지역으로부터 군수물자 조달이나 부족한 병력의 지원이 한계점에 도달한 때문이었다.
따라서 북한군은 제3사단과 제105전차사단(-)만이 경부국도 축선을 따라 기동하고 제4사단은 대전에서 남쪽으로 금산가도를 따라 무주-안의-진주 방면으로, 제2사단은 보은-황간 방향으로, 제15사단은 괴산에서 상주로 기동하고, 제1사단은 문경 새재 방향으로 기동토록 하였다.
(2) 미 제1기병사단, 제25사단의 작전복안
'50. 7월 18일 제1기병사단은 1차 선발대인 제5, 제8기병연대가 포항으로 상륙하고 태풍으로 제7기병연대는 22일에 포항으로 상륙한다.
따라서 제5기병은 열차로 19일 김천에, 제8기병은 20일 야간 영동에 도착하여 21일 오전에 영동 서쪽에서 제21연대와 방어진지를 교대하였다. 그리고 제8기병은 야간에 영동 남서쪽 무주 방향에 진지를 점령하였다.
반면 제25사단은 오오사카 지역에 있다가 제27연대가 7월 10일 부산을 통하여 들어오고 제24연대는 12일, 제35연대는 13~15일 사이에 각각 부산에 상륙하였다. 따라서 제27연대를 안동으로 추진하고 상주로 올려보낸 제24연대에서 제2대대를 뽑아 제천-풍기-안동 축선의 국군 제8사단과 충주-문경-함창 축선을 담당하고 있는 국군 제6사단 사이를 보강토록 하였다.
또한 제35연대에서 1개 대대를 뽑아 포항비행장을 경비토록 하고 연대(-)는 김천으로 이동하여 사단 예비로 운용하였다.
그러다 기병사단의 진출에 따라 다시 부대를 재배치하여 제25사단은 상주 정면의 한국군 지원에만 전념토록 사단은 상주로 제35연댄는 김천에서 함창으로, 제24연대는 상주에서 상주 서쪽 괴산-화령장-상주간 도로의 방어에 중점을, 제27연대는 안동에서 보은-황간 도로로 이동시켜 정면의 적을 지연토록 하였다. 특히 제24연대는 연대장만 백인이고 나머지는 전부 흑인이었다.
2. 영동 전투(7. 22~25) / 탐사 및 탐문결과
대전을 점령한 북한군 제3, 제4, 제105전차사단은 21일을 부대정비로 보내고 22일부터 기동하기 시작한다. 제3사단과 제203전차연대는 경부축선을 따라 제8연대와 전차부대 일부는 옥천-영동 가도를, 제7, 제9연대와 전차부대 일부는 금산-무주 방향으로 우회기동하여 영동을 공격한다.미 제1기병-제8연대는 제1대대가 옥천-영동 가도에, 제2대대는 무주-영동 가도에 배치되었다.
가. 옥천-영동 가도
7월 22일부터 북한군의 제3사단이 금강도하 노력이 있었으며 23일부터 본격적인 도하공격이 시작 되었다. 그러나 제1기병-제8기병연대 제1대대의 강력한 저항과 미군의 포병화력으로 도하공격이 저지되고 제5기병연대 제1,2대대가 이 지역으로 투입 됨으로써 25일까지 방어 된다.
"기호 나루터에 떠내려 가는 돼지들(?)
심천 면대장님이 점심을 사시겠다고 불렀다. 군의 선배되시니 혼쾌히 찾아갔더니 연세드신 한분이 같이 계셨다.
"인사해라, 한국전쟁도 참가했고 월남전도 참가하신 대선배님이시다."
"네 안녕하세요. 육군본부 발굴통제장교 이 용석입니다."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이곳 심천도 많이 왔다갔다면서요?"
"네 초강링하고 용담리에는 한 세번 정도 갔습니다."
"오시면 꼭 연락해요. 그래도 내가 이곳의 유지요."
우리는 심천역 근처 국밥집에서 점심을 따뜻하게 먹었다. 어르신은 5사단으로 막바지에 북한강 너머 황병동이란 곳에서 전투하다 어떻게 살아 남았다 월남전까지 28년 군대생활을 했다고 한다.
반주로 소주 1잔씩 하고 오늘은 함께 금정리와 명천리를 가기로 했다.
위의 장소는 영동지역 전투 당시에 북한군의 도하장소인데 얼마나 무시무시한 포병화력과 비행기가 폭격을 했는지 미군이 간 뒤에도 도하를 못하고 북한군이 숨어 있었다는 곳이다. 동네에 들어가 마을 사람을 찾으니 몇분이 계셔 당시를 증언해 주는데 안타까운 것이지 통쾌한 것인지 분별이 어려운 심정이었다.
"어휴 생각하면 북한군인 불쌍해요. 여기 우리집 근처에도 몇명이 왔는데 모두 어려서 학생들이야. 와서는 밥좀 달라고 그러고 옷을 바꿔 입는다고 바지좀 달라고 그러고 꼴이 아니더라고."
"아니 그 놈들 계속 이기고 있는데 어째서 그렇게 어린 학생이 전쟁터에 왔을 까요?"
"난들 알아유, 서울에서 인천에서 대전에서 온 학생도 있던데."
이곳 금강변은 미군이 화력으로 북한군의 도하를 거부한 장소다. 그러니 밤에만 쥐새끼처럼 몇명씩 나루터에서 넘어오는데 저 위의 다리는 다 폭격으로 무너졌고 비가 얼마나 오는지 무척 내려서 건너다가 물에 휩쓸려 가 수없이 죽었다고 한다.
"어르신도 강물에서 죽은 군인 보았습니까?"
"꼭 돼지가 고개처들고 물속에 있는 것처럼 보여. 돼지야 돼지. 어쩌다 물을 건너온 얘들이 막 울어요. 그러면 거기 장교인지 인솔하는 놈이 또 남한 사람인지 달래더라고. 이제 됐다면서."
이해 못 할 전쟁의 공포며 방황이다. 아무리 강한 군대도 한번 무너지면 추수리기가 쉽지않은데 비오듯 쏫아지는 미군의 포병화력이 정말 무서웠다고 소련군 군사고문단장의 기록에 있다.
"혹시 국군이 이곳에 온 적은 없는지요?"
"우린 국군을 전쟁동안에 본적이 없어요. 경찰은 그래도 한 두번 보았지만."
"국사봉-어류산에 올라선 학도의용군은 아군일까 북한군일까"
우린 금호교를 건너 기호리에 들어갔다. 아무리 국군이 없다고 하여도 경부국도 우측에 제2사단이 병행하여 축차 철수중인데 심천이나 이원지역에 국군을 보지못했다니 의아하다. 지역에는 본적이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런데 누군가 강건너 국사봉에 우리 학도병과 경찰이 잠시 머물다 금산쪽으로 내려갔다고 하여 찾아온 것이다. 산에서 개인호도 보고 탄피도 보고 죽은 군인이 서너명 있었다는 제보도 받았다. 이곳은 올라서는데 그렇게 어렵지 않아서 함께 다같이 갔다. 국사봉(502m)에 올라서니 심천이 하눈에 보이고 이원도 잘 보인다. 여길 올라섰다면 누가 올라섰을까라는 질문에 모두가 북한군 한다. 어류산과 국사봉 사이는 좁은 회랑처럼 되어 포병의 공격에 피해를 많이 받을 지역이 아니였다. 그러니 아마도 북한군이 강제로 잡아들인 어린 학도병들을 이곳에 올려 야밤에 강을 건너면 어디로 공격하라 아니면 어디근처로 오라고 지시를 내리기에 좋은 곳이다.
하지만 마을 제보자는 분명 경찰도 있었고 우리 학도병이 이곳에 숨어있다가 금산쪽으로 내려갔다는 것이다. 본인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고 한다.
군인이 죽어 있었다는 곳을 찾았다. 지금 보덕사란 절이 있는데 절을 오르기전 맞은 편으로 어류산 정상이 아니고 산 밑인데 아마도 미군 포병사격으로 죽은 북한군일 확률이 높았다.
"마을로 숨어들었다 빨갱이에게 죽은 경찰"
마곡리에 들어가니 본인이 직접 경찰이 죽어서 묻혀있는 곳을 안다는 농부를 만났다. 그래서 논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안내하는 장소로 갔다. 야산인데 농부의 집에서 멀지않은 곳이다. 산밭 모퉁이를 지나 산속으로 들어가니 갑작스레 왕벌이 나타났다.
"어르신 잠깐만요?"
"건드리지 않으면 괜찮아요. 여기에 그놈들 집이 있어요."
어르신은 별 문제없이 잘도 간다. 우리는 가만히 서서 벌들이 돌아가기를 기다렸는데 가만히 보니 바로 눈 앞에 벌집이 있다. 그래서 우회하여 어르신이 아버지와 묻었다는 곳에 도착해 보니 비록 50년전이 지났지만 약간 볼록한 느낌은 들었다.
"어르신, 이 장소를 혼자만 아세요, 아니면 다른 사람도 아시는지요?"
"몇 사람이 알아요. 그런데 너무 오래 되어서 있을지 모르겠네요."
"저앞동네에 가니 국군이나 경찰을 본적이 없다는데 어떻게 여긴 경찰이 왔을까요?"
"우리도 모르지. 사실 이 경찰을 동네 빨갱이란 놈이 데리고 들어와 죽인거요."
"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동네는 전쟁이 난지도 몰랐다 한다. 나중에 미군이 들어와서 국사봉 하늘에 비오듯이 조명탄이 터지고 폭탄이 터졌을 때는 7월 말이고 처음에는 남쪽이지만 산골이라 뭔지도 모르는데 어느날 경찰관 3명이 동네에 들어와 밥을 먹고 잠을 잤는데 빨갱이란 놈들이 냄새를 맞고 그 집을 기습했는데 도망치다가 잡혔다고 한다. 그래서 빨갱이들이 옷을 홀딱벗기고 이 곳으로 데리고 들어와 죽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얼마전에 우리가 그곳을 발굴해보니 아무런 흔적이 없다. 혹시나 함께 있다 살아난 경찰이 나중에 찾아와서 발굴해 갔는지도 모른다.
"초강리 야산 나무가지에 걸쳐진 북한군"
"꿈속에 나타난 약목리의 고, 강천수 일병"
'07. 2. 28일 아직 발굴이 시작되지 않고 있는 구름낀 날씨다.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웬 모르는 얼굴없는 사람이 날 잡아 당긴다. 이럴 때면 주술을 외워 빨리 떨어지게 해야 한다고 아는 절의 스님으로부터 광명진언을 배웠다. 결코 나에게 유리하지 않다고 하였다. 이걸 뛰어넘는 영적인 개념정립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어려운 이야기였다.
아침에 출근하여 팀장들에게 오늘 외부전화 잘 받아라 당부를 하고 있는데 따르릉이다. 영동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묘동 약목리에 유해가 노출 되었다는 내용이다.
"무전기,호루라기,삼각자 등과 같이 발굴되는 4인의 유해"
우린 바로 영동으로 달렸다. 현장에 가보니 산판길을 포크레인으로 만들다가 큰 소나무 등걸 밑에서 나온 것은 포크레인 기사 손청민(34)씨가 신고를 한 것이다. 손기사는 이 지여구 공사전에 영동의 한 식당에서 식사중에 유해발굴 팀을 만난 적이 있어 신고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발굴되는 유해는 소나무 한그루 뿌리밑에서 나오기 때문에 발굴은 어렵지 않았다.
미제 무전기가 반파된 모습으로 있고 수통, 삼각자, 숟가락, TT완탄, 모시나칸트탄등 150여점이 쏟아져 나왔다. 유품으로 보면 무전기와 수통을 제외하고는 적군 유품이었다.
그런데 이대 마을에서 몇몇 어른들이 현장에 나타났다. 그 중에 한명이 말을 한다.
"어어, 저 자리는 북한군을 미군이 사살해서 동네에서 부역으로 매장한 장소인데."
"아저씨가 직접 보신 것은 아니고 이야기만 들으신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그 당시에 이 일대에 북한군이 수없이 죽어 논 밭에 널려 있었어요. 미군이 무슨 불폭탄 같은 것을 쏘아서 하늘에서 드럼통같은 것이 꼬리치며 내려오는데 한번 꽝하면 오랫동안 불이 붙어 타는데 엄청 뜨거워요. 이런 것은 내가 직접 경험했어요."
"피아판단에 문제가 발생했다. 지역주민이 북한군이라 하니 난감하다"
"아저씨 잘 알겠습니다. 일단 수습하여 전문 박사팀에서 감식을 하도록 한 후에 결정토록 하겠습니다. 혹시 다른 말씀하실 분은 없습니까?"
아무런 대답이 없어 발굴을 끝내고 우린 서울로 복귀하여 감식과에 유해를 넘겼다. 감식과에서도 난감하다. 지역주민의 증언이 북한군을 매장했다고 하니 말이다.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우연이 필연이 된다고 본인이 부인(82세)이라며 자식을 이용 감식을 요청(장가를 들어 1남이 있고, 어머니도 살아 계셨다) 해 왔는데 유전자가 동일하다. 난리가 났다.
"유전자가 일치하는 유가족이 나타났다. 제7사단 강천수 일병이다"
국방부 조사단에 있는 유전자과에서 또 다른 시료를 요구해와 다시 4분의 유해를 분류하여 시료를 보내 재검에 들어갔다. 한 유해가 동일한 조건의 결과가 반복된다. 지금까지 인식표나 전우들의 증언, 매화장보고서가 없이 사전에 확보된 감식용 타액과 일치되는 건은 처음이다.
그런데 문제는 또 다른 곳에서 나왔다. 이곳의 전투부대는 국군 제2사단인데 전사자기록카드에 7사단 9연대로 나와 있다. 이때는 제7사단은 해체 수준이고 전북지역에 민부대가 그 맥을 잇고 있는 정도였다. 이것이 기록의 한계다.
용사님은 49. 1. 20일에 입대했고 3월에 공비토벌작전중 집에 엽서를 보낸 것이 마지막 유품이 되었다.
" 준0엄마 보시오, 웃음으로 전해준 당신의 마음 잘 알고 있소. 떠나는 이 사람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처지이니, 부모님 모시고 잘 있을 줄 믿으며, 준0이도 잘 노는 줄 믿고 있습니다.내가 없더라도 집안을 웃음으로 화목하게 잘해주기를 바랍니다."(49년 음력 설날 편지글 중)
별별 가정이 나오지만 우린 복잡한 판단은 크린시켰다. 왜냐하면 DNA감식이 맞았는데 이것이 가장 정확하다. 이런 경우도 있다. 전사자가 북한군의 복장을 바꿔입고 있을 수 있다. 그 당시는 그런 사례가 많다. 그리고 부대가 한강방어선이 무너진 이후 건재가 사라진 가운데 인접 제2사단을 따라서 전투를 하며 후퇴할 수 있다. 결국 우린 국군으로 처리했다.
"영동 묘동 묘동리 간단회 결과"
1)장대식(77, '14)의 증언이다.
마을 야산(교동뒷산)에서 예비군 훈련차 호를 파다가 미국산으로 추정되는 만년필을 습득하였는데 한 40년전 일이다.
2)장인상(81세)
교동 뒷산을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다가 미군과 육박전을 벌였으며 그 장소에서 미군 유해 10구를 목격하였다. 전쟁 이후에는 나무하러 다니면서 성산에서 유해 및 유품을 많이 목격했는데 언제부터인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북한군이 그들 통신장교를 밭머리에 매장하는 것도 보았다.
3)강신권(81)
양강 초등학교에 미국군대 본부가 있고 그 앞 탱크안에 미군 전사자 1구가 있었는데 부역으로 인근에 매장했다고 들었다. 묘동 뒷산에서 북한군 100여 명이 죽었다.
4)민용호(81)
다리골(교동) 왼편 신기(묘동)방향 과수원 뒷 골짜기에 유해가 많았고 구두를 신은 발이 나와 있는 것을 목격했다.
"성지골 도로변에 휘날리는 달러"
성지골안은 과거에는 돼지 기르는 돈사가 많았으나 요즘은 없어졌다. 성산 밑에 있는 마을로 그 안에는 탄약을 실어나르기 위한 철로가 개설되어 있는 곳이다.
성산 안이 모두 적의 공격으로부터 엄폐되어 있는 아주 좋은 탄약보호소로 탄약창이 있는데 이곳이 6.25전쟁시에 미군과 북한군이 육박전이 벌어진 곳이다.
그러나 처음 미군이 진주하던 당시에는 군기가 불량한 것인지 평시에도 그러는지는 몰라도 길바닥에 그저 누워서 잠드는게 일이였다고 한다. 아마도 미 제24사단이 대전전투에서 밀려 내려온 부대가 아닌가 싶다.
동네사람들 대다수가 북한군이 여름날 새벽에 길바닥과 성산 하단부 밭과 연결딘 평지에 침낭같은 것을 뒤집어 쓰고 잠들어 있는 미군을 공격하여 혼비백산하여 미군이 모든 것을 놓고 도망치는데 정신이 없으니 발가벗고 산으로 달려 북한군 진영으로 들어가는 군인, 바로 우측 길옆에 있는 강물에 뛰어드는 군인, 영동쪽으로 길을 이용하여 그저 달리는 군인 등 아수라장이 되엇다. 그런데 일시적으로 광풍이 불었는데 달라돈이 날라 성산에 무슨 목화꽃이 핀 것처럼 온통 산이 종이 돈으로 뒤덮혔다고 한다.
"죽어가는 미군 유해에 달겨붙어 챙기는 북한군"
그러니 북한군 일부는 그 돈을 줍느라고 허둥대고 일부는 쓰러진 미군에 달겨들어 몸을 뒤져 뭘 가져가는데 혈안이 되고 그래서 가만히 다가서 보니 시계를 팔둑에 차고 있는데 어떤 군인은 5개도 넘게 차고 있더라는 것이다. 다중에 함안지역 전투시 또 언급이 되겠지만 10개까지 차고 있는 놈도 있다 한다. 바람에 날리는 달라를 주어 갔다주니 좋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후 바로 이 성산에 미군의 포격이 시작되고 불폭탄이 솓아져 내려 북한군은 미군보다 10배는 죽엇는데 마을 사람들이 올라가 개인호에 앉아있는 군인을 손가락으로 밀면 픽하고 쓰러지는데 모두가 까맣게 그을려 죽어 있었다.
"한여름 침낭속에 잠든 미군"
미군들은 한국인을 싫어했다. 아마도 게릴라들이 편의대로 위장하여 피난민 속에 끼여서 미군을 공격하고 때로는 박격포탄을 쏘도록 유도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네에 남아있는 어린아이들은 좋아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이 "기부미껌"하고 다가서면 대부분 한개씩은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내들은 야간이 되어 잠들때 보면 그 더운데 침낭같은 것을 가지고 들어가 잔다고 한다. 아마도 즉시 전투태세를 갖추어야 하니 전투화를 싣고 소총을 휴대한채 잠들다 바로 전투태세를 갖추는데 좋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부작용도 많아 보초를 제대로 서지않고 잠들어 기습받기 일쑤고 어떻게 딘 것인지 총을 쏘지도 못하는 병력도 있다한다. 갑작스레 모병하여 들어오다 보니 제대로 훈련이 안되어 있는 실정이라고 봐야 할 것같다.
"심천역에 나타난 북한군 여군악사들"
영동지구 전투가 끝나고 미군이 낙동강 밑으로 내려가던 7월말에 북한군 선전대가 들어왔다. 주로 예쁜여자들로 구성된 노래와 춤을 보여주는 것인데 노래는 주로 북한선전 노래와 김일성 찬양가 일색이다. 하지만 전쟁통에 특히 남한은 당시에 북한보다 3배나 못사는 나라수준이니 이런 것을 시골에서 보기란 쉽지가 않다.
마을마다 치안대나 여성동맹들이 나사서 역전으로 모이라하여 사람이 주로 할아버지 할머니 위주로 모였다. 알고보니 이것은 지하에 숨어있는 군인적령의 남자들과 여성들을 유혹하여 군에 끌여들이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때만 해도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무릎윗부분이 노출되는 치마에 짙은 화장발로 많은 박수와 앙콜송을 부르며 거의 1시간 가량 떠들다 떠났다. 그 후에 마을 단위별로 입당원서를 받고 집집마다 수색하여 지하에 숨어있는 청년들을 찾아내 전선으로 보내는 혁명적 사업이 강화되기 시작한다. 그러니 지금 판단하면 그들은 대전전투를 마치면서 대부분의 전차가 파괴되고 정예사단인 제3.4사단의 병력비율이 50% 이하로 떨어지면서 위기감이 오기시작했고 정말 시간과의 전쟁으로 8월 15일 이전에 부산을 점령하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즈음에 김일성이 바로 수안보에 있는 전선사령부를 들러 독려했다는 것이 사실로 확인이 되고 있다.
나. 무주-영동 가도
7월 23일, 무주 방향의 제8기병연대-제2대대 지역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적이 우회기동으로 유점리 일대까지 추진된 부대의 후방인 갈령을 점령하여 퇴로를 확보하기 위한 전투가 계속되어 제5기병연대에서 지원병력이 투입되기도 했지만 모두 실패하였다.
이때 북한군은 피난민을 가장하여 아군 후방으로 침투하여 후방의 포병진지를 유린하는 등의 전술을 획책하여 결국 아군은 강력한 피난민 통제대책을 강구하게 된다.
"성산(436m)에 휘날리는 깃발"
앞에서 성산계곡에 미군이 잠들다 기습을 받아 산이 온통 달라로 뒤덮혔다고 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성산 꼭대기에 미군이 성조기를 올렸는데 북한군이 침투하여 인공기로 바꿔달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을에사는 분들은 아니 분명 인공기가 펄럭였는데 얼마 있으면 미군기가 펄럭이고 도깨비같은 장난이 여러번 반복되니 어리둥절 했다.
"묘동 국민학교 운동장의 군인"
묘동리 마을회관에서 간담회시 양강초등학교 안에 미군 본부가 있었다고 증언한 적이 있다. 그런데 어느날 학교에서 학교 운동장 보수공사중에 수류탄이 나온다고 신고가 들어와 긴급히 출동하여 2군지역 폭발물 처리반과 합동으로 현장조사 후 수류탄 나오는 곳을 굴토하니 유해가 나오는데 탄통도 완벽하게 한통이 그대로 나오는데 북한군이 사용하는 모시나칸트 탄이다. 하지만 기관총 탄피부터 반밥, M1탄피, 탄창 등 모두가 아군용이다.
도대체 여기 학교 운동장에서 왜 나오는지 확인에 들어가니 이곳은 확장된 곳으로 전쟁 당시는 논이였으며 전후에 땅을 매립하였다 한다. "어린 학생들이 몰려들었는데 무슨 말을 할 수가 없다. 학교 선생님이 가로막고 접근을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다. 이 선생님 전교조?
"덕유산 적상산(1,038m)성과 조선왕조실록 4대사고의 비화"
고려말 최영장군이 민란을 진압하고 이곳을 지나다 아름다운 단풍에 이끌려 산꼭대기에 오르게 되었고, 절벽같은 바위가 앞을가로막고 있어 허리에 찬 긴 칼(장도)를 봅아 바위를 힘껏 니리쳤더니 바위가 양쪽으로 쪼개지면서 길이 열렸다 하여 "장도바위"라 한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으로 그 진실성을 떠나 최영장군이 이곳까지 왔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붉은 단풍이 아름다운 이곳은 우리나라 5대 비경중 하나로 꼽히는 곳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보존했던 유일한 사고가 남아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실록들은 모두 북한의 김일성대학 박물관에 들어가 있다. 김일성이 이곳으로 진주한 군대에 명령하여 바로 이실록을 북으로 옮기도록 한 것이다.
조선전기전(임진왜란 1592년)까지는 서울 춘추관 사고, 충주, 성주, 전주의 4곳에 사고가 이있었지만 임진란시 전주것만 남고 모두 불타 버려 1603년(선조 36년0에서 1606년까지 전주사고 실록을 근거로 태조부터 명종까지 13대에 걸친 기록을 다시 4부씩 인새하여 임진왜란시 끝난 후에 춘추관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 마니산에 사고 5곳을 설치하여 보관했는데 이괄의 난(1624)때 춘추간 것은 불타버렸다.
그 후에 왜적의 주요 침입루트에 해당되는 충주, 성주의 사고는 모두 병화의 피해로 그 존재가 사라지고 다행히 전주사고본이 관리자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내장산가지 옮겨지는 등의 우여곡적끝에 보존 되었다.
조선 후기의 지방의 4사고는 정족산(강화도), 적상산(전북 무주), 태백산(봉화), 오대산(강원 평창)으로 확정 되었고 이르 지키도록 주변에 수호사찰을 두었는데 바로 전등사(정족산 사고), 안국사(적상산 사고), 각화사(태백산 사고), 월정사(오대산 사고)가 이러한 기능을 하였다.
그 후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서 모두 접수하여 정족산.태백산 것은 경성제국대학(지금 서울대)으로, 적상산 것은 이왕지 소속의 창경궁 장서각으로 옮기고, 오대산 실록은 1913년 도쿄제국대학으로 반출했다. 하지만 일본으로 들어간 것은 1923년 간토대지진시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고 알려졌으나그 일부가 남아 있는 것이 확인 되어 2006년에 47책을 반환 받았다.
현재는 정족산본은 서울대 규장각, 태백산본은 국가기록원(부산지소), 적상산본은 북한 김일성 종합대학, 오대산본은 일본에서 돌아온 47권만 전한다. 1977년 10월 1일 세계기록문하 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록 되어 있다.
"무주, 미군 4인의 불알까는 빨치산"
참 전국을 곳곳을 다니다 보니 들을 것, 안들을 것 가리지않고 많이도 듣고 보게 된다. 내가 들은 6.25전쟁은 일제시대 악랄한 고문경찰과 빨간완장을 차고 동네를 누비는 순사들의 망나니짓 이야기와 같다. 참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많다.
무주 적상면의 치목에서 만난 동네분들의 이야기가 정말 기막히다.
"미군 4명을 어떻게 붙잡았는지 마을 프락치들과 빨치산이 옷을 홀딱 벳기고 나무에 매달아 놓고 불알을 깠다."
"아니 산 사람을 돼지처럼 깐다는 말이신지요?"
"그러니까 양키들이 거시기가 크니 얼마나 큰지 보자며 보자니까 움추리잖아. 그러자 두손과 다리를 묶어서 바로 이나무야 여기에 매달아 놓고 옷베끼더니 불알까더라니까?"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뭐 별거없잖아. 그러니 몽둥이로 몇대 갈기고 별것도 아닌 것들이 까분다며 만지고 별 장난을 다했지. 그러다 죽는다고 하니 다시 풀어서 내려 놓아요."
"그렇게 한다음 어디로 끌고 갔습니까?'
"그건 잘 몰라요. 왜냐하면 나무에서 내려놓고 팔과 다리를 풀어주었는데 갑작스레 미군 헬기가 나타나 기총사격을 하는 바람에 숨어들고 이때를 이용해서 미군들이 피를 흘리며 빨개벗고 저 산속으로 뛰어 들어간는데 어떻게 된건지는 모르오."
"그들은 결국 공비들이 붙잡아 끌고 가서 사살되었다."
어느날 괴목리에서 제보가 들어왔다. 동네에 바위가 있는데 이곳이 빨치산이나 북한군이 진주해 있을 때에 인민재판으로 동네사람이나 때로는 군인이나 경찰을 총쏴 죽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 가서 사실관계를 학인에 들어갔다.
북쪽에는 무주호가 있고 상곡천이 마을 앞을 지나는데 갈수기에는 흐르지않는 작은 개울이다. 동네 바로 앞산이 적상산이고 마을 뒤는 덕유산의 한 지맥이 900m고지군을 유지하면서 남북으로 발전된 정마루 산속 마을이다.
바위가 있다는 곳에 가서 주변의 숲을 다 제거하고 탐지기를 이용하여 돌려보니 소리가 난다.
"뭐하슈, 거기에 죽은 소나 돼지, 동네 개들이 묻혀졌는데~"
지나가던 한분이 우리가 탐사 활동하는 곳으로 들어와 함께 한다. 우리가 6.25전쟁 당시에 이곳에서 죽어간 사람의 뼈를 찾는다고 하니 없을 거라 한다.
"왜 없다고 하시나요? 동네 분들이 여기에 있을거라고 해서 우리가 조사하는 겁니다."
이때 조사팀이 뼈로 판단되는 일부를 찾았다. 형태를 보니 사람 것은 아닌 것같았다. 몇군데서 부분뼈들이 일부 나오고 있다.
"누가 말했는지는 몰라도 저기 농협 앞에 넓은 공간이 있는 것 봤는지 모르겠는데 죽고 나면 시신을 그곳에 갔다 놓으면 유족들이 대부분 찾아가고 찾아가지 않는 사람이 이곳 사람이 아닌 경찰이나 군인일 학률이 있는데 전부 옮겨서 다묻었서요. 어쩌다 한두구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습니까. 그럼 이 곳 일대에 혹시 유해를 찾을 만한 곳 없습니까?"
"전쟁이 끝나고 일정기간 적상산이나 덕유산 정상 일정구간 능선상에 유해가 종종 보였어요. 특히 덕유산에서 무룡산 구간에 크게 파인 방공호같은 곳에는 불탄 숯들이 있는데 어느 호에는 몇구씩 불탄채로 남아 있기도 했지요. 그런데 그 많던 것들이 70년초반이 지나면서 다 없어졌어요."
"없어진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관에서 수습을 했다던가, 아니면 어던 다른 이유가 있는지요?"
"잘은 모르겠고 그 당시가 남부지방에 가뭄이 너무 심하게 와서 먹고 살기가 힘들 때였어요."
"혹시 어디 사시는지 존함은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시겠어요?"
"아닙니다. 그건 됐습니다."
이쪽에 특징이 많은 사람들이 본인의 이름이나 연락처를대기를 싫어한다. 이유가 뭘까 생각하니 바로 전쟁전훙 지리산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빨치산들이 활동하면서 손가락질로 피해를 많이들 보다보니 서로 경계하는 모습에서 그러게 되었다고 본다.
아저씨가 더나고 괴목리 노인회관에서 간담회 준비가 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혹시 이거 찾으러 왔나요?"
노인정으로 가고 있는데 도중에 길을 걷고 있는 어른이 차를 세웠다. 이분은 경찰 연락병으로 이곳에서 활동한 장본인이다. 그런데 뭐루 나에게 준다.
"이게 뭡니까?"
"명단이요. 우리지역에 빨치산에 동조한 집안 이름이요."
"네? 그러니까 쉽게 말해 '부역자 명단'이란 말씀이지요."
"맞습니다. 누가 보면 안되니 어서 집어넣으세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이렇게 우리네 불쌍한 민중들은 서로가 밀고하고 손가락질하고 죽어갔다. 서로 얼싸안고 살려고 해도 죽는 마당에 이렇게 적색리스트가 준비되어 있으니 또 전쟁이 나면 어떻게 될까~~!"
"북한군 여군장교의 카리스마" 바위에 올려 죽이다.
1)박만술(82세, '13)증언이다.
이곳은 전쟁전부터 빨치산 이현상 부대가 무주일대에 준동했고 경찰들이 방어했지만 밤에는 거의 빨치산 세상이었다.
사산리 마산마을 속칭 안골에서 산에 은거하고 있는 게릴라들이 미군 4명을 끌고 가서 사살했다.
"아니 혹시나 치목에서 도망친 미군들 아닌가요? 우리 들어오다가 무슨 큰나무 밑에서 동네분들을 만났는데 불알까고 풀어줬는데 산속으로 뛰어들어갔다고 제보를 하던대요."
그건 모르겠어요. 이 죽은 미군은 나중에 미군이 다 찾아갔어요.
2)안쌍규(80)증언이다.
내창교 아래쪽 300m부근에 경찰이 이동하다가 이현상부대에 걸려들어 대규모 전사했으며 유해는 뒤따라 들어온 국군이 수습했다.
동네 뒤에 대호산(592m)이 있는데 공비들이 경찰을 사살한 후 매장한 장소를 알고 있고 전쟁 후에도 한 10년동안은 유해를 목격했다.
"그러시면 간담회 끝나고 함께 가보시죠?"
"밭 언저리를 타고 들어가 죽인 장소는 조금만 들어가면 큰바위가 있어 찾기도 쉬워요."
(이렇게 해서 찾아가서 탐사를 했지만 흔적을 찾지못했다. 탄피도 없다. 아마 누군가 수습한 모양이다)
3)김재주(79)증언이다.
설천면 심곡리 배방이골에 전투가 치열했는데 국군이 빨치산에게 포위당하여 많이 전사했지만 지역주민들이 빨치산을 따라가 있다가 죽었다. 아침에 지역 경찰이 통제하여 마을주민들이 시신을 마을농협 앞으로가져왔는데 유족들이 찾아갔다. 찾아가지 못한 5구를 이곳 포내리 중리마을 야산에 매장했다.
4)장인섭(86), 이진홍(75) 등 다수 증언이다.
북창리 외북창 마을 인근에서 미군이 인민군을 사살하여 도랑에 묻었다. 북한군들이 도망치는데 민복으로 갈아입고 도망가더라.
어느날에 중중리 거 사람죽인다는 바위에서 인민재판이가 뭔가를 하는데 아니 북한군 여군 장교가 왔더라. 멋진 가죽장화를 싣고 테래비에서 보는 무슨 지휘봉을 들고 발을 꼬고 의자에 앉아서 윗옷이 버껴진 국군인지 경찰인지 닥다리 하는데 아 위엄이 있더라고. 말도 별로 안해요. 간단하게 질문하고 듣기만 하는데 결국 다 죽지. 지금 듣고 보니 그 사람들이 국군포로였나보네. 잠은 어디서 잤는냐면 저기 우리집에 잤어요.
그런데 어느날 많은 경찰이 토벌을 나오는데 높은 사람이 짚차를 타고 하중리쯤 들어오고 나머지는 걸어서 오는데 오합지졸이지 뭐. 지금 이곳에 인민재판이 진행중이란걸 모르고 낮이니까 들어오는거야. 포위되어 인민군이 총 몇방쏘니까 짚차도 놓고 총도 다 버리고 도망쳐 버려. 몇명 죽었는데 우리가 묻었지. 가볼래요. 하중리에서 개천을 건너 바로인데 시체가 지금까지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나는 마을사람을 따라 현장에 가보았다. 그리고 몇군데를 기초굴토하여 보았으나 흔적이 없다.
"유성장모텔 사장님의 6.25전쟁 기억하기"
나는 설천 심곡의 배방리와 구천동계곡에 6.25전쟁 전사자 추모비가 있다하여 찾아갔다.
먼저 유성장모텔 사장을 찾았다.
가을 감이 탐스럽게 매달려 있고 단풍이 들어 멋진 가을날이다.
"옆집에 살고 있던 당시 경찰이 집문서를 도용해 갔습니다. 그래서 지금 재판중입니다."
아니 경찰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하지요하고 물었더니 북잡한 내용이다. 답은 분명한 사기꾼짓인데 땅문서를 도용한 근거를 밝혀내기가 관건이란다.
내용은 이렇다. 사장 아버지가 전쟁전부터 지역 청방대에 가입하여 할동했는데 그 당시는 전쟁전에도 덕유산 골짜기는 빨치산이 판치고 있었다. 그래서 낮에는 경찰이 밤에는 그들 세상이었다. 이때 경찰 한명이 사장집에 세들어 와서 살았다. 형제처럼 살다보니 처음에는 무척이나 가까웠다. 그런데 전쟁이 났다고 하여 총을 들고 마을을 지키려하는데 경찰이 청방대를 공격했다.
사장 아버지는 뭔가 오해가 있다고 판단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바로 집에 프락치들이 진을 치고 있어 붙잡혔다.
"할아버지가 나서 아버지를 빼왔다."
집이 잘 살아 이지역 웬만한 땅이 모두 사장집 땅이였다. 악하게 살지않아 일제시대에도 인심을 많이 사서 프락치들도 할아버지에 대한 호의가 높았다. 하지만 견물생심이라던가 뭔가를 원하는 눈치여서 할아버지가 땅문서 일부를 주고 아버지를 빼왔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않았다. 알고보니 이 경찰이 청방대의 배치상황을 프락치들에게 알려준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 그런지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 김경사의 짓은 이해가 되었다. 아버지가 사라지면 할아버지를 협박해 원하는 것을 획득하려 한 것이라 본다.
그런데 죽지않고 돌아왔으니 작전이 실패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경찰대는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 전쟁이 끝나가는데 다시 경찰이 돌아왔다. 계급도 하나 올라가 있고 책임자가 되어서 왔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안했다. 공백기간에 이곳에 와 있던 경찰에게 사실을 알려주어 내부적으로 감시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재도 개편이라고 점점 마수는 다시 다가서고 있었다. 바로 프락치중에 가져간 땅문서를 이 경찰이 갖고 있었던 것이다. 본인이 정상적 거래도 샀다고 하니 기막힐 노릇이다. 그 프락치는 이미 총알받이가 되었다. 그 경찰도 죽고 자식이 소유권을 주장한다. 얼마전까지 아버지가 살아계셨는데 이번에 운명하셨다. 모두 1선이 물러나고 2선이 나선상태다.~~
"6.25전쟁당시 전쟁은 어디서 가장 많이 있었나요?"
아버지로부터 들은 이야기로 몇군데 답변을 했다. 구천동(비오는 날에는 병사들이 줄을 서서 저벅저벅 걷는다), 냇가 좌우측 배방이, 구천초교 일대, 백련사일대에 가장 심했다 한다.
배방이터에 갔다. 높지않은 야산에 개인호가 널려있다. 주변에 매복형태가 한눈으로봐도 맞다. 바로 이곳에 경찰도 오고 군인도 오고 외곾에 프락치가 총을 들고 있었다. 죽어간 시신은 주변에 방치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어떻게 된지 모른다. 세월이 모두 삼켜버렸다. 우린 겨우 파편과 탄피류, 그리고 전투화 잔해를 몇점 찾았을 뿐이다.
구천동 계곡은 지금 너무도 조용하다. 누가 전쟁터라 하였는가. 옆에는 덕유산 모든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차가운 물이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흘러내리고 있다. 백년사 방향으로 한 30분 으로니 수호비가 나온다. 이곳일대는 많은 비와 충혼탑이 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이 덕유산이 이현상의 남부군과 그 휘하 이영희등의 거점으로써 중요한 역활을 했고 이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국군이나 특히 경찰은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이중에서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북한군이 38선이북으로 물러난 상황에서 미쳐 후퇴하지못한 북한군이 지리산과 태백산으로 숨어들었으며 이곳 무주구천동도 덕유산거점의 핵심이었다. 그러니 토벌작전과정에서 국군이나 경찰뿐만아니라 지역에서 경찰과 군인을 지원하던 청방대등 자체 토벌대 등 수많은 인원이 전사했다.
"육십령 고개와 구천동 계곡은 비오는 날에는 지금도 군인들이 저벅저벅 행군을 합니다." 용하다는 지역무당의 한스런 답변이고 함께하고 있는 모텔사장이 들려주는 이야기다.
하지만 지금은 무주 덕유산리조트 공사로 너무많은 모습이 천지개벽이 이루어져 어디가 어딘지 모를 지영이 되었다. 알고 있는 것은 저 덕유산 장상의 천년묵은 주목나무 뿐~!
백년사는 신라 신문왕(681~691)때 창건한 절이지만 6.25전쟁때 소실 되어버렸다. 절 이름은 구천동사, 백련암 등도 있다. 백련사에서 덕유산 향적봉까지는 1H:30분이 소요되는데 그런 시간적 중심과 공간적 중심에 위치하여 공비들의 소굴이며 타켓이 되었음은 당연한 결과라 한다.
하지만 그 피비린내나던 유해의 실체는 한동안 이 덕유산의 웬만한 곳에는 널려 있었다는 표현이 맞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도 어느날부터는 보이지않게 되었는데 그것이 수습이 되었던 아니면 자연재해에 휩쓸려 나갔던 아니면 동물의 밥이되고 혹은 유족들이 어떻게 찾아와 수습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가슴아픈 이야기다.
다. 영동에서 철수
7월 24일에 북한군이 방어진지 좌우 측방으로 깊숙이 우회 침투하여 후방을 교란하고 이로 인해 많은 피해가 발생하였다.
더우기 갈령고개 넘어에 있는 제8기병-제2대대는 퇴로가 막혀 있었으며 몇번의 전차를 동반한 구출작전에도 실패하여 결국 각자 산을 넘어 철수해야만 했다. 더우기 북한군이 가장 치열한 포격에 공격을 감행하여 25일 오후에 영동을 빠져 나오고 북한군이 20시경 점령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전사 49명, 부상 234명, 실종 118명이었으며 북한군은 18명이 포로가 되고 약 2,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포로의 진술이 있었다.
3. 영동-김천지연전 및 탐사 및 탐문결과
가. 영동-황간 전투(7. 26~29)
7월 25일 오후 5시에 영동을 빠져나온 기병사단이고, 같은 날 8시에 영동을 점령한 북한군이다. 하지만 북한군은 아직 포병이 금강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밤 11시가 되어서야 금강을 건너 포병부대가 심천으로 들어온다.
같은 시간대에 미 제1기병은 우측에 바어중인 미 제25사단의 제27연대가 황간에서 북한군 제2사단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할 경우에 측방이 노출되어 지연전이 어렵다고 보고 26일 01:30분경 한 측방에 북한군이 침투하자 공격이 개시된 줄로 알고 공포에 휩싸여 걷잡을 수 없이 분산되어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된다.
7월 26일에는 서송원리-노근리일대에 참호를 파고 4번국도를 따라 주곡리와 그 우측 426고지 일원에 제7기병이 서송원지역은 제5기병과 8기병부대들이 축차진지를 구축하고 방어 중에 7월 27일 새벽부터 북한군의 공격이 시작 된다.
그러나 이미 북한군 정찰대 300여 명이 편의대로써 피난민을 가장하여 미군 후방지역에 침투하여 교란하고 특히 포병부대들을 집중적으로 타격하였다.
하지만 미군포병의 적극적인 포격과 일선부대들의 적극적인 방어 노력, 미 공군의 폭격으로 북한군은 경부 국도축선의 정면 돌파를 단념하게 된다.
특히 우리가 잘아는 "노근리 쌍굴다리 민간인 폭격피해 사건"이 이때 발생하게 되는데 이곳을 방어중인 부대는 제7기병 부대들이었다.
"노근리 쌍굴다리 사건 비상근 조사위원으로 참석하다"
계룡대에 근무하던 어느 날에 노근리 사건에 대한 범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라 있을 때에 나는 사실 규명을 위한 노근리 대책위운회와 군 조사단의 요청으로 유해발굴 가능성에 대한 현장 조사단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영동 군청회의실에서 모여 간단한 개요를 설명을 듣고 현장으로 이동을 했다. 쌍굴이 나온다. 지금이야 그 북쪽에 추모비도 있고 공원을 조성하여 스토리를 전재해 놓았지만 '01년도는 그런 것 없었다. 우린 현장 조사를 마치고 다시 모여 가능성에 대한 토의를 하였다. 우리가 집중적으로 살펴본 곳은 쌍굴 위에 철로에서 남서쪽으로 500m 쯤 떨어진 야산의 평탄한 곳이다. 이곳은 원래 밭으로 개간되었다가 요즘 사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혹시 어르신 만약에 발굴해서 안나오면 어떻하시려구요?"
"아냐 예전에 밭 주인이 이곳을 개간할 때에 불에 그을린 뼈조각이 나왔다고 하나 뭐든 있을거요."
"저는 다시한번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한두명이 죽은 것이 아니라 수십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그곳에서 화장을 했던 아니던 너무 협소하고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아마 전 밭주인이 본 것도 사람뼈가 아니라 동물뼈일 겁니다. 그곳 조금 아래에 민가도 있었다니 개뼈일 수 있고 제가 발굴현장을 2년여 돌아다니며 지켜보았지만 확률이 없습니다."
나의 설명에 불타오르던 민간인 조사위원들의 실망이 커보였다. 왜냐하면 땅을 굴토했다가 아니면 그만큼 주장의 신뢰성이 무너지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우리의 도움이 없이 충북대 박교수팀과 협의하에 그곳을 굴토하였고 나오는 것은 어린아이뼈 몇조각만 찾았다. 그곳이 과거 애장터란 이야기도 나왔다.
헬기에서 사격을 했느니 기관총으로 사격을 했느니 별별 소문이 요란한 이 쌍굴에 무수히 많은 총알 자국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적어도 내가 바라본 총알 자국의 형태는 비록 기관총이라 할 때에 땅바닥으로 즉 하향 사격이 아닌 상향사격이였다. 이 이야기는 사람에게 직접 조준사격이 아니고 위협사격을 가했다는 가능성을 말한 것이고 묻혔다고 하는 한 장소는 사실이 아니였다. 이런 저런 분석적 이야기에 나중에는 나는 부르지않아서 유해발굴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이제 일단락 되었지만 여러가지 교훈을 남겼다. 그 중에 하나가 "과연 전시에 또 다시 적들이 민간인 복장으로 피난민 대열에 끼여들어 아군의 후방 깊숙히 침투하고 최후 저지선에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그 선을 넘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란 해답이다. 적어도 이곳 전투에서 1,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미군의 입장에서 말이다.
나. 김천 전투
북한군은 7월 26일부터 겨부 국도축선의 정면공격을 단념하고, 이 축선에는 일부병력만 남기고 주력을 김천 남쪽의 지례로 우회공격 한다.
지례로 우회기동은 북한군 제3사단의 1개 연대가 영동-황간사이의 4번도로 상에서 밤새 산악기동으로 지례에 도달했다고 보여진다. 이에 맞서 미군은 김천에 있던 미 제24-21-3대대를 이곳으로 보내 방호토록 하고 그 뒤에 기병 5연대를 배비한다,
경부가도에는 제7기병연대로 상주에서 내려오는 곳에는 제8기병 연대가 배비하였으며 지례방면의 수색중대가 중대장 전사등 큰 피해를 입어 부대들이 급파되었지만 북한군은 산속으로 숨어들어 보이질 않았다. 그들은 숫자가 부족하여 지원병력이 오길 기다리며 31일까지 보냈다.
그러다 31일에 드디어 주축선인 경부 가도에 전차 25대를 앞세우고 공격을 해왔으나 미 제7기병연대는 포병과 항공지원을 받으며 무려 19대의 전차를 파괴해 버렸다.
"Stand or Die", 제2의 바탄과 덩케르크는 없다(맥아더 원수, 워커장군)
경부가도와 지례에서 전투가계속 되고 있을 때에 미 제8군사령부는 상주의 미제 25사단을 김천후방으로 철수시켜 대구 정면을 보강하려했으며 8월 1일 이동을 개시한다.
위의 내용은 7월29일에 상주에 제25사단을 방문한 워커중장이, 7월 27일 대구로 방문한 맥아더 사령관의 강조사항을 훈령으로 하달한 것이다.
미 제25사단은 김천 동쪽에 집결중에 다시 열차편으로 삼랑진으로 이동하여 서남부 지역의 적 위협에 대처토록 하고 전군에 '50. 8월1일 낙동강 동안으로 철수를 명한다.
이에 미 제1기병사단은 8월 3일 밤에 왜관철교와 인도교를 폭파하고 낙동강 동안에 새로운 진지를 점령한다.
영동-김천전투결과 북한군은 전차연대의 괴멸과 2,000여 명의 병력손실 등으로 전투력이 50%이하로 가소되어 전투력이 상실되게 되었다.
반면 미 제1기병사단은 전사 64명, 부상 355명, 실종 374명의 피해를 입었다.
"삼도봉-민주지산-각호산에 올랐다"
나는 설천에서 공비들의 이동르트를 파악하던 중에 지역주민들이 용화에서 밎주지산-각호산, 삼도봉으로 해서 백두대간을 이용하게 된다고 한다. 올라서면 오직 산밖에 보이지 않아 특히 겨울에 살아남기가 어려운데 그 고난의 길을 택하여 버티며 밤에는 지역에 내려와 약탈을 일삼던 공비들을 잡으러 토벌대는 또 그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쌍방간에 수없이 죽어갔다. 그 영혼이 우리를 기다리기에 나는 올라야 했다.
경북 김천 부항면 해인리로 이동하여 먼저 삼도봉(1,176m)을 올랐다. 경북 김천시, 충북 영동군, 전북 무주군이 만나는 곳이다. 올라서자 나는 바로 묵념을 올리고 바로 주변을 살폈다. 시간이 촉박하다. 이곳에서 보면 1,000m급의 능선이 남북으로 달리고 있는 모습을 미치도록 볼 수 있다. 개인호가 고지정상을 기점으로 발달해 있다. 우리는 기초발굴을 해 볼 여유가 없다. 민주지산 각호산으로 해서 도마령으로 가야 한다.
석기봉(1,200m)에 이르니 점심시간이다. 세 봉우리 중에서 가장 개인호가 많은 고지군이다. 나는 이곳에서 김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이곳에서 내려서면 김천 상촌면 황룡사가 나오고 남서방향으로 내려서면 무주 설천면 대불리가 나온다.
민주지산(1242m)으로 달린다. 이곳은 얼마전에 공수부대들이 동계산악훈련중 대설로 묻혀 많은 인원이 눈속에서 순직하는 비극이 벌어진 곳이다. 나는 묵념을 올리고 주변의 개인호 실태를 조사했다. 이러는 가운데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올라섰다. 김천에서 올라온 남녀 동호인 10여 명이 황룡리로 해서 올랐다. 바라보니 한 남자가 음주를 건하게 한 모습이다.
"선생님 산에서 음주를 많이 하시면 잘못하면 사고나게 됩니다."
씨익 웃으시며 "그래서 염려해주시는 겁니까. 여긴 군인아저씨는 왜 왔습니까?"
"이곳에 6.25전쟁시 공비들이 아지트로 사용했기에 그 실체를 조사하러 왔습니다."
"그래요. 아니 그 뚱뚱한 체격으로 산을 어떻게 다딘다고 제대로 조사가 되겠어요?"
"우린 등산이 아니고 주변을 탐사하며 다니기에 대한민국 산은 몇군데 빼고 다 올라갔습니다."
"정말이요?"
"제 허벅지를 한번 만져보실래요. 그러고 제가 선생님 허벅지를 한번 만져보겠습니다."
"와 이거 쇠뭉치네.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오해해서"
"죄송하시다면 벌을 받아야지요. 그 벌은 혹시 이 산에서 유해를 목격한 사실이 있다면 알려주는 겁니다."
"그 공수부대가 여기서 눈속에서 눈이 솓아져 압사했습니다."
아니 내가 아는 내용과는 너무 달랐다. 산악 행군 도중에 기온이 급강하하고 폭설이 솓아져 설화사고라고 알았는데 다른 내용이다.
"이 자리가 그들의 동계 훈련장이요. 이곳은 눈이 내리면 모든 곳의 눈이 이곳에 모여 눈속에 동굴을 파고 들어가 잠을 자고 설한지작전을 체험하는 체험장이요."
"그런데 왜 여기서 죽습니까? 다른 곳에서 길을 잃고 눈속에 파묻혀 헤어나지 못한다면 몰라도?"
"아니 군인아저씨도 똑같구먼요. 이 눈동굴에 있다 동굴이 무너져 사고가 나는거나 아저씨가 말하는거나 뭐가 달라요?"
우린 무거운 마음으로 묵념을 올렸다. 그 옆에는 조그만 사무실같은 것도 있다. 도대체 진실은 어디에 있는건지 나는 서서히 산을 떠나야 했다. 이곳에도 고지 정상으로 몇개의 개인호가 남아 있는데 훈련용인지 공비용인지 아니면 이곳을 점령한 토벌대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각호산(1,178m)에 이르렀다. 늦은 여름날이라 해는 길어서 이제 1시긴이면 도마령에 이른다. 도마령은 영동의 조동리와 고자리를 잇는 24굽이의 고갯길로 칼을 든 장수가 말을 타고 고개를 넘었다는 곳으로 가을 단풍이 어디에도 지지않는 곳이란다. 이 길로 남쪽으로 내려 계속가면 무주 설천이다. 그러니 6.25전쟁 당시에 아마도 이런 길을 이용하여 프락치들이나 공비들이 넘나들며 서로 연락을 주고받고 토벌대를 피하고 또는 유인하여 매복했다 기습하여 살상시키는 요충지로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역사, 아니 가픈 과거를 알고 있는 이는 없다. 오늘 이동한 어디에도 그런 기록이 남겨진 곳은 없다.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했다.
"지례에서는 별로 싸우지도 않았다."
제8군은 7월 24일경 "북한 제4사단이 한국의 남서 3,300평방킬로미터 평방 지역을 분산해서 기동중"이라고 판단하고 있을 대, 북한 제6사단과제4사단은 "한국전쟁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동"이라고 일컬어졌던 우회기동을 실시 중에 있었다.
다음은 북한군 제6사단의 기동에 대한 일본전사자료내용이다.(1권p268~270)
"북한 제6사단은 본래 웅진,개성,김포,인천을 점령했던 중공의 제166사단의 정예사단이지만 , 천안까지는 제4사단을 후속시켰다가 천안부터 서남진하여 7월 13일에 예산을 통과하고 이어 군산을 점령한 후에 20일에는 전주를 공격했다. 그런데 이 사단의 진로를 저지하고 있던 부대는 패전부대인 한국 제7사단 민기식부대 밖에 없고 지역경찰이 그나마 접촉을 유지하는 정도였다.
사단은 밤낮으로 전진하여 23일에는 광주로 진입하여 제13연대를 목포로, 제14연대를 보성으로, 제15연대를 순천-여수로 각각 투입시켜 해상 보급을 원활하게 하고 유엔군의 상륙을 저지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25일에 사단은 순천에 집결한다.
이때 지리산에서 내려온 공비들은 사단의 전진을 유도.엄호하고, 정보누설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유선망을 차단했다. 또한 공비들은 전진중에 도처에서 반공인사에 대한 보복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어느 공비가 갖고 있던 7월 29일자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오늘 체포한 12명 중, 국회의원. 경찰. 반공청년단 간부 등 4명은 현장에서 사살하고 나머지 8명은 인민재판 후 처형했다."
남한 서남부지방의 주민들 사이에 혼란이 야기되고 반공을 자인하고 있던 사람들은 앞다투어 부산으로 피난했다. 서울에서 이 지방으로 피난 온 사람중에서 게릴라의 만행으로 희생당한 사람이 적지 ㅇ낳았다. 전후 조사에 의하면 피해가 가장 많았던 곳은 전라남도였는데 전.남북도에서는 거의 전투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피해는 순전히 게릴라에 의한 것이였다."
미 제8군의 정보판단은 북한군이 시속 3.2km로 전진한다는 가정에 계산을 하니 북한 제4사단이 7월 25일에는 지리산 남쪽 안의-진주선에 진출하리라 판단했다.
그러나 이때 제8군의 저지선은 영동-보은(상주)-함창-영덕선으로, 영동 이남에서 남해안까지의 120km 사이는 미군이 한명도 없었다. 워커 장군은 위기를 실감하고 북한군보다 빨리 예비대를 구축하여 낙동강 서남부지역을 기동방어해야만 했다.
그래서 군에비로써 영동에서 철수하여 김천.의성.군위에서 재편성중인 미 제24사단을 진주에서 김천에 이르는 서측방을 방호토록 한다. 당시 새로 임명된 처치 제24사단장을 대구 사령부로 불러 던진 말한디에 의미심장한 장군의 고뇌가 묻어난다.
"귀사단에 이러한 임무를 맡긴다는 것은 매우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말한 그대로 군의서측방이 완전히 노출되어 ㅜ있는 상태다. 적은 북괴 제4사단으로 짐작되는데 계속해서 전진해 오고 있다. 나는 귀관이 진주에서 김천에 이르는 군의 좌측방을 엄호해 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처어치 소장은 60~70%의 장비를 잃고 병사들은 피로와 전장공포에 질리고 대대는 300~400명의 인원밖에는 없는데도 바로 김천의 제19연대를 진주로 급행할 것을 명령하고, 이어 26일에는 군위.의성에 있던 제34연대를 거창을 방어케하고 사령부제21연대는 군 예비로 돌리고 24일 부산에 상륙한 제29연대의 2개 대대를 제24사단에 배속시킴)는 합천으로 이동시켰다.
이와같이 미 제8군이 낙동강 방어선으로 전선을 조성할 싯점에 영동에서 밀려난 제1기병사단 게이소장은 29일 아침에 사단수색중대를 지례로 보내 적정을파악하게 된다. 1개소대 규모의 수색대는 지레입구에서 한국 경찰병력으로부터 적 1개 대대가 진입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본대에 보고 하게 되고 직접 수색중대장이 1개소대 병력과 우리 경찰 14명을 이끌고 진출하여 교전을 하게 되는데 중대장을 포함하여 전사 2명, 3명 부상, 11명 실종이라는 피해를 입는다. 사단은 바로 7월 30일 제24-21연대 3대대와 기병사단의 5기병연대 제1대대, 제99포병대대로 지원토록 했으나 이미 적은 마을을 비워놓고 남쪽의 고지대(500m선)로 올라가 박격포로만 대응할 뿐이였다.
"용감한 중대장"
나는 김천에서 거창-합천에 이르는 3번도로를 따라 지례지역에 대한 탐사와 탐문을 해 보았다. 비록 2명의 전사지만 11명의 실종이 발생한 전투라 나름 해당 지역에 많은 흔적이 있으리라 판단하였다. 하지만 그건 기우였다. 동네분들이 이구동성으로 북한군을 보더니 미군은 도망쳤고 몇명이 겨우 북한군과 전투하다 중대장이 부상한채로 사우다 현장에서 죽었고 많은 병력이 그냥 무기고 뭐고 다 버리고 도망쳤다고 한다.
그러나 미군만 의 문제는 아니였다. 미군이 저 멀리 먼지를 이르키고 나타나는데 마을에 들어왔던 북한군은 모두 산으로 들어가버렸다. 미군이 무서웠다. 북한군도 가공할 미군의 화력과 비행기 포격에 혼이 나서 과감히 맞서질 못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다 지켜본 지역 주민들은 솔직히 싸운 것이 아니고 박격포같은 것만 쏘아대고 1~2명 죽었지 죽은 군인도 없다고 한다. 파편이나 탄피 등은 여기저기 많이 있다고 가져가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