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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2장
1.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1-6)
죄로 인해서 멸망에 처한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손길이 주어짐으로써, 멸망에서 건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것은, 놀라운 은총의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도란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이 사실을 믿게 된 자이며,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의 사건 하나만으로도 부족함이 없이, 모든 것이 채워졌음을 고백하게 되는 사람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는 현재의 형편이 어떠한지의 여부를 떠나서,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은총만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은총의 사건으로 그 속이 채워지지 않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자신의 속을 채우려고 하게 됩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고, 그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덮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은총을 기대하게 되고, 자신이 원하는 은총을 받음으로, 자신의 허전한 속을 채움으로써 만족을 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피로써 죄 용서 받은 은혜와, 평생토록 건강하게 사는 것 중, 여러분은 어느 것을 원하십니까? 둘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하기 싫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개 십자가의 피의 은혜는, 성도에게는 기본적인 것이고, 세상의 복을 받아서 건강하게 살고, 편안한 삶을 누리는 것은, 추가로 주어지는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 받은 자가, 믿음에 순종하며 열심히 살아갈 때 주어지는, 부수적인 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전혀 알지 못한 자의 거짓된 말일 뿐입니다.
이렇게 비유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10억에 당첨된 복권과 10만 원짜리 수표를 주웠습니다. 이 경우 복권이 10억에 당첨된 사실을 알았을 때와, 몰랐을 때의 반응이 어떨까요? 당첨 사실을 몰랐을 때는, 10만 원짜리 수표를 바라보며 좋아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복권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혹시 당첨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복권이 당첨된 사실을 알았다면 어떨까요? 수표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직 10억에 당첨된 복권만으로 기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기독교에서 볼 수 있는 믿음의 모습은, 과연 어느 쪽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현대 기독교가 보여주는 믿음의 현실은, 기뻐할 것으로 기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은혜의 귀함을 알지 못하기에, 사도가 배설물처럼 여겼던 썩어질 세상의 것으로, 자신의 기쁨을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말하면서도, 온통 자신의 삶에 매어 살아가는 모습만 난무하고 있는 것이, 현대 기독교의 현실인 것입니다.
3-4절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사도는 디모데를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로 일컫습니다. 이것은 디모데라는 특정 사람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가 곧 그리스도의 병사임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라고 하면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인데 왜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그런데 이것이 사도가 말하는 믿음으로 인한 참된 현실입니다. 이 말씀에 비춰 본다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서 고난을 피하고, 자신이 꿈꾸는 편안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은, 성경에서 빗나간 잘못된 생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로 복무하게 되기를 소원하십니까? 이것은 사도가 걸어갔던 고난의 길도 거부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고난 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 받기를 거부하지 않는다고 해서, 고난을 좋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도가 고난을 좋아해서, 고의로 고난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싫어하기에, 그리스도의 병사로서 복무하게 되면, 필히 고난을 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병사로 복무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기에, 고난에도 굴복하지 않고 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는 고난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이 있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병사로 복무하기를 기뻐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그리스도가 그의 전부이며, 기쁨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로 복무한다고 해서, 그 대가로 좋은 것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연봉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건강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자녀의 출세가 약속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병사로 복무함에도 불구하고, 직장에서 잘릴 수 있고, 병이 들 수 있고, 자녀들이 속만 썩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병사로 복무하는 것을 기뻐하고 소원한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자로서,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은 자가 분명한 것입니다.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말이 그런 의미입니다.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 생활을 모두 팽개치고, 밖에 나가서 전도만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성도에게는 하루하루 주어지는 모든 생활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 멋대로 팽개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믿음을 먹고 사는 문제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믿으면, 건강하게 잘사는 복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것들이,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생활에 얽매일 때, 고난은 피해야 하는 불행으로만 여기게 될 것이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병사로 복무하는 것보다는, 편안한 자신의 삶을 목적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란, 병사로 모집한 분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자기 생활에 얽매이게 되면, 항상 집중하는 것은 자기에게 기쁨이 되는 일일 뿐, 자신을 병사로 모집한 분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염두도 두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병사로 모집한 분의 기쁨도, 관심 밖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절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사도는 디모데에게 사도에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합니다. 디모데가 사도에게 들은 것은 두말할 것 없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탁받은 그들이,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내게 부탁되어진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곧 날 위한 복음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충성된 사람이란, 복음에 헌신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고, 복음에 헌신한다는 것은, 날 위한 복음이 아니라, 나에게 복음을 부탁한 분을 생각하며, 복음으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자기 생활에 얽매이면 복음을 들었다 할지라도, 자신에게 복음을 맡긴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복음을 들었고, 복음을 알았으니, 복음으로 말미암아 나쁜 것은 피하고, 좋은 것을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에 빠지기 십상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복음의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맡은 자의 모든 삶이, 복음을 나타내고 증거하는 그릇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생활에 얽매인다면, 그의 삶은 복음을 증거하는 그릇이 아니라, 복음을 가리는 훼방꾼일 수밖에 없습니다.
5-6절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경기하는 자에게 중요한 것은, 법대로, 곧 경기 규칙에 따르는 것입니다. 경기 규칙에 따르지 않으면, 아무리 우승을 하였다고 해도, 우승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곧 경기하는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우승이나 열심 이전에 규칙을 따르는 것입니다.
규칙을 경기하는 자가 정할 수 없습니다. 자기 마음에 맞는 대로 규칙을 정하고, 자기 편한 대로 경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해진 규칙이 자신이 보기에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여도,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경기 하는 자에게 요구되는 것인 것처럼, 성도에게 요구되는 것도, 믿음을 자기 입맛에 맞게 수정하지도, 이해하지도 말고, 오로지 성경이 말씀하는 것에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그리스도의 좋은 병사로 부름 받은 자에게 주어질 규칙이라면, 거기에 순종하는 것이 복음에 충성된 사람입니다. 고난은 싫으니까 고난이 없는 길을 가겠다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자기 입맛에 맞게, 병사의 삶을 수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길에는 승리자의 관이 없다는 것이 사도의 말입니다.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내용도, 같은 의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를 수고하는 농부로 빗대어서, 모든 일에 목사가 먼저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곧 규칙을 자기 입맛대로, 수정해 버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곡식을 먼저 받는다는 것은, 먼저 받고 나중에 받는 순서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의 수고는 그때그때 어떤 대가를 받는 수고가 아닙니다. 추수할 때의 기쁨을 바라보고, 수고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대가가 주어지기를 기대하지 않고, 추수를 바라보고 열심히 수고하는 농부처럼, 성도 역시 지금 대가를 기대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주어질 추수의 기쁨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믿음이 세상에서의 기쁨과 연결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러한 기대를 가지고 그리스도께 나온다면, 그것이 과연 좋은 병사의 모습이며, 규칙대로 경기하는 자이며, 추수를 바라보는 농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 복음에서 벗어난 것이고, 승리자의 관이 없는 길을 달려가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충성된 사람은 복음에 헌신하는 사람이지, 자신을 위해서 복음에 헌신하는 척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복음이 자신에게 고난만을 안겨준다고 해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복음이 증거되는 길을 가고자 힘쓰는 그가 바로, 그리스도께 충성된 사람이며, 진심으로 복음을 맡은 자인 것입니다.
2. 모든 것을 참음은(7-13)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복음을 알게 된 것은, 복음을 맡은 자로 부름 받은 결과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여러분을 부르셨다는 것은, 분명 부르신 분의 뜻이 있는 것이고, 그 뜻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복음을 맡겨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자로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항상 복음을 담은 그릇으로써, 복음을 나타낼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자기 생활에 얽매인다면, 부르신 분을 기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생활에 얽매인다는 것은, 곧 자신을 위해 살아감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삶에서, 복음이 증거될리는 만무하지 않습니까?
사도는 디모데를 좋은 병사로 일컫는데, 병사는 싸움을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이지,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해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군인의 먹고 사는 것, 곧 모든 생활은 국가가 책임을 집니다. 하지만 군인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군인은 국가가 주는 대로 먹고 마시며 생활하면서, 군인다운 자로 훈련을 받아서 군인다움을 보여주면 됩니다.
성도가 그와 같은 존재입니다. 성도로 부름을 받은 것은,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먹고 사는 것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책임지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먹이시고 입히십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먹고 살면서, 성도로서 가야할 길에 충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규칙대로 경기하는 모습이고, 추수 때를 바라보고 열심히 수고하는 농부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성도에게는 믿음으로 인한 기쁨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사도들을 통해서, 그리고 수많은 신앙의 인물들을 통해서, 확인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기쁨이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나에게 세상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기쁨과 재미를 충족시켜 주기를 원하는 기대감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가 기쁨이 아니고, 여전히 세상의 좋은 것을 기쁨의 도구로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에게는 그리스도가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처지에 있다고 해도, 그리스도는 변함없이 그들과 함께 하고 계셨기 때문에, 흔들림이 없이 그리스도로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기쁨과는 차원과 수준이 다른 것입니다.
7-8절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그래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는 것은, 단지 머릿속으로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다시 사신 예수라는 것은,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다는 뜻입니다.
물론 성도라면 예수님을 죽은 분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사신 예수님으로 믿는다면,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부지런히 일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하늘에서 우리들을 그냥 바라만 보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고, 대신 그리스도의 영을 보내셨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한 자로 삽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일하심을 뜻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그리스도가 인도하시고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예수님이 주시는 총명입니다. 이 총명이 있는 성도는 그리스도가 곧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기억만 해도 두려움이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고, 인도하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떤 고난으로 가게 된다고 해도, 고난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설사 죽음에 이르는 길로 가게 된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임을 알기에, 얼마든지 순종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직 그리스도로만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가 믿음을 말했으나, 얼마나 믿음과 상관이 없는 길을 갔던가를 능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스도로 기뻐하기보다는, 세상의 것이 주어지는 것에서 재미와 기쁨을 누리려고 했던, 우리들의 불신앙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성도가 그리스도로 기뻐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귀함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귀함에 무지하다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십자가 은혜를 안다고 주장한다고 해도, 그 은혜가 그리스도로 기뻐하는 자리까지 나아가지 않는다면, 은혜에 대해 무지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에 무지한 것은, 자신의 무가치함과 어둠에 자리에 떨어졌던, 자신의 악함을 안고서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은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곧 추상적으로만 그리스도를 외쳤을 뿐, 어둠에 있던 인간의 현실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은혜가 가슴 깊이 몰려오지 않는 것이고, 다시 살아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로, 기뻐하는 것에 대해서도 무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항상 자신만 바라보면서, 세상의 것이 주어지는 것으로 울고 웃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가 두려워 할 것이 무엇입니까? 병들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내 가정에 어려운 일이 올 수 있다는 것으로 두려워해야 합니까?
빌립보서 4:6-7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아뢰라는 것은, 기도하면 모든 염려가 되는 문제들을 해결해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맡길 때,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곧 어려운 일이 있을까 두려워하지 말고, 어떤 어려움에서도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강입니다.
9절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비록 옥에 갇혔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쉬지 않고 활동합니다. 말씀이 활동을 한다는 것은, 다시 사신 그리스도가 일하심을 뜻하기 때문에, 사도가 옥에 갇힌 고난에 처한다고 해서, 예수님이 사도에게서 떠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 예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이 어떤 어려움에 매인다고 해서, 예수님도 매인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자신의 뜻대로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성도는 두려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10절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사도는 택한 자를 위해 모든 것을 참는다고 말합니다. 모든 고난과 박해를 참는 것은, 사도 자신은 택한 자를 위해 부름 받았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도에게 복음을 맡기시고 고난의 길을 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택한 자로 구원을 영광과 함께 얻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에게 매인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부르신 분의 뜻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를 부르신 분의 뜻에 의해 세상이 움직이고 있으며, 세상은 지금도 그분의 뜻에 복종되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가 원하는 나의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곧 불신앙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11-13절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미쁘다는 것은 ‘미덥다, 신실하다’는 뜻입니다. 곧 주와 함께 죽으면 살고, 참으면 함께 왕노릇하고,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한다는 말이 신실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신뢰하는 성도라면, 죽는 것도 고난도 두려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으면 살 것이고, 고난을 참으면 왕노릇 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고난을 참지 못하는 것은, 주를 부인하는 것이고, 주를 부인하면 주님 역시 나를 부인할 것임을 알기 때문에, 성도는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고난도 참게 되는 신앙에 굳게 서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항상 미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한결같이 신실하신 분입니다. 성도의 구원이 가능한 것도, 그리스도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두려움에서 멀어지고, 모든 일에서 참게 되고, 눈앞의 현실보다는 장차 주어질 영광을 소망하는 자로 자라갑니다. 그래서 걱정과 염려가 감사와 찬양으로 바뀌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3. 유익이 하나도 없는 일(14-17)
믿음은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쉬지 않고 일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으로써, 하나님 되심을 세상에 선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성도는, 아무리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게 여겨지고, 다른 사람처럼 열심과 뜨거움이 없다고 해도, ‘내가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식으로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현대 교회에 있어서 믿음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께 두어야 할 믿음의 근거를, 자기에게 두는 것입니다.
믿음의 근거를 자신에게 두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현재의 모습과 형편과 주어지는 모든 것을, 믿음과 연관시켜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라는 근심을 하게 되고,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되지 않을 때도, 하나님이 자신에게서 멀어져 있는 것 같은 생각을 함으로써, 믿음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의 근거를 자신에게 둠으로써, 믿음으로 인한 고난에 대해서도, 마치 하나님께 벌을 받는 차원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곧 고난이 없는 것을 믿음으로 인한, 복의 결과로 인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딤후 1:8절에서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말을 함으로써, 성도에게 고난은 믿음에 의한 당연한 결과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곧 어떤 고난도 성도에게는 부끄러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딤후 1:12절에서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사도 바울을 버립니다. 이것은 바울이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곧 복음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부끄러워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믿음의 근거를 자신에게 두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현대 기독교의 대부분은, 복음으로 인한 고난이 아니라, 사람들이 원하는 축복으로 바꿔 버린 실정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원하는 기쁨을 제공하는 복음으로 바꿔 버린 것입니다. 곧 복음의 본질 자체가 변질됨으로써, 다른 복음을 복음으로 위장하여 내어 놓는 현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생명의 능력이 없는 비복음으로 전락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16-17절에서는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16-17절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망령되고 헛된 말은, 당시 에베소에 성행했던 거짓된 복음을 말합니다. 자기 욕망을 위해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3계명에 보면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자기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부르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망령되고 헛된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 것이기에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생명이며 빛입니다. 어둠에 붙들린 자를 해방시켜, 빛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는 능력이, 복음의 내용이며 본질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원하는 복음의 내용은, 생명도 아니고 빛도 아닙니다.
애당초 생명이 관심이 아니고, 빛이 관심이 아니며, 자신의 삶이 모든 관심거리일 뿐입니다. 이것이 다른 복음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오직 자신이 관심의 전부인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문제는 관심 밖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인간의 욕망의 문제에만 몰두할 뿐입니다.
14절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여기서 말한 말다툼은, 신화와 족보로 인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당시 교회 내에 침투해 있는, 이단들의 가르침과 변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당시 디모데가 시무하던, 에베소교회 내에 성행한 거짓 교사들이, 계속해서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며, 교회의 분열을 조장하고 있었음을 인식하고, 그러한 변론이나 논쟁들을 금할 것을, 디모데에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말다툼은 유익이 전혀 없고, 오히려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유익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의 깊이를 깨닫는 것입니다.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희생과 은혜를 깨닫게 하는 복음이 유익할 뿐이지, 인간을 잘되게 한다거나,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 위한 말들은, 결코 유익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러한 말들은 듣는 자로 하여금, 생명이 아닌 망하는 길로 이끌어 가는 것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도가 진리를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별이 없다면 결국 듣기에 좋은 말, 감동이 되는 말, 위로가 되는 말 등을, 무작정 진리로 여기고 따라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스스로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15절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무엇이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입니까? 사도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곧 진리에 충성하고, 진리에 헌신하는 것이야 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일한 것이 없고, 공로가 없어서 부끄러운 일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보면, 다섯 달란트 남긴 종이나 두 달란트 남긴 종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동일합니다. 모두에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얼마를 남겼든 상관없이 적은 일에 충성하였다고 말씀하고, 똑같이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것을 말씀합니다. 남긴 액수를 따라 차별 대우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받은 대로 일한 것을 두고, 충성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행위를 구분하고, 공로를 구분하고, 상을 구분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는 망령된 것입니다. 성도는 이것을 분별하면서, 진리로만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를 가르치고, 인간의 행함이 의가 되어서, 그것으로 복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가르치는 것들이, 성도에게 어떤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에게서 행함을 이끌어 낼 수는 있을지언정, 그리스도를 은혜를 아는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유익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라면 진리에서 나오는 말과, 인간의 욕망에서 나오는 말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에서 나오는 것만을 마음에 두는 것이 여러분께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주님의 은혜만 증거합니다. 인간의 공로는 증거 되지 않는 것이 진리입니다. 인간의 욕망 또한 용납하지 않는 것이 진리입니다. 교회와 연관된 일이라고 해서, 욕망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회를 통하여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 자기만족을 누리고, 자기 기쁨을 누리고자 한다면, 그 모든 것은 자기 욕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 부흥이 진리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에만 관심을 둔다면, 진리를 위장한 인간의 욕망을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에 관심이 없기에, 진리와 인간의 욕망을 분별하지치 못하게 됩니다.
진리는 성도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것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진리가 아닙니다. 거짓 복음일 뿐입니다. 내 욕심을 채워 주는 것에서, 기쁨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우리를 구원하신 사랑과 은혜를 아는 것으로, 기쁨을 삼고자 하십시오. 그러면 진리를 분별하면서 유익이 없는 일을 버리며, 복음 안에서 기쁨과 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4. 귀하게 쓰는 합당한 그릇(18-21)
20절 “큰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이 구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는 그릇이 있고, 천하게 쓰는 그릇이 있다는 말을 합니다. 이러한 말을 대할 때, 사람들이 갖게 되는 공통적인 생각은 ‘나는 어떤 그릇일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그릇으로 쓰이기를 원합니까? 두말할 것 없이 귀하게 쓰는 그릇이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귀하게 쓰는 그릇이 어떤 것인지 압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일이 무엇인지 압니까?
사실 귀하게 쓰신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귀하게 쓰는 그릇이 되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쓰는 그릇이라는 것을, 자신이 귀하게 되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는 그릇이니까, 귀하게 여기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귀하게 쓰신다고 할 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용도인 것이지, 사용되는 그릇은 아닙니다. 곧 귀하게 쓴다는 것은, 귀한 일에 사용하신다는 뜻이지, 그릇이 귀하다는 의미가 아니란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6절을 보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세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음을 의미하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택하였다는 말을, 자기 구원으로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가령 여러분이 망치를 집어 든다면, 망치를 사용하여 하고자 하는 일을 계획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망치를 위해 망치를 집어 든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 위해, 망치를 집어든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구원론적인 시각으로만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귀하게 쓰는 그릇도 내가 귀하게 여김 받는 것으로, 곧 자기 구원론적인 시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21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을 깨끗하게 함으로써, 귀하게 쓰는 그릇이 되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이것을 ‘만약 누구든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하나님이 귀하게 쓰는 그릇이 된다’는 내용으로 이해해 버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내용과 모순이 됩니다. 왜냐하면 선택받을 조건을 미리 내가 갖추어 놓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의 조건을 보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쓸 만한 그릇이어서, 불러서 귀하게 쓰시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21절의 내용은 자기를 깨끗하게 함으로써, 귀하게 쓰는 그릇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무슨 경건주의나 금욕주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죄를 범하지 않고, 깨끗한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을 깨끗하게 만들라는 뜻이 아니란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이런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한 이런 것은, 진리에서 벗어난 다른 복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면서,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님의 피만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피의 은혜를 바라봄으로써, 용서의 은총 안에 사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귀하게 쓰는 그릇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용서의 은총 안에서 살아갈 때, 그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은, 용서의 은총의 흔적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사 쓰시고자 하시는 귀한 일이고, 성도는 이 일을 위한 그릇으로 택함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귀하게 쓰는 그릇으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담아 주신, 긍휼과 사랑과 자비하심을 나타내고 증거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귀하게 쓰는 그릇입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이 등장하여 이것을 훼방합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에 빠져서, 긍휼과 자비하심을 훼방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18-19절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후메내오와 빌레도 등, 에베소교회에 있었던 이단들은 영의 부활은 인정하나, 육체의 부활은 부인하였습니다. 이러한 거짓된 말들이 진리를 훼방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흔들림이 없이 굳게 서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곧 견고한 터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위에 서 있는 성도는, 어떤 유혹에서도 흔들림이 없게 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위에 서 있는 성도는, 견고한 터 위에 있기에, 불의에서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귀한 그릇으로써, 우리가 받은 긍휼과 자비를 증거하기 위해, 진리를 분별하면서,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며, 오직 하나님께서 내 속에 담아 두신 것만 나타내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귀하게 쓰는 그릇입니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라면, 그 내용물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만,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욕심이나 공로와 같은 것들은, 긍휼과 자비하심을 훼방할 뿐입니다. 그런 것들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서, 하나님이 담아 두신 것만, 나타내고 증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귀하게 쓰는 그릇입니다.
롬 9:21-23절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진흙으로 어떤 그릇을 만드느냐는 것은, 전적으로 토기장이의 권한입니다. 나를 진노의 그릇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항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나를 지으신 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를 왜 진노의 그릇으로 만들었습니까? 내 마음에 안듭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를 만드신 뜻이 무엇입니까?’라며, 나를 만드신 분, 나를 붙들고 계시는 분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릇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망령되고 헛된 말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십시오. 인간의 힘이나 열심을 따라가지 마시고, 사나죽으나 우리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만을, 여러분 속에 간직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귀하게 쓰는 그릇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그릇에는, 더러운 것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오직 깨끗한 것만 담겨 있게 되는 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자비하심입니다.
이 그릇에는 교회 부흥이나 목회 포부 등, 인간의 욕망이 담겨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것은 인간의 욕망에서 흘러나오는 더러운 것들이고, 그 더러운 것을 속에 담아두고 있다면, 귀하게 쓰는 깨끗한 그릇의 역할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속이 무엇으로 채워지기를 원합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사 십자가 아래로 부르심으로써, 세상에서 구할 수 없는 자비하심과 용서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속은 용서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춤추며 기뻐하고 감사함이 충만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속이 과연 이러한 상태입니까?
세상의 것으로 내 속을 채우려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더러움에 던지는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속으로는 귀하게 쓰는 그릇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릴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용서의 은총으로 그 속이 채워질 때, 여러분은 귀하게 쓰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주의 종은(22-26)
여러분은 자신이 성도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설마 ‘나는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성도다’라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죠?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인 것은, 여러분의 선택도 의지도 아니라는 얘기를 수없이 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믿고자 스스로 결정해서 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겉으로 보면, 여러분의 생각과 의지에 의한, 여러분의 결정인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나올 수 있는 생각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도 되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결단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11절을 보면 사도는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는 말을 합니다. 곧 사도는 자신의 사도됨을, 자신의 결정과 의지에 의해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도로 세우신 분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사도로 세우신 분의 의도는, 복음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위해 사도로 세우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는 오직 복음을 위해서 살아갈 뿐입니다. 그것이 사도로 세움 받은 자신이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이었던 것입니다.
사도는 복음을 위해 세움 받은 사도직임을 알기 때문에, 사도직을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대접받고, 많은 사람 위에서 다스리는 것은, 사도로서 분명 어긋난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자신이 목사 된 것에 대해, 사도와 같은 이해를 하고 있다면, 현대 교회에서 수없이 등장하는, 목사의 문제와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목사직을 이용해서, 대접받고자 하는 것도 없을 것이고, 목사직을 내세워서, 마치 교회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지도 않을 것이고, 목사직을 다른 성도와 구별하여, 우월한 자로 여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성도 역시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여러분을 성도로 세우셨겠습니까? 딤전 2:4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뜻이 바울을 사도로 세운 것이고, 여러분을 복음을 아는 성도로 세우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의해 되어진, 성도의 삶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오직 복음을 위해 달려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도라는 존재로, 세상에 머물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에 취해 살 사람이 아니고, 세상을 전부로 여겨서도 안 될 사람인 것입니다.
성도 아닌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길을, 자신의 정욕대로 결정하고 힘써 달려가면 됩니다. 그러나 성도의 삶의 길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고, 그 길로 밀어 붙이시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일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그 일에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로,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지 않으면, 결국 그 마음에 남는 것은 자기 자신 뿐입니다.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하는 것 밖에 없기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의 도구다’라는 말을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마음대로 사용하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이왕이면 이렇게 사용해 주세요’라면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쓰이는 도구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된 것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택한 다른 사람을 위해 나를, 성도되게 하셨다는 것을 도무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모두 구원해서 진리에 아는데 이르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서 나타나고 증거되어야 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복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22절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성도가 정욕을 피하고,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라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도가 그러한 것을 따름으로써,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하지만 사도는 성도에게 어떤 유익을 안겨 주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세움 받은 것이 성도이기에, 성도로서 당연히 따라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유익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유익은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열매임을 알아야 합니다. 곧 성도는 자기에게 돌아올 유익을 기대하기보다는, 복음을 따라 행할 때,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열매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은 그리스도께 있는 것들입니다. 곧 성도가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아는 자로 산다면, 자연스럽게 그리스도께 있는 것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에게서 그리스도의 것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청년의 정욕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청년의 정욕은 단지 젊은 사람들의 정욕이라기보다는, 세상에서의 성공에 모든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청년의 특징을 두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년의 정욕을 따르는 길에서는, 그리스도의 것이 나타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23-24절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은, 인간의 자랑거리와 업적을 두고 경쟁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에서는 다툼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이기고자 하는 욕망만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업적과 자랑거리로 상대방을 누르고 싶어하는 욕망에서, 다툼은 필연코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주의 종은 다투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의 종은, 흔히들 말하는 목사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주를 따르는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주를 따르는 자들이라면, 여러분이 곧 주의 종입니다.
주의 종은 자신의 정욕이 아니라 주를 따르기 때문에, 자신의 자랑과 업적으로, 상대방과 경쟁하고 이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랑하고 나타내는 것이라면, 오직 주님의 업적이고 주님의 행하심입니다. 따라서 다툼은 자연히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주의 종으로서 주님을 생각하게 되면, 성도로서 갈 길은 분명히 정해져 있습니다. 그것은 내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을 나타내는 길입니다. 저 역시 목사로 세움 받은 사람으로서, 갈 길은 분명히 정해져 있습니다. 해야 할 말도 분명히 정해져 있습니다. 저를 위한 길이 아니고, 저를 위한 말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길이고 말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이해하는 목사직입니다.
물론 이 길은 저의 본성으로는 도무지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여전히 저의 본성은 저로 하여금, 제 안위를 걱정하게 하고, 때로는 교회를 향한 유혹으로 끌고 갑니다.
그러나 저를 목사로 세우신 하나님이, 저를 붙잡아 제가 가야 할 길로, 밀어 넣고 있음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로 인해서 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흔적들이기 때문에, 저 역시 저의 어떤 것으로도, 저를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도 우리의 본성을 따라 살면 편합니다. 저 역시 저의 정욕을 따라 말을 한다면, 여러분의 욕망과 일치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도 여러분도 우리의 욕망을 따라 살 사람으로, 세움을 받지 않았습니다. 평생토록 주를 따라야 할 주의 종으로 부름을 입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달려가야 할 삶의 방향까지, 이미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 자로 부름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정욕을 따라 살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따르는 주의 종의 길을 갈 때, 자연히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은 사라지게 되고, 다툼 역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생명이 아닌 것, 진리가 아닌 것으로 경쟁하고 이기고자 하는, 모든 것이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입니다.
주를 따라 살기에 자연히 주를 위해서, 온유하게 되고 참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생각함으로 자연히 참게 되는 것이, 곧 온유인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이러한 온유로 인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지 않습니까?
주의 종을 가르치기를 잘하는 자라고 하는 것도, 성경을 잘 가르친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증거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것 역시 목사의 고유 권한이 아니라, 주를 따르는 자로 하나님께 부름 받은, 모든 성도를 일컫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을 위해 살아갈 때는, 교회에서의 훈계도 복음을 위한 것으로 행하게 됩니다.
25-26절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찌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많은 경우 교회에서 행하는 훈계는,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또는 목사를 보호하기 위한 경우가 태반입니다. 곧 교회에 큰 문제를 일으키거나, 목사를 비방하고 도전할 때, 교회를 위해서 또는 목사를 위해서, 그 당사자를 교회로부터 쫓아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거역하는 자는 훈계하라고 하면서도, 훈계의 목적을 훈계 받는 자의 회개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역하는 자는, 진리를 거역한 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는 훈계하되 온유로 하라는 것은, 거역한 자의 구원을 위해 훈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훈계는 보복도 아니고 징벌도 아니라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도 진리를 거역한 자들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온유로 받으심으로써, 성도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거역하는 자는 훈계하되, 나를 받으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타내는 훈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거역하는 자라고 해서, 그가 멸망 받을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를 돌이키사, 그리스도를 아는 길로 가게 하실지, 누구도 모르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사람에게 자연스런 것은, 자신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복음을 위해 산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본성에 자연스런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시고, 복음을 위한 길로 가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소원하면, 주를 바라보는 것이 성도이며, 주의 종입니다. 성도 됨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할 수 있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