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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별과 인간 양심
信天함석헌
수문(Watergate)은 터지고야 만다!
더위에 여러분 다 많이 고생하시는 줄 압니다. 지금 윤선생 말씀하시는 대로 피차에 우리가 답답한 심정입니다. 시원한 말이라도 있어야겠는데 그렇게 안된다는 말씀 미리 다 먼저 했으니 이해하실 줄 압니다. 그래도 또 모든 것은 때가 있지 않습니까? 때가 있습니다. 요새 이렇게 가뭅니다. 그러나 아무 때 가서도 비가 오긴 올 겁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것과 마찬가지로 역사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그래도 이젠 이만큼 살았으면 자연계에서도 그렇고 정신계에서도 그렇고, 거기 어쩔 수 없는 법칙이 있는 걸 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연계에서 마치 기후의 법칙이 있는 줄 알기 때문에 어떻게 좀 늦어져서 비가 안 오는 일이 있어도 어느 때 가서는 올 거라 확신을 가지고 견디는 모양으로, 우리 역사의 일에서나 인생의 일에서도 한때 답답하지만 아무래도 시원한 날은 오고야 말 것을 믿어서 싸웁니다.
요새 저 미국 같은 나라를 보면 불행이람 참 불행이면서 또 어느 면으로 보면 대단히 시원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름조차도 워터게이트(Watergate)라고, 그래서 수문(水門)이 터졌습니다. 여기도 이제 비가 많이 오면 수문이 터지긴 터질 것입니다. 안 터지는 재주가 없지요. 비가 많이 오면 어떤 수문도 터지게 마련입니다. 수문을 막는 사람은 어떤 비가와도 난 안 터지게 막는다. 그러지만 이날까지 안 터진 수문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걸 하나의 역사적 실예로 본다면 미국을 위해서 섭섭한 일이 되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참 시원한 것입니다. 막아 놓고 민중이 아주 모르는 걸로 끝을 내려고 했던 노릇이 어쩔 수없이 터졌습니다. 미국을 갔다 온 사람 얘기 들으면 요새는 TV에서 그것만 하는 모양입니다. 수문이 왜 터졌습니까? 민중이 의심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의운(疑雲), 의심의 구름이란 말이 있습니다마는 씨은 뵈지 않는 물방울 같은 것이지만 그것이 의심을 해서, 구름이 짙어지면 폭우로 쏟아져 억압의 수문을 깨고야 맙니다.
그런 시원한 소나기 같은 말은 못되더라도 구름이라도 불러 일으켜 봅시다.
죽이는 이는 따로 있다
그런데, 지금 말씀대로 오늘 저녁은, 제 시간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모여서 옛날 한문을 읽어갑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자리에서 얘기하는 것도 이왕이면 거기서 할 것과 같은 말을 해서 두 곳의 책임을 동시에 했으면 합니다. 그래서 옛글 중에서 오늘 저녁 문제에 맞는 글을 하나 읽고 거기 설명을 좀 붙여서 하면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형벌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은 여러분보다는 우리나라의 정치하는 분들이 와서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직접은 정치에 손을 대지 않았어도 사실로 정치는 씨의 손에 있는 거니까 여러분이 들으시는 것이 곧 정치인들이 듣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민상불외사(民常不畏死)면 내하이사구지(奈何以死懼之)리요.』 씨이, 민중이, 사람이 말입니다. 사람들이 언제나 늘 죽 음을 접허하지 않는다면, 아유 죽으면 어쩌지, 죽는 건 싫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죽음을 접허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만일 없다면, 어떻게 즉음을 가지고 그 사람들을 무섭게 할 수 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 담은 『약사민상외사이위기자 오득집이살지(若使民常畏死而爲奇者 吾得執而殺之면 숙감(孰敢)이리요.』 만약 정치하기를 사람들이 언제든지 죽는 것을 싫어하고 죽는 것을 접허해서 죽으면 어쩌지, 나는 죽는 건 싫다, 하게끔 그렇게 정치를 해놓고 爲奇者, 더러 나쁜 장난하는 놈을 吾得執而殺之 내가 능히 잡아서 죽일 수가 있다면, 그런다면 숙감(孰敢)이리오. 누가 감히 거기 반대할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는 그다음
『상유사살자살 이대사살자살(常有司殺者殺 而代司殺者殺)이면 시대대장착(是代大匠斵)이라.』 그런데 죽이는 건, 그럼 이제 나쁜 일 하는 놈은 누가 죽이냐? 그것은 언제든지 그 나쁜 일을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차지하는 분이 계시다. 사살자(司殺者)가 살(殺)이라, 죽이는 것을 차지하는 분이 그걸 죽이는 법이다. 죽을 놈을 누가 죽이냐, 죽을 놈을 맡아 주장하는 분이 계시다.
여기 노자의 뜻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건 하늘이 한다 그 뜻입니다. 그런데 ‘대사살자살(代司殺者殺)’이란, 만일 죽이는 것을 차지하는 이가 있는데, 내가 대신해서, 그이를 내놓고 내가 한다면 그건 뭣 같은고 하니 ‘대대장착(代大匠斵)’이라 그건 저 도편수, 집짓는 대목을 대신해 가지고 ‘내가 하련다.’ 그러고 나서는 것과 마찬가지다.
『부대대장착(夫代大匠斵)이면 희유불상기수의(希有不傷其手矣)이라.』 목수를 제쳐놓고 내가 하겠다 그러고 나선다면 그런 짓하고 손 다치지 않는 놈이 세상에 없지, 그런 말입니다. 다시 한번 읽습니다.
사람들이 언제나 죽음을 접허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죽이는 것 가지고 사람을 무섭게 할 수 있느냐? 만약 사람으로 하여금(정치하기를) 언제든지 죽는 것을 두려워하도록 그렇게 해놓고, 그 다음에 그중에서 혹 나쁜 장난하는 놈을 잡아서 내가 능히 죽일 수 있다면 반대할 사람 없을 거다. 정치하기 어렵지 않을 거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죽일 사람 죽이는 것 누가 죽이냐 하면 그것을 차지하는 분이 계시다. 저 하늘이 기다. 하느님이시다. 그런데 그이가 뉘에게나 다 시켜서 하는 건데 그것을 기다리지 않고 내가 한다, 내가 곧 하늘을 대신해서 할 수 있다 그러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마치 대목을 대신해 나서 가지고 제가 재목을 다듬어 집을 짓는다고 서두르는 것과 마찬가진데 그런 일을 하다가는 반드시 손을 상하고야 말거다.
정치는 양심 간섭 못한다
우리가 형벌문제를 생각할 때에 그 형벌이 하는 거를 어떡할 것이냐?
말을 하려면 많을 것입니다. 법률이고 도덕이고 그런데 관한 깊은 무슨 지식이라든지 체험이 그렇게 있지를 못하니까 자세한 말을 못합니다마는 이 말이 좋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설명을 하면서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데 대한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신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누가 나더러 묻기를 너는 요새 무엇이 제일 관심거리냐? 그렇게 물으면 나는 서슴지 않고 대답할 것이 있습니다. 어떡하면 민족 양심을 지켜갈 수 있을까? 이것이 내 제일 관심거립니다. 양심의 수호입니다. 양심은 물론 우리가 직접 느끼는 것은 개인적인 양심이지만 사람의 살림은 그 근본에 있어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어가지고 있는 민족으로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양심을 지키는 것은 민족적인 노력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민족양심의 수호없이 개인 양심의 지킴이란 불가능합니다. 지금 우리가 양심을 지켜가기가 아주 어려운 시대에 처해 있습니다. 양심을 지켜가기가 왜 어려우냐 주로 두 가지 까닭이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첫째는 정치 때문이고 둘째는 과학 때문입니다. 우리는 잠깐 내놓고라도 저 미국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아요. 나는 미국 역사는 독특한 의미를 가진다고 그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마는 그저 보통 다른 나라와 의미가 좀 다릅니다. 어째 그러냐 그러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설 때에 뭘로 섰느냐, 어떻게 서게 됐느냐? 다른 나라들은 수천년 수만년 전부터 차차차차 자연 발달해서 나온 나랍니다마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인간이 생각해서 세운 나라입니다. 종교개혁이 있은 이후에, 사람들이 자기 신앙을 자유로 지켜가자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정신에 있어서 큰 발달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정치가 간섭을 해가지고 복잡하고 참혹한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시대나 인간정신 문제의 초점은 양심과의 문젠데 엄정한 의미에서 한마디로 요약하면 정치는 인간에 양심에 대해서는 간섭할 권리가 없다는데 귀착됩니다.
그런데 매양 이점에서 잘못합니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 정치가 종교에 간섭을 해가지고 이런 종교는 믿는다, 이런 종교는 못 믿는다, 이래가지고 종교전쟁이 일어나서 오랫동안 비참한 혼란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 끓는 솥 같은 복잡한 유럽 천지에서 뛰쳐나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에라, 나는 이런 데서 살수 없다, 이렇게 내 신앙에 구속을 받고 어떻게 사느냐, 차라리 내 선조가 났던 땅을 내버리고라도 내 나라라 하는 이 조국을 내버리고라도, 나는 양심의 자유를 가지고 내가 섬기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고 싶다, 그러는 사람들이 거기서 탈출해 나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그래 그 사람들이 소위 미국의 혼이 됐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 말고도 물론 간 사람이 많지요. 그건 남쪽 텍사스주를 중심으로 하고 거기 가서 담배농사와 목화농사를 해가지고 어떻게든지 돈 벌고 살자고 갔던, 한마디로 황금을 숭배하던 사람들입니다. 돈을 벌자, 돈 벌어, 돈벌이만 압니다. 그건 말하자면 사람으로 말하자면 몸뚱이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덩치가 아무리 커도 거기 혼이, 정신이 살아 있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 않아요? 미국이라는 나라가 장차 돼가는데 그 혼이 어디 있냐? 그러면 지금 말한 그런 종교의 자유를 위해서 모든 걸 내버리고라도 살아보겠다고 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미국 데모크라시의 시작입니다. 그러한 나랍니다. 그런 나라가 지금 저러니 참 답답하다 그 말입니다. 국가주의에서 보면 미국의 그런 문제 그리 걱정할 것 없지만 미국은 미국인 동시에 인류정신사에서 보면 독특한 의미를 가지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서 그런다니까 참 답답한 일입니다.
백성이 안심하고 살게 하라
그런데 그 문제도 결국은 무슨 문제냐 하면 양심문제입니다. 어째서 정치가 개인의 양심까지 간섭하느냐, 왜 그러냐? 정치는 정치로서의 할 일의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먹을 것 입을 것, 노동을 어느만큼 평균하게 분배를 할 수 있으며, 생산이 돼나오면 그걸 어느만큼 골고루 나누어줄 수 있으며, 그런 정도의 일, 먹고 입고 집을 가지고 하는 그런 일에 관해서 적당하게 하면 그 소임이 다된 겁니다. 왜 그런고하니 정치하는 사람은 거기에 대한 전문가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일은 그걸로 다 되는 것 아니고 정신과 종교와 도덕과 예술의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것을 만일 정치하는 사람이 예술도 내가 좋아하는 예술을 해라, 도덕도 내가 좋아하는 도덕대로 해라, 종교도 내가 편리하다고 생각하는 종교만 해라, 그런다면 그건 주제넘은 생각입니다. 그런 일을 하게 될 때에는 어느 나라도 망하는 법입니다.
그런데 여기 지금 사람들이 항상 늘 죽음을 접허한다는 건 무슨 소리 인고 하니, 여기에 대하여 주를 놓은 소유(蘇由), 저 유명한 당나라시대의 문장가 있지 않았어요. 그 사람의 주(註)가 아주 재미있습니다. 뭐라고 그랬는고 하니,
「정번형중(政繁刑重)이면 민무소조수족(民無所措手足)이라」 했습니다.
정치가 번거롭고 형벌이 중해지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어한다.
어떻게 할 줄을 모르게 된단 말입니다. 그런즉 민불외사(民不畏死),그 사람들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여기 처음에 죽기 두려워 한다는 건 무슨 소리인고하니 평소에 정치가 그런 문제 곧 사람의 사사생활이나 양심문제에까지 간섭을 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때입니다. 그렇게 삶을 즐길 수 있는 때면 사람이란 죽는 걸 싫어하는 법입니다. 사는 건 좋고 죽는 건 싫다, 인간의 떳떳한 정입니다. 죽는 건 싫다. 생을 즐거워하고 죽는 것을 두려워해서, 그러한 속에 간혹 가다가 더러 나쁜 일하는 놈도 있지 없지 않으니까 그것을 잡아서 벌을 하면 그럼 무슨 문제가 있을 것 없지 않아? 이 말 옳은 말입니까? 잘못된 말입니까? 옳은 말입니다. 수백 년 전의 말이지만 옳은 말 아니에요.
인심이 천심
그렇게 놓고는 노자가 뭐라고 했는가 하면 그렇지만 잘못 생각해서는 안된다. 내가 잡아서 죽인다고 하니까 네 마음대로 그 사람을 잡아 죽인단 그런 말 아니다. 왜 그런가 하면, 죽일 사람 죽이는 것은 마땅히 차지하는 이가 있다 그 말입니다.
누구 길까? 사람을 세상에 낸 이만이 죽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생명을 준 이만이 빼앗을 권리가 있을 겁니다. 분명히 아십시오. 이것은 천하의 원리입니다. 생명은 부모가 준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생명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어느 시간에 내리는 알 수 없는 어떤 명령에 복종을 할 뿐입니다. 생명은 아버지가 준 생명도 어머니가 준 생명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사람은 누구도 제 생명을 제 손으로 만든 사람도 없고 남의 생명을 자기 손으로 만든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면 생명을 만들질 않았다면 죽일 권리도 없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착각이 돼 나오는고 하니, 살고 죽는 것은 우리가 능히 할 수가 있다, 내가 하늘 뜻을 대신해서 할 수 있다하는 데서 나옵니다. 그런 거 아닙니다.
하늘이 누구를 시키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누구를 시키는 것만은 사실이지만 하늘이 어떻게 시키나 거기 문제가 있습니다.
요새는 투표방법으로 그것을 알아보자고 합니다. 그런 것이 하나의 방법입니다. 표를 써서 표가 많이 오면 그것이 하늘이 내게다 주는 증거다, 그렇게 해 볼려고 그럽니다. 그럴 때에는 그 투표라는건 사람의 생각이 들어가지 않고 엄정하게 각 개인의 자유에 맡겨서 매수도 하지 말고 간섭도 하지 말고 누가 따로 선전을 하지도 말고 그렇게 하고 투표를 했어야 할 겁니다.
미국이란 나라가 지금 저런 문제가 난건 닉슨이 자기가 또 한번 대통령이 되고 싶은 생각에, 부하 사람을 시켜서 그랬는지 시키기 전에 그 아래 사람이 과잉충성으로 그랬는지, 자기는 말이 나는 직접관계는 안했다 그러지만 그것은 닉슨의 양심의 정도가 낮은 걸 증명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만일, 양심이 있는 사람 같으면 자기가 명령하지 않았더라도 그 “책임은 내가 져야합니다” 할 것입니다. 그런다면 닉슨도 자기 죄를 어느 정도 속할 수도 있고, 인망이 올라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나는 직접 관계한 일 없다.” 설혹 관계한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럴수록 인격도 내려가고 국민의 신망도 받을 수가 없는 일 아니겠어요?
그러니, 이런 일이 다 하늘 뜻을 대신한다고 하는 잘못 생각하는 데서 납니다. 옛날엔 하늘 뜻이 어떻게 나타났느냐 하면 인심이 천심이라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저 하늘 위에서 “야, 아무개야, 내가 너를 임금으로 세운다.” 요샛말로 아무개야 내가 너를 대통령으로 명령을 한다, 그러지 않습니다. 옛날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던 때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정신연령이 그보다는 높이 올라갔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의 명령을 저 하늘에서 무슨 나팔소리처럼 난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나팔소리처럼 난다고 그래도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면 내 속에 있는 심리가 이상심리로 인해서 그런 환상의 소리를 듣고 보고 하는 거지 하나님이 직접 그러시는 것 아닙니다.
지금은 그보다도 우리가 역사생활을 수천 년을 해보고 인간의 문화가 있어서, 경험에 의해서 아는 것은 뭐냐 하면 하늘 뜻이 전체 사람의 뜻에 나타난다 합니다. 여론이라는 겁니다. 옛날로 말하면 양심이라는 겁니다. 누가 시킨 것 없이, 시키면 사람의 마음이란 유혹되기가 쉬운 것이기 때문에 그릇나가기가 쉽습니다마는 적어도 무슨 각별히 누구만이 가서 선동을 한다든지 누구만이 가서 매수를 한다든지 그런 것 없이 자연대로만 맡겨두고 판단을 하게 되면 일반 민중이란 언제나 전체적으로 볼 때는 정당한 비판을 내린다 그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조시대에 이조가 들어서기는 들어섰지만은 이성계의 한 일이 민중이 보기에 하늘이 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태조에 대해서 동정하는 생각이 없고, 정몽주라든지 최영이라든지 하는 사람들께 있었습니다. 세조도 자기의 흉계와 지독한 아주 악독한 폭력을 써가지고 모든 선비를 죽여가지고 정권을 얻어 임금이 되기는 됐고, 그 다음에 정치를 하는 데 상당히 어느 정도 수완있게 한 점도 있기는 있지만 그래도 민심이 어디 있냐 그러면 사육신 편에 많이 동정을 했지, 세조를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것은, 성공 불성공이 문제가 아니라 민중의 가슴 속에 누가 그 자리를 차지했나가 문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이해관계도 아니고 순전히 이치로 볼 때, 도리를 생각해볼 때에, 이들의 생각이 옳았다 하는 한 생각 때문에 아지도 못하는 동안에 가는 동정입니다. 그것이 하늘이 허락해준다는 겁니다.
형벌이 너무 중해졌다
그럼 그와같이 죽일 사람 죽이는 것은 항상 하늘이 차지해서 하는데 그럼 어떻게 하나, 누구를 시키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시키는 일을 어떻게 하느냐? 민심의 돌아가는 걸로 한다 그 말입니다. 민심 돌아가는 걸로 되는건데 그때 그걸 내가 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제일이다, 입후보를 내가 해가지고 합니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의회정치의 입후보라는 걸 아주 우습게 생각합니다. 내가 감히 어떻게 일어섭니까? 내가 하겠다고 자신이 있노라 하는 사람 나는 신용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여간 일어서서 내가 하겠다, 그리고 내 생각대로 한다 그럽시다. 그러면 그것은 스스로 하늘자리에 서는 일입니다. 사람을 죽이고 살릴 권이 있다하는 말입니다. 모든 권위는 결국 생살권(生殺權)의 주장입니다.
실지로 없는 권위를 있는 척하면 도둑질해서 쓰는 생각입니다. 이런 점은 아마 세계의 어느 정치도 예외에 속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다 이런 폭력이 배경이 돼가지고 있는 나랍니다. 그러니까 하나도 정당하게 돼가는 형벌이 있을 수 없습니다. 형벌이 지나쳐서 중합니다.
1차 대전 이후에 한동안은 인도주의가 상당히 올라갔습니다마는 그 이후는 어떻게 된 것인지 세계적으로 2차 대전 이후로 역행이 되게 됐습니다. 나는 통계적으로 학문적으로 자세하게 하질 못해 모릅니다마는 상식적인 판단으로 봐도 세계 전체를 놓고 볼 때에 벌이 중해졌지 결코 경해 진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나라, 진보된 나라에서는 사형 같은 것 폐지하자고 그런 나라도 있습니다. 또 전쟁도 확실히 죄악이다 하는 생각에 젊은이 중에서 우리는 다른 게 아니고 내 믿는 종교적인 양심 때문에 나는 군대에 갈수 없다, 그러는 그 양심적인 거부를 해서 법률로 허락하는 나라도 있습니다마는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그런 것이 문제가 안됩니다. 더구나 우리나라 같은 데서 그런 걸 말하면 나라의 정부는 고사하고 일반사람들까지도 뭐라는고하니 국민의 사대의무를 무시한단 말이냐 그러고, 그렇게밖에 생각을 못합니다마는 그것은 아직도 이 우리의 양심이 우리의 살아가는 이 시대에 맞추어서 그만큼 올라오지 못했기 때문에 되는 일입니다. 조만간 우리에게서 가도 많은 젊은이들이 병역이 싫어서도 아니고 무서워서도 아니고 단순히 종교적 양심 때문에, 어떻게 인간으로서 서로 동류를 죽일 수 있느냐 그런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차라리 징역을 하면 했지 군대는 갈수 없다고 하는 청년이 반드시 많아질 겁니다. 나는 많아지길 바라는 사람입니다. 많아지면 그것이 우리나라에 발달이지 결코 잘못된 길이 아닐 겁니다.
그렇게 하면 혹 말하기를 공산주의를 어떻게 막겠는가 하겠지만 공산주의를 무기로 막을 줄 압니까? 그것이 벌써 막아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계역사가 잘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닉슨이 모택동을 수걱수걱 찾아간다고 하는 사실이 그걸 증거하는겁니다. 닉슨이 뭐하자고 모스크바까지 찾아갑니까? 그것이 그것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그러지 않고도 될 수 있다면 왜 그랬겠습니까? 공산주의가 만일 원자탄만 많이 가지면 없앨 수 있다면 왜 그러겠습니까? 그걸 가지고 될 수 없다는 것이 증명이 돼가고 있기 때문에 마음의 원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화해를 하고 평화적인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그러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이왕 그렇다 할진대는 진실로 성의로 해야 할 건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속엔 딴 생각이 있기 때문에 자기네가 권력을 쥐고 이걸로 하늘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할 일을 내가 이렇게 한다 하는데 쾌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일이 바로 되지 않습니다.
아무도 하늘 뜻을 대신할 수 없다
사람을 내는 것도 하나님이 내고 죽이는 것도 하나님입니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분들은 ‘하나님’이라는 명사가 싫으면 그건 다른 말로 아무걸로 해도 좋습니다. 하늘이라 해도 좋고 자연이라 해도 좋고 이름은 뭐라 붙여도 상관이 없습니다. 어쩌나 사람을 내는 이가 계십니다. 내는 이가 계시니까 나고, 죽으면 또 돌아가는 데가 있습니다. 마치 물을 떠오면 이 사발 속에 있다가 또 내버리면 제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온 데가 있기 때문에 또 그 근본으로 돌아갑니다.
생이란 마땅히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그 주인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는 그런 생각을 한다면 자기 마음대로 법을 만들고 자기 마음대로 처벌을 해서 그렇게 해서 내 속에 좋다고 하는 일이 되기만 하면 이것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거니 그렇게 좁은 생각은 아마 안할 겁니다. 그것은 생각을 넓히 하지는 못해, 생각을 깊이 하지를 못 해서 그럽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란 참 개인적인 판단으로만은 되질 않습니다. 우리가 뻔히 그것을 알건만 어쩐지 잘 그렇게 안됩니다. 말하자면 우리 개인의 생각으로 하면 비가 올 듯한데 아니 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유두살이가 와서라도 비가 오는 법인데 왜 아니 오냐? 그러지만, 무슨 일인지 안 오는 수도 더러 있습니다.
천지자연이란 하루하루로 돼가는 것이 아니라 스케일이 크게 돼가는 거니까 어떤 때 조금 가무는 때도 있고 어떤 때 홍수가 조금 나는 해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체로 볼 때에는 어쨌거나 여름에는 비와서 곡식 자라게 마련이고, 가을 되면 추수하게 마련이고 이것이 영원불변한 일입니다. 가다 어떤 때 조금 틀리는 일이 있다고 해서 그걸 의심해 되겠습니까? 하지만 인간이 마침내 자연이나 하늘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것은 연구결과 어느 정도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일어난 생각입니다.
현대 문명의 잘못된 점은 인간이 자기의 힘을 가지고 능히 못할 일이 없다고 하는데 있습니다. 연구해서 어느 정도 아는 것은 좋습니다. 우주학을 연구하는 것도 나는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연구는 연구고 거기서 어떤 무엇이 나왔다고 해서 너무 흥분한 생각에 “아 우리가 못할 것이 없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그것은 잘못인데, 우리는 학자들이 이때까지 수백 년 그런 선전을 해왔고 또 그런 생각을 일반민중이 깊은 생각 없이 받아드려 가지고 잘못 생각했던 인생관 때문에 그 결과를 우리가 지금 받고 있는 것 아닙니까?
너무 다른 말이 길어졌습니다마는, 그것을 오늘 말하는 여기에 관계시켜 말한다면, 사람이 잘못하는 일이 있으니까 벌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벌을 어떻게 하느냐? 누가 하느냐? 어느만큼 하느냐에 문제가 있는데 그 점에서 지금 정치는 크게 잘못하고 있습니다. 여기는 죽이는 얘기만을 들었습니다마는 아래 층층이로 있는 형벌이 있습니다. 그것을 결정할 때에 어느 근본되는 데서 잘못되면 모든 형벌이 잘못되게 됩니다. 왜 그런고하니 사람의 생각에서 근본 잘못된 생각은 뭔고하니 ‘나’ 라고 하는 내 감정입니다. 사람이 나 없이는 물론 못살지만 나라고 하는 것과 내가 나에 대한 감정이라고 하는 것과는 별개문제입니다. 참 사람이 됐다는 사람은 내가 나인 줄을 알면서도 나에 대한 감정을 강하게 써서 편견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나나 마찬가지 인격을 대접하게 되는 것이, 그게 정신적으로 높아진 인간입니다.
나만 알고 다른 사람을 생각할 줄 모르는 것을 이기주의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사람인 다음에는 정도 차이는 있습니다마는 아무도 자기에게서 완전히 해방이 되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감히 하늘 뜻을 받아서 할 수 있다 말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일수록 아까 말씀한대로 그 양심이 의심스러운 사람이라 그 말입니다. 퍽 재치가 있고 인격이 있어서 그러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말 아니할 때까지는 우리가 존경을 하겠는데 “내가 능히 하늘을 대신할 수 있다” 그러는 순간 그에 대한 신뢰가 다 떨어져버리고 맙니다. 그것은 자기의 지나친 생각이지 감히 정당한 양심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감히 자격 없다 해야……
그러기 때문에 형벌을 하는 마당에 들어가서는 언제든지 내가 형벌한다는 생각이 없어야 옳습니다. 이게 우리가 알아야 할 겁니다. 우리도 대통령의 자리에 간다든지 국무총리 자리에 간다든지 법무장관 자리에 간다든지 판사 검사의 자리에는 안 갔습니다마는 그래도 우리는 우리대로 우리 주위에서 남의 잘못에 대하는 태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생각할 것은 뭔고 하니 내가 능히 남을 판단할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가령 한 컵의 물이 있다고 그러더라도 여기 가령 파리가 한 마리 빠진다든지 불결한 물건이나 독이 든 물건이 빠진다면 이 컵의 물 전체를 내버리지 조금 내버리고 그러고 난 마시겠다 그럴 사람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의 생각은 여러 가지의 생각이 있을 수 있지만 거기 어느 독소가 들어올 땐 이 전체가 그만 믿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성경이 말하는 건 그래 그렇습니다. 마땅히 그런 생각이 있어야 사람은 겸손해지는 겁니다. 나는 감히 할 자격이 없습니다, 해야만 비교적 그래도 하늘 뜻을 대행을 해서 정당한 판결을 내리울 수가 있겠는데 잘못하는 것 보기만하면 곧 신경이 곤두서서, 핏대가 두드러지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판단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하는 나 자신도 부끄럽습니다. 이 말하는 나 자신도 어떤 젊은 사람하고 얘길 하다가 화를 참질 못해서 뺨을 때렸던 일이 있습니다마는 그럭하고 나서 오늘날까지 아직도 마음이 어찌 어찌 불안한지 참 내 마음이 언짢습니다. 내 일생에 남을 손을 대서 때렸던 것이 네 번 쨉니다. 참 안된 일입니다. 평상시에 그러지 말자고하는 주의를 가진 나로서도 못 참고 그러는데 하물며 당연히 그래도 좋지 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정당히 해 갈 수 있겠나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것이 한 사람 두 사람을 단위로한 한 가족도 아니고 전체의 수천만 되는 한 나라를 상대로 한다 그럴 때 어떻게 되겠나? 이것이 우리 국가생활에서 생각할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노자가 말하기를 대목이 따로 있는데, 집을 짓는데는 이 인간의 목수라는 사람이 하지만, 다년간 경험을 쌓은 사람이 목수 노릇을 하지만 이 역사의 집을 짓는 이 우주의 집은 누가 짓느냐? 그건 짓는 이가 계시다. 그것도 어느 짓는 분 목수가 계셔 짓는다. 그러니까 그 이가 할 텐데 네가 뭐라고 나서서 그러느냐? 네가 재주가 상당히 있는 것 같아 나서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 네 재주가 감히 그걸 못 감당한다. 그러기 때문에 하기만 하면 네 손 다칠 거다. 손만 다치고 그만두면 모르지만 그건 아주 점잖게 말하니까, 희유부상기수(希有不傷其手), 손 안 다치는 법 없지 그랬지만, 사실을 말하면 모가지가 안 없어지는 법 없을 겁니다. 히틀러가 뭣입니까. 무솔리니가 뭣입니까. 진시황이 뭣입니까! 형벌을 내가 할 수 있다! 내 뜻이 곧 법이다! 그랬던 것들 모가지가 안 달아난 것이 어디 있나 보시오. 생전에 모가지가 안 달아나면 죽은 다음에도 모가지를 자르는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 것이 이 날까지 종교가 수천 년 두고 가르쳐온 일입니다. 이 근래 오다가 종교심 이 약해졌기 때문에 이 어리석은 인간들이 감히 거기 대해서 건방진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 어디 있다더냐? 그런 말을 감히 하게 됐습니다. 그러고 감히 대담하게 백주에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죽는 데로 내버리기도 하고 죽이고도 안 죽였다고 그러기도 하고 그럭하는 폐해가 어디서 생겼냐 그러면 이 문명 때문에 그렇게 됐습니다. 자연대로 있을 때에는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도망갈 수도 없었습니다. 무소도야(無所逃也)라 하늘 아래에서 도망갈 데가 없지. 그렇지만 이놈의 과학이 발달됐기 때문에 있는 걸 없이 만들 수도 있고, 없는 걸 있게 만들 수도 있고, 남의 집 비밀을 알 수도 있고, 엿듣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엿들을 수도 있고, 조작을 할 수도 있고, 그런 과학의 발달을 그것을 잘못 썼기 때문에 인간이 이렇게 되지 않았겠습니까?
죽으면 다가 아니다
그러니까 내가 우리 지금 양심의 위협을 느끼는데 그것은 주로 정치 때문이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다른 까닭도 있기는 있습니다마는 제일 크게 장난을 하는 것이 정치입니다. 나 일전에도 누가 얘기하는 걸 들었습니다. 이북에서는 국민들께 소위 김일성전집이라는 걸 만들어가지고 강제로 성경책처럼 읽힌다고 합니다. 흔히들 이북엔 종교 없다고 그러지만 모르는 말입니다. 이북에는 김일성교가 있습니다. 사람의 세상치고 종교 없는 법 없습니다. 짐승의 세상은 모르겠습니다마는 사람의 세상에는 종교 없이는 못삽니다. 마치 지구 위에 어떤 물건도 지구의 인력이 아니고는 있을 수 있다 그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원하거나 아니 원하거나 간에 우리는 지구의 중력 속에서 삽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깨닫거나 못 깨닫거나 간에 종교적인 관계 속에 사는 것이 사람입니다. 다만 아느냐 모르느냐가 문제입니다. 지구의 중력이 있는 줄 알면 내가 넘어질 만한 때도 안 넘어질 수가 있지만 지구의 중력이 있는 줄을 모르면 본능적으로 잘 하다가도 반드시 크게 다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알고 모르는 차입니다. 종교문제도 마찬가집니다.
사람은 종교 신앙 있어야만 바른 인간사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김일성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종교를 그냥 두고는 참된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자기 정치가 용납되지 못할 줄을 알아 종교를 말살하기는 하면서도 자기 이름으로 가짜 종교를 만들어 사람들을 한때 속이면서 지배해가는 것입니다. 김일성뿐만 아니라 모든 정치는 이 점에서 꼭 같습니다. 그런데 이 점에서 사람들의 생각이 옛날에 비해서 크게 박약해졌습니다. 그것이 걱정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앞날을 그런 점에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여러분이 여기 앉아 계시지만, 여러분 몇십 년 후에는 다 없어질랍니까? 나는 이제 70이 넘었으니까 잘한대도 10년 있겠는지 20년 있겠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도 나보다는 좀더 오래 있을지 몰라도 어느날 가서는 분명 없어질 것입니다. 그렇지요, 눈에는 안보이게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인생입니까? 나는 안 없어질랍니다. 내가 만일 없어질 사람이라면 이런 말할 수가 없습니다. 못합니다. 어떻게 이제 사는 이 시간까지만 살고 죽는 다음에는 없어진다면, 내가 무슨 자신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고 누굴 아니라고 비평을 하고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인간은 책임에 살고 권위에 삽니다. 만일 죽으면 다라면 어디서 책임이 나오며 어디서 권위가 나옵니까? 선은 뭐고 악은 뭐입니까? 죽지만 죽지 않습니다. 죽지 못합니다. 죽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이요 생명입니다. 이제 이 몸은 없어지지만 반드시 계속해 있다 믿습니다. 그것이 오 늘의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미래도 그것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건 믿으려면 믿고 안 믿으려면 안 믿고 여러분의 마음대로 하시오. 하나 살다보면 아실 겁니다. 죽으면 다라 하고 살아보는 것과 죽어도 다가 아니다, 그 다음에 생명이 있다 하는 것과는 다를 것입니다.
양심은 혼자서 못 지킨다
이제는 시간이 거의 다 되고 그래서 내 말을 이제는 끊어야겠습니다마는 한마디로 하면 벌을 하는 건 사람이 하는거 아니고 이 천지의, 이 생명의 주인되는 이만이 할 수 있는 거다 그 말입니다. 사람은 어느 동물과도 다르게 제 동류에게 벌이라는 것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 하면 인간 이상이 될 수 있지만 잘못하면 이 때문에 인간은 동물만도 못한 것이 되고 망해버릴 수 있습니다. 인격을 누가 만드는지 인격을 만드시는 이만이 벌을 할 수 있습니다.
벌이라는 건 우리 인격이 가다가 조금 잘못된 것이 있어서 그 잘못한 것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 인격을 만든 그 뜻만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뜻은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실행은 반드시 사람을 통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사람 된 점은 생각하는 데 있는데 그 생각이란 반드시 언제나 일정하고 모든 사람이 다 일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을 그럼 어떻게 하면 우주와 생명의 역사를 발전시켜가는 그 근본의지, 곧 종교에서 신이라 하는 그 뜻을 반영시킬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중요한 과제라 그 말입니다. 단 하나의 발붙일 점은 양심뿐입니다. 예로부터 오늘까지 여러 가지 종교가 있고 철학이 있습니다마는 이 점에서는 일치 합니다. 양심을 살리고 키우는 일입니다. 양심을 살리는 것이 내가 살고 전체가 사는 일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정치 살림이 잘못 됐으면 잘못 됐을수록, 내가 내 양심의 판단이 환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양심의 판단대로 하기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우리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왜 어째서 그러냐 그러면, 요 말씀이 오늘 여러분에게 하고자 하는 말의 요점입니다.
양심이라는 것을 옛날 우리는 생각하기를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닙니다.’ 이것을 나는 여러분 앞에서 강조합니다. 양심은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민족적인 것입니다. 양심은 어디서 나오냐?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어떻게 이 땅에 생기게 되냐 그러면 인간이 살림을 하는 가운데 나오게 됐는데, 그 인간의 살림이란 처음부터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 사회적, 종교적인 것입니다. 개인을 이제 필요한 모든 자료를 주고 지식을 주면 살 수 있느냐?
그렇게 줄 수도 없거니와 설혹 준다 가정해도 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살림은 처음부터 종족적으로 된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전체로 된 것입니다. 이것을 전체적 사회 혹은 유기적 사회라고도 합니다. 지금부터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그런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직도 대부분의 종교까지도 양심이라고 그러면 개인적인 것으로만 생각을 해서 네가 깨달았느냐? 그러면 구원을 얻는다. 네가 깨닫지 못했냐? 그러면 구원을 못 얻을 거다 하는 결론밖에 못내리웁니다. 그러나 그런다면 내가 알기 쉽게 여러분에게 문제를 제출하리다.
그러면 여러분이 나기 전에 났던 모든 조상이 참 종교적인 그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면 어떡할 거냐. 그럴 때, 그 뭐 지옥가도 관계없지 그러고만 평안할 심사이겠습니까? 또 여러분의 무릎에 사랑하는 자녀를 낳아서 기르다가 말도 채 못하고 알아듣기도 전에 죽었다 그럽시다. 그것은 어떡하렵니까? 그것은 그저 하나의 물건을 얻었다 잃어버리는 모양으로 그저 죽어도 좋습니까?
여러분의 가족 중에서 한 사람이 앓는다 그럽시다. 그 앓는 병이 보통 병이 아니고 이 인간의 이성을 유지해가기가 어려우리만큼 심한 병이라 그럽시다. 그럴 때 어떡하겠습니까? 그럴 때 네 책임은 네가 져라 그럴 수 있습니까? 세상에 그런 몰인정하고 잔혹하고 비이성적인 일이 어디 있습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 양심은 개인에게 있다 하던 것은 개인도 모르는 때에 우리를 깨우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깼습니다. 개인적으로 사람이 됐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훨씬 자랐습니다. 개인만으로 하던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인간의 양심이라고 하는 것이 구성되기는 도리어 전체 살림이라고 하는 깊은 바닥에 내려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령 우리가 구원론을 얘기한다면 “전체의 구원 없이 개인의 구원 없다”고 나는 아주 이젠 그렇게 단언을 합니다.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 그렇게 믿겠는지 모르지만 나는 개인으로 구원 얻는 것으로 만족하고 전체가 망하는 것을 관심하지 않는 종교라면 그런 종교는 믿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만약 그 따위가 하나님이라면 그 따위 하나님에 대해서 반항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버러지 하나라도 아끼고 자리를 주어서 있게 하는 이 자연이 어느 하나를 무시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을 우리가 지키고 길러가려면 어떻게 하냐? “너, 혼자만은 못 지킨다” 그 말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아십시오. 혼자서는 못합니다. 너 혼자 강하면 물론 좋지만 너 혼자만으로 지키려 해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옛날은 또 모릅니다만 적어도 지금이 과학적인 시대, 기술적인 시대, 고등기술이 발달이 돼서 사람이 어쩔 수없이 하나로 돼 있는 이 시대에는 나 혼자 아무리 깨끗하려고 해도 깨끗할 수도 없고 나 혼자 빳빳하려고 해도 빳빳할 수도 없습니다. 어떡하면 이 전체 사람의 양심을 지키느냐? 이 문제 생각 않하고는 안됩니다.
폭군들의 양심을 깨우자!
우리 육신의 살림도 전체적인 것이 됐지만 정신은 더욱 그렇습니다. 인간의 타락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내려다보고 있을 성인이란 이제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여기까지 자랐습니다.
그러는 데 있어서 형벌문제를 생각할 때 형벌권을 정치하는 사람들이 쥐고 있어서 잔인하고 과중하게 하고 있습니다. 정치라는 것이 결코 하늘 뜻을 대표한 것이 아닙니다. 정치는 어떤 당파, 어떤 수, 그 수가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일부 수의 사람이 전체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이해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지 전체의 합의를 얻어서 전체를 대표한 것이 아닙니다. 또 그것은 자기네 권력과 부를 대표한 거지 결코 그것이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도덕적인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예술적인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자님이 말하기를 夷狄之 有君 不如諸夏之無也라고 했습니다. “저 문화가 낮은 민족들이 임금을 가진다 해도 중화민족들이 임금 없는 것만 못하다”
임금이란 정치의 표적입니다. 문화가 낮은 백성도 정치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한다고 해도 중화민족에 정치 일시 없는 것만 못하다. 왜?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인간이 인간돼 가는데 더 기본적인 것은 문화에 있지, 인간 인간끼리가 서로 하나가 돼서 살아가는 이 사회적인 살림을 해가는 이것이 바닥 되는 거지, 정치에 뭐 대가리가 있다든지, 대가리에 그다음 되는 대가리가 있다든지 그까짓 것이 문제 되지 않는다, 일시로 그거 없어도 된다 그 말입니다.
해방 이후 우리가 지내봤습니다. 상당히 몇 달 동안은 정치적 공백기가 있어도 우리 사회가 혼란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일본 사람 다 죽인 것도 아닙니다. 일본 사람을 다 밉다고 내쫓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정치적 원수지만 인간적으로 대해주었습니다. 왜? 그래야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더러 잘못도 있기도 있었지만 인간 양심이 변함없이 있기 때문에 “한국 사람은 인정이 있는 사람이다. 뭔지 도리를 아는 국민이다” 하는 것이 세계에 증거 되지 않았어요? 불행이지만 그것으로 우리 정신이 올라갔습니다. 6·25도불행이람 불행입니다만 그걸로 인해서 우리에게 전쟁만이 아니고, 사람 죽이기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만 아니고, 그보다 힘있게 사람 살리려는 힘이 있다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이후에도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뭔고 하니 죽으면서도 인간이 인간성을 지켜가는 이것이 있기 때문에 돼가지, 만일 죽고 사는 것이 칼과 총으로만 결정이 된다 그런다면 오늘날 이렇게 있을 것 같습니까? 이 점 분명히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마음에 있는 것을 말할 수도 없고 듣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들을 수도 없고 해서 우리의 양심의 교통을 자유로 할 수가 없는 시대니 만큼, 이런 생각을 우리 속에 상당히 깊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왜 그런고하니 양심이란 심할 땐, 평상시엔 될수록 말하고 듣고 해야 하지만, 심할 땐 말 못하고 듣지 못해도 그걸 우리 속에서 교통해야 합니다. 그것이 정신의 놀라운 점입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런 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렇게 해서 우리 민족 양심을 살려가야 한다, 그렇게 해서 세계에 참여해서 인류의 양심을 지켜갈 때에도 우리가 보람 있는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당면한 어려움이 뭔고 하니 우리 살아가는 이 정치에서 인간에 대한 벌을 할 때 과중하게 합니다. 과중하게 하는 것은 쓸데없이 목수도 아닌데도 목수를 대신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데서 나옵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네도 어느 때 손을 다칠는지 모가지가 없어질는지 모르지만 한 사람이나 두 사람만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다간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다 그 말입니다. 역사가 보여주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든지 될 수 있다면 남들 모양으로 사형을 폐지한다든지 거기까지는 못 가더라도,하여간, 인간의 이 개인의 양심을 살리기 위해서 형벌을 가지고 지나치게 하지 마라, 형벌을 너무 지나치게, 지독하게 하면 모처럼 사람 속에 있는 이 양심에 손상을 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겁니다. 절대 없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날까지 세계 위에 모든 폭군이 있었습니다. 그러지만 마지막에 인간 속의 양심을 빼앗는데 성공을 하고 갔다는 놈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건 하나도 없다고 단언해도 좋습니다. 그러니까 종당 마지막에 가선 우리가 이길 줄은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빨리 이기질 못하면 희생자를 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희생자가 많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양심을 그만큼 짓밟고 약화시킨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점에 힘을 써서 어떻게든지 우리의 양심을 지켜서 지나친 형벌로 인해서 쭈그러져가는 인간의 양심을 건지자, 그 말입니다. 더구나 아까 한 말씀 또 반복합니다마는 과학 이 한몫 곁들여 기술적으로 악독하게 합니다. 참 어려운 점입니다. 이런 점 피차 주의해서 이 시대에 났던 우리로서 할 소임을 하는 것이 우리를 건져가는 일이고 또 인류 전체를 건져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폭군 속에도 양심은 있습니다. 다만 잠자고 마비돼 있을 뿐입니다. 악독한 형벌제도를 고치는 길은 오직 잘못된 정치인들의 양심을 깨우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죄히 흘리는 피가 아니고는 어려울 것입니다.
민주주의란 다른 것 아니고 폭군들의 양심을 깨운 것입니다.
씨알의소리 1973년 8월 25호
저작집30; 없음
전집20; 12- 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