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팔자에 / 최미숙
82년도에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발령 받은 곳이 여천군 화양면이다. 지금은 넓은 도로도 생기고 관광지가 되었지만 그때는 건물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 비포장 도로로 교통까지 좋지 않았다. 집에서 학교까지 시내버스 포함 3번, 왕복 6번을 타야 했다. 대학 다닐 때 빼고는 집을 떠나 보지도, 여행을 다녀본 적도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대학 때도 오빠와 같이 생활했기 때문에 엄마 곁을 떠나 혼자서 생활하는 것은 겁나고 두려운 일이었다. 통근이 힘들기는 하겠지만 집에서 다니기로 했다.
흔들리는 버스를 타고 떨리는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학교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버스에서 내려 5분 쯤 걸어야 했다. 구두에 걸리는 돌을 피해 교문에 들어서니 검정 고무신 신은 아이들이 보인다. 까까머리 남학생, 네모 단발 여학생이 나를 쳐다본다. 내가 살고 있는 순천에서는 보지 못했던 아이들의 겉모습에 놀랬다. 교무실에는 또래 전주교대 출신 신규 여교사 2명이 와 있었다. 그들을 보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동무가 생겨 다행이었다. 둘은 관사에서 생활하기로 하고 친구가 되었다. 부엌 하나 달랑 달린 그곳은 대문도 없었고 창문을 보호하는 창살도 보이지 않았다. 옆 관사는 살림을 할 수 있는 곳으로 40대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학교는 넓었으며 뒷산에는 밤나무가 많아 해마다 가을이 되면 학생들과 밤을 딴다고 했다.
통근버스를 놓치지 않으려면 일찍 서둘러야 했다. 여수에서 출발한 버스에는 화양면에 근무하는 교사들로 가득 했다. 아침마다 아이들 이야기며 교장, 또 전날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로 시끌시끌하다. 그러다 학교가 하나씩 보이기 시작하면 차근차근 내린다. 말하지 않아도 어떤 선생님이 어느 학교에 근무하는지 저절로 알게 되었다.
학부모들은 벼와 보리 농사를 짓기도 했지만 주로 고구마를 심어 소주 원료인 빼깽이를 만들었다. 벼 심는 시기가 되면 못밥이라고 집집마다 돌아가며 선생님들을 초대했다. 매일 주민들과 한 상에 앉아 못밥을 먹었다. 점심 도시락을 싸고 다녔던 때라 고마웠다. 지금이야 도다리 미역국이 알려져 있지만 나는 생선 넣은 미역국은 그때 처음 보았다. 모내기가 끝나고 고구마 심는 6월 초가 되면 현충일까지 연이어 농번기 방학을 했다. 이때는 아이들도 고구마 심는 부모님을 도와 심부름을 한다. 늦가을이 되면 캔 고구마를 씻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절간 해 흙 위에 널어 말린다. 뻣뻣하게 마를 때쯤 멀리서 보면 온 밭에 하얀 꽃이 피어 있는 것 같다. 순천이 큰 도시는 아니지만 모든 것이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이었다.
4학년 담임을 했다. 지금은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지만 그때는 용의검사가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얼굴도 씻지 않고 가방만 들고 오는 아이, 손톱을 깎지 않아 긴 손톱 밑에 검은 때가 끼어 있는 아이가 많았다. 학교 끝나면 대부분이 뱀을 잡아 돌리면서 놀기도 하고, 바다에 낚시하러 가기도 했는데 도무지 무서움이 없었다. 밤 늦게까지 뛰어 놀고는 씻지도 않아 목 주변과 가슴팍까지 거뭇거뭇한 때가 그대로 보였다. 몸 속은 보지 않아도 뻔하다. 학교 뒤 저수지로 데리고 가 얼굴과 목 주변을 씻기기도 했는데 아무 일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지금 생각하면 위험한 일이었다.
그 시절 가을 운동회는 마을 축제다. 학년 별 무용, 마스게임, 기마전, 인간 탑 쌓기, 부채춤, 소고놀이, 줄다리기, 이어달리기 등이 필수여서 그것을 준비하느라 9월 초부터 한달 동안은 매일 연습해야 했다. 우리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힘든 줄도 몰랐다. 운동회 전날은 총 예행 연습으로 마지막 점검을 하면 준비는 끝난다. 인간 탑 쌓기는 가을 운동회의 꽃이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사고에 대비해 교사들이 주변을 빙 둘러 서면 6학년 중에서 몸집이 큰 아이들이 맨 아래 서고 그 어깨 위로 몸무게가 적은 아이들이 오른다. 그렇게 4층 맨 위는 몸집이 작은 3학년 학생이 올라가 두 팔을 벌리고 서는데 높이가 상당하다. 조그만 아이가 겁도 없이 맨 위에 올라 늠름하게 두 팔을 벌리고 섰을 때 바라보고 있던 학부모 모두가 탄성을 지르며 아낌없이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연습 때부터 여러번 봤지만 그때마다 대견하고 가슴이 벅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첫 발령지를 생각하면 그 장면이 선명하게 가징 먼저 떠오른다.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멋진 기억으로 남아있다. 점심시간이 되면 마을 별로 준비한 음식을 나눠 먹고, 오후에는 노래자랑이 벌어진다. 볼성 사나운 사람도 있었지만 너나 없이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늦은 시간까지 운동회 연습하느라 관사에서 자는 날이 잦아졌다. 바쁘게 지내다 시간이 널널하니 처음에는 적응이 안됐다. 마을 주변을 둘러보기도 하고 화단에 걸터 앉아 노을을 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차츰 시간을 즐기게 되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새벽 일찍 일어나 서두르지 않아도 되었고, 자고 싶은 만큼 넉넉히 잘 수 있다 보니 이곳에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허락을 받고 관사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생애 처음으로 가족의 품을 떠나 자유 아닌 자유를 얻었다.
그곳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한 친구는 옆 학교 선생님과 연애하느라 거의 매일 여수로 나가고 둘은 운동장으로, 뒷산으로 돌아 다니며 친구를 기다렸다. 밤 늦게까지 친구의 연애 이야기를 듣는 것도 우리의 낙이었다. 시간에 쫓기지 않는 여유 있는 생활 덕분에 얼굴이 좋아졌다는 말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잠결에 창문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꿈인가 하고 눈을 떠 귀를 기울이니 누군가 문을 열려고 창을 흔드는 게 보인다. 심장이 오그라 들었다. 무서워 말도 나오지 않고 그대로 얼어 붙어 버렸다. 가끔 시골이나 섬으로 발령받은 친구들이 좋지 않은 일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정신을 차리고 잠에 빠져있는 옆 친구를 깨웠다. 어둠 속에 눈을 뜬 친구에게 손가락으로 창문을 가르켰다. 사람 그림자가 보인다. 놀란 친구가 누구냐고 소리를 지르니 도망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앉아서 밤을 꼬박 새웠다. 여름이라 덥다고 창문을 열어 놓고 잠이 들었으면 어쩔 뻔 했을까 생각하니 단 하루도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마을과 떨어져 있는 학교 주변에는 버스 정류장 앞에 조그만 상점이 하나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가끔 마을 청년들이 학교에 놀러 오기는 했지만 워낙 마을과 떨어져 있다보니 별 교류는 없었다. 교장, 교감에게 밤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 했지만 그 분들도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문단속만 철저히 하라고 했다. 나는 그날로 짐을 싸 들고 나와 버렸다. 무섭고 겁이 나 하루도 있을 수가 없었다. 시간에 쫓기는 피곤한 생활이 다시 시작 되었지만 집에서 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맛본 내 자유는 그 사건을 계기로 끝이 나 버렸다. 그 후로 지금까지 혼자 사는 자유는 한 번도 누리지 못하고 항상 가족과 함께이다. 가끔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시간이 그리울 때도 있지만 그냥 꿈 꾸는 걸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첫댓글 시집와서 빼깽이를 알아 듣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선생님 글이 정겨움으로 다가옵니다.
혼자 사는 자유를 앗아간 그때는 얼마나 놀랐을까
생각해봅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저도 학교 관사에서 자취할 때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
주변에서 그런 이야기를 여러 번 듣기도 했고요.
얼마 전 있었던 흑산도 사건도 다 그런 일의 연장이리라 생각합니다.
그 시절 가을 운동회가 제가 섬에 근무했던 학교의 운동회와 비슷하여 정겹습니다.
언젠가는 저도 그런 내용으로 글을 써보고 싶네요.
그때는 시설도 참 열악했어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