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영상: 광부 파독 60주년 기념음악회 장소: 베를린 돔 2023년 4월 15일,
유한식/1963년 파독 광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1963년 12월 23일에 독일에 광부 제1진으로 온 유한식입니다.
강옥순/1970년 파독 간호사: 제 이름은 강옥순이고요. 고향은 진해입니다. 그리고 저는 1970년 1월말에 독일에 왔으니까 지금 53년이 되었네요.
김진복/1970년 파독 광부: 김진복 이고요. 1970년 5월 31일에 김포공항을 떠났죠.
파독 간호사: 1974년 4월 15일에 쾰른으로 비행기가 도착했어요. 그래서 거기서 뮌헨으로 분배를 했죠.
파독 간호사: 1976년 2월에 파독 간호사로 베를린에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여지껏 지금까지 베를린에 있어요.
내레이션/최불암: (전라남도 무안) 땅은 언제나 귀하고 고마운 존재입니다.
정양수/1977년 파독 광부 정정수의 형: 여기에서 이렇게 비닐로 쳐진 데가 다 동생하고 우리 형제들 땅이에요 5천평(약169㎡)이에요. 밥을 안 먹어도 괜찮아요. 밥을 안 먹어도 참 여기 좋죠 내가 이 땅을 보면 마음이 엄청나게 아픕니다. 내 동생 정수가 뼈 빠지게 벌어서 이 땅을 사줬습니다. 참 농사 잘 짓고 엄청나게 형으로서는 흐뭇합니다.
내레이션: 네~ 농부에겐 땅이 있고 없고는 천지차이~ 덕분에 번듯한 집을 지을 수 있었죠. 가난한 집안에선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정양수: 여기 사진을 보면 120~130년 된 고택에서 아주 생활이 곤란했을 때 살았던 집이 사진 속에 나와 있어요. 주소 JUNGSOO 베를린
내레이션: 정정수, 광부가 되고자 독일로 간 집안의 막내 (1977년 광부로 파독된 막냇동생 정정수) 독일 베를린, 정수씨는 여전히 독일 베를린에서 살고 있습니다. (1977년 마지막 파독 광부 정정수), 청년이 노인이 된 세월,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한결 같은 입맛,
석봉건/정정수씨 아내: (라면을) 드시지 말라고 해도 안되고 기본으로 하루에 네 개, 그게 기본이에요.
내레이션: 처음 고향을 떠나 올 땐 타향살이가 이처럼 길어질지는 몰랐습니다.
정정수: 저는 파독 광부로 왔는 데 1977년 10월 26일에 왔습니다.
내레이션: 정수씨 아내는 파독 간호사입니다.
석봉건/1972년 파독 간호사: 저는 석봉건이에요. 1972년 10월 6일에 베를린에 왔어요.
내레이션: 더 나은 삶을 위해 부부는 그저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정정수: 어렸을 때 너무 못 사니까 한이 맺혀서 돈 밖에 생각 안 했어요. 독일 와서도 마찬가지였어요. 더 열심히 해서 한국에 돈도 좀 보내고 엄마 아빠가 잘 사시게 해드려야지 그 생각 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자식, 아내
내레이션: (독일 에센/파독 당시 석탄산업의 중심도시) 석탄 산업이 호황이던 시절, 독일 광산은 가난한 한국청년들의 희망이었습니다. 기대반 두려움반 스물 일곱살 청년은 가난을 벗기 위해 탄광으로 향했습니다.
정정수: 이건 탄광으로 내려가고 올라오고 (할 때 탔어요) 자일이 이 밑으로 막 내려가는 거예요. 막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석탄을 캐고 석탄을 캐서 나오는 경로가 있잖아요. 그게 오면서 자꾸 떨어져요. 나는 삽으로 주워서 싣고 그랬거든요. 지하 갱도로 들어가는 그 광경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세월이 45년이 돼서 제 나이가 72살 아닙니까. 세월이 이렇게 빠른가 싶고
내레이션: 1960년대 초 경제개발자금이 절실한 한국은 독일과 경제협력을 맺습니다. 한국은 독일에 차관을, 독일은 한국에 인력파견을 원했지요. 그렇게 1963년 첫 광부 모집이 이루어집니다.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에 젊은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유한식/1963년 파독 광부: 제 생각에는 경쟁률이 한 200:1 정도 되었지 싶어요. 꽉 찼어요, 꽉 찼어. 거기서 떨어진 사람이 노동청에 돌을 던지고 그랬어요. 교육받을 때 찍은 사진인데 내가 여기 있잖아요. 그러니까 여기 서울대학교 졸업한 사람도 있고 대구 도청에서 온 공무원도 있고 별별 사람들 헌병 대위였던 사람도 있고 장사하다가 온 사람도 있고 별의별 사람이 다 섞여 있었죠.
내레이션: 1963년 12월 21일 제1진 파독 광부 123명을 시작으로 1977년 까지 약 8000명이 독일로 떠났습니다.
김진복/1970년 파독 광부: 아이고 이거 찾았어요. 너무 귀하게 보관해 가지고 보여드릴까요? 1970년 김포공항 떠날 때 가지고 온 가방, 신세계 백화점에서 새것 사서 온 것이 지금 다 낡았어요. 이거는 1973년의 광산 마지막 작업복이에요. 제가 영원히 남긴다고 아껴서 딱 한 번만 입고 새것처럼 보관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광부가 하얀 옷을 입으면 어떡해요 하는데 석탄이 새까마니까 눈에 띄게 하얀색 옷을 입어요. 한 번 입고 들어가면 또 새까매져요.
내레이션: 김진복씨에게 광부는 자부심입니다.
김진복/1970년 파독 광부: 디자인이 멋지잖아요. (작업복을 보니까) 가슴이 두근거리죠. 영화 돌아가듯이 그때 장면들이 모든 상황이 순간적으로 다 떠오르는 거예요. 제가 사고 나서 죽을 고비를 넘겼던 그런 장면까지요.
내레이션: 탄광 생활은 위험천만했습니다. 체격이 큰 독일인에 맞춰진 기계는 좀 채 익숙해 지지 않았죠. 기계 속도와 호흡이 어긋나기라도 하면 곧장 사고로 이어졌습니다. 生과 死의 경계에서 부디 오늘 하루도 무사히 새카만 탄 가루와 함께 광부들은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흘려보냈습니다.
김진복: 갱도가 그냥 무너질 때가 있어요. 굴 속에서 어디 도망 갈 때도 없죠. 그냥 쪼그리고 있는 거예요. 한 번은 무너진 게 제 몸을 덮쳤는 데 돌 하나가 떨어지면서 헬맷이 벗겨져서 피투성이가 됐는데 저는 알죠. 제가 죽지 않은 것을~ 주위 사람들이 제가 죽었다고 소리 지르는 걸 다 들은 거예요. 여기도 흉터가 있고 이것도 흉터고 여기도 흉터고 여기도 있고요. 광산에서 제가 죽었다고 소문이 날 정도로 죽을 고비였어요. 그러면서 끝까지 제일 어려운 일을 했어요. 이런 표현을 하고 싶어요. 저는 광부 중의 광부입니다. 저처럼 억척스럽게 일한 사람은 없어요.
심동간/1977년 마지막 파독 광부: 수테페레라고 천장에 압축으로 세우는 게 있거든요. (동영상) 그 쇠가 튀어서 입을 때려서 제 앞니가 안으로 많이 떨어졌거든요. 그러니까 사고가 손가락 다친 것 깨진 것 이런 건 보통이고요. 참 많이 다쳐요. 다리 부러진 사람 우리가 탄광에 들어갈 때 글뤽 아우프 (Gluck Auf) 이게 인사예요. ‘다치지 말고 죽지 말고 돌아오라’ 깊은 뜻이 그 뜻이거든요.
내레이션: (베를린 비반테스 종합병원) 비슷한 시기 독일 땅을 밟은 사람은 광부만이 아닙니다. 몇해전 정년 퇴직한 김금선씨는 지금도 파트타임으로 환자를 돌봅니다.
김금선/1976년 파독 간호사: 1976년 2월에 파독 간호사로 베를린에 도착했습니다. 저 여기 40년 동안 응급실에서 근무했어요. 40년 전에는 유럽에서 제일 큰 응급실로 쳤거든요.
내레이션: 광부에 이어 1966년부터 독일로 간호사 파견이 시작되었습니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지금처럼 활발하지 않던 시절 (1966~1976년 총 11,057명 간호사 파독). 그들은 생면 부지 낯선 땅에서 스스로 삶을 개척하고자 한 당당한 여성들이었습니다. 한국의 간호사들은 영리하고 친절했습니다. 하지만 천사 같은 미소 뒤엔 남모를 고충도 있었지요. 특히 언어적응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강옥순: 독일 간호사들이 병동으로 일하러 나가고 나면 저 혼자 간호실에 남게 되고 전화가 오면 간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소리가 나요. 왜냐하면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이현숙/1974년 파독 간호사: 출근해서 한 10분씩… 앉아 있는게 고역이었어요. 못 알아들으니까. 웃으면 웃어야 할지 표정 그게 참 곤란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벨만 울리면 쫓아가는 게 한국 간호사들이었을 거에요. 차라리 일을 하는 게 편하니까
김금선: 일단 아직 말을 잘 모르니까 항시 웃잖아요. 환자한테 늘 웃으면서 아주 친절하게 하니까 그때는 ‘한국의 엔젤’ 천사라고 그랬어요. 우리 처음에 왔을 때 환자가 그러더라고 ‘코레아 엥헬’ 이라고 그래서 실수를 안 해야 한다 뭐든지 하려면 진짜 아주 완벽하게 잘 해야 된다.
내레이션: 독일 간호사들이 꺼리던 힘든 업무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강혜지/1974년 파독 간호사: 제가 온 곳은 처음에 노인병원이었는데 노인들 전부 씻기고 주사 놓고 다 해야 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되게 힘들었어요. 왜냐하면 저희는 체력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는데 독일분들은 체격이 되게 크고 뚱뚱하잖아요. 그래서 힘들었어요.
석봉건: 부모가 도저히 키울 수 없다고 우리 병원에다 맡기는 거죠. 그런 아이들이 8~9명을 혼자 돌봐야 해요. 아이들마다 다 밥을 먹여 줘야죠. 그 다음에 기저귀 갈아줘야죠. 보통 어려운 게 아니죠. 드라간 이라는 아이가 있었어요. 유고슬라비아 남자아이인데 간호사들이 걔라면 막 두손을 들어요. 근데 이상하게 내 말을 잘 들어요. 제일 무서운 간호사가 누구냐 그러면 봉건이라고 하고 너를 가장 사랑하는 간호사가 누구냐 그러면 봉건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걔가 그런 말 한 마디 해주는 거로 인해서 수간호사가 저를 아주 인정해 주는 거예요.
내레이션: 광부와 간호사들은 아끼고 아낀 임금 대부분을 한국으로 보냈습니다. 1977년 까지 송금액 약 1억 달러, 당시 한국 총 수출액의 2% 규모였습니다. 그래도 아깝지 않았습니다. 집안 일으키는 보람에 고생도 낙이라고 여겼습니다.
정정수: 봉급봉투,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몰라요. 내 형제들이 이 돈을 받으면 땅도 사고 집도 사고 그러니까 얼마나 좋아요. 그렇게 그 보람으로 살았어요.
이현숙/1974년 파독 간호사: 우리 월급이 그때 800마르크 (당시 원화 가치 약 16만원) 이었어요. 우리 생활비는 지금 생각하면 한 달에 50 마르크 가지고 살 수 있더라고요. 그러면 그 나머지 돈을 한국으로 송금을 계속했죠. 서로 시합하듯이 얼마나 보냈냐. 얼마 보냈다. 서로 자랑하고 그랬죠.
유한식: 우리가 보내는 돈이 그래도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됐대요. 종잣돈이 됐대요. 그리고 우리가 여기 와서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한 것도 하나의 주춧돌이 됐다고 해도 말이 아니죠. 집을 세우려면 주춧돌이 없으면 지을 못 세우잖아요. 그만큼 참 든든한 일을 했어요.
내레이션: 새로운 기회를 찾아 독일로 떠나온 한국의 광부, 간호사들, 어느 덧 6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김길화/파독 간호사: 1973년에 왔어요.
기자: 파독 간호사로 오신 거예요?
김길화: 남편이 먼저 와서 저는 가족으로 초대해서 왔어요 그리고 간호사 생활했어요.
이휘성: 여기 살면서도 이제 나이가 좀 드니까 모이는 횟수가 줄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제가 여기 와서 한인회 행사 온 것 같고 너무 너무 좋습니다.
내레이션: 파독 60년 기념사진을 남기는 자리, 이들이 걸어온 길은 오늘날 독일 한인사회에 기초가 됐습니다. 낯선 땅에서 광부와 간호사가 만나 부부연을 맺고 산지 45년 가족을 위해 보다 안정된 삶을 위해 참 뜨겁게 후회 없이 살아왔습니다. 광부 간호사 파견이 종료되고 일부는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정수씨 부부는 독일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이 시작됐습니다.
정정수: 광부 끝나고 베를린 오니까 일자리기 없는 거예요. 그래서 1980년에 두번 째 회사를 만났는데 그게 플라스틱 공장인데 냄새가 워낙 지독해서 오래 있을 직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신문을 보니까 B자동차에서 사람을 구한다고 해서 갔었어요.
내레이션: 그렇게 광부는 자동차 공장 노동자가 됐습니다. 자동차 회사는 광산보다 작업 환경이 좋고 임금이 더 많았습니다. 그는 일터를 사랑했습니다. 옛 동료들이 퇴직 후 오랜만에 찾아온 정수씨를 반갑게 맞아줍니다.
안토니우스 게카스/직장동료: 잘 지니고 있죠?
정수: 그럼
안토니우스: 다시 봐서 너무 반갑네요. 이렇게 다시 오니까 좋네요. 정말 옛날이었어요. 건강하세요.
정수: 고마워
정수: B자동차에서 제 연봉이 8만 유로였어요. 1년에 8만 유로, 1억원이 넘죠. 내가 성실하게 일하니까 이런 행복을 받는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레이션: 남부러울 것 없던 시절, 그 행복을 놓치지 않으려 정수씨는 누구보다 열심히 헌신적으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시련은 예기치 않게 찾아 왔습니다.
정정수: 나도 모르게, 간이 그렇대요. 아파도 모른대요. 피를 토하니까 그때야 아~ 의사한테 가보니까 간경화 말기래요.
석봉건/정정수씨 아내: 한국으로 치면 총책임자가 있잖아요. 그 사람이 병가 내라고 해도 안 냈어요. 너 멍청이냐? 너 아픈 거 다 아는데 왜 병가 안 내냐?
정정수: 사람이 일하다가 보면 버틸 수 있잖아요. 집에 있는 것보단 회사에 나가는 게 낫다. 나는 그 길 밖에 없잖아요. 나는 아들하고 딸, 우리 집 사람 이것 밖에 없었어요. 내일 죽더라도 열심히 일하겠다. 그것만 염두에 두고 그렇게 인생을 살아왔어요.
내레이션: (베를린 샤리테 대학병원) 죽음의 문턱에서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1989년 간이식수술에 성공한 것입니다. 독일내 열 아홉번 째 수술 사례였습니다.
데니스 우리히/샤리테 대학병원 간이식 센터장: 정정수씨는 자랑스러운 19번째 이식환자입니다. 30년 후 우리가 여기 앉아서 이렇게 대화할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석봉건: 이상하고 신기하고 너무 편하고 감사해요.
내레이션: 정수씨의 생일날, 가족들이 모입니다. 1989년 이후 가족들은 정수씨가 수술에 성공한 5월 8일을 생일로 기념합니다.
정유진/정정수씨의 딸: 아버지 생일 축하해요 건강하게 오래 오래 행복하게 같이 살아요,
정정수: 응 고맙다. 너희도 건강하고 열심히 해서 남들 부럽지않게 살아라.
석봉건: 너무 너무 감사하고 살아줘서 감사해요. 덤으로 사는 생이잖아요. 1989년에 이식 수술해서 33년 덤으로 산 생이네요. 간경화 말기로 아팠는데 자기 해야 할 것 다 하고 가정을 우선으로 하는 사람이라 전 정말 감사해요.
내레이션: 돌아보면 어떻게 흘러왔는지 모를 아득한 세월~ 그래도 힘들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고난도 고생도 모두 보람이라 여기며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정유진: 어렸을 때 저희가 굉장히 가난환 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사고 싶은 거 있을 때 마다 부모님이 안돼 ‘이게 있잖아’ 외식을 많이 안 했거든요. 물을 살 수 없을 정도로 ‘집에서 보리차 마셔’ 항상 저는 그걸 어렸을 때 너무 많이 들어서 ‘아 우리는 정말 가난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좀 커서 보니까 항상 모으셨던 거예요. 한국에 그만 보내도 되니까 지금 남은 돈으로 뭔가 인생을 누리면서 살았으면 좋겠는데 불쌍해요…(눈물을 보임). 왜냐하면 지금도 옷을 잘 안 사세요. 고급식당 가면 너무 불편해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돈 없는 것도 아닌데 항상 남을 위해서만 살다가 인생을 다 지나버린 것 같아서 너무 불쌍해요. (부부사진) (가족사진)
내레이션: (독일 에센) 그 시절 수 많은 아버지들이 정정수씨처럼 살았습니다. (야외 장례식), 한 시대를 짊어졌던 광부 간호사들은 어느 덧 하나 둘 생의 마지막을 맞고 있습니다.
장귀매/1974년 파독 간호사: (울면서) 잘 지내고 또 만나야지
故이창노/1974년 파독 광부: (영정사진)
정정수: 그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편안히 쉬시고 영면하십시오.
조종관/1977년 파독 광부: 지금 4월 초잖아요. (올해) 연달아서 일곱 번째 돌아가셨어요.
김우선: 이제는 매년 갈수록 많아질 수 수밖에 없어요.
김미자/1966년 파독 간호사: 다음 차례는 나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잘 가시고 나도 잘 가야지
유한식/1963년 파독 광부: 이제 내 나이 85세인데 한편 생각하면 참 너무 쓸쓸하고 외롭다고…
강혜지/1974년 파독 간호사: (피아노 연주) 혼자 있을 때 항상 한국 생각나면 제가 한국 동요를 많이 쳐요. 한국은 제 고향이잖아요. 그래서 한국이라는 말을 들으면 소름이 끼쳐요. 그만큼 형제도 보고싶고…
이현숙/1974년 파독 간호사: 한국은 항상 염두에 있고 가족이 없으니까 한국에서 2019년에 입양해 왔어요. (강아지) 너무 정이 가요. 강아지한테 많이 의지하고 살아요.
강옥순: 지금도 힘을 주는 내 고향은 그래도 한국이라고요. 독일에 50년 넘게 살았지만 저는 한국 사람이에요.
정정수: 내가 한국에 몇 번 더 갈지는 모르지만 한두 번 더 갈 거예요. 가고 싶어요.
내레이션: (서울)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열망이 무에서 유를 만들어냈던 시절, 그 60년이 있었기에 오늘의 놀라운 변화와 성장도 가능했을 겁니다. 이제 지나온 시간에 우리가 화답할 차례입니다. 지휘자 김문길씨는 파독 광부 간호사와 인연이 남다릅니다.
김문길/서울나눔 클라리넷 앙상블 지휘자: 제가 1996년부터 2002년 까지 베를린에서 유학생활을 했는데 베를린 교포신문에서 베를린 특파원으로 활동했습니다. 한인행사 취재다니고 하면서 정말 많은 교민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베를린 유학하는 학생이라고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돈을 꺼내서 자기 손자 한테 주듯이 행사 끝나고 나면 차비하라고 그러면서 진짜 그걸 쓸 수가 없어요, 너무 너무 꼬깃꼬깃해서.
내레이션: 가난하고 외롭던 유학시절에 온기를 불어넣어준 베를린 한인들, 그때 고마움을 부부는 지금껏 잊지 않고 있습니다.
김문길: 제가 기숙사에 살았는데 기숙사 앞에 쌀 20㎏ 짜리 몰래 사놓으시고 우리 가족도 그렇게는 안 했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잘 해주셨는지 모르겠어요. 마음 속에 늘 버킷리스트처럼 베를린에 계신 교민 분들한테 언젠가는 꼭 한 번 은혜를 갚아야지 하는 마음이 계속 있었거든요.
내레이션: 그렇게 기획된 것이 파독 60주년 기념 베를린 음악회 취지에 공감한 단원들이 개인 시간과 사비를 털어 동참에 나섰습니다.
유명희/서울나눔 클라리넷 앙상블 단원: 베를린에 가는데 대충 준비를 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정순애/서울나눔 클라리넷 앙상블 단원: 연주를 정말 잘 해서 그분들한테 위로를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내레이션: 직장에는 특별히 양해를 구하기도 했습니다.
정귀용/서울나눔 클라리넷 앙상블 단원: 3주 정도 비워서 업무의 공백은 예상하지 않고 있고요. 책상 치울 것 같애요 (웃음).
기욤 미라보/A보험 대표이사: 사실 매우 기쁩니다. 직원들이 업무뿐만 아니라 다른 열정도 있다는 사실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의미있는 행사에 참여하게 된 것에 대해 저는 응원을 보냅니다.
내레이션: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공항) 지난 4월 김문길 지휘자와 앙상블 단원들이 베를린에 도착했습니다.
김문길: 여기는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한 번 하면 오래가는 것 같고 김문길씨는 이곳 베를린 예술대학교에서 클라리넷을 전공했습니다. 큰 꿈을 안고 떠나온 유학, 하지만 현실은 간단치 않았습니다. IMF 경제위기가 저희 때 있었거든요. 환율이 두 배로 뛰어서 다들 어려웠는데 (한국으로) 돌아가는 학생도 있고 이걸 포기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루에 100번도 넘게 했던 것 같아요. 그때 학비와 생활비를 벌 수 있도록 결정적 도움을 준 사람이 바로 정정수씨였습니다. (B자동차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건 직원들 자녀나 지인들만 추천하게 되어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신청 자체를 못하는 거예요. 그때도 정정수 회장님이 자기 식구처럼 지인처럼 저를 소개해줘서 큰 어려움 없이 우리 부부는 어려운 시기를 무사히 잘 넘기고 유학을 마칠 수 있었던 게 되게 기억에 남습니다.
내레이션: 정수씨 집으로 반가운 손님이 왔습니다.
김문길: 안녕하십니까?
석봉건/정정수씨 아내: 김문길 장로님, 오랜만입니다. 몇 년만에 오신 거예요?
김문길: 여전히 건강하시죠?
내레이션: 오래 전 그때처럼 부부는 정성스레 음식을 마련합니다. 외식 한 번 안할만큼 절약이 몸에 벤 정수씨, 부부지만 유학생들에게만은 아낌 없이 넉넉했다고 합니다.
김문길: 그때는 한식으로 여기 상을 꽉 채워서 학생들을 매번 초대해서
석봉건: 아이구 몇 번 하지도 않았는데~
김문길: 우리들이 여기 오는 날은 계 타는 날이라 학생들이 엄청 좋아했죠. 저희 첫 번째 애 낳았을 때도 저희 부모님이 조금 늦게 오셨는데 그때도 필요한 물품들 다 구입해서 보내 주시고 하여튼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한 두 가지가 아니어서
정유진: 유학생들은 정말 가난했어요. 그러니까 한 번 배부르게 먹이자 해서 초대 했는데 깜짝 놀랐어요. 정말 이전에 없었던 반찬들이 상에 접시를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반찬이 많았어요. 나한테서는 밖에서 물도 안 사주시는데 이분들을 위해서 고기까지 내와서 내가 좋아하는 잡채나 이런 반찬들이 나오니까 그때는 서운했어요.
석봉건: 나는 유학으로 온 게 너무 대견스럽고 여기에 뭔가를 배우려 왔다는게 대단한 거 아니에요? 그분들이 여기서 사는 게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드니까 어떻게 해서든 뭔가를 도와 드리고 싶지만 솔직히 도와 드린 건 없어요.
내레이션: 파독 광부 간호사와 베를린 유학생 시대와 배경은 다르지만 그들 사인엔 서로 통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독일의 자랑 베를린 돔, 지난 4월 15일, 이곳에서 광부 파독 60주년 기념음악회가 열렸습니다. 베를린 한인들을 비롯해 파독 광부 간호사를 기억하는 독일인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음악회를 찾았습니다.
바바라 존/前베를린시 외국인 담당관: 그때 독일에 와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합니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그들은 많은 어려움을 이겨냈습니다. 한국인들은 좋은 삶을 위해 인내하고 헌신했습니다. 힘들어도 결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인들은 우리가 다양성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본보기입니다.
내레이션: 준비기간만 2년, 지휘자 김문길씨의 작은 바람에서 시작된 음악회는 드디어 베를린 돔에서 막을 올립니다. (파독광부 60주년기념 공연 베를린 아리랑 베를린 돔 2023년 4월 15일)
조은영/재독한인 2세: 평생 동안 고향과 그리고 부모님과 형제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독일에서 사신 모든 부모님 여러분의 노력과 용기에 경의를 표합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마음 깊이 감사합니다.
연주/서울나눔 클라리넷 앙상블: 아베 마리아, 어라운드 아리랑,
이선영/KBS 아나운서: 1960년대 먼 타국으로 떠나와서 탄광으로 또 호스피스 병동으로 그 헌신 덕분에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의 초석이 세워졌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요. 오늘의 감동을 마음 속 깊이 행복한 추억으로 간직하시라고 마지막 곡을 준비했습니다.
연주: 아리랑
내레이션: 베를린 아리랑~ 지난 60년 그들이 쏟아낸 땀과 눈물이 아리랑 대합창 속에 흘러 넘칩니다. (관중이 일제히 따라 합창)
석봉건; 저희 생각해 주신 것, 광부 간호사를 기억해 주셨다는 것, 너무 감사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저는 눈물 밖에 흘린게 없네요. 너무 너무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감사해서 우리나라가 자랑스럽고 잘 살아줬고
내레이션: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산업역군, 맨 주먹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갔던 한 시대의 초상, 우리는 그들을 잠시 잊었는지 몰라도 그들은 우리를 조국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강옥순: 지금도 힘을 주는 내 고향이 그래도 한국이라고 독일 50년 넘게 살았지만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저는 한국 사람이에요.
심동간: 대한민국은 나의 조국이고 우리 대한민국이 있었기 때문에 광부로 올 수 있었던 거에요. 나라 없는 설움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죠.
정정수: 이런 나라에 살고 있구나. 얼마나 발전했습니까. 참 자부심을 갖죠. 물론 내 돈도 좀 보태서 보탬이 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항상 자부심을 갖습니다. 나는 한국 사람이야. 코리아 아 얼마나 좋습니까. 끝. (KBS 다큐인사이트 141회 베를린 아리랑에서 정리).
내용 요약
① 2023년 4월 15일, 독일 베를린 돔에서 광부 파독 60주년 기념 음악회가 열렸다. 유한식씨는 1963년 12월 23일에 광부 제1진으로 독일에 왔다. 강옥순씨는 파독 간호사로 1970년 1월말에 독일에 왔는데 지금 53년이 되었다. 김진복씨는 1970년 5월 31일에 김포공항을 떠났다. 한 파독 간호사는 1974년 4월 15일에 쾰른으로 와서 뮌헨으로 배치됐다. 어느 파독 간호사는 1976년 2월에 베를린에 도착해서 여지껏 베를린에 있다. 정양수 마지막 파독 광부는 1977년 독일에 왔다. 여전히 독일 베를린에서 살고 있다. 청년이 노인이 되었다. 처음 고향을 떠나 올 땐 타향살이가 이처럼 길어질지는 아무도 몰랐다. 정정수씨의 아내 석봉건씨는 1972년 파독 간호사로 베를린에 왔다. 그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정정수씨는 어렸을 때 너무 못 산게 한이 맺혀서 돈 밖에 생각을 안 했다. 독일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더 열심히 해서 한국에 돈도 보내고 엄마 아빠가 잘 사시게 해드려야지 그 생각 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식, 아내, 파독 당시 독일 에센은 석탄산업의 중심도시였다. 석탄 산업이 호황이던 시절, 독일 광산은 가난한 한국 청년들의 희망이었다. 기대반 두려움반 스물 일곱살 청년 정수씨는 가난을 벗기 위해 탄광으로 향했다. 지하 갱도에 들어가 작업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45년이란 세월이 흘러서 그의 나이 72살이 되었다.
② 1960년대 초 경제개발자금이 절실한 한국은 독일과 경제협력을 맺었다. 한국은 독일에 차관을, 독일은 한국에 인력파견을 원했다. 그렇게 1963년 첫 광부 모집이 이루어진다.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에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유한식씨는 1963년 파독 광부로 왔는 데 그때 경쟁률이 한 200:1 정도 되었다고. 거기서 떨어진 사람이 노동청에다 돌을 던졌다고. 참여자 중에는 서울대학교 졸업한 사람, 대구 도청에서 공무원도 있고, 헌병 대위 출신도 있었고 장사하다가 온 사람, 별의별 사람이 다 섞여 있었다. 1963년 12월 21일 제1진 파독 광부 123명을 시작으로 1977년 까지 약 8000명이 독일로 떠났다. 김진복씨는 1970년 파독 광부다. 1970년 김포공항을 떠날 때 가지고 온 가방, 신세계 백화점에서 새것으로 사서 가지고 온 걸 보관하고 있다. 1973년의 광산 마지막 작업복도 보관하고 있다. 김진복씨에게 광부는 자부심이다. 1970년 파독 광부 김진복씨는 작업복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영화 돌아가듯이 그때 장면들이 순간적으로 다 떠오른다. 거기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
③ 탄광 생활은 위험천만했다. 체격이 큰 독일인에 맞춰진 기계는 좀 채 익숙해 지지 않았다. 기계 속도와 호흡이 어긋나기라도 하면 곧장 사고로 이어졌다. 生과 死의 경계에서 부디 오늘 하루도 무사히 새카만 탄 가루와 함께 광부들은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흘려보냈다. 갱도가 무너질 때가 있다. 굴 속에서 어디 도망 갈 때도 없다. 그냥 쪼그리고 있는 거다. 한 번은 무너진 게 몸을 덮쳤는 데 돌 하나가 떨어지면서 헬맷이 벗겨져서 피투성이가 됐다. 주위 사람들은 죽었다고 소리 지르는 데 난 죽지 않았다. 광부들은 여기 저기 몸에 흉터가 있다. 광산에서 죽었다고 소문이 날 정도로 죽을 고비였다. 그러면서 끝까지 제일 어려운 일을 했다. 광부는 그렇게 억척스럽게 일했다. 수테페레라고 천장에 압축으로 세우는 게 있다. 그 쇠가 튀어서 입을 때려서 앞니가 부러진 사고, 손가락 다친 것 깨진 것 이런 건 보통이었다. 참 많이 다쳤다. 다리도 부러진다. 탄광에 들어갈 때 글뤽 아우프 (Gluck Auf) 이게 인사다. ‘다치지 말고 죽지 말고 살아 돌아 오라’ 라는 뜻이다. 베를린 비반테스 종합병원, 비슷한 시기 간호사도 독일 땅을 밟았다. 김금선씨는 1976년 2월에 파독 간호사로 베를린에 도착했다. 40년 동안 응급실에서 근무했다. 40년 전에는 유럽에서 제일 큰 응급실이었다. 광부에 이어 1966년부터 독일로 간호사 파견이 시작되었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지금처럼 활발하지 않던 시절 (1966~1976년 총 11,057명 간호사 파독). 그들은 생면 부지 낯선 땅에서 스스로 삶을 개척하고자 한 당당한 여성들이었다. 한국의 간호사들은 영리하고 친절했다. 하지만 천사 같은 미소 뒤엔 남모를 고충도 있었다 특히 언어적응에 어려움이 많았다. 일단 아직 말을 잘 모르니까 항시 웃었다. 환자한테 늘 웃으면서 아주 친절하게 대하니까 ‘한국의 엔젤 천사’라고 그랬다. 처음에 왔을 때 환자가 ‘코레아 엥헬’ 이라고 해서 실수를 안 해야 한다 진짜 아주 완벽하게 잘 해야 된다 라고 생각했다. 독일 간호사들이 꺼리던 힘든 업무도 마다하지 않았다. 노인병원에서 일한 간호사들은 노인들 전부 씻기고 주사 놓고 다 해야 했다. 처음에는 되게 힘들었다. 왜냐하면 한국 간호사들은 독일 사람들 처럼 체력이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독일분들은 체격이 되게 크고 뚱뚱하였다. 그래서 힘들었다.
④ 광부와 간호사들은 아끼고 아낀 임금 대부분을 한국으로 보냈다. 1977년 까지 송금액 약 1억 달러, 당시 한국 총 수출액의 2% 규모였다. 그래도 아깝지 않았다. 집안 일으키는 보람에 고생도 낙이라고 여겼다. 봉급봉투,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내 형제들이 이 돈을 받으면 땅도 사고 집도 산다. 그런 보람으로 살았다. 1974년 파독 간호사 이현숙씨는 그때 월급이 800마르크 당시 원화 가치로 약 16만원이었다. 생활비는 한 달에 50 마르크로 살 수 있었다. 그러면 그 나머지 돈은 한국으로 송금을 계속했다. 서로 시합하듯이 얼마 보냈냐. 얼마 보냈다. 서로 자랑하고 그랬다. 우리가 보내는 돈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됐고 종잣돈이 됐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 와서 열심히 일을 한 것도 하나의 주춧돌이 됐다. 집을 세우려면 주춧돌이 없으면 지을 못 세운다. 그만큼 든든한 일을 했다. 새로운 기회를 찾아 독일로 떠나온 한국의 광부, 간호사들, 어느 덧 60년 세월이 흘렀다. 김길화 파독 간호사는 먼저 온 남편의 초청으로 1973년에 왔다. 그리고 간호사 생활했다. 여기 살면서 이제 나이가 드니까 한인회 행사 같은 모이는 횟수가 줄었다. 한인회 행사는 너무 좋다.
⑤ 파독 60년 기념사진을 남기는 자리, 이들이 걸어온 길은 오늘날 독일 한인사회에 기초가 됐다. 정수씨 부부는 낯선 땅에서 광부와 간호사로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산지 45년, 가족을 위해 보다 안정된 삶을 위해 참 뜨겁게 후회 없이 살아왔다. 광부 간호사 파견이 종료되고 일부는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정수씨 부부는 독일에 남았다. 그리고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정정수씨는 광부를 끝내고 베를린에 오니까 일자리기 없었다. 그래서 1980년에 두번 째 회사를 만났는데 그게 플라스틱 공장인데 워낙 냄새가 지독해서 오래 있을 직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신문을 보니까 B자동차에서 사람을 구한다고 해서 갔었다. 그렇게 광부는 자동차 공장 노동자가 됐다. 자동차 회사는 광산보다 작업 환경이 좋고 임금이 더 많았다. 그는 일터를 사랑했다. 옛 독일인 동료들이 퇴직 후 오랜만에 찾아온 정수씨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B자동차에서 연봉이 8만 유로였다. 1년에 8만 유로, 1억원이 넘는다. 성실하게 일하니까 이런 행복을 받는다. 남부러울 것 없던 시절, 그 행복을 놓치지 않으려 정수씨는 누구보다 열심히 헌신적으로 일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시련은 예기치 않게 찾아 왔다. 간경화 말기다. 집에 있는 것보단 회사에 나가는 게 낫다. 그 길 밖에 없다. 아들과 딸, 집 사람 밖에 없었다. 내일 죽더라도 열심히 일하겠다. 그것만 염두에 두고 그렇게 인생을 살아왔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1989년 간이식수술에 성공한 것이다. 독일내 열 아홉 번째 수술 사례였다.
⑥ 정수씨의 생일날, 가족이 모였다. 1989년 이후 가족들은 정수씨가 수술에 성공한 5월 8일을 생일로 기념한다. 덤으로 사는 생이다. 1989년에 이식 수술해서 33년 덤으로 산 생이다. 간경화 말기로 아팠는데 자기 해야 할 것 다 하고 가정을 우선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돌아보면 어떻게 흘러왔는지 모를 아득한 세월~ 그래도 힘들다 생각하지 않았다. 고난도 고생도 모두 보람이라 여기며 그렇게 살아왔다. 정유진씨는 어렸을 때 자기 집이 가난한 줄 알았다. 왜냐하면 사고 싶은 거 있을 때 마다 부모님이 ‘안돼 이게 있잖아’ 외식도 많이 안 했다. 물을 살 수 없을 정도로 ‘집에서 보리차 마셔’ 어렸을 때 그걸 너무 많이 들어서 ‘아 우리는 정말 가난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커서 보니까 부모님은 항상 모으셨던 거다. 한국에 그만 보내도 되니까 지금 남은 돈으로 인생을 누리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지금도 옷을 잘 안 사입으시고 고급식당 가면 불편해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돈 없는 것도 아닌데 남을 위해서만 살다가 인생을 다 지나버린 것 같아서 불쌍해 보인다. 독일 에센, 그 시절 수 많은 아버지들이 정정수씨처럼 살았다. 야외 장례식, 한 시대를 짊어졌던 광부와 간호사들은 어느 덧 하나 둘 생의 마지막을 맞고 있다.
⑦ 지금 4월 초다. 올해 연달아서 일곱 번째 돌아가셨다. 이제는 매년 갈수록 많아질 수 수밖에 없다. 다음 차례는 나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잘 가시고 나도 잘 가야지. 1963년 파독 광부 유한식씨는 85세인데 한편 생각하면 참 너무 쓸쓸하고 외롭다고…1974년 파독 간호사 강혜지씨는 혼자 있을 때 항상 한국 생각나면 피아노로 한국 동요를 친다. 한국은 내 고향이다. 그래서 한국이라는 말을 들으면 소름이 끼친다고 그만큼 형제도 보고싶고…1974년 파독 간호사 이현숙씨는 한국은 항상 염두에 있고 가족이 없으니까 한국에서 2019년에 강아지를 입양해 왔다. 너무 정이 간다. 강아지한테 많이 의지하고 산다. 강옥순씨는 지금도 힘을 주는 내 고향은 한국이다. 독일에 50년 넘게 살았지만 나는 한국 사람이다.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열망이 무에서 유를 만들어냈던 시절, 그 60년이 있었기에 오늘의 놀라운 변화와 성장도 가능했다. 이제 지나온 시간에 우리가 화답할 차례다. 지휘자 김문길씨는 파독 광부 간호사와 인연이 남다르다. 서울나눔 클라리넷 앙상블 지휘자 김문길씨는 1996년부터 2002년 까지 베를린에서 유학생활을 했고 베를린 교포신문에서 베를린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한인행사 취재 다니고 정말 많은 교민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베를린 유학하는 학생이라고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돈을 꺼내서 손자 한테 주듯이 하고 행사 끝나고 나면 차비하라고 그러면서 진짜 그래서 그걸 쓸 수가 없었다, 너무 너무 꼬깃꼬깃해서.
⑧ 가난하고 외롭던 유학시절에 온기를 불어넣어준 베를린 한인들, 그때 고마움을 부부는 지금껏 잊지 않고 있다. 김문길씨가 기숙사에 살았는데 기숙사 앞에 쌀 20㎏ 짜리 몰래 사놓으시고 우리 가족도 그렇게는 안 했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잘 해주셨는지 모르겠다. 마음 속에 늘 버킷 리스트처럼 베를린에 계신 교민 분들한테 언젠가는 꼭 한 번 은혜를 갚아야지 하는 마음이 계속 있었다. 그렇게 기획된 것이 파독 60주년 기념 베를린 음악회, 취지에 공감한 단원들이 개인 시간과 사비를 털어 동참에 나섰다. 서울나눔 클라리넷 앙상블 단원 유명희씨는 베를린에 가는데 대충 준비를 하면 안 되어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서울나눔 클라리넷 앙상블 단원 정순애씨는 연주를 정말 잘 해서 그분들한테 위로를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직장에는 특별히 양해를 구했다. 서울나눔 클라리넷 앙상블 단원 정귀용씨는 3주 정도 비워서 업무의 공백은 예상하지 않고 있고 책상 치울 것 같다 (웃음). A보험 기욤 미라보 대표이사는 사실 매우 기쁘다. 직원들이 업무뿐만 아니라 다른 열정도 있다는 사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의미있는 행사에 참여하게 된 것에 대해 응원을 보냈다.
⑨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공항, 지난 4월 김문길 지휘자와 앙상블 단원들이 베를린에 도착했다. 김문길씨는 이곳 베를린 예술대학교에서 클라리넷을 전공했다. 큰 꿈을 안고 떠나온 유학, 하지만 현실은 간단치 않았다. IMF 경제위기가 있었다. 환율이 두 배로 뛰어서 다들 어려웠는데 한국으로 돌아가는 학생도 있고 이걸 포기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루에 100번도 넘게 했다. 그때 학비와 생활비를 벌 수 있도록 결정적 도움을 준 사람이 바로 정정수씨였다. B자동차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건 직원들 자녀나 지인들만 추천하게 되어 있다. 일반인들은 신청 자체를 못하는 거다. 그때 정정수 회장이 자기 식구처럼 지인처럼 김문길씨를 소개해줘서 유학생 부부는 큰 어려움 없이 어려운 시기를 무사히 넘기고 유학을 마칠 수 있었다.
⑩ 정수씨 집으로 반가운 손님이 왔다. 김문길씨였다. 오래 전 그때처럼 부부는 정성스레 음식을 마련한다. 외식 한 번 안할만큼 절약이 몸에 벤 정수씨 부부는 유학생들에게만은 아낌 없이 넉넉했다. 유학생들이 여기 오는 날은 계 타는 날이라 생각하고 좋아했다. 김문길씨는 첫 번째 애 낳았을 때 부모님이 조금 늦게 오셨는데 그때 정정수씨 부부는 필요한 물품들 다 구입해서 보내 주시고 하여튼 잊을 수가 없다.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유학생들은 정말 가난했다. 그러니까 한 번 배부르게 먹이자 해서 초대 했다. 정말 이전에 없었던 반찬들이 상에 접시를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딸에게는 밖에서 물도 안 사주시는데 유학생들을 위해서 고기까지 사서 잡채나 이런 반찬들을 마련했다. 석봉건씨는 그들이 유학으로 온 게 너무 대견스럽고 여기에 뭔가를 배우려 왔다는게 대단하였다. 유학생들이 여기서 사는 게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드니까 어떻게 해서든 뭔가를 도와 주고 싶었다. 파독 광부 간호사와 베를린 유학생은 시대와 배경은 다르지만 그들 사인엔 서로 통하는 마음이 있었다.
⑪ 지난 4월 15일, 독일의 자랑 베를린 돔에서 광부 파독 60주년 기념음악회가 열렸다. 베를린 한인들을 비롯해 파독 광부 간호사를 기억하는 독일인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음악회를 찾았다. 바바라 존 前베를린시 외국인 담당관은 그때 독일에 와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하다.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그들은 많은 어려움을 이겨냈다. 한국인들은 좋은 삶을 위해 인내하고 헌신했다. 힘들어도 결코 불평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우리가 다양성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본보기다.
⑫ 준비기간만 2년, 지휘자 김문길씨의 작은 바람에서 시작된 음악회는 드디어 베를린 돔에서 막을 올렸다. 파독광부 60주년기념 공연 베를린 아리랑 베를린 돔 2023년 4월 15일, 조은영 재독한인 2세는 평생 동안 고향과 그리고 부모님과 형제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독일에서 사신 모든 부모님 여러분의 노력과 용기에 경의를 표합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마음 깊이 감사합니다 라고 발표하였다. 서울나눔 클라리넷 앙상블 연주는 아베 마리아, 어라운드 아리랑이었다, 1960년대 먼 타국으로 떠나와서 탄광으로 또 호스피스 병동으로 그 헌신 덕분에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의 초석이 세워졌을 수 있었다. 오늘의 감동을 마음 속 깊이 행복한 추억으로 간직하시라고 마지막 곡을 준비했다. 아리랑~ 베를린 아리랑~ 지난 60년 그들이 쏟아낸 땀과 눈물이 아리랑 대합창 속에 흘러 넘쳤다. 관중들이 일제히 따라 합창하였다, 석봉건씨는 생각해 주신 것, 광부 간호사를 기억해 주셨다는 것, 너무 감사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 밖에 흘린게 없다. 너무 가슴이 벅차 오른다. 감사하고 우리나라가 자랑스럽고 잘 살아줬다. 누군가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산업역군, 맨 주먹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갔던 한 시대의 조상, 우리는 그들을 잠시 잊었는지 몰라도 그들은 우리를 조국을 잊지 않고 있다. 강옥순씨는 지금도 힘을 주는 내 고향이 한국이라고 독일에서 50년 넘게 살았지만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저는 한국 사람이에요.
⑫ 심동간씨는 대한민국은 나의 조국이고 우리 대한민국이 있었기 때문에 광부로 올 수 있었다. 나라 없는 설움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정정수씨는 이런 나라에 살고 있구나. 얼마나 발전했습니까. 참 자부심을 갖죠. 내 돈이 보탬이 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항상 자부심을 갖습니다. 나는 한국 사람이야. 코리아 아~ 얼마나 좋습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