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로 사는 법 / 조미숙
금요일 저녁, 해남 사는 언니가 전화했다. 김장 언제 하냐고, 배추를 밭떼기로 팔았는데 안 뽑아 간 것이 많다고 가져가지 않겠느냐고 한다. 매년 크리스마스쯤 했기에 아직 생각도 안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다 몇 번의 추위가 닥치거나 눈이 내려야 배추에 단맛이 드는데 올해는 너무 따뜻해 김장을 더 늦춰야 하나 생각하던 차였다. 몇 년째 그 집에서 절임 배추를 사 왔던 터라 언제 전화라도 해 봐야지 했었다.
남편에게 쉬는 날 가서 뽑아 오면 어떻겠냐고 물었더니 괜히 고생하지 말고 그냥 사서 하라고 한다. ‘퍽이나!’ 속으로만 코웃음 치고 “아까운데......” 했다. 뒤늦게 소금도 사야 하고 이래저래 일거리가 늘어나면 나만 머리 아프고 고단할 테니 입맛을 다시기만 할 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뜩이나 요즘 마늘 까느라 손가락과 손목이 아픈데 말이다. 그래도 밭에 널브러져 있을 배추 생각에 언니에게 내일 가도 되냐고 물었다. 바람도 쐴 겸 겉절이라도 해 먹으려고 그런다고.
아침에 점심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삼겹살 사 구워 먹기로 했는데 저울에 올라온 고기 양이 너무 작아 보였다. 두 근을 사서 출발했다. 생각보다 춥지 않아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에 호젓하고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면서 양옆으로 펼쳐진 배추밭의 푸른 물결을 눈에 가득 담았다. 넘실대는 억새와 갈대도 햇빛에 반짝이니 충만한 가을 길이다. 텅 빈 논에는 볏짚을 싼 덩이들만 듬성듬성 남아 있고, 따뜻한 날씨에 잘린 벼의 밑동에 새싹이 파릇파릇하게 올라왔다.
몇 번 가본 적이 있었는데 내비 찍고도 옆 골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무래도 다른 곳인 것 같아서 좁은 골목길에서 차를 돌리느라 애를 먹었다. 마당에 들어서니 큰 개 두 마리가 호기롭게 짖는다. 방문 앞에 있는 개는 자세히 보니 아직 어린 것 같은데 눈 한쪽이 안 좋다. 유기견을 데려왔다고 했다. 부엌 창문 바깥에 딱 붙어 있던 고양이들을 보면 언니의 동물 사랑이 엿보인다. 마침 고양이 간식을 싣고 택배가 왔다. 언니는 과자 몇 개 챙겨 들고 택배 아저씨께 내민다.
햅쌀을 압력솥에 안치고 삼겹살을 구웠다. 밥을 안 해도 된다고 해도 새 밥을 고집한다. 배추 한 포기 가져와 씻고 구운 삼겹살과 뜨끈한 흰 쌀밥에 내 배가 남산만 해졌다. 언니는 사실 삼겹살을 좋아하지 않았고 형부도 집에 안 계셔서 괜히 나 좋다고 번거롭게 한 것만 같아 미안했다.
점심을 먹고 바로 밭으로 갔다. 배추가 무거울 테니 차로 가자고 한다. 너른 밭에 탐스러운 배추가 나뒹군다. 먼저 부추를 베 가라고 한다. 부추가 꽃무릇 잎처럼 넓적하고 통통한 데다 부드럽기까지 한다. 칼로 쓱 베니 푸릇한 그 향기가 침을 불러온다. 무쳐 먹으면 참말 맛있겠다. 언니는 많이 베라고 하면서 옆 밭에도 배추를 심었나 본다고 갔다. 아니 어디에 얼마 만큼 무엇을 심었는지도 모른단 말인가? 예전부터 자기는 농사에 관심도 없고 할 줄도 모른다고 했다. 옷차림도 살랑살랑 봄바람 같다. 공주로 사는 게 맞다. 간단한 집안 살림 외에는 아무것도 안 한다더니 맞구나 싶었다. 눈 씻고 봐도 농촌 아낙은 아니다. 물론 마냥 노는 건 아니고 산림치유지도사로 일한다.
배추를 욕심껏 캐서 담고 이번에는 갓을 가지러 갔다.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또 엄청난 밭이 있었다. 그 가장자리로 갓이 탐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진한 보라색 갓잎에 달팽이가 잔뜩 붙어 있는 데다 구멍이 숭숭 뚫리게 먹어 치운 흔적도 눈에 많이 띄었다. 분명 배추에 약을 쳤을 텐데도 그 환경에서 살아남았다니 대단하다. 언니가 “우리 남편이 샘 같은 사람하고 살아야 행복할 텐데. 이런 것 가져다 맛있게 김치 담가주면 좋아할 텐데.” 한다. 우리 남편이 들었어야 할 말이다.
동네 앞에 언니를 내려 주고 차를 돌렸다. 이미 차에는 언니가 챙겨준 유정란과 홍시 몇 개, 형부가 캐다 놓은 무 몇 개를 실어 놓은 상태인데 욕심에 눈 멀어 쌓다 보니 빈 공간이 없을 지경이었다. 막 출발해서 가는데 전화가 왔다. 많이 안 갔으면 돌아오란다. 늙은 호박 몇 개를 가져가란다.
집에 갔더니 형부가 돌아와 있었다. 그러면서 배추는 이미 좋은 것만 추려서 망에 넣어 두었단다. 거기에 햅쌀까지 주었다. 호박 몇 덩이까지 더 넣으니 차가 굴러갈까 불안할 정도였다. 잘 알지도 못하는 아내의 지인에게 이렇게 성의를 다해 챙겨주는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넘치는 인정에 빈손이 더 부끄럽게 되었다.
밥 먹으면서 물었다. “언니, 이렇게 공주 대접을 받으며 사는 비법이 뭐야?” 딱히 뭐라고 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한 것 같아 보였다. 나에게 없는 애교일까? 아니면 늘 허리가 아픈 여리여리한 몸이어서일까? 남의 가정사를 속속히 알 수는 없어 답은 모른다. 다만 그만큼 언니를 사랑하는 형부의 마음 아닐까 싶다. 난 공주가 아닌 무수리여도 좋으니 나도 그런 대접 받으며 여유롭게 살고 싶다. 참 부럽다.
첫댓글 와, 제목 좋다.
읽어 볼게요.
풍짐하게 김장하시겠네요. 타인의 시선으로 보니 공주 같았을 거예요.
나도 무수리인데 그냥 무수리로 살아야할까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