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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을 주목한다
화자
― 김일연, 너와 보낸 봄날(황금알, 2018) ― 박명숙, 그늘의 문장(동학사, 2018) ― 이석구, 그늘의 초록을 만졌다(문학의전당, 2018) ― 장영춘, 단애에 걸다(황금알, 2018) ― 정평림, 유빙의 바다(책만드는집, 2018) ― 홍성운, 버릴까(푸른사상, 2019)
김남규
0. 겸손하게 사라지는 자, 시인
시에서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를 우리는 그동안 ‘화자(話者)’라는 이름으로 시적 발화를 수행하는 자로 지칭해왔으며, 화자라는 가면을 쓴 실제의 발화자를 ‘시인’이라고 가정했다. 시적 발화는 시인이 화자라는 가면을 쓰고, 화자의 목소리를 빌려 시인 자신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표명하는 것으로 그동안 말해져왔다. 더욱이 서정시의 제1원리라 할 수 있는 ‘자아와 세계의 동일화’(자아의 세계화 또는 세계의 자아화)에 근거하여 시인과 화자를 손쉽게 동일한 주체로 보는 것에 크게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이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일단 (적어도 현대시에서는) 시는 1인칭의 독백 형식이 아닌 다성성(polyphony)이 드러나는 문학 장르이며, 정신분석학에 의해 화자가 언어행위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발화 주체(화자)’와 ‘발화 행위의 주체(시인)’ 사이의 분열을 간과하는 순간, 시는 시인 스스로의 윤리를 증명하고 자랑하는 도구 혹은 일기(신변잡기)로 전락해버릴 위험이 있다. 이렇게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시조의 화자는 시인이 아닐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이제’ 시의 목소리는 시인의 것이 아니라, 시라는 형식 속에서 발화된 내면성, 곧 ‘시적 주체’라는 자리가 드러나는 곳이 되었다. 그러므로 시적 주체는 발화를 가장 주관적으로 구축하는 힘이자 시를 만들어내는 힘 자체이며, 개별 시의 주인이다. 따라서 한 시인이 쓴 여러 작품에서 다른 형태의 목소리들이 다수 출현하거나 충격적인 표현을 썼다고 해서 놀랄 필요가 없다. ‘이제’ 시인과 시를 분리하는 것에 적응할 때가 된 것 같다. 그렇다면, 시인이 분리되어 떨어져나간 후, ‘남은 시’는 무엇인가. 스스로 자족하여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남은 세계 역시 만만치 않다. 그 안에서 화자와 대상이 관계하는 방식에 따라 의미가 발생하고, 리듬이 출현한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화자라는 존재가 먼저 있고 후에 대상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화자의 자리를 마련해준다. 대상은 소실점이 하나인 원근법처럼 그 자리에 서 있기를 강요하기도 하지만, 동양화처럼 어떤 대상은 두 가지 혹은 여러 가지의 자리를 요구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대상과 관계 맺는 것에 따라 (시적) 주체가 형성되고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 대상과 주체의 역학 관계가 얼마나 미학적이고 그 목소리가 매력적인지에 따라 시의 완성도 혹은 미학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시인은 시인 자신을 지우는 작업을 할 때가 되었다. 여기서 시인 자신을 지운다는 것은, 탈자태하여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며, 시인은 자기라고 믿었던 것을 비우고 타자를 영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시인이 떠난 자리에는 화자가 남아 있고, 이 화자는 시에서 ‘주체’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제’ 시인은 말없이 자리를 떠나는 자, 화자에게 공(功)을 돌리는 자, 겸손하게 사라지는 자가 되어야 한다.
1. 바람―김일연, 너와 보낸 봄날
이번 김일연 시인의 시집은 “내 젖은 마음결이 신성의 숲속으로/ 그윽한 비의 문장을 이슥토록 따라가면/ 맨 나중 빗방울 하나 이윽고 나는 닿아”(「비의 문장」)라는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신성의 숲속’에서 ‘비의 문장’을 따라간 시집이다. 이 세계에 있으면서도 이 세계가 아닌 세계를 그리고 있으니, “마음이/ 백지 하나로/ 펼쳐지는 거기”(「불이선란」)는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한 곳일까. 말 그대로 신성(神聖)의 숲속이 아닐까.
다 떠난 골짜기에 하루 두 번 오가는
진눈깨비 한 십 년 무서리에 한 십 년
기차는 텅 빈 공덕을 바람에 닦으며 가고
말을 잃은 철길이 이별보다 서러워
꽃 지고 새도 가고 별도 감감 먼 하늘
바람은 적막강산에 불멸 새기며 간다 ― 「바람의 협곡」 전문
이 시의 화자는 누구인가. 차근차근 살펴보자. ‘바람의 협곡’이라 했으니, “다 떠난 골짜기”가 주인공일 가능성이 보다 높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골짜기에 오가는 것들, ‘진눈깨비’, ‘무서리’, ‘기차’, ‘철길’, ‘꽃’, ‘새’, ‘별’, ‘바람’ 등등일 것이다. “다 떠난” 골짜기에 “기차는 텅 빈 공덕을 바람에 닦으며” 하루 두 번 오간다. 그것도 “진눈깨비 한 십 년”, “무서리에 한 십 년”씩 그렇게 무심히, 공덕을 쌓으며 오간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말을 잃은 철길”이 “이별보다 서러”운 곳이고, “꽃 지고 새도 가고” “별도 감감 먼 하늘”의 공간이다. 말 그대로 ‘적막강산’인 것이다. 그러나 시를 다 읽고 나면, 주인공을 꼭 골짜기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제목 ‘바람의 협곡’ 중에 ‘바람’을 주목해보자. 바람은 적막강산에 기차를 밀어 올리며, “꽃 지고 새도 가고” “별도 감감 먼 하늘”에 “불멸 새기며” 간다. 바람이 없다면, 기차도, 진눈깨비도, 무서리도, 꽃과 새도 골짜기에 머물지 못할 것이다. 바람이 적막강산에 ‘불멸’을 새기며 간다고 했으니, 불멸하는 것은 바람과 골짜기 이 둘의 관계일 것이다. 이러한 바람과 골짜기와의 관계, 서로가 주체이자 객체로 존재하고 있으니, 이 모두를 아우르는 자는 누구인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육성으로 전달하는 자, 그리하여 특정한 사물들을 한 공간에 배치시켜 한 세계를 창조한 자, 곧 ‘시적 주체’일 것이다. 그러나 섣불리, 시적 주체의 상태를 바람이나 골짜기의 상황으로 치환하여, 시인으로 소급 적용하는 것은 위험하고, 틀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시인이 창작했으니, 시인의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 이 시는 ‘이미’ 바람과 골짜기의 것이다. 시에서 화자는 그저 이러한 상황을 중계한 것에 불과하다. 당연히, 중계자가 시인이 아닐 수도 있다. 만약 여기서 시인의 목소리가 직접 개입하거나 시인이 이 세계에 불쑥 출현하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불멸을 말하는 이 시적 공간에서 하찮은 인간(시인)이라니. ‘바람의 협곡’이 불멸하듯, 이 시 역시 불멸할 것이다. 그러나 시를 쓴 시인은 필멸할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시를 쓴다. 필멸자로서 불멸하는 것에 대한 열망과 희구(希求)는 영원성에 근거한 일이다. 필멸자인 우리가 불멸을 꿈꿀 수 있는 일이 몇 가지나 있겠는가. 그 중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하나가, 바로 시조다.
2. 꾀꼬랠루 ―박명숙, 그늘의 문장
“벌어진 지퍼들이 이빨을 물고 가듯// 바위의 흉터들을 솔이끼가 기워갑니다// 잔걸음 총총대면서 정수리로 몰려갑니다”(「박음질」)와 같은 세밀화를 시집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이번 박명숙 시인의 시집은, 분명 유니크(unique)하다. 이 세상에 없었던 세상이자, 이 세상에 없었던 작품이다. “작은 새가/ 울컥,// 작은 혀를 내뱉었다// 말랑한,/ 붉은 살점을// 세상에 반납했다// 노래를/ 뽑아 던지자// 뜰의 앞니도 빠져나갔다”(「반납」)는 시집의 첫 작품에서 알 수 있듯이, 작은 새가 붉은 살점을, 노래를 세상에 반납하는 특별한 세계가 박명숙 시인의 시집 안에 켜켜이 접혀 있다.
한 나무가 한 나무를 말없이 어루만질 때
꾀꼬랠루 꽤꼬랠루 먼 산에 새가 우네
진달래 꼬깃한 귀가 온종일 젖고 있네
고개를 주억이며 집 마당 둘러보더니
당신이 날아가네 하얀 새로 날아가네
마른 봄 붉게 젖어서 내 귀에도 움이 튼 날
꾀꼬랠루 새가 되어 고대 따라 나설 것을
다리 건너 고개 넘어 같이 가면 좋을 것을
잘 가라 손을 흔드니 잘 있으라 손 흔드네 ― 「꾀꼬랠루 꾀꼬랠루」 전문
이곳은 “한 나무가 한 나무를 말없이 어루만지는” 곳이자, “진달래 꼬깃한 귀가 온종일 젖고 있는” 곳이다. 먼 산에서 우는 “꾀꼬랠루”, 꾀꼬리의 노래 때문이다. 이 노래는 곧이어, “고개를 주억이며 집 마당 둘러”보다가 “하얀 새”로 날아간다. 바로 ‘당신’이다. 당신의 부재로 인해 꾀꼬리의 노래 소리가 들리는 것인지, 꾀꼬리의 노래 소리 때문에 당신의 부재를 알게 된 것인지, 선후는 분명하지 않으나, ‘꾀꼬랠루’는 부재의 방식으로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화자를 상상해볼 수 있다. 화자는 아마도 ‘집 마당’에서 ‘하얀 새’로 날아가는 광경을 볼 수 있는 위치, 곧 집 마당 근처에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화자는 ‘꾀꼬랠루’로 인해 나무가 나무를 말없이 어루만지는 것을, 진달래 꼬깃한 귀가 온종일 젖는 상상을 한다. 물론, 꾀꼬리가 실제로 날아온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꾀꼬랠루’ 소리가 하얀 새로 날아가는 것으로 읽는 것이 더 좋아 보인다. 그렇게 당신은 날아가고, “마른 봄 붉게 젖어서 내 귀에도 움이 튼 날”이 화자에게 도래했다. 화자는 “새가 되어 고대 따라 나설 것을”, “다리 건너 고개 넘어 같이 가면 좋을 것을”하며 혼잣말을 해본다. 그리고 당신에게 “잘 가라 손을 흔드니” 당신도 잘 있으라며 손을 흔드는 것으로 작품은 끝이 난다. ‘하얀 새’로 날아간 당신에게 손을 흔드는 시적 주체, 어떤 곡진한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먼 산에서 들리는 꾀꼬랠루 소리가 작품을, 시집을, 우리의 마음에 반향(反響)을 일으키고 있다. 그곳에서 시적 주체는 귀에 움이 트는 봄날을, 같이 날아가고 싶은 봄날을 지금 막 지나고 있다. 우리도 따라 들어갈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3. 초록 ― 이석구, 그늘의 초록을 만졌다
이석구 시인은 시집 커다란 잎(2010), 마량리 동백(2017)을 거쳐 이번 시집에 이르기까지, 줄곧 ‘식물성’에 몰두해온 것으로 보인다. 한강의 소설집 채식주의자처럼 폭력과 육식성에 완강히 저항하기 위한 시인의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발자국 꾹꾹 찍힌 얼음장 풀린 뒤// 당신과 내 그림자는 물에 뜬 꽃잎 한 점// 속눈썹 파르르 떨며/ 어디에서 꽃피우나”(「납매」)처럼, “당신과 내 그림자”가 “물에 뜬 꽃잎 한 점”이라니. “꽃과 나/ 둘 중 하나가/ 마지못해/ 떨어졌다”(「위미리 동백」)고 말하는 (싱그런) 화자 앞에, 우리는 우리의 육식성을 반성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석구 시인의 식물성을 섬약한 것, 여성적인 것으로 보는 선입견은 ‘정말’ 곤란하다. “날을 세운 호미로 뽑지 못한 뿌리들이// 월남댁 치마만 한/ 토란잎 한가운데// 흙냄새/ 번진 그늘을 새파랗게 에워싼다”(「초록 2」)에서처럼, 식물의 머리라 할 수 있는 뿌리는, 강력하고 생명력 짙다.
소나기 한 줄기가 쏟아진 다음에는 새소리가 들려오고 버들잎이 만져지고 물 위에 입혀진 무늬 당신의 긴 그림자
바람이 분다 불어도 그 끝을 잡지 못한 아무렇지 않은 듯이 흐르는 뭉게구름 배추밭 고라니 발자국 왔다 갔다 서성이고
잘못 드는 길이면 그대로 주저앉을 팔월 여름의 반은 물결에 떠올라서 수북이 쌓인 풀잎이 꽃피는 줄 몰랐다 ― 「그늘의 초록을 만졌다」 전문
소나기 한바탕 훑고 간 팔월 한낮을 상상해보자. 소나기 쏟아진 후에는 “새소리가 들려오고” “버들잎이 만져지고” “물 위에 입혀진 무늬”를 듣고 보고 상상하게 된다. 그 무늬는 “당신의 긴 그림자”와 같아서, 화자의 마음에도 서늘하게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다. 그렇게 당신은, “바람이 분다 불어도 그 끝을 잡지 못한” “아무렇지 않은 듯이 흐르는 뭉게구름”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은 “배추밭 고라니 발자국 왔다 갔다 서성이”는 것처럼, 계속 화자의 마음에 서성인다. 당신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 그 마음을 당신에게 주고 싶다. 그러나 당신은 화자 마음에 관심이 없다. 그리하여 화자는 “잘못 드는 길이면 그대로 주저앉을” 것처럼, 툭 하고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언제든 주저앉아 망연자실할 것처럼 있으니, “수북이 쌓인 풀잎”들이 “꽃피는 줄 몰랐”을 수밖에. 그것도 “팔월 여름의 반은 물결에 떠”오를 정도였는데도 말이다. 작품 제목처럼, 소나기 내린 팔월 한낮, 새소리와 버들잎이 “물 위에 입혀진 무늬”가 되는 초록의 세계. 시집 표지 색깔처럼, 당신은 화자 마음에 서늘한 그림자를 드리우나, 화자는 그런 당신을 뭉게구름처럼 만지지 못하고 잡지 못한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당신. 그런 당신이 화자에게 건네준 그늘의 초록. 이 시를 읽는 독자 역시 팔월의 소나기를 그리고 그 소나기가 만든 서늘한 그늘을, 초록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화자가 부러 초대한 자리니, 사양하지 마시길.
4. 애월 ― 장영춘, 단애에 걸다
제주도 시인의 시집은 제주도만의 고유성을 갖고 있다. 그 고유성은 육지에 사는 이들에게 약간의 거리감을 느끼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신비함 또한 간직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제주도 태생의, 제주도에 거주하는 시인들의 시집을 읽을 때면, 약간 긴장하게 된다. 우리가 모르는 사물,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시집 안에 ‘오름’처럼 곳곳에 솟아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4ㆍ3의 시간 속에 파편처럼 꽃은 피고/ 여태껏 아버지는 어느 골짝 헤매시나/ 해마다 과오름 길엔/ 생각 없이 꽃은 핀다”(「쏙닥쏙닥」)에서 우리는 4ㆍ3이라는 현대사의 질곡과 그에 따른 개인의 희생 정도는 생각해볼 수 있으나, 타인의 고통에 접근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실제로 발생한 죽음과 그 죽음을 포착한 이미지와 글과는 엄청난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옆 페이지 시구 “아득히 비켜선 자리 무지개를 뛰웁니다”(「아득히 비켜선 자리」)처럼 아득하다.
이 겨울 누가 내게 마른 꽃을 건넨 걸까 거꾸로 걸어놓은 한 움큼 산수국이 기어코 애월 바다로 나를 끌고 나왔다
어디로 가는 걸까 한 무리 괭이갈매기 저마다 파도 끝에 사연들을 묻어놓고 해질녘 아득한 하늘 또 하루를 삭힌다
늦은 귀갓길에 눈 몇 송이 남아서 모난 마음 한쪽 자꾸만 깎아내다 아슬히 단애(斷崖)에 걸린 인연마저 떠민다 ― 「단애에 걸다」 전문
화자는 늘 자리에 있던 “거꾸로 걸어놓은 한 움큼 산수국”, 즉 ‘드라이플라워’가 낯설어지는 순간을 경험한다. 마른 꽃이 화자를 애월 바다로 끌고 나왔으나, 정확히 말하면, 바다로 나가야하는 사연이 있어, 산수국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핑계 삼아 나온 애월 바다. 많은 시인들이 어렴풋이 알고 있는 거친 바다, 애월(涯月). 그곳에서 화자는 괭이갈매기가 “저마다 파도 끝에 사연들을 묻어놓고” 갈 것이라 생각해본다. 더 정확히 말하면, 파도 끝에 사연들을 묻어놓는 것은 화자일 것이다. 그렇게 화자는 “해질녘 아득한 하늘” “또 하루를 삭힌다”. 사정은 알 수 없으나, “늦은 귀갓길에 눈 몇 송이”가 화자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모난 마음 한쪽 자꾸만 깎아내”는 것은 ‘눈 몇 송이’. 화자는 ‘애월(달에 가까운 물가)’에서 “아슬히 단애에 걸린 인연”을 떠민다. 그렇게 화자를 떠나가는 인연, 화자가 떠나보낸 인연. 그 인연은 단애 혹은 애월에 걸려 있다. 물론, 여기서의 인연은 시인 개인사일 수도 있겠으나,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애월 앞에 당도한 우리는, 아슬하게 단애에 걸린 달을, 인연을, 감정을 충분히 경험하고도 남을 것이다.
5. 소나무 ― 정평림, 유빙의 바다
각주가 그 어떤 시집보다 많은 정평림 시인의 이번 시집은, 작정하고 썼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 쉬지 않고, 문장을 이어가며,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다. “철부지 귀잠 깨워 갈 길 이르는 저 물소리// 우수수 밤하늘 별빛 빈 배낭에 쓸어 담”(「평창 나들이」)으려는 시인은, “꼬리 물고 포개진 산맥”(「가리왕산 바람꽃」)처럼, “추임새 넣을 때마다 내리꽂는 힘”(「정선아라리 9―디딜방아」)으로, “코앞에 둔 유토피아”(「유빙의 바다」)를 향하듯 문장을 이어간다. 이 시집의 해설을 쓰신 박시교 선생님의 글 제목 ‘영원한 문청의 활기찬 그 행보―자신만의 독특한 보법에 얹은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적극 동의하는 바다. 어느 봄날 깃털 달고 하늘 가녘 날던 한때
저녁연기 모락일 즈음 환한 꽃길 접어놓고
지렁이 울음소리에 적막 속으로 말려든다
아차! 싶은 경고음인가, 어둠 하마 발목 잡고
푸른 이내 결 풀리듯 찌르르 산이 울면
이순의 몽니만 남아 내일, 또 내일 연다
벼랑 끝 몰리고 난 뒤 볕 고르는 저 다복솔
촘촘한 나이테 세며 긴 오도송 외고 있나
땀땀이 후광 두르고 허위넘는 벼룻길 ― 「비탈 소나무」 전문
이 시의 목소리는 소나무를 보고 있는 화자의 것이기도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나무에 투사하고자 하는 화자의 결기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어느 봄날 깃털 달고 하늘 가녘 날던 한때”와 “저녁연기 모락일 즈음 환한 꽃길”이 저물고, “어둠 하마 발목 잡”는 때, “지렁이 울음소리에 적막 속으로 말려”드는 때가 왔다. 하늘을 날며 꽃길을 걷던 때를 지나, 이제 아주 작은 미물의 울음소리조차 들리는 적막의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그래도 “이순의 몽니”는 남았으나, “벼랑 끝 몰리고 난 뒤 볕 고르는 저 다복솔”처럼 “촘촘한 나이테 세며 오도송 외고 있”어야 할 것을 화자 스스로 다짐해본다. 그렇게 “땀땀이 후광 두르고 허위넘는 벼룻길”을 걸어가야 하는 소나무와 그렇게 살고 싶어하는 화자. 끝내 닮아갔으면 좋겠다, 고 우리는 기원해 본다. 소나무를 닮아가려는 화자와, 스스로 있는 소나무. 시인도 그러하겠지만, 우리 역시 소나무를 닮아가고 싶은 건 사실 아닌가.
6. 조랑말 ― 홍성운, 버릴까
장영춘 시인과 같이 “지상의 생각으론 가늠 안 될 일”이 가득한 “동굴의 고향 제주”(「숲속의 동굴」)에 살고 있는 홍성운 시인의 시집 역시, ‘영등할망(바람의 신)’의 제주 바람(「광대야 줄광대야!」)으로 가득하다. 신비(神祕)하다. “산골의 소낙비는/ 빈손으로 오지 않아// 여름밤 별무리를/한 자루/ 가득 쟁여// 풀벌레/ 울음 꼭지에/ 별 총총/ 풀고/ 간다”(「망초꽃」)는 말에, 할 말을 잃는다. 저절로 끄덕이게 하는 힘이 있다. “피고/지고/피고 지고/지는 듯 핀다면야// 곶자왈 동백꽃이/ 일순/ 떨어진들// 참았던/ 눈물주머니/ 이 봄날/ 터지겠느냐”(「동백꽃 지다」)에서 제주의 허파라 불리는 곶자왈에서 피고 지는 동백꽃의 무한순환이 마치, 우주의 순환, 대자연의 섭리처럼 느껴지는 것도 아마, 이런 연유에서 일 것이다.
섬억새 흔들려도 하늘이 금갈 것 같은
이런 날 조랑말도 집을 향해 울음 운다
테우리 휘파람 소리, 산허리에 묻어둔 채
외딴집 돌담 굴뚝 외려 바쁜 가을 끝
청동 워낭 목에 단 듯 하눌타리 농익고
할머니 사립을 여니 먼산주름 다가온다
가는 듯 온다면야 아궁이가 눅눅할까
희나리 불씨 먹여 타닥타닥 타오를 때
올레길 누가 오는가 개밥바라기 마중한다 ― 「가을 귀가」 전문
“조랑말도 집을 향해 울음 운다”는 이미지 앞에 우리는 경이(驚異)를 느낀다. 제주도 혹은 특정한 곳에서만 볼 수 있는 이미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공간이다. 더욱이 그곳은 “섬억새 흔들려도 하늘이 금갈 것 같은” 곳이자, “테우리 휘파람 소리, 산허리에 묻어둔 채” 있는 곳이다. 신성한 곳이다. 신발을 벗어야 하는 곳이다. “할머니 사립을 여니 먼산주름 다가온다”는 일반 풍경조차 예사롭지 않다. 그리하여 “희나리 불씨 먹어 타닥타닥 타오를 때”는 마치 백석의 모닥불과 같아서, 모든 만물이 모여 있는 곳, 태초의 신비와 생명을 간직한 곳처럼 느껴지니, ‘가을 귀가’는 가을‘에’ 하는 귀가가 아니라, 가을‘로’ 하는 귀가일 것이다. “올레길 누가 오는가 개밥바라기 마중한다”는 목소리의 주인공 화자는, 지금 집을 향한 울음을 우는 조랑말을 기다리는, ‘가는 듯 오는 이’를 기다리는 할머니를 보고 있으니, 이 3장 9행의 시조 전체가 하나의 그림 같아서, 하나의 세계 같아서, 이 세계를 전하는 이, 이 세계를 보여주는 이는, 도대체 누구인가. 바로, 대자연과 할머니가 있는 곳, 금갈 것 같은 하늘이 있는 곳, 테우리 휘파람 소리가 있는 곳, 외딴집 돌담이 있는 곳을 보고 있는 이다. 예찬의 감정이든, 연민의 감정이든 간에, 화자가 우리에게 전하는 세계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 본 적 없는 세계이니, 시집을 읽는 것 자체가 경이로운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다. 제주도만 가능한 일이다.
0. 불꽃
“순수한 작품이란 필연적으로 시인 화자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며, 사라지는 시인은 낱말들에 주도권을 양도한다. 하나하나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충돌함으로써 같은 자리에 모이게 되는 낱말들은 마치 보석들 위에 길게 뻗어 있는 허상의 불빛처럼 그들 상호 간의 반영으로 점화되어, 감지될 수 있는 호흡을 고대의 서정적 숨결로, 혹은 개성적 문장의 열정적 방향으로 대체한다.” ― 말라르메, 「운문의 위기」 부분
말라르메의 말처럼, 시인(더불어 화자까지)의 소멸이 있어야 순수한 작품이 남는다. 그리하여 시의 문장들은, 낱말들은 ‘고대의 서정적 숨결’ 혹은 ‘개성적 문장’이 되어, 서로 충돌하며 불꽃(spark)을 일으킨다. 그 불꽃이 시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시인이 해야할 일은 서둘러 시에서 빠져나오는 일일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이 빠져나온 시는, 화자와 대상만이 남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대상이 화자보다 ‘아프리오리(a priori)’하게 선재(先在)하고 있으니, 대상이 얼마나 매력적이냐에 따라 화자의 목소리도 그에 따라 매력적일 것이다. 김일연은 시인은 ‘바람’, 박명숙 시인은 ‘꾀꼬랠루’, 이석구 시인은 ‘초록’, 장영춘 시인은 ‘애월’, 정평림 시인은 ‘소나무’, 홍성운 시인은 ‘조랑말’을 대상으로 삼았다. 물론 여기서, 대상 자체가 매력적이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대상을 향한 시적 주체의 태도와 양상이 매력적이어야 할 것이니, 이들이 배치한 대상과 화자와의 관계에 보다 주목한다면, 우리는 쉽게, 그러나 빠져나오기 어려운 문학의 공간에 접근하게 될 것이다. 불꽃, 섬광처럼 튀었다 사라지는 곳. 한순간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사그라지는 곳. 가끔은, 문학의 공간이 무서울 때가 있다.
김남규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가람이병기 학술논문상 외 수상. 시조집 밤만 사는 당신 외, 연구서 한국 근대시의 정형률 연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