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립, 수술, 시술
흐르는 물을 보았을 때에는 정법(正法)의 흐름을 타고 부처님 나라의 대해(大海)에 나가도록 하여야 합니다.
우물을 보았을 때에는 다함 없는 가르침[法水]을 마시고, 위없는 덕을 갈무리하여야 합니다.
골짜기에 흐르는 물을 보고서는 먼지와 때를 씻고 맑은 마음이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다리를 보았을 때는 불법의 다리를 만들어 쉼 없이 사람들을 깨달음의 저 언덕[彼岸]으로 건너가게 하여야 합니다.
즐거운 사람을 보았을 때는 청정한 가르침을 원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 기뻐해야 합니다.
또 굶주린 자를 보았을 때에는 미혹을 떠나는 마음을 일으키고,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에는 모든 괴로움을 없애주는 부처님의 지혜를 얻어야 하며, 건강한 사람을 보았을 때에는 금강(金剛)과 같이 부서지지 않는 법신(法身)에 이르고, 병든 사람을 보았을 때에는 몸이 본래 공(空)한 것임을 알아 일체의 괴로움에서 해탈하여야 합니다.
은혜를 갚는 사람을 보았을 때에는 항상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의 은덕을 생각하고, 출가한 사람을 보았을 때에는 청정한 불법을 얻어 모든 악을 떠나야 합니다.
고행을 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에는 몸과 마음을 굳게 갖고 불도에 정진하여야 합니다.
밥을 얻었을 때는 밥을 먹고 얻은 그 힘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뜻을 두고 정진해야 하며 밥을 얻지 못하였을 때에도 모든 악행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얻었을 때에는 절도를 지키고 욕심을 줄이고 그에 집착하는 것을 끊어야 합니다.
맛없는 음식을 얻었을 때에는 모든 것은 허공과 같이 무상(無常)하다고 하는 삼매에 사무쳐야 합니다.
음식을 삼킬 때에는 선정(禪定)의 기쁨을 삼킨다는 마음을 갖고, 음식을 먹은 다음에는 공덕이 몸에 충만하여 부처님의 지혜를 완성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래를 보았을 때에는 모두가 부처님 눈을 얻고 여래의 실상을 볼 수 있어야 하며, 여래의 실상을 보았을 때에는 모든 시방을 보더라도 단정하기가 부처님과 같아야 합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었을 때에는 모든 번거로움을 그치고 마음의 혼란을 떠나야 하며 아침에 눈을 떴을 때에는 모든 마음을 기울여 시방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화엄경> ‘제 7장 정행품(淨行品)’
- (‘서재영의 불교 기초 교리 강좌’에서)
임금님께서 같은 꿈을 두 번이나 거듭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시기로 이미 결정하시고, 그 일을 꼭 그대로 하시겠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임금님께서는, 명철하고 슬기로운 사람을 책임자로 세우셔서, 이집트 땅을 다스리게 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임금님께서는 전국에 관리들을 임명하셔서, 풍년이 계속되는 일곱 해 동안에, 이집트 땅에서 거둔 것의 오분의 일을 해마다 받아들이도록 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앞으로 올 풍년에, 그 관리들은 온갖 먹거리를 거두어들이고, 임금님의 권한 아래, 각 성읍에 곡식을 갈무리하도록 하십시오.
이 먹거리는, 이집트 땅에서 일곱 해 동안 이어갈 흉년에 대비해서, 그 때에 이 나라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갈무리해 두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시면, 기근이 이 나라를 망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로와 모든 신하들은 이 제안을 좋게 여겼다.
바로가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을, 이 사람 말고, 어디에서 또 찾을 수 있겠느냐?"
바로가 요셉에게 말하였다. "하나님이 너에게 이 모든 것을 알리셨는데, 너처럼 명철하고 슬기로운 사람이 어디에 또 있겠느냐?
네가 나의 집을 다스리는 책임자가 되어라. 나의 모든 백성은 너의 명령을 따를 것이다. 내가 너보다 높다는 것은,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뿐이다."
바로가 또 요셉에게 말하였다. "내가 너를 온 이집트 땅의 총리로 세운다."
그렇게 말하면서, 바로는 손가락에 끼고 있는 옥새 반지를 빼서 요셉의 손가락에 끼우고, 고운 모시 옷을 입히고, 금목걸이를 목에다 걸어 주었다.
그런 다음에, 또 자기의 병거에 버금가는 병거에 요셉을 태우니, 사람들이 "물러나거라!" 하고 외쳤다. 이렇게 해서, 바로는 요셉을 온 이집트 땅의 총리로 세웠다.
바로가 요셉에게 말하였다. "나는 바로다. 이집트 온 땅에서, 총리의 허락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손 하나 발 하나도 움직이지 못한다."
바로는 요셉에게 사브낫바네아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과 결혼을 시켰다. 요셉이 이집트 땅을 순찰하러 나섰다.
요셉이 이집트 왕 바로를 섬기기 시작할 때에, 그의 나이는 서른 살이었다. 요셉은 바로 앞에서 물러나와서, 이집트 온 땅을 두루 다니면서 살폈다.
풍년을 이룬 일곱 해 동안에, 땅에서 생산된 것은 대단히 많았다.
요셉은, 이집트 땅에서 일곱 해 동안 이어간 풍년으로 생산된 모든 먹거리를 거두어들여, 여러 성읍에 저장해 두었다. 각 성읍 근처 밭에서 나는 곡식은 각각 그 성읍에 쌓아 두었다.
요셉이 저장한 곡식의 양은 엄청나게 많아서, 마치 바다의 모래와 같았다. 그 양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아져서, 기록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요셉과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 사이에서 두 아들이 태어난 것은 흉년이 들기 전이었다.
요셉은 "하나님이 나의 온갖 고난과 아버지 집 생각을 다 잊어버리게 하셨다" 하면서, 맏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지었다.
둘째는 "내가 고생하던 이 땅에서, 하나님이 자손을 번성하게 해주셨다" 하면서, 그 이름을 에브라임이라고 지었다.
이집트 땅에서 일곱 해 동안 이어가던 풍년이 지나니,
요셉이 말한 대로 일곱 해 동안의 흉년이 시작되었다. 온 세상에 기근이 들지 않은 나라가 없었으나, 이집트 온 땅에는 아직도 먹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이집트 온 땅의 백성이 굶주림에 빠지자, 그들은 바로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부르짖었다. 바로는 이집트의 모든 백성에게 "요셉에게로 가서,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였다.
온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요셉은 모든 창고를 열어서, 이집트 사람들에게 곡식을 팔았다. 이집트 땅 모든 곳에 기근이 심하게 들었다.
기근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었으므로, 다른 나라 사람들도 요셉에게서 곡식을 사려고 이집트로 왔다.
-(<창세기> 41장 32~57절)
오늘 화엄경에서 [병든 사람을 보았을 때에는 몸이 본래 공(空)한 것임을 알아 일체의 괴로움에서 해탈하여야 합니다.]와 [맛없는 음식을 얻었을 때에는 모든 것은 허공과 같이 무상(無常)하다고 하는 삼매에 사무쳐야 합니다.]를 보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최상의 처방이다. 이를 나는 가급적 실천하려고 한다. 내 몸이 아프면 공(空)이 될 것임을 인지하며 견딘다. 그래도 순간순간 오는 통증에는 짜증을 낸다. 아직 깨닫지 못해서다. 먹기 힘든 음식을 먹을 때 나는 아무 말 없이 일단 먹는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삼매에 사무치면서’ 말이다. 표현이 재밌고 멋지다.
오늘 창세기에서 [요셉이 저장한 곡식의 양은 엄청나게 많아서, 마치 바다의 모래와 같았다. 그 양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아져서, 기록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를 보자.
끝까지 셀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래서 “기록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재치 있는 문장을 쓴다. 재미있고 멋지다.
<향모를 땋으며>에 나오는 글을 보자.
[잃어버린 언어를 내가 처음 맛본 것은 퍼퍼워(Puhpowee)라는 단어가 혀 끝에 감도는 순간이었다. 이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아니시나베 민속식물학자 키웨이디노퀘이가 쓴 책에서였다. 그 책은 우리 부족의 전통적 균류 사용법에 대한 것이었다. 그녀는 ‘퍼퍼워’가 “버섯을 밤중에 땅에서 밀어올리는 힘”으로 번역된다고 설명한다. 나는 생물학자로서 그런 단어가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서구 과학은 온갖 전문 용어를 가지고 있지만 그런 용어는, 이런 신비를 간직한 단어는 하나도 없다. 여러분은 하고많은 사람 중에도 생물학자만은 생명에 대한 단어를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과학의 언어에서 우리의 용어는 지식의 테두리를 정의하는 데 쓰인다. 우리의 테두리 밖에 있는 것들은 여전히 명명되지 않은 채다.]
위 글을 보면서 든 생각은, 현재의 언어가 대상을 쪼개고 분석하고 난 뒤 재조합하는 데 적합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통합으로 즉각적 고찰을 하는 언어는 이제 잘 와닿지도 않고 생산도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언어들이 우리 삶을 더 편안하게 해주는 상품 생산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깊은 사유의 질문이 담긴 글들은 이제 도서관으로 직행할 것인가? 그러면 그런대로 흘러가는 게 우리 삶 아닌가? 우려도 안타까움도 없다. 누가 이 세상을 알 것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글을 보자.
[볼로뉴 숲을 인공적인 장소이자 동물학적이고 신화적인 의미의 정원으로 만드는 이 복합적인 작업을, 나는 금년 11월 초 어느 아침 트리라농 성에 가다가 다시 한 번 느꼈다. 이 무렵 파리에서 가까이 다가오다 금방 끝나 버리는 가을 풍경을 집 안에서도 구경하지도 못하고 놓치고 나니까 낙엽에 대한 향수와 열기가 나를 사로잡아 잠마저 이룰 수 없었다. 닫힌 방에서 낙엽을 보고 싶다는 욕망으로 환기된 이 향수와 열기는, 한 달 전부터 내 생각과 내가 몰두하는 몇몇 대상 사이에 끼어들어서는 이따금 아무리 눈을 똑바로 뜨고 봐도 노란 반점처럼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래서 그날 아침, 나는 며칠 계속되던 빗소리도 들리지 않고, 행복의 비밀을 누설할까 봐 꼭 다문 입술처럼 닫힌 커튼 모서리에서 화창한 날씨가 미소 짓는 것을 보고는, 햇살이 단풍을 꿰뚫고 가는 최상의 아름다움을 보러 갈 수 있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이다. 자주 인용되는 1권만 읽고 그만두었는데, 나머지를 읽어보기로 했다.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군더더기가 참 많다는 것이다. 문장은 멋있는데, 좀 줄여서 하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자비로 출간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세계적인 소설로 남아는 있다. 여기서 비밀은 있는 것 같다. 누구 간섭 받지 않고 자기가 쓰고 싶은 대로 쓰면 된다는 것이다. 이제는 SNS 시대인 만큼 그 길은 활짝 열려 있다. 우리 모두 열심히 쓰자.
위 글에서 “볼로뉴 숲을 인공적인 장소이자 동물학적이고 신화적인 의미의 정원으로 만드는 이 복합적인 작업을”과 “행복의 비밀을 누설할까 봐 꼭 다문 입술처럼 닫힌 커튼 모서리에서 화창한 날씨가 미소 짓는 것을 보고는”을 보자. 앞의 것은 인문학적인 진술이고, 뒤의 것은 문학적인 진술이다. 지금 나는 어느 것이 더 쓰기 어려울까? 감각 전달이 높은 문학적인 진술이다. 이에 재주가 없어 문학을 그만두었지만, 이제 편하게 내 마음대로 문장을 만들어 보자.
헤세의 <싯다르타>를 보자.
[카말라여, 그대는 내가 가르쳐볼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 그대가 나에게 가르치게 될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을 나는 배워왔소, 그러니까 아무튼지, 머리카락에 기름은 발랐으나 옷도 신발도 돈도 없는 지금 처지의 싯다르타는 그대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공격적인 구애를 하고 있다. 앞에서 왜 이런 일을 벌이게 되었는지 나와 있겠지만 벌써 잊었다. 조금씩 필사를 해서가 아니다. 이제는 책을 쭉 읽어도 앞의 것을 잊으면서 다음 페이지를 넘긴다. 머리 탓에 나이 탓에 복합적이다. 그러려니 산다.
오늘도 게송으로 마무리하자.
가난한 내가 오래 살겠다고
오늘 임플란트 두 개를 식립했다.
머리 나쁜 내가 오늘의 글쓰기 명상을 한다고
임플란트를 꺼내 놓고 식립이라고 했는데
맞는 표현인지 모르겠다.
오늘 내가 한 것은 뼈이식 그리고 철기둥을 박은 것 같은데
이 글을 쓰면서 잠시 검색을 해보았지만
식립인지, 수술인지, 시술인지, 헷갈린다.
당분간 술을 안 먹으니 몸이 좋아질 거에 미리 감사하고
당분간 많이 안 먹을 것이니 살이 좀 빠질 거에 미리 감사한다.
하지만 앞으로의 일을 어찌 알 것인가?
그저 흘러가는 것을
가난해도 목숨은 붙어 있는 것을
100년 전의 가난과 지금의 가난은 차원이 다른 것을
그저 감사하며 살아갈 것을
옴 샨티 샨티 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