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옥희 집사/ 기장신앙촌 (출생: 1943년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면)
지난 3월 학생축복일에 신앙촌에서 아이들이 참새떼처럼 종알대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예배 마치고 2부 행사로 딸기 축제를 열었는데, 제법 야무지게 딸기 자르고 생크림을 올려 조물조물 간식 만들고 열중하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신통방통했습니다. 저는 권사님들과 같이 주변을 치워 주고 의자 정리해 주면서 자꾸만 아이들에게 눈길이 갔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이리 예쁜데 하나님 보시기엔 얼마나 예쁠까 싶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이들처럼 열 살 안팎일 때 “꼬불꼬불 산길 나 혼자 걸어도 하나님과 같이 가면 무섭지 않네~” 찬송을 부르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6·25 전정 때 어머니 돌아가시고
얼마 안 가 젖먹이 동생도 죽었을 때
어린 마음에도 너무 슬프고 아파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싶은 마음 생겨
엄한 아버지 심부름으로 혼자서 산을 넘어 다니다 무섬증이 들면 교회에서 배운 찬송가를 산골이 떠나가라 불렀습니다. 어머니는 매일같이 학교에 저를 업어다 주고 데려오실 만큼 아끼고 사랑해 주셨지만 6 · 25 전쟁 때 공산당의 총에 맞아 돌아가신 뒤였습니다. 그때 어머니 등에 업혀 있던 젖먹이 동생은 살아남아 애처롭게 울어댔는데 얼마 안 가 그 동생마저 죽었을 때는 어린 마음에도 슬프고 아팠습니다. 그 후 집에 들어온 새엄마를 따라 장로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이야기를 처음 듣게 됐습니다. 찬송에 나와 있는 대로 하나님께서 같이 계신다고 생각하면 혼자 가는 길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진짜 하나님을 뵙고 처음으로 은혜를 알게 된 것은 소사신앙촌에서 예배드렸던 때였습니다. 그때가 1960년, 제 나이 열일곱 살 때였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박태선 장로님에 대해 이야기만 많이 들었지 한 번도 뵌 적이 없었습니다. 박태선 장로님께서 전도관이라는 교회를 전국에 세우시고 신앙촌을 건설하셨다는 것을 집안 중에 제일 먼저 전도관 교인이 된 큰집 식구들에게 들었습니다. 전라북도 신태인에 살던 큰집 식구들은 원래 열성 장로교인이었지만 큰아버지가 전도관에 나가시게 되면서 증조할머니부터 손자 손녀까지 온 식구가 전도관에 다녔습니다. 전해 들은 이야기 중에서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일은 자꾸 들어도 놀랍고 신기했습니다.
돌아가신 할머니 전도관 식으로 장례를 치른 후
아기 살결처럼 뽀얗게 피어나
장로교인들이 조문하고 돌아가자
돌덩이처럼 뻣뻣하게 굳고 피부가 시커멓게 변해
다시 전도관 교인들이 예배드리자
굳었던 몸이 부드러워지고 피부도 다시 환하게 피어
증조할머니는 생전에 오랫동안 장로교회 다니셨지만 전도관 교인이 되셨으니 전도관 식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하셨답니다. 입관식 때 신태인전도관 교인들이 집에 와 예배드리면서 할머니를 깨끗이 씻겨 드렸다고 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부터 무릎이 많이 구부러지셔서 반듯하게 눕지 못하고 무릎을 세우고 계시는 할머니를 어떻게 관에 넣고 뚜껑을 덮을지 걱정이었는데, 다 씻기고 나니 다리가 반듯하게 펴져서 식구들은 꿈인지 생시인지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고 했습니다. 전도관 교인들이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면 돌아가신 분이 살아 계실 때보다 더 노긋노긋 부드러워진다면서 태연하게 말하는 모습에 더 놀랐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놀랄 일은 다음이었습니다.
입관예배를 마친 후 신태인 장로교회 교인 몇 사람이 조문을 왔답니다. 큰집은 농사를 크게 짓고 여유가 있어 장로교회 기둥 역할을 도맡아 했는데 온 식구가 전도관으로 돌아서니 장로교회에서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증조할머니가 워낙 오랫동안 장로교회에 다녀서 인사차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장로교인들이 할머니를 모신 방에서 잠깐 조문하고 돌아가자 시신이 돌덩이처럼 뻣뻣하게 굳고 아기 살결처럼 뽀얗던 피부가 시커멓게 변해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식구들이 놀라고 당황해서 다시 전도관 교인들을 붙들고 예배를 드려 달라고 했는데, 한참 동안 예배드리고 나니 굳었던 몸도 다시 노긋노긋 부드러워지고 피부도 환하게 피었다고 했습니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셨던 작은할아버지는 그때부터 온 가족을 이끌고 전도관으로 나가시게 됐다 했습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고 젖먹이 동생이 죽는 것을 봤던 저는 죽음이란 생각만 해도 무섭고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전도관은 무엇이 있기에 돌아가신 할머니 얼굴이 아기처럼 뽀얗고 예뻐지는지, 살아 계실 때도 뻣뻣하던 무릎이 어떻게 돌아가신 후에 부드러워지는지 궁금했습니다. 전도관에 다니기 전부터 막연하게나마 박태선 장로님은 참 신기한 능력을 갖고 계신가 보다고 여겼는데 그보다 제 마음에 와 닿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은혜를 주시고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이야기가 마음에 남아서
집에서 가까운 전도관에 나가게 돼
마흔 명 넘는 식구와 함께 전도관 다녀
큰아버지 말씀이, 박태선 장로님은 은혜를 주시는 감람나무이시고 우리 마음을 모두 알고 계시는 영모님이라 하셨습니다. 영모님은 영적인 어머니라는 뜻인데 그 말이 왜 그리마음에 남는지 하루종일 ‘영모님, 내 마음을 다 아시는 분’ 하고 되뇌었습니다. 장로교회 친구들한테 “얘들아, 세상에 영모님이 계신대. 우리 마음을 다 알고 계신대. 나는 그분을 따르고 싶어.” 하고 얘기했더니 친구들은 다니는 교회나 잘 나오지 난데없이 무슨 소리냐고 핀잔만 주었습니다. 그러든 말든 저는 은혜를 주시고 마음을 살피시는 존재가 바로 옆에 계시는 듯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그때부터 집과 가까운 함평전도관에 나가게 됐습니다. 큰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네까지 마흔 명 넘는 집안 식구가 전도관에 다니니 어머니도 자연히 따라 나오셨고 농사일에 바쁜 아버지는 예배에 오지 못하셔도 전도사님과 교인들 드리라고 밤이며 과일을 넉넉히 싸 주셨습니다.
그 후 큰집 식구들이 소사신앙촌에 입주하게 되면서 저도 신앙촌에 들어갔습니다. 말로만 들었던 박태선 장로님을 직접 뵙는 날을 고대하고 고대했습니다. 드디어 1960년 3월 소사신앙촌 오만제단에서 하나님을 처음 뵈었던 날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손으로 머리를 짚어주시자
말로 다 못할 향기로운 냄새가 진동해
상쾌하고 좋은 향기가 계속 불어와
이게 바로 은혜인가보다 감격스러워
오만제단은 신발 벗는 입구에서 보면 앞쪽의 단상이 아주 조그맣게 보일 정도로 넓었는데, 거기에 사람이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붙어 앉다 못해 다른 사람 무릎 위에 올라앉는 모양이었습니다. 힘차게 찬송하시는 하나님 음성은 오만제단을 울리고 소사신앙촌 전체를 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단상에서 내려오셔서 그 많은 사람 한 명 한 명에게 안수해 주셨습니다. 와이셔츠가 흠뻑 젖을 정도로 구슬 같은 땀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모습은 뵙기에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두 손으로 제 머리를 짚어 주시고 지나가시자 그때부터 말로 다 못할 향기로운 냄새가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꽃향기라고 해야 할지 과일 향기라고 해야 할지, 상쾌하고 좋은 향기가 바람처럼 불어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더니 다시 또 불어와 맡아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은혜 주시는 감람나무라 하시더니 이게 바로 은혜인가 보다!’ 하며 저도 모르게 감격해 울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처음으로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첫댓글
잘보았어요~
놀라운 신앙 체험이에요
잘 보고 가요
넘 좋네용 ㅎ 힘내야징
잘보고갑니다
잘보고 갑니다~
따뜻한 내용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