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윤(姜宗允)
[진사시]선조(宣祖)즉위년(1567)정묘(丁卯)식년시(式年試)[진사]3등(三等) 44위(74/10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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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백승(伯承)
생년 계묘(癸卯) 1543년(중종 38)
합격연령 25세
본관 진주(晉州)
거주지 경(京)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전력 유학(幼學)
부모구존 구경하(具慶下)
[가족사항]
[부]
성명 : 강응서(姜應瑞)
품계 : 과의교위(果毅校尉)
[안항(鴈行)]
제(弟) : 강덕윤(姜德胤)[進]
제(弟) : 강충윤(姜忠胤)
[출전]
《융경1년정묘10월19일사마방목(隆慶元年丁卯十月十九日司馬榜目)》(개인 소장)
2011-10-31《융경1년정묘10월19일사마방목(隆慶元年丁卯十月十九日司馬榜目)》(개인 소장)을 저본으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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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24권, 23년(1590 경인/명만력(萬曆) 18년) 6월 1일(신미) 4번째기사
최영경이 옥사하여 사람들이 원통히 여기다
최영경이 옥에 있을 때 홍정서는 그 말이 진주의 품관(品官) 정홍조(鄭弘祚)에게서 나왔다고 하여 잡혀올 때 그와 함께 와서 홍조가 말한 것으로 공초하였다. 홍조는 공초할 때 승복하지않고 1차 형문하였으나 또 승복하지않았다. 이윽고 영경이 병이 심해져 사망한 뒤 정서 등은 모두 석방되었다.
간원이 오히려 전의 주장을 고집하여 아뢰기를,
“영경은 단서가 드러나 말이 막히자 자살한 것인데, 금부의 감수관(監守官)이 잘 수직하지못하여 갑자기 죽게했으니 파직시키소서.”하니, 윤허하였다. 도사는 강종윤(姜宗允)이었다.
최영경은 효우하고 독실한 행실이 있었다. 조식(曺植)을 존모하였고 정인홍(鄭仁弘)과 뜻을 같이하여 서로 칭찬하였는데, 명예는 인홍보다 나았다.
영남에 살았는데 많은 선비들이 존숭하였고, 조정에서도 그의 논의를 근거로 인물을 진퇴시켰기 때문에 성세가 매우 커져 집안뜰이 저자처럼 붐볐다.
영경은 기절과 의리를 숭상하고 선악의 평가를 좋아했는데 당론에 치우쳤기 때문에 그를 싫어하는 자도 많았다. 일찍이 박순(朴淳)과 정철을 죽여야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정철이 국청에서 영경의 공초를 받고 나와서는 그를 위해 변명하는 말을 하고 이어 손으로 목을 그으며 말하기를,
“저 분이 늘 나를 이렇게 처결하고자 하였지만 나는 군자이니 오늘날에 있어 어찌 저 분의 불행을 마음으로 좋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하자,
유성룡(柳成龍)이 말하기를,
“여기는 농담할 곳이 아닙니다.”하니,
정철이 말하기를,
“알았습니다. 다만 뒷날 이 말로 증거를 삼으려는 것입니다.”하였다.
또 이항복과 함께 상의하여 신구(伸救)하는 차자(箚子)를 기초하였다가 영경이 석방되자 올리지않았다.
그러나 영경의 옥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원통히 여기면서 정철이 속으로는 원한을 갚으려 하면서도 겉으로는 구원한 것이라고 하였다.
○崔永慶之在獄, 洪廷瑞以其語出於晋州品官鄭弘祚, 被追時與之偕來, 以弘祚所言納供。 弘祚供不服, 拷訊一次, 又不服。 旣而永慶病劇而歿, 廷瑞等竝見釋。 諫院猶執前說, 啓以永慶端緖呈露, 理屈自盡, 而禁府監囚官不謹守直, 以致徑斃, 請罷職, 從之。 都事, 姜宗允也。 永慶有孝友篤行。 尊慕曺植, 與鄭仁弘同志, 相稱贊而名譽過之。 旣居嶺南, 多士宗之。 朝中亦藉其論議, 進退人物, 聲勢甚張, 門庭如市。 永慶尙氣誼, 好臧否, 黨論偏僻, 惡之者亦多。 嘗倡言朴淳、鄭澈皆可斬, 故澈在鞫廳受永慶供, 旣退有救解之言, 仍以手畫頸曰: “彼公常欲處我如是, 我是君子, 到今日豈容甘心?” 柳成龍曰: “此非戲言之所。” 澈曰: “唯唯。 但欲他日以此言爲證案耳。” 又與李恒福相議, 草箚伸救, 永慶得釋, 故不上。 然永慶之獄, 人多冤之以爲: “澈內實修隙,而外爲救解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