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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다가오고 산야는 숲에 숨고 그 산속을 찻는 고행은 어김없이 즐거움으로 만드는 산꾼의 숙명을 따라 백운지맥 미륵산, 신선봉암릉을 칫아 다녀왔다.
이어간다는 것은 전해주는 주체가 있어야 하는지 받아야 하는 주체가 있어야 하는지 서로가 전래라는 말의 뜻을 알아야한다.
전래 傳來 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이나
다른 나라로 부터 전해 오는 것을 말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어간다는 것은 인간이 전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을 정해서 서로에게 필요로 하고 원하고 공유하는 것이다. 문자가 발견되기 전에는 공동사회의 모든 것은 서로의 의견이나 이해관계는 인간의 목젖의울림 발달로 언어로 대화라는 것을 택하기에 상하나 수평적 관계의 이해를 위주로 살아가기 때문에 모든 이들의 공동체를 위한 것이 우선이었다. 문자의 발달은 대화나 이해의 단절로 갈수도 있다는 논리에서 처음은 거부감이 많았다고 한다. 문자는 평등의 시작이었는지 모른다.
의식의 전달은 문자가 우선이기에 상하의 느낌은 별로 중요하게 느끼기보다 하나의 개념이 위주의 전달이 목적이었다. 기록은 하나의 불변같은 증거로 채택되기 때문에 어떤 이해관계는 무시할수 있었다. 제자백가의 사상이 문자로 지배할 시절은 단연 배운자가 지배하는 쪽이 되어가는 시작점이 되었다. 지금은 AI 시대로 가는 시점이다. 문자가 인간을 바꾸듯이 모든 문화는 어떻게 바뀔 것이다. 인간이 아닌 AI
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변하겠지만 AI 는 하나의 전래도구일 뿐이다. 비싼 핸드폰으로 무슨 것이나 보내고 받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지 핸드폰이 하는일은 아니지만 점점 도구의 지배나 지시를 받는 쪽으로 변해간다.
의식을 AI에게 물어보는 인간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겪는 어려움의 공통점은 비슷하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는 지금 왜
행복하지 않는지, 내가 지금 까지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와로움 불안감, 사람을 미워한다 던지 , 알수없는 분노가 이따금 치솟는 이유등 이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을 찻지 못하는 것에서 부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자신을 잃고 사는 생활에서
다른곳에서 찻는 습관이 배여있는 것 때문이다. 먼저, 자신의 문제에 대한 질문을 자신에게 물어보는 습관이 필요하다. 다음에, 자신의 희노애락이나 생노병사는 남의 것이 아니기에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빨리 알아야한다. 자신을 돌아보는 방법은 스스로 에게 질문을 하는 자신을 아는 것이다. 가치관이나, 자신이 바라는 행복이나,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허심탄회 하게 물어보는 것을 배워야한다. 참으로 세상일은 해결책은 항상 주위에 있는데 찻아 헤메이는 것에 빠져 사는 것이다. 이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아온 것은 당연하다. 늘 지시나 눈치로 살도록 어릴때부터 받은 교육이다.
전래되는 것들이 자신을 굳어진 상태가 있기에 그런 것이다. 늘 비교하는 환경이나 다른 것에 대한 끝임없는 동경이 만드는 허황된 가식을 쫏아가는 환경이 문제이다.
증자는 하루에 세가지를 자신에게 물어본다고 한다. " 남을 위하여 일을 도모하는 데 충심으로 하였는가? 친구를 사귀는데 신의를 다했는가? 스승에게 배운 것을 충분히 스스로 익혔는가? " 물론 도인이나 선지자는 항상 자신을 깨우치고 단련하는 것을 지향하지만
우리는 인격의 도야뿐 아니라 행복도 자기 자인에게 질문을 던질수 있는 자신을 잘 알수가 있고, 자신의 행복을 찻을수 있다.
스스로 에게 물어보면 언제 가장 행복한가?
하면 대부분은 아내가 행복할때, 자식이 좋아할때, 동료들과 어울려 술 한잔 할때등 남의 시선에 맞추어 행복을 찻는다. 그러나, 진정으로 어느 산꼭대기에서 멀리 바라볼때나, 어느 길가에서 노오란 단풍을 바라볼때나, 차창밖으로 내리는 눈송이 를 볼때 처럼 나혼자 가지고 있는 행복이 다가올때를 알아야한다.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 산물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대한 이해를 스스로 전래되는 것을 찻아야한다.
논어 술이편에 나오는 말이 "子曰, 君子判蕩蕩, 小人 長戚戚 공자왈, 군자는 태평하면서 너그럽고, 소인은 언제나 걱정에 훱싸여 있다." 우리는 이따금 느끼기에는 성인군자는 이런저런 생각과 걱정이 많고 소인배는 아무생각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사는 줄 알고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는가 보다. 인격수양이 충분히 되어 유유자적한 삶을 사는이는 군자이고, 세속의 고민과 번뇌속에 갈등만 느끼는 것이 소인배의 삶이 라한다. 나는 어릴때부터 큰 시장근처에 살았다. 물론 일본에서 해방후 귀한한 조부와 가족들이 일본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시장근처에 살아온 덕에 시장근처에 살았다.
시끌법쩍하고 온갖생활품 속으로 다니면서 온갖사람들을 보고 자랐다. 시장통 아이들은 모두 장삿꾼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그땐 먹고 사는일에서는 조금 나았는지 모른다. 늘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면 심심할일이나 걱정거리는 없고 늘 새로운 일들 뿐이다. 세월이 지나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기분이 우울하고 생각할 일이 있어면 큰 시장속을 돌아다녀본다. 모두 참으로 진솔하게 살고 있는 곳이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에 각종소리들을 들어면서 돌아다니면 정말 내가 살아있는 것같다. 어느 한사람이라도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이 없고 소중한 소통하는 장삿꾼 뿐이다.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소통하여야 한다. 서로가 필요한것은 소통하지 못하면 소멸하고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시장 모퉁이 맛집에서 술한잔 들이키면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나 걱정은 사라지고 그 오래전 보이는 조부모나 부모님 얼굴이 지나간다. 삶이란 지나가는것 뿐이다. 내가 있든지 없든지 세상은 시장처럼 오늘도 열심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걱정을 하는 소인배보다 유유자적한 군자가 좋지 아니한가?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이나 부처님 , 공자님, 이슬람교의 무하마드 는 모두가
남긴 것은 없다. 예수님은 살아생전 기독교를 만드시지 않았다. 기독교나 이슬라엘 의 유대교나 이슬람교나 모두가 하느님을 믿는 같은 종교이다. 유대교는 나의주님 아도니아, 기독교는 야훼나 여호아라 하고 이슬람교는 알라하는 하느님 유일신을 믿는다. 모두 같은 뿌리 종교이다. 예수는 살아생전 제자들에게 각자 열심히 하느님을 모시고 신앙생활을 하고 종교를 만들어라 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예수의 말과 뜻을 정리하여 기독교를 만들었다. 무하마드는 살아있을때 글한자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단지 이슬람교에서는 수많은 신의 사자중 한분이다. 예수나 모세나 아담 , 노아, 아브라함등 124,000명의 신의 사자중 하나이고, 그중에 하나인 무하마드라고 하는 상인이 같은 종교라 하여 제자들이 만든 것이 이슬람교이다. 공자님도 살아생전 논어를 만들고 훌륭한 글을 남기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공자의 말과 글을 모아 만든 것이 논어이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살아생전 글을 남기지 말고 본인이 하는 모든 말과 생각은 이전에 누군가가 했던 진리를 내가 전하는 것 뿐이니 제자들은 각자 열심히 깨닫고 참되게 살아가라 하였는데, 제자들이 경전을 만들고 각자의 종파를 만들고 서로가 정통이라 싸우고 대승이니 소승이니 논쟁을 만들고 서로 다른 불교의 사상을 내세운 것이다. 집안에 어른이나 선조가 잘되는 것은 후손들이 잘모시고 늘 공경하고 받들어야 집안이 나날이 발전하고 좋은 자손이 생기는 것이다. 예수나 부처나 공자나 마호메트나 모두가 대단한 것은 제자들이 받들어 모시고 키워서 그런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잘될려면 부모나 선조들을 잘 모셔야된다. 윗사람이 좋아져야 후손들이나 본인이 절대로 좋아지는 것이다. 우리는 일이 어렵거나 괴로운 일이 생기면 비는 마음이나 반성하는 마음을 가져야한다. 길을 가다가 잘못간 길을 계속 가는 짓올 하지 않듯이 돌아가든지 길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 방법이 단지 원래길을 찻아 돌아가지 않는 것은 없다. 세상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듯이 고향이나 뿌리를 찻지 않는 것은 없다. 자신이 없는데 어찌 후손이 생기고 부모형제가 어찌 생기는 것인지 알아야한다. 부모 형제를 모시지 않는 다고 못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분들은
혼자는 잘살수 있을지 몰라도 후손이나 그 다음 후손이 본인을 존경하고 모시지 않어면 별볼일 없는 것이다. 세상은 홀로가는 여정이라 하지만 끝까지 가면 누군가 에게
가는 길을 전해주어야 한다. 절에 있어보면
조상의 천도제를 종종 지내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모두가 자식이나 집안이나 서로 잘지낸다. 그것이 부자라는 것이다. 홀로 잘 먹고 사는 것도 어느정도이다. 늙고 병들면
보살피고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면 행려자나
무엇이 다른지 알아야한다. 세상은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예수나 부처나 공자나 마호메트나 단지 연결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 사람들이다.
학교를 마치고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일을 해야하고 가정을 이루고 사회속에 살아가야 하며 직업을 가진다. 어쩌다 특성과 다르게
가진 직업이 건설쪽이다 보니 외국이나 가면
건축물을 자주 접하고 오래된 유물같은 건물이나 도시의 모습이나 지금도 유명힌 다리를 걸어본 적이 많다. 서양의 모든 건축물은 정치와 경제에 무관하지도 않는데 무관하다. 오랜 세월동안 저렇게 존재하는 것들이나 지어진 지금도 거주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고 앞으로도 계속 유지되고 지금도 공사중인 유적을 보면 놀랜다. 우리나라는 마치 벼락부자가 지은 참으로
모래성 같다. 높이 높이만 올라가고 필요에 따라 만든 도로를 다시 넓히는 계획이라 할수없는 땜질같은 짓이다. 주거공간도 마치
똑같은 닭장같은 아파트는 단지 돈벌이로
자리싸움에 좋은 곳은 하늘 높은줄 모르고
올라가는 곧 무너져야하는 바벨탑같은 고층아파트나 정부청사도 지방단체장의 업적으로 날림으로 하나의 빌딩일 뿐이다.
외국의 오래된 청사나 광장에는 수백년이 지나도 그대로 보존하는 전통이나 문화적 가치가 있다. 우린 이십년이 지나면 모든 것들은 재개발이라는 허울속에 지역민의 갈등과 의견차이로 민헝사상 문제로 몇십년을
소모하고 투기의 온상이 되지 않어면 시간만 보내고 있다. 국가적으로나 후손들에게 부담만 주는 이런 한국적 건축문화는 사라지지 않는다. 당장 몇년이 지나면 보기가 흉물스러운 닭장에서 똑같이 살아가는 짓을 언제까지 주택정책이나 부동산 투기에 묻허 사는 불쌍한 나라가 되어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외국에 나가면 부러운 것은 몇백년 동안 스카이 라인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다.
오래된 건물이 지금도 고풍스러운 정취에서
오래된 전통이나 문화가 계속 후손에게 전래되고 앞으로도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린 지금 재개발이나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바벌탑이나 짓고 못난 얼굴에 성형수술로
바꿀려는 졸부의 늙은이 모습을 후손들의
고통으로 물려주는 짓거리를 하는 지도자의 허세에서 벗어나야 할때는 지난것 같다.
우리의 자손들이 유물로 보전되거나 오래된 건물 에서 조상들의 향수를 느끼는 집에서
살아가도록 준비를 해야한다. 지금 살고있는 집들이 애물단지로 돌아오는 시기가 되었다.
자연주의보다 더 위대한 철학이 있다. 휴머니즘, 즉 인간주의 철학이다." 산은 영원히 푸르고 물은 주야로 흘러 그치지 않는다. 만사가 이만히면 족하다." 노장사상에 투철한 논리적 결론은 산림으로 들어가 선인仙人이나 은자隱者처럼 생활하고 속세를 떠나 푸른산의 주인이나 파란 물의 주인으로 나무꾼과 어부생활로 들어가 살아야한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행복이라는 생활은 도피가 아니다. 인간사회와 인간생활 속에서 살아야한다. 인간사회에서 도피하여 산속에서 홀로 사는 도인은 환경에 지배받는 이류의 은자라는 것이다. "큰 은자隱者는 시장에 숨는다." 속세에서 고기도 먹고, 술도 마시고, 여자의 아픔이나 남자의 고민을 느끼고, 자기 마음을 더럽히지 않고 같이 깨닫는 사람이 훌륭한 도인이다. 유교나 노장철학의 모순은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결국은 가장 모범적인 생활은 중용의 저자인 공자의 손자 자사자子思子의 사고도 먖는지 모른다. 인간의 문제는 알맞은 생활의 가르침 이나 중간인 중용을 터득한 철학은 어렵다.
절반을 숨기고 절반을 나타내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다. " 무슨 일이든 세상은 정도껏 생각하고 살아왔다. 그것 참 이상하다. 이 중용 은 씹어면 씹을수록 맛이난다. 중용의 기쁨보다 더 한것이 없네. 재미있다. 모든게 절반 당황하지 않고 서둘지 않고 속도 편하다. ᆢᆢ반은 부처이고 반은 노자 일세.
ᆢᆢ세상은 달고 쓰다고 깨닫고 보면 절반 맛이야 말로 제일 이라네.' 중국의 이밀암 李密庵 의" 중용의 노래가" 생각난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대단한 일을 하지는 않았지만
생활에서 걱정이 없고 그렇다고 전혀 걱정이 없는 것이 아닌 정도인 유명속의 무명과 한줌의 재정능력이 있는 하찮은 사람들 아닌가?
중용은 참으로 어려운 말같지만 현대를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말이다. 삶의 무게를 항상 분산시키고 어느정도를 아는것은 대단한 지혜이다. " 공자 께서는 네 가지를 끊어쎴어니 사사로운 의견이 없으셨으며 , 반드시 해야 된다는 것이 없으셨으며, 고집함이 없으셨으며,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 없으셨다. " 논어 자한 편에 나오는 말이다. 첫째 사사로운 의견이다. 사사로움이 없다는 것은 나 자신이 없다는 것과 같다. 중요한 것은 사사로움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다. 사사로운 마음의 소리를 낼수록 내 입지는 좁아진다. 둘째 반드시 해야 된다는 생각이다. 세상에는 반드시 그래야 하거나 그러지 말아야 하는 것은 없다. '반드시 해야 된다' 는 생각은 다른 말로 하면 '반드시 나처럼 해야 된다는 생각'과 같다. 목적지는 같아도 향하는 길은 다를수 있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거나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 잡히면 더 헤메이게 되는 것이다. 셋째는 고집이다. 고집에는 고집불통이 있고 고집통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일정수준의 경계를 갖고 살아간다. 경계란 나와 세상사이에 가로놓인 담벼락과 같다. 중요한 것은 서로 통풍이 되느냐이다.
내게만 고집이 있다는 것은 스스로 담벼락을 쌓는 것이다. 넷째는 내가 아니면 안될 것이란 생각이다.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은 독단과 진행으로 이어지기 쉽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마음에는 남들은 필요치 않다는 생각이다. 나홀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없으면 남도 없고 남이 없으면 나도 없음을 알아야한다. 공자가 이야기 하는 것은 융통성이다. 융통성은 중용의 가장 기본이다. 사사로움을 버리고 상통가능한 고집을 배워야겠다. "사헐은 각기 기후가 다르지만 하늘은 한편에만 치우치지 않기 때문에 한해가 이루어진다. " '장자' 의 '칙양' 에 나오는 말이다.
이름을 불러줄 때 꽃이 된다. 인간은 절대로 생각해 본적이 없는 세계는 그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한다.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 이라 말한이유다.인간은 자기 앞의 현상을 언어로 정립해 받아들인다고 한다. 공부란 새로운 언어를 찻는 과정이다. 공자나
선인들이 끝없이 계속되는 공부의 능력은 언어의 새로운 갈구였는지 모른다. 말할수 없는 세계, 즉 불가에서 미증유라는 신천지를 아는 단계에 할수있는 언어를 가질수 있는가?
인간은 새로운 것을 습득하면 언어의 창조부터 한다. 인간의 언어없이는 모든 가치는 붕괴한다. 이것을 걷어내면 남는 것은 동물의 본능 뿐이다. 사랑, 정의, 보편성, 아름다움, 소중함, 진실함등 이런 단어는 생각하는 인간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언어를 창출하면서 공동어 신화를 만즐어 내고, 이것이 현실세계가 된다. 세상에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합니다 하는 당신의 언어가 나오는 순간 세상에 사랑이 존재하게 된다. 누구를 즐겁게 할려면 내가 즐거워야 한다. 기분은 말과 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서로가 말이 통하는 사이가 정말 사랑하는 사이이다. 인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은 서로 말을 할때 느낀다고 한다.진실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언어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세상 모든 만물의 이름은 인간이 지었다. 모든 만물은 인간에 의해 정의되면서 가치를 부여받는다. 인간의 언표 없이는 세계는 존재가 불가하다. 우리가 세계의 모든 것들보다 앞서 있는 이유는 사유하고 이름을 불러주기 때문이다. 이름을 불러줄때 꽃이되고 사랑이 된다. 오늘 친구와 술한잔 하면서 언어의 즐거움이나 즐길까?
우린 꽃이 아름답다는 것만 가르친다. 꽃이 아름답지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꽃은 십일을 넘기지 않고 진다는 것이다. 젊음과 화려함은 좋은 것이지만 언젠가 입은 옷은 밧고 화려함은 발가벗은 존재의 상실에서 실존적인 진리앞에 나타낸다는 것이다. 꽃이 피는 이유는 열매를 얻기위한 짧은 화려함이라는 것을 배워야한다. 인간의 인생주기는 피는 시기와 지는 시기가 있다.
지는 시기를 후회하는 것은 영글어가는 열매를 보지 않아서이고 알지 못하는 무지의 결과이다. 이른 나이에 크게 피는 인생일수록
서서히 지는 시기에 감정의 격차를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계속 피어있기를 바라는 조화처럼 모양만 끝없이 유지 되길 바라는 것이 현대사회이다. 우리시대 교육과 성공 담론은 온통피는 방법만 가르친다. 지는 법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산을 다니는 산꾼인 우리는 올라가면 언젠가 내려오는 길을 알아야 하듯이 내려오는 길을 확보해야만 한다. 루소의 말처럼 '자연상태의 인간' 을 먼저 교육해야 한다.루소시절에는 귀족이나 평민들의 교육이 있었는데 이런 교육이 사회를 망친다고 보았다. 지금 서구의 교육은 변했다. 좋은 교육이란 '자연 그자체 ' 이다.
어떤 상태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것이다. 살면서 입는 옷을 벗지 않는 사람은 없다. 언젠가 꽃은 지는 것이다.
다음을 위해 열매를 맺는 것을 알고 가르쳐야 한다. 지금 오늘도 온갖 미디어에 매달리는 허구를 찻고 쫏아가는 길을 가르쳐주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부모가 되어야만 하는가?
무엇을 전래해야 하는가?
우리가 매일 접하는 것은 대부분 이미지로 남는다는 것이다. 배우는 것, 보는 것, 느끼는 것, 좋아하는 것, 귀중하다는 것, 지나가면서 하루를 사는데 수많은 이미지들이 가득 전해진다. 눈뜨고 감을때까지 얼마나 많은 것들이 나타날지 즐겨서는 말은 홍수라고 한다. 우리는 가지는 이미지로 상대에게 노출된다고 한다. 노출되는 것은 요새 정보사회에서는 죽음으로 비유된다. 얼마나 자신을 숨기는가에 따라 생존이 가능한지 모른다. 불특징 다수에게 오는 통신망의 유무에 쉽게 답을 하지 않는 이유는 노출을 극히 싫어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쉽게 노출된다. 무방비 상태에서 부모의 보살핌속에 발가벗겨지는 나약함으로 살아간다. 우리가 사는 동안 무력감에 길들여지는 이유는 소아적때 부터 얻은 벌가벗겨진 모습으로 노출된 경험에서 오는 결과인지 모른다. 어른이 되면 가면으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어지길 바란다. 성숙해지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이기 싫어한다. 야생에서 노출은 맹수의 먹잇감이 된다. 비밀은 인간의 피할수 없는 조건이다.
그것은 보이는 것외에 다른 것들이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대방이 이 비밀을 파악하기전에는 불가해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쉽게 전근하지 못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거리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보임의 조건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구사하는 생존의 방식인지 모른다. 마치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신비를 나타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은 텅빈 것일지라도 외견상 불가해함이 연출되기만 하면된다. 숨겨진 이미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해석할수 없는 외형을 갖춤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하는 동식물 같은 자신을 보호하는 일종의 방어 수단이기도 하다. 자신이 노출되면 극심한 불안으로 삶에 영향을 받고 살수도 있다.
자신은 관객에게 노출되는 주인공보다 바라보는 관객이 되는것이 편한 세상이다. 누군가에게 전래되는 것보다 전래되어 오는 것을 안전하게 기다리는 현대인들이 되어간다. 야생의 숲에서 이미지가 노출되는 위험을 싫어하는 것이다.
"人法地 인법지 地法天 지법천 天法道천법도 道法自然 도법자연 ,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 즉, 스스로 그러함 을 본받는다." 노자의 도덕경의 25장 말씀이다.
사람이 땅을 본 받는 다는 것은 마음에 싶은대로 거두는 것이며, 땅이 하늘을 본받는다는 것은 본래 마음이 텅 비어 심을 것이 없다는 것이며 , 하늘이 도를 본 받는다는 것은 본래 마음이 텅 비어 작용에 걸림이 없다는 것이며, 도가 자연을 본 받는다는 것은 무위 자연의 이치를 말한다.
사람의 마음이 자연을 닮아서 본래 누구나 도를 품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왔고, 그 마음은 자연의 법칙에서 어긋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이 자유로우며 자연이고 도이다. 경계가 없는 마음이 세상의 편견을 능히 벗어나고, 시비를 떠나서 걸림이 없어면 자유로운 것이 도道라 한다. 세상은 허공같이 텅 빈것에 형상을 만들고 머금고 있고, 악법이니 선법이니 일체대해와 수미산을 만들어 있다. 만물은 공空한 것이다. 허공은 크다. 허공이 마음이니 노자는 도와 덕이 세상에 나온 것 역시 바람 없는데 물결을 일으킨 것이다. "봄이 오면 풀이 절로 푸르다. 春來草自淸."
나의 의식이 타자에게 어떻게 전래되었는
타자는 나는 타자에게 어떻게 변하는가?
화려한 암릉은 어찌 저리 적막한 산야에서
무엇을 주기위해 기다리나?
험하디 험한 산야를 지나가는 산꾼의 흔적을
바람은 날려버리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첫댓글 유유자적이올씨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