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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831주일 [예수 그리스도의 종] 김성현감독(강석준집사님 정리)
롬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오늘은 로마서1:1을 가지고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여기 있다.
교회 사태 전후에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면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우리에게 복음이 없다고 마음에 판단하였다.
사태 이후에도 많은 아쉬운 모습들을 보면서, 빨리 복음을 이해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나는 위기를 느끼고,빨리 로마서를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꽤 오래전부터 했다. 이제 비로소 로마서 첫절을 보게 되었다.
어떻게 할지, 자신이 없던 부분도 있고, 어느 면까지 나누어야 할지 확신도 못하고 있다.
에베소서도 적지 않은 힘이 필요했는데, 이것은 여러배 더 힘들다.
과연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여러가지 부족함이 많고, 무엇보다 체력의 한계와 주어진 시간의 한계 떄문에 쉽지 않은 문제였다.
로마서는 에베소서처럼 일일히 모든 구절을 나누지는 않을 것이다.
에베소서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 교회 삶의 지침서로서 한절도 뺴놓을 수 없지만, 로마서는 우리에게 주는 핵심이 있다.
구원이 무엇인지, 구원에 응하여 사는 삶이 무엇인지 알면 된다.
그래서, 모든 것을 말하지 않고, 신속하게 진행하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의 수고는 줄어들지 않는다. 모든 부분을 소화해야 해서, 쉽지 않다.
처음에는 로마서 핵심인 4-7장까지만 할까 생각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일단 오늘은 8장까지 목표로 잡고 있다.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아서 할 것이고, 나는 다음주에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기 바랄 뿐이다.
로마서는 복음에 대한 설명이다. 로마서를 알아야 복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로마서를 통해 복음을 알게 되면, 성경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
복음의 기초 아래 모든 것을 대조하여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로마서를 모르면, 복음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나는 최근에 실감했다.
그래서, 아무리 도전이 되더라도, 로마서를 해야겠다고, 1년 이상 생각했다.
지금 하지 않으면, 성락교회 누구도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내가 더 나이 먹어도 하지 못할 것 같다.
로마서는 하나님은 누구신가, 우리와 어떤 관계인가를 알려준다.
이것은 정리된 주입식 말씀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게 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해 고민하면서, 우리 삶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좋은 아이디어를 갖게 될 것이다.
모든 구절을 다 하지 않고, 때에 따라 융통성 있게 움직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뭐라고 하는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자세,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있는지, 그의 입장을 헤아려보고, 그리스도와 바울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시각을 키우는 것이다.
주입식으로 억지로 마음에 넣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어깨너머로 그가 보는 하나님을 함께 보자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크신 뜻을 잃어보려고 한다.
이에 따라, 그의 자세를 보고, 우리도 어떤 자세를 취해야할지 단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복음이 뿌리내려야 영생이 있다.
나는 이것을 대단히 시급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말씀을 진행하면서, 복음의 원리 뿐 아니라, 신앙의 기초를 세우려고 한다.
우리 교회는 기초 지식이 대단히 부족하다. 할 수 있는 한 말씀을 나누어 여러분의 영혼을 깨우려고 한다.
수십년 신앙생활 했으면, 이 정도는 알겠지 단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아직 젖먹이처럼 먹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새롭게 체계를 정착해야 할 첫발을 디딘 시점에서 많은 기도와 격려 부탁드린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우리 영적 현실을 알아야 비로소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처한 영적 현실을 알지 않고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기 어렵다.
마땅히 어떤 자세를 갖추어야 할지 아이디어가 없게 된다.
[우린 영적 실상을 잘 알고 있는 자들일까?]
많은 신자들이 자기의 신자적 권위를 너무 높게 잡고 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지위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높지만, 이것을 우리 삶에서 내내 누릴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기 스스로 너무 오만한 자세를 갖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믿는 자로서, 기쁨을 충만히 하고, 우리를 능하게 하신 모든 혜택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격려하는 것은 맞지만, 삶은 겸손하고, 조심스러워야 그리스도인 정체에 맞다.
첫단추가 잘 채워져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옳게 하는 것이 첫단추다.
이것이 잘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계속 엇박자가 된다.
주님과 맞지 않으면서, 잘못된 삶을 계속 이어가게 될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의 문제점은 기독교 이론에 지나치게 묶여 있는 것이다.
신학의 도움으로 인해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정리한다. 이렇게 하면 구원받고, 이렇게 하면 버림받는다. 이것은 정리하는 길잡이는 될 뿐이다. 진짜 신앙은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다.
기존의 기독교 환경은 인간의 혜택은 굉장히 빠르게 반응한다.
그러나, 도리와 책임은 회피한다.
그렇다면, 신앙은 불균형으로 왜곡된 자세와 태도를 계속 유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초점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 영적 상태를 옳게 봐야 한다.
그래야, 우리 신앙은 비로소 맞는 길을 가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 누군가 예수의 복음을 잘 설명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바로 사도 바울이다.
바울은 모든 사도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명하는 것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자다.
그가 보는 영적 세계는 우리가 보는 것과 엄청난 차이가 있다.
예수님을 친히 만난 자.
구약성경의 박사.
예수님이 부어주시는 영감으로 다시 인생을 시작한 자.
우리의 한정된 지식으로 들여다 보는 영적 세계와 그가 보는 영적 세계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바울의 자세는 그리스도인의 표준으로 봐야 한다.
[로마서에 대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를 기록한 책이다.
성경 전체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죄인된 인간에게 필요한 계시의 말씀을 담아 놓고 있는 책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런 내용이 있다.
첫째, 죄에 물들어 멸망의 위기에 빠진 인간의 운명을 드러내고 있다.
둘째, 이에 따라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의지와 그가 실행하고 계신 구원의 사역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셋째, 그 구원을 이루기 위해, 인류에게 주신 구원자가 있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는 우리가 따르고, 의지할 유일한 길이시다.
넷째,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서, 태초부터 종말까지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다.
이런 성경은 구조에 있어서, 다양성을 품고 있어서, 자칫하면 성경의 핵심을 놓칠 수 있다.
성경 안에는 많은 책들이 있는데, 저자들이 다 다르고, 배경도 다르고, 문학적 장르도 다르다.
도저히 일치 될 수 없는 부분인데, 거기에 담긴 진리는 유일한 맥을 가지고 공존해 있다.
한점의 오류도 없는 진리가 성경 전체의 연속성과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성경의 단 한면을 보더라도, 성경 전체와 조화되는 것을 확인해야 하고, 해석해야 한다.
성경에는 서신서가 있다.
서신이 성경이 되었다. 서신서는 신구약 66권 중에서, 복음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표현된 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서 구원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심도있게 설명한 것은 로마서다.
로마서는 당시 바울이 로마 곳곳을 돌아다니며 선교하면서, 로마교회에 방문하기 위해 먼저 보낸 서신서다.
당시 로마교회가 있었는데, 예수를 믿는 소수의 유대인과 다수의 이방인으로 되어 있었다.
학자들이 추측하기는 예루살렘의 오순절 성령강림할 때, 방언하는 것을 보고 놀랐던 자들 중 일부가 로마로 가서 교회를 세웠다고 하지만, 확인은 어려운 문제다.
이 교회는 사도들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충분히 배웠을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구약의 신앙에 예수 그리스도를 대입한 정도일 것이다.
바울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시급히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을 소개하므로, 그들이 이해하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편지 내용은 자기 소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진리, 복음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에 완전히 할애했다.
이것은 놀라운 성령의 역사다.
바울의 마음에 열정이 있었던 것 같다.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 자신은 너무 감동받고 있어서, 아직 모르는 자에게 빨리 전해야 하는 재촉감으로 펜을 들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하나님은 당시에 유일무이하게 한 사람을 부르셨다.
그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하나님의 대변인 같은 자였다. 바로 바울이다.
대변인은 많지만, 주 대변인.
그는 복음이 도래했다는 것을 알리는 주된 선포자였다.
그는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부르신 자였다.
엡3:4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다른 사도들도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교회를 세우지만, 바울은 이방을 위해서 이 일을 하도록 은사를 받았다.
엄청난 은사다. 하늘을 보는 은사,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은사다.
그는 계시를 받은 자였고, 계시를 전달하는 자였다.
이 비밀을 이렇게 논리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자였다.
골1: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그는 유대인이고, 헬라 교육을 받았고, 로마 시민이었다.
그는 지도력도 놀랍고, 충실하고, 진실하고, 긍휼이 많았으며, 겸손했고, 높은 지성과 문학적 표현력도 훌륭했다.
그는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이후에 로마 곳곳을 다니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대사로서의 일을 감당했다.
지구상에 누구도 그와 같은 일을 해낸 사람이 없다.
정말 하나님이 준비하신, 이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롬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그런데, 이 사도는 자신의 서신에서 서두에 자신을 예수의 종이라고 밝혔다.
여기서 나는 어디서 무엇을 했고, 위대한 무엇을 했다고 하지 않고, 종이라고 했다.
편지를 받은 사람을 당황하게 할 수 있는 소개다.
오늘날 이 부분을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권위를 알고 있다. 특별하다.
옷차림은 허술하고, 약하게 생겼어도,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 그 뒤에 장엄한 하나님의 후광이 느껴진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때, 시각이 달라진다.
하지만, 당시 로마, 헬라 문화권에서 종이라는 느낌은 우리의 생각과는 완전히 다르다.
종은 노예다.
노예는 로마제국에 속한 자들에게는 매일 현실에서 보는 것이다.
노예에게 로마는 지옥이었다.
헬라, 로마 문화권에서 노예는 법적 권리도 없었고, 상업적 필수품정도로 취급되었다.
노예는 주인의 소유일뿐, 아무것도 아니었다. 주인 마음대롤 사고 팔렸고, 이런 면에서 소나 말같은 짐승과 다른 점이 없었다.
짐승은 짐승인데, 말하는 짐승이다.
그들은 도구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어떤 법적 권리도 없었고, 인권도 없었고, 무자비하게 다루어졌다.
그들의 죽고 사는 문제는 주인의 마음에 달려있었다.
이유없이 죽임을 당해도, 주인은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다.
이쯤되면, 노예의 참혹함을 이해할 수 있다.
노예는 바닥 중의 바닥이다.
그들이 노예의 굴레에서 벗으려면, 죽어야만 가능했다.
이렇게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는 신분을 자기를 소개하는 것에 쓰고 있다.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최후까지 그가 유지한 그의 생각이다.
종에 대한 개념은 이스라엘에서는 상당히 다르다.
역사속 이스라엘의 종은 권위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종,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다윗.
성경의 유명한 이들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다 하나님의 종으로 불리었다.
종은 종인데, 그렇게 낮지 않은 종이었다.
하나님의 종이니, 그 위치는 상당히 높게 책정되어 있다.
구약에 종이라는 말이 많이 나와있는데, 하나님의 종이라는 표현은 겸손하면서, 귀족적인 고결함을 잃지 않는 자랑스러운 칭호였다.
하지만, 로마서의 종이라는 타이틀은 그런 권위적인 이미지가 아니다.
로마서의 환경은 구약시대의 착한 제도와는 분위기가 엄청 다르다.
1세기 로마제국을 유지했던 무시무시한 노예제를 고려하지 않으면, 오늘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없다.
바울은 자신을 종이라고 하면서, 이스라엘 식의 개념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사칭하지 않음]
완전히 굴종적이고, 짐승이나 다름없는 노예로 자기를 소개하고 있었다.
평생 그점을 유지했다.
딤전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는 자신을 영광된 종이라기 보다, 평생 낮고 낮은 노예로 여겼다.
심지어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다.
확실한 것은 바울은 자신을 구약시대의 선지자처럼 엄청난 권위있는 자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노예라고 생각했고, 남들 앞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낮게 여겨지더라도, 진실하게 고집했다.
자신을 종이라고 할 때, 이중적인 뉘앙스가 있지 않다.
종이라고 하면서, 선지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누가 봐도 느낄 정도로 굴종적인 노예 자체로 소개했다.
물론 바울도 과거의 선지자의 위상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것을 완전히 제거했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에게 속한 자에게 자격을 주시고, 위치를 위임하여 존엄성을 부어주시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떤 사명을 주실 때, 권위도 따라온다는 것 다 알고 있지만, 그는 그 권위를 누리거나, 표현하지 않았다.
주님께 받아서, 우쭐대고, 자랑하지 않았다.
정말 특별한 경우다.
바울은 종이 된다는 것을 신분의 상승이 아니라, 은혜라고 하고 있다.
거기서 한발짝도 더 나가지 않았다.
주님 앞에 영광받았지만, 여전히 부끄럽고, 죄인인 것으로 머물러 있다.
어떤 자라도 그들 자신 자체로는 여전히 죄에 물든 자들이다.
누구도 하나님이 베푸신 혜택을 받고도, 그럴 자격이 있어서 받을 수 있지 않다.
부활하신 주님께 속한 자를 잡으려고 갔는데, 주 예수를 직접 만난 자만 가질 수 있는 특징.
그날 주님을 만날 때, 엄청 꾸중을 들으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시력을 잃고, 남의 부축을 받으며, 이끌려가고, 식음을 전폐했다.
그는 그날 영원한 운명을 알아버렸다.
하나님의 세계의 모든 실상.
고전3: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자신에 대해 사역자로 표현했다.
바울, 아볼로 초대교회의 중요한 인도자였다. 오늘날 훌륭한 목사들이다.
여기도 목사님들 많지만, 다 사역자들이다.
사역자라고 하니까, 근사해보일 것이다.
원어로 디아코너스(διάκονος)라고 하는데, 식탁에서 시중드는 사람을 뜻한다.
이 단어에서 집사라는 말이 나왔다.
주의 종은 성질로 보면 집사다.
바울의 경우, 종에 불과하다.
디아코너스는 종이라는 말로 많이 번역된다. 섬기는 자, 사환, 하인, 수종자, 일꾼, 사역자, 집사.
그들은 식탁에서 섬기는 자다.
목사님들 어디에 있는가.
서 있다가, 식탁에서 밥을 나르고, 반찬을 나르고 해야 할 것이다.
사역자는 어떤 권위도 갖고 있지 않은 하찮은 존재라는 개념을 갖고 있다.
고전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노예)으로 여길지어다.
노예는 노예인데, 2층으로 된 큰배에서, 가장 낮은 바닥에서 노를 젖는 노예다.
거기서 병들고, 쓰러져도 아무도 돌보지 않을 자.
거기에 있는 자는 노예 중에 가장 천한 자, 가장 낮은 자다.
바울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지위를 이스라엘 전통의 명예적 느낌으로 하지 않고, 은혜로 베푼 것으로만 생각했다.
하나님이 제공하신 권세를 받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고 보는 것이다.
고전15:9-10
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자랑할 것이 무엇인가. 이것도 은혜다.
내게 기회가 있는 것도 은혜고, 내가 열심히 하고 있는 것도 은혜다.
[행복을 찾은 종]
바울의 모델은 모세 율법의 노예 조항에서 찾을 수 있다.
고대는 노예제를 다 유지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노예에 대해서, 종신고용을 허용하는 조항이 있었다.
자신을 포기하고, 영구적으로 노예가 되는 경우가 있다.
출21:5-6
5. 종이 진정으로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 하면
6.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 귀를 뚫을 것이라 그가 영영히 그 상전을 섬기리라
일정 시기가 지나면, 반드시 자유하게 되는데, 어떤 노예가 계속 노예를 하겠다고 할까.
그런데, 종 중에 자기 주인을 너무 사랑하는 자가 있다.
주인에 대한 사랑을 버릴 수 없어서, 평생 종이 되겠다고 못박는 것이다.
나의 남은 삶은 주인을 위해 살겠습니다. 이런 결단을 하면, 상전이 재판관에게 데려가, 귀를 문에 대고, 송곳으로 구멍을 뚫는다.
그러면, 그는 영원히 그 상전을 섬길 것이다.
이 관습은 바울이 생각하는 본질을 너무 잘 설명하고 있다.
사도는 주께 자기를 전폭적으로 내어주었다.
자기를 영원한 죽음에서 살리신 주인. 죄의 책임을 묻지 않고, 덮어주신 주인.
자기의 직책이 가져올 명예는 어떤 상관도 없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의 노예. 주인은 그리스도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하늘의 영광이 있다 잘난 척하지 않고, 예수님께 속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래서, 그들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했다.
내 주인은 그리스도시다.
굉장히 자신을 낮추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시초 자체가 바울의 정신과 일치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로 인정하고 있었다.
[나의 나 된 것은 한없는 은혜]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이방에 복음을 선포하는 대사였다.
왕이 보내는 최고의 높은 이, 그는 하늘의 대사다.
사도는 지구상에 열세명 밖에 없다.
열세번째로 바울이 사도가 되었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택정함을 받은 자였다.
바울이 태어나기 전부터 택함을 받았다.
그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받았고, 실제 기독교 역사에 가장 큰 한축을 담당했다.
엄청 위대한 자다.
바울의 영향을 받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단 한명도 없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노예라고 했다.
바울은 이를 행복하게 여기고 있었다.
주의 종이라는 자체가 그에게는 영광이었고, 은혜였다.
먹음직스러운 명예라기보다, 그분이 자신을 종으로 삼는다는 것에 대한 영광이다.
그가 나를 사용하신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된 것에 대해서, 엄청난 은혜로 여기고 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종이다.
엡2:8-10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에 속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은혜를 느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을 주셨다면, 은혜다.
주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다면, 은혜다.
우리에게 신자의 새인생을 주셨다면, 은혜다.
오만하지 말아야 한다.
다메섹에 가는 길에 주님을 뵙고, 회개하고, 돌이킨 바울의 자세는 우리를 꺠운다.
사도가 종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종보다 못한 자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과 같이 은혜 받은 자다.
딛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주님의 주되심은 우리의 구원의 원인일 뿐 아니라, 이 자체가 우리의 영원한 행복이다.
나 같은 자를 구속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다.
그분의 목적을 위해 사용해 주시기 때문에.
영원히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자들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