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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있는다’의 시학―송승환 읽기
POETIKA
2020. 3. 4. 20:34
나는 아무 이름도 아니다
ㅡ 송승환, <있다>에서
김진수
1. ‘이름’은 부서져서 ‘이름들’이 된다
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기를 그친다면 당신이 드러난다면 마침내 당신이 밝혀진다면 이름은 부서져서 이름들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적어도 이른바 이제껏 허투루 이토록 한층 한달음에 함께 여름에 겨울에 남으로 북으로 좀처럼 자주 바닥으로 창공으로 바람으로 눈으로 영원히 절대로 가령 깊숙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이를테면 솟구치듯 불쑥 마치 오히려 한결같이 완전히 헛되이 가까이 아니면 이윽고 그것뿐인 양 마치 아무것도 어떤 것도 더하지도 덜하지도 송두리째 봐란듯이 숫제 똑같이 아니 여기에 거기에 이미 살며시 밤마다 언제나 그러나 전혀 어쩌면 예외로 대부분 아마도 그처럼 그토록 텅텅 그토록 그처럼 아마도 대부분 텅 텅 당신이 걸어나간다면 끝까지 예외로 어쩌면 전혀 그러나 언제나 온전히 밤마다 살며시 이미 거기에 여기에 아니 똑같이 덜하지도 더하지도 어떤 것도 아무것도 마치 그것뿐인 양 이윽고 아니면 가까이 완전히 한결같이 오히려 마치 불쑥 솟구치듯 마침내 당신이 밝혀진다면 (* 강조 - 필자)
ㅡ 송승환, <심우장尋牛莊> 전문
나는 언어 속에 있고 언어 속에 없다
나는 세계를 채우고 세계를 작동시킨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출발하고 모든 것이 나에게 도착한다
ㅡ 송승환, <플라스틱> 부분
명사로부터 시작해보기로 하자. 무엇보다도 먼저 명사는 이름이다. 그리고 이 명사의 권력은 바로 호명하고 명명하는 데 있다. 이 호명으로 인해 모든 존재는 언어 속에서 새로 태어나고, 이 명명 행위로 인해 모든 구체적이고도 개별적인 것들은 하나의 추상적이고도 보편적인 것 속으로 이행한다. 그리고 이 이름의 보편성은 공동체의 약속에 의해 유지되어야 한다. 그 약속을 명문화한 것이 사전이라는 것의 존재이다. 사전은, 언어의 유일한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의사소통이 가능케 하는 언어의 지급보증서이다. 그것은 마치 금 본위제 아래에서 화폐가 유통될 수 있게 하는 금 같은 것이다. 이 지급보증서가 없다면, 언어는 불환 지폐에 불과한 것이 된다. 명사와 사전의 관계는 아마도 국가와 헌법의 관계에 상응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개별적인 것들을 하나의 보편적인 것으로 호명해 들이는 이 명사의 권력은, 동시에, 모든 개별성(생명)을 희생해 보편성(관념) 속에 복속시키는 폭력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것은 전제주의 체제에서의 국민과 국가의 관계 같은 것이다. 그 체제에서 국가는 가령, 한 민족이라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국민을 전쟁터에 보낼 것이다. 명사의 권력이 지닌 호명으로 인해 모든 존재가 언어 속에서 새로 태어나듯이, 또한 그것의 명명으로 인해 모든 존재는 언어 속에서 사라져 버리는 듯하다.
불행히도, 이름은 살아있는 개별적 존재나 사물을 현전시키지 못한다. 명사가 지닌 보편성의 전제가 하나의 원인이라면, 다른 원인은 그것이 변화하는 존재와 사물들의 세계를 동결시킨다는 점이다. 명사는 무엇보다도 존재being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성becoming 중인 세계를 자신의 체제 속에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유동적인 세계와 이름으로서의 명사의 관계는 흐르는 물과 응고된 얼음의 관계와 같다. 가령, 명사로서의 ‘나’를 떠올리면, 내게는 ‘나는 나’라거나 ‘나는 있다’라는 사태가 출현한다. 그러나 ‘나는 나’라거나 ‘나는 있다’라는, 뜻이 아주 단순하고도 명확해 보이는 이 문장들은,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 ‘존재한다(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고, 또 살아있다는 것은 응고된 상태being가 아니라 생성becoming 중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모두 움직임(운동)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움직임이 없다는 것,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죽은 것을 두고 ‘나는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겠다. 그렇기에 살아있다는 사태나 사건은 존재를 하나의 이름에 정박시키지 못하게 한다. 살아있는 ‘나’는 단수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복수로서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이기도 하고 ‘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명사로서의 ‘나’라는 이름은 부서져야 하고 부서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갖는다. 시인은 이 같은 사태를 두고 “이름은 부서져서 이름들이 된다”고 했던 것 같다. 생성을 수용할 수 없는 명사의 운명을 자각한 시인은 또한 그러한 난감한 사태를 해결하고자 “나는 있는다”(<시인의 말>)라는 독창적인 언어와 문법을 창안하기도 한 것 같다. 명사의 보편성과 응고성이라는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동사가 변화해야만 했고, 또 문법 역시 바뀌어야 했던 것이다.
2. ‘매우’ 느리게 움직이는 표범과 ‘너무’ 빨리 달리는 달팽이
하지만 실은 어쩌면 그러나 조금 굉장히 가까스로 가끔 그러나 그래도 그렇다면 그래 하마터면 어쩌면 그리고 짐짓 차라리 단김에 꼬박 거푸 따라서 더욱 도리어 그러나 그래도 그렇다면 슬그머니 문득 바라건대 불현듯이 시나브로 밤낮으로 온통 오직 끝까지 사뭇 아마 겨우 모처럼 실컷 아니 아예 한낱 참으로 철철이 켜켜이 통째로 툭하면 퍽 흠씬 힘껏 갑자기 흠뻑 돌연 한꺼번에 아기야 그러하다면 오로지 이대로 이로써 엉겹결에 물밀듯이 문득 여기에 십상 부디 아니나다를까 바야흐로 보아하니 쉽사리 스스로 일시에 더욱 그런데 의외로 막상 실제로 뜻밖에 다시 역시 기어이 그렇게 이제야 너무 더디게 천천히 그러므로 도무지 멋대로 마구 모조리 틀림없이 반드시 하지만 실은 어쩌면 그러나 조금 굉장히 가까스로 (* 강조 - 필자)
― 송승환, <이화장梨花莊> 전문
접속사와 부사들만의 축제다. 마지막 구절이 첫 구절로 되돌아가 있으니, 아마도 시는 되풀이해서, 끊임없이 계속될 모양이다. 말(언어)의 기능은 뜻을 지시하는 데 있다고 한다. 언어학자들의 용어로는 기표와 기의의 연결망이 언어라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지만 말이 아닌 경우가 존재한다. 바로 부사副詞라는 존재이다. 그 말의 뜻을 그대로 전달하자면, 부사는 말에 복무하는(副) 말(辭)이다. 그것은 정사正辭, 즉 바른 말이거나 주인 되는 말이 아니다. 부수적이거나 장식적인, 어쩌면 없어도 좋을, 뭐 어쨌든 그리 중요하지 않은 말이라는 것이겠다. 그래서 그것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지시하지 못한다고 간주된다. 부사는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언어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언어의 기능을 상실한 언어, 말하자면 언어가 아닌 언어이다. 그래서 부사(말에 복무하는 말)이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 말하자면 췌사(사전적 의미로는 없어도 좋을, 쓸데없는 군더더기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내 생각으로는, 그것이 없다면 언어는 지시 기능을 잃을지도 모른다. 달리 말해서 부사만이 담당할 수 있는 언어적 기능이 분명 존재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이 없다면 언어적 체계 전체가 기능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점이 부사가 존재하는 이유이지만, 그 존재 이유는 사실상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
부사가 없다면, 표범이 ‘달리는’ 것과 달팽이가 ‘기는’ 것의 차이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표범은 ‘매우’ 빨리 달리고 달팽이는 ‘너무’ 느리게 움직인다. 만약 ‘너무’ 느리게 달리는 표범과 ‘매우’ 빨리 움직이는 달팽이가 있다면, 그들 사이의 언어적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그렇다면 사전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차이를 적시해주는 것이 부사의 기능이다. 그리고 이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바로 언어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언어는 무엇보다도 차이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천사와 ‘선한’ 악마는 사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의 차이가 무화되었기 때문이다. 장미와 대나무의 차이를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언어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그런데 차이를 가장 분명히, 그리고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 또한 부사라는 사실은 언어의 역설이다. 차이의 구분이라는 사태를 염두에 두자면, 사실은 부사야말로 언어의 기능에 가장 충실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매우’ 빨리 달리는 표범과 ‘너무’ 느리게 움직이는 달팽이야말로 이들의 차이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행위는, 그 자체로는 의미를 갖지 못한다. ‘매우’ 빨리 달리지 못하는 표범은, 이미 표범이 아니다. ‘너무’ 느리게 움직이지 않는 달팽이도 이미 달팽이가 아니다. 표범이 표범이라 불리는 것은 ‘매우’ 빨리 달리기 때문이고, 달팽이가 달팽이로 불리는 것은 '너무‘ 느리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너무’ 느리게 움직이는 표범과 ‘매우’ 빨리 달리는 달팽이의 경우이다. ‘너무’ 느리게 움직이는 표범은 표범인가? ‘그리고, ‘매우’ 빨리 달리는 달팽이는 달팽이일까? 그럴 수는 없다. 표범의 사전적 정의가 ‘매우’ 빨리 달리는 동물이고, 달팽이는 ‘너무’ 느리게 움직이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정도의 차이에 따라) ‘느리게’ 움직이는 표범은 표범일 수 있지만, ‘너무 느리게’ 움직이는 표범은 표범일 수 없다. 그것은 사전적 정의에 어긋난다. 하지만 부사는, 사전적 정의를 넘어서, ‘매우’ 느리게 움직이는 표범과 ‘너무’ 빨리 달리는 달팽이 모두를 가능하게 한다. 다시 말해, ‘너무’ 느리게 달리는 표범과 ‘매우’ 빨리 움직이는 달팽이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것은 표범과 달팽이의 차이를 드러내 줄 뿐만 아니라, 또한 표범과 표범 사이의 차이 역시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어는 차이의 표현인 것이다! 결국 부사야말로 표범과 달팽이라는 언어적 차이를 가장 분명하게 전달하는 ‘언어의 언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차이의 구분이야말로 언어가 감당할 몫이고(그렇지 않다면 언어는 무의미해진다), 바로 이 차이들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부사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부사의 존재로 인해 표범은 ‘매우’ 빨리 달리는 표범이라는 언어의 보편성(그러므로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은)으로부터 벗어나 ‘너무’ 느리게 움직이는 표범도 존재한다는, 생명력 있는 개별성을 획득하게 된다. 하지만 언어는 이 개별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 개별성을 허용하면 언어는 언어(보편성)로서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전적 정의에 있어서 ‘매우’ 느린 표범은 있을 수 있지만, ’너무‘ 느린 표범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표범이 ’매우‘ 느릴 수는 있어도 ’너무‘ 느릴 수는 없다. ’너무‘ 느린 표범은 사전적 정의에 어긋난다. 그리고 우리의 언어 관습에 있어서 언어는 사전 속에 존재해야 하고, 이 사전 속에 존재하는 표범은 ‘매우’ 빨리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매우’ 느리게 달리는 표범과 '너무’ 빨리 움직이는 달팽이는 저 언어의 사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너무‘ 느리게 움직이는 표범과 ’매우‘ 빨리 달리는 달팽이는 이미 표범도 달팽이도 아니다. 그러나 부사는 ’너무‘ 느리게 움직이는 표범과 ’매우‘ 빨리 달리는 달팽이도 표범이나 달팽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한다. 부사야말로 언어의 기능에 가장 충실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역으로, 그것이야말로 언어를 가장 배반하는 언어라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언어는 보편성이 없다면 그 존재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고, 부사는 그 보편성을 훼손해 개별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개별성은 온전히 살아 있는 생명의 문제이다. 생명(삶)은 보편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개별적으로, 또한 특수하게 존재한다. 모든 생명(삶)이 존중받아야 마땅할 이유이다. 그것은 대치, 혹은 호환 불가능성을 생명으로 삼는다. 만약 그것이 다른 어떤 것과 대치될 수 있다면(언어의 보편성은 이 개별성을 희생한 대가 위에 세워진 바벨탑이다. 그리고 이것을 허용한 것이 언어이다), 그것은 그 무엇인가를 위한 한낱 수단에 불과할 것일 테다. 그러나 한낱 수단에 불과한 그 어떤 존재도, 생명도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사는 이 존재와 생명의 존귀함을, 그것의 유일성과 일회성을 증거 하는 강력한 알리바이다. 부사로 인해 명사와 형용사는 비로소 존재할 수 있고, 또 그 생명력을 보장받는다. 그러므로 부사는 췌사이기는커녕, 언어의 가장 핵심적인 기능, 즉 차이와 그 차이의 차이를 보증해 줄 수 있는 핵심적인 말이라고 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아마도 언어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상실할지도 모른다.
3. 시집 한 권과 비평집 한 권
지난 해 봄, 시인 송승환은 자신의 세 번째 시집 《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기를》(문학동네)을 상자했다. 2007년에 첫 시집 《드라이아이스》(문학동네)가, 2011년에 두 번째 시집 《클로로포름》(문학과지성사)이 나왔으니, 두 번째 시집을 낸 지 8년만의 일이다. 그 시인은 또한 비평가이기도 해서 지난 해 가을에는 자신의 두 번째 평론집 《전체의 바깥》(문학들)을 펴냈다. 2010년 《측위의 감각》(서정시학)이 나온 지 9년만의 일이다. 해서, 나는 순전히 그의 시와 평론으로만 이루어진 글, 말하자면 오직 인용으로만 이루어진 그런 글을 써보고 싶었다. 그것은 비평가로서의 송승환이 시인으로서의 송승환의 시에 대해 말하는 자리가 될 터이다. 이 단락 이후의 인용들은 그러한 실험의 소산이다. 인용된 시집 《당신이 있다면 당신이 있기를》은 I로, 평론집 《전체의 바깥》은 II로 표기했다.
4. 송승환의 송승환 읽기
“시는 시인의 언어를 통해 탄생한다. 미지의 시가 시인의 언어로 탄생한다는 점에서 시는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로 확정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의 시적 전통의 지평에 출현하여 그 전통을 계승하고 확장시킨다는 의미 또한 지닌다. 한 편의 시와 한 권의 시집은 시인의 시세계뿐만 아니라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의 시적 전통에 영향을 준다는 뜻이다. 시의 전통은 매우 낯설고 이질적인 시가 출현하기 전까지 시의 정의와 질서를 완전히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낯설고 이질적인 시가 출현하여 ‘시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시의 전통에 제기할 때 전통적인 시의 정의와 질서는 균열을 일으키고 희미해진다.”(II. <정전 속에서 움직이는 많은 손들>, 251쪽). “시는 시인이 언어를 통해 삶과 세계의 사태를 포착하고 ‘지금-여기’의 삶과 세계를 형상화하고 성찰함으로써 ‘지금-여기’의 결핍과 난관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미지-거기’의 세계와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글쓰기이다. 그러나 언어는 실재의 삶과 세계와는 자의적 관계이고 그 실재의 삶과 세계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시는 실재가 부재하는 언어로 ‘지금-여기’의 삶과 세계를 완벽하게 그려냄과 동시에 ‘미지-거기’의 세계와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탐색해야 하는데, 그것은 그 자체로 실패가 예견되어 있고 완전한 삶과 미美의 이상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시는 실패의 글쓰기이고 실패담의 기록이다.”(II. <실패 없는 실패>, 196-7쪽). “시는 ‘지금-여기’의 상황을 재현하고 비판하면서도 ‘지금-여기’의 의미를 항상 재구축하는 언어의 형식을 통해 ‘지금-여기’의 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초과하는 낯선 현존, 동경의 대상을 ‘지금-여기’에 출현시킨다. 이질적인 언어의 형식과 상상력을 통해 지금까지 보지 못했거나 감춰져 있던 세계의 이면을 드러낸다. 시는 고통의 경험에서 흘러넘치는 낯선 언어의 경이를 받아 적는 ‘낯선’‘나’의 목소리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세계의 출현을 ‘지금-여기’ 타자로서의 내가 재현 불가능한 언어로 기입하는 것이다.”(II. <염려하는 주체와 언어의 형식>, 71쪽).
밤은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모든 것이 가까이 있다
모든 것이 있다
― I. <다른 목소리> 부분
“시는 스스로를 자명하다고 확정하는 그 주체에게, 차별과 폭력을 가하는 테바이의 왕, 크레온에게 “나는 진실로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던지는 것이다. 시는 주체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고 침묵하면서 타자의 언어를 응시하는 침묵의 자리에서 고요히 흘러넘치는 언어로서 출현한다. 그 침묵 속에서 너의 언어는 나의 언어를 대신하지 않으면서 너와 내가 함께 만나는 환대의 윤리를 마련한다. 그리하여 시는 주체와 국경, 그 전체의 바깥과 미지에서 도래하는 타자의 목소리를 듣는 주체의 침묵에서 현현한다.”(II. <책 머리에>, 11쪽).
1
나는 진원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만 일어나는 해일을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세계의 밤에 내던져진다
2
나는 벽을 바라보는 자
나는 벽 뒤에 있는 자
나는 뜨거운 검은 비를 맞으며 해안에서 해안으로 달린다
나는 뜨거운 겨울의 검은 빛을 손으로 움켜쥔다
나는 모래밭에 엎드린다
― I. <B102> 부분
“주체는 주체 스스로 육체를 포기하거나 육체적 삶이 끝난 후 무無가 될 수 있지만 자신의 육체 안에 거주하고 있는 한 객관적 세계를 무無로 만들 수 없다. 주체는 객관적 세계로부터 기원한 것이지 객관적 세계가 주체로부터 기원한 것은 아니다. 객관적 세계에서 사물은 주체가 대상으로 삼기 이전에 이미 실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주체의 탄생 이전에도 실재한다. 그리고 주체가 탄생한 이후 언어를 습득하고 언어로 표현하기 이전에도 사물은 실재한다. 주체가 습득하는 언어는 주체가 학습한 언어권의 자의성에 따라 구성된 의미 체계이며 사물의 이름은 주체가 자의적으로 명명한 기호일 뿐이다. 사물이 주체의 대상이 되어 한 언어의 이름으로 명명되고 호명된다고 하더라도 언어에 사물은 부재하고 사물은 언어와 무관하게 실재한다. 그런 점에서 언어는 주체가 객관적 세계를 대상으로 삼을 때 발생하는 주체의 환상이자 환상의 의미 체계이다. 언어는 대상과 무관하게 문법의 경계와 의미 체계를 넘나들면서 자율적으로 의미를 생성하고 증식하고 소멸시킨다.”(II. <비대상과 초현실>, 208-9쪽).
나는 두 개의 무덤
사이에서 태어난다
나는
극지의 바닥으로 내려간 자정을 알고 있다
적도의 바다 한 점에 머무는 자정을 알고 있다
나는
얼음을 두 손으로 부숴 삼킨다
빙하의 밤 심해의 쇄빙선 안에 갇혀있다
검은 돌
검은 돌
그림자
자정에서 자정으로
백야에서 백야로
그러나 나는 도끼로
망치로
쐐기로
작살로
나는 투명한 얼음의 밤을 깨뜨릴 수 있는가
― I. <검은 돌 흰 돌> 부분
“시인은 보이는 것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을 투시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것을 모국어로 번역하고 명명하는 자이다. 시인이 바라본 것을 언어로 명명하지 않을 때 세계는 인간의 언어 바깥의 세계로 남아 있고 의미 이전의 사태로 현존한다. 시인의 그 사태를 가장 적확하고 최적의 언어로 명명하고자 고심할 때 이미 주어진 언어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이미 주어진 언어는 저 풍경의 사태를 최초로 명명한 순간의 순수성을 상실하고 죽은 언어이다.”(II. <강요된 침묵과 언어의 파열>, 169쪽). “시인이 꽃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꽃에 삶의 고통과 환희의 의미를 부여할 때 그 언어는 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 언어는 꽃에 대한 심미적 취미 판단이며 시인의 고통과 환희의 목소리를 담아낸 협의의 ‘서정시’일 뿐이다. 프란츠 카프카는 구스타프 야누흐가 쓴 《프란츠 카프카와의 대화》에서 그 언어를 예술이 아니라고까지 말한 바 있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위무할 뿐 실존에 대한 깊은 성찰과 실재하는 꽃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거짓 화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환자의 환부를 도려내는 메스의 언어가 아니라 환부에 투입하는 마취제의 언어일 뿐이다. 시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과 위무의 역할도 해야 하지만 그 역할에만 만족하고 한정될 때, 시는 삶과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의 언어로 진화하지 못한다.”(II. <실재와의 만남은 불가능한가>, 244쪽). “이제 그는 시적인 것의 전체, 시적인 것의 의미와 문법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그는 지금까지 매번 실천해 온 서사의 구축과 의미 지우기를 하지 않는다. 더 이상 어떤 시적 포즈를 취하거나 새로운 시적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는 가능한 시의 전체, 그 바깥의 최전선에 서 있는 무의미의 전위이다. 그는 무의미를 리듬으로 실천한다. 그 리듬은 시적인 것의 의미로부터 자유롭고 뜻을 버림으로써 획득한 ‘소리 다발’이다.”(II. <이야기의 틈과 바깥의 언어>, 149쪽).
1
자정
밤의 페이지
시침 분침 초침
책을 펼친다
2
병은 비어 있다
마저 한 방울 마신다
켜졌다
꺼졌다
건너편
건물 첨탑 불빛
붉은
유리
창문 의자 탁자 화분 화병 장미 벽지 책상 책장 장롱 호스 링거 리넨 차트 선반 열쇠 액자 이불 침대 베개 커튼 천장
검다
검다
있다
아마도
만약 그리하여 그러므로 그러면 그에 그래서 그렇듯 하지만 그러기에 그런데 그렇지만 혹은 그래도 그제야 그러나 그리고 어쩌면
그림자
있다
아마도
3
밤의 거울
마주 선다
사라진다 나타난다
― I. <어떤 목소리> 전문
“전체의 내부를 돌아보며 가능한 것에서 시작할 때 시인은 어제의 시와 안주하는 삶으로 회귀한다. 그러나 전체의 바깥을 바라보고 불가능한 것에서 시작하려 할 때 시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시와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삶을 경멸한다. 자신의 시와 가능한 삶의 방식을 모두 도려내고 불가능한 것에서 시작하려 할 때 시인은 죽음과 무無를 바라보고 있다. 시인은 전체의 바깥을 바라보며 경계에 서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 어제와 오늘의 경계. 오늘과 내일의 경계. ‘지금-여기’와 ‘미지-거기’의 경계. 이쪽 절벽과 저쪽 절벽의 경계. 시인은 자신이 소유한 시의 영토를 뒤로하고 경계 너머로 저쪽 절벽을 향해 내딛는다. 이쪽 절벽 끝에서 저쪽 절벽 끝을 향해 눈을 감고 허공 속으로 내딛는 한 발. 미약한 언어에 실존을 걸고 온몸을 던지는 시적 도약의 순간.”(II. <전체의 바깥과 오늘의 감각>, 131쪽). “이미지는 실재와 실재를 지시하는 언어 사이에 위치한다. 이미지는 실재를 드러내면서 실재를 가린다. 언어가 실재를 지시하면서도 언어의 자의성 때문에 매번 실재를 온전히 지시하지 못하는 실패를 겪는다면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 비존재와 다른 세계의 현존을 눈앞에 드러낸다. 죽은 예수의 시체에 드리워져서 예수의 얼굴을 드러낸 ‘토리노의 수의Shroud of Torino’처럼 이미지는 말해지지 않은 것과 고대적인 것, 있지 않은 것과 죽어 있던 것을 드러낸다. 이미지는 눈앞에 보이지 않는 사물과 생명체가 거기에 있었음을 드러내는 잔존의 영상映像이다. (...중략...) 이미지는 기억과 파토스의 잔존을 통해 부재하는 현존, 그 실재와 실재에 가장 근접한 언어가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매개한다.”(II. <염려하는 주체와 언어의 형식>, 79쪽).
1
이름
빈 무덤
어머니가 없다
2
솜으로 귀와 코를 막는다 눈을 감기고 턱을 받치고 입을 닫는다 머리를 높이 괸다 손발을 주무르고 몸을 눈힌다 백지로 얼굴을 덮는다 배 위에 왼손 오른손 올려놓는다 받침대로 옮기고 홑이불로 덮는다 병풍으로 가린다
향나무 삶을 물로 씻긴다 머리 빗질을 한다 자른 머리카락 깍은 손톱 발톱 주머니에 넣는다 이불에 넣는다 물 수건 빗 마당에 묻는다 몸을 관에 눕힌다 몸과 관 사이 메운다 문을 닫는다 나무못을 박는다 관을 묶는다 병풍으로 가린다
묘지 네 모서리 말뚝 아래 관이 내려간다
어머니가 있다
3
어머니가 없다 부를 것인가
어머니가 있다 부를 것인가
― I. <병풍> 전문
“무無를 직시하는 인간은 유한有限의 인식을 전제한다. 인간 스스로 육체의 한계와 정신의 결함을 절감할 때 유한에 대한 자각은 매우 통렬하다. 갑작스러운 질병과 급격한 노환은 육체가 얼마나 유약한 것인지를 보여주며 죽음은 삶과 함께 항상 공존해 왔음을 환기시킨다. 한편 정신은 사유와 성찰을 수행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이해와 인간 자신에 대한 탐구를 증진시킬 수 있지만 개인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사유와 삶의 깊이는 주체의 거듭된 반성과 저 육체의 한계를 통해 유한성을 다시 깨닫게 한다. 그런 점에서 개인이 육체와 정신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면서 느끼는 임계점은 목숨을 건 도약의 출발점이다. 그것은 삶에서 죽음으로, 있음에서 없음으로, 의미에서 무의미로, 가능한 것에서 불가능한 것으로의 경계다. 주체가 그 경계 너머로 나아갈 때 주체는 전혀 다른 주체로 태어나게 된다. 그것은 주체가 현실 바깥의 세계로 나갈 때 타자가 되는 지점이다. 그 타자의 얼굴은 죽음이며 무無이고 무의미다. 죽음과 무無는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아서 영원하고 언어 없이 존재하기에 의미가 없다. 죽음과 무無는 의미 없는 비존재로서 영원하다.”(II. <강요된 침묵과 언어의 파열>, 161쪽). “음악은 침묵 속에서 솟아올랐다 침묵 속으로 사라진다. 음악은 침묵을 찢고 나왔다가 침묵 속으로 돌아간다. 음악을 들으면 들을수록 음악이 사라진 뒤에 떠오르는 침묵이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침묵은 음악을 되새기게 하고 침묵 속의 음악을 바라보게 한다. 침묵은 음악의 기원이고 사라져가는 음악의 미지未知이다. 그런 점에서 침묵은 ‘소리-존재’의 생성을 준비하고 귀환의 자리를 마련하는 무無이다. 무無는 없음 자체가 아니라 존재의 생성과 귀환 운동을 무한히 발생시키는 없음이다.”(II. <육체의 형식과 시의 형식>, 151쪽). “시는, 사태의 자리에 부재하다. 시는, 사태 이후에 온다. 시는, 사태 이후에 오기 때문에 사태, 그 자체의 끔찍함을 온전히 재현할 수 없고 경악스러운 고통을 즉각적으로 말할 수 없다. 사태의 현장에 부재했다는 부채감과 무력감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그러나 말을 해야만 하는 시인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의 언어는, 그리하여 매번 다시, 고쳐서 말해야만 하는 언어는, 사태를 기억하기 위해 상상하는 언어는, 언제나 나중에 도래한다. 상상을 통해, 시인의 육성이 아니라 사태의 어둠 속에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름 없는 타자의 목소리로, 사태의 어둠 속 하나의 파편에서 비롯된 상상력으로, 온전히 고통스럽게 사태를 살아낸, 시인의 온몸을 빌어서 돌연, 도래한다.”(II. <재현의 정치성에서 상상의 정치성으로>, 41쪽).
-『문학들』 2020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