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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의 반론도 참 오래간만에 보네요.
┗지나가다..
풍납토성이 백제건국세력이전의 선주세력에 의해 건설되었냐는 질의에 예라고 답한것 맞나요??? 새롭고 경이적입니다.11:23
????>이런 질문을 하는 자체가 의아스럽군요. 님은 필요 이상으로 댓글에서 별 상관없이 사족적으로 증말, 기가 막히니.. 새롭고 경이적이니?? 아래에도 미스니를 연발하며.. 그리고 아래 글에서도 그렇고 계속해서 상대의 댓글에 한글 문맥을 모르는건지.. 뭐가 진짜 미스인지는 차근 차근 이야기해 봅시다.
우선 위 글은 풍납토성내에는 선주 세력의 취락유적이나 토기들이 발견되고 있는 상황에서 풍납토성이 단순히 성벽위주만의 단순한 사고 개념이 아닌 사람이라면 풍납토성의 조성에 선주민 세력이 일정부분 관여했다라는 표현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님을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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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님
ㅋㅋ 댓글로 달다보니 말이 짧아지고 이해력의 혼선을 넘어 초축을 500년 운운하니 말을 길게 풀어 님의 고견을 듣자고 말했더니 여전히 댓글이군요.성곽이란 자체가 기본 인구밀집의 취락을 보호하기 위해서 생겨난 개념이고 백제 온조 13년 궁궐 축조와 14년 성을 쌓고 한성으로 불리는 기록이나 기본 도성의 예에서도 그 터가 이전 일정한 도시개념이나 취락의 발전 분포지을 기본 틀로 해서 조성이나 천도됨을 기본 상식으로 깔고 봐야 할것이며 풍납토성내의 청동기시대의 전형적 환호-물론 3중형태의 특징 존재-시설의 기원전시기로 보이는 이곳은 이전부터 이런 취락이나 성곽 둘레에 사용하는 것으로 넓은 의미에서 풍납토성의 기본 조성12:09
=> 간단한것 하나여기서 지적합니다. 우선 성곽둘레에 사용되는 것은 환호라 하지 않고 해자라 합니다. 환호나 주거지유구등은 풍납동 축조세력보다 선주한 세력으로 그 기층문화로 작용할수 있는 정도일것입니다.<지나가다>
?????>성곽의 개념자체를 다시 이해해야 하겠군요. 성곽이란 군사적, 행정적인 측면에서 지어진 보호, 방어를 위한 개념의 건축물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곽은 머무는 사람이나 목적, 지형, 입지와 축성재료, 평면의 형상 등에 의해 다양하게 분류되며 여기서 축성재료에 유념해서 보면 정치체가 커지고 문명수준이 올라가면서 나타나는 토성이나 돌로 쌓은 석성, 흙과 돌을 이용한 토석혼축성, 벽돌을 주재료로 한 전축성뿐 아니라 <초기에는 나무를 재료한 목책도 성곽의 개념이(목책성) 됩니다.대평리 유적에서는 2·3중으로 중복된 환호와 목책이 실제 발굴>이건 초기부터 삼국시대 그리고 조선시대에 와서도 임진등 긴급하거나 단기 시기로 사용된 형태입니다. 환호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도랑이죠.이런 형태는 후대 고조선 문명권 이전 시기인 요하 일대의 흥륭와 취락 유적에도(기원전 6천년경) 보이듯 방어적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으며-혹은 해자의 개념으로도 설명한다. 특별히 틀린 말은 아님. 세계에 널리 나타나는 현상으로 농경 사회의 정주취락과 관계하며 기원전 6천년경에 이런 해자형태는 당시 시대상에서는 상당히 혁신적 개념이라고 할수 있슴- 하여튼 그기에 목책(성)이 함께 병행되어 발전합니다.. 즉 성곽의 개념인 목책성에 환호도 사용되는 것이지요. 추가로 평면의 형상에서 평지성, 산성, 평산성(구릉지 일대의 성)로 분류할수 있고 현재 평양의 토성동 토성(낙랑토성으로 추정)인 이 성을 마치 평지성에 장방형이라는 한나라식 토성으로 말하는데 실제 구릉지의 평산성에 장방형의 모양이 아닙니다.
<해자라는 것은 성곽의 규모가 커지고 정치력이 강해지면 풍납토성에서도 보이듯 기타 환호의 형태가 좀 더 규모화 커진 연장성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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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의 초축년대라함은 보축이나 수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초축년대에 다하여 막연하게 연구자들의 견해를 듣다 보니 헷갈리신것 같기도 합니다만, 위 댓글에 보이는 설명은 풍납토성의 초축년대에 대한 편년 개념을 기본적으로 판단미스하는 듯 보입니다.
??? > 헷갈리 것이 없습니다.. 님이 내내 헷갈리는 소리 하는 거지요. 보강(증축)이나 수리는 글자 그대로 이전의 초축같은 기존 건축물이 있는 이후 상태에서의 행동 개념임을 모르시나요?? 저는 가를 말하는데 님은 나를 말하면서 저보고 헷갈리네 하시니 도무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 바를 모르겠군요. 이게 님의 토론 방식인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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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발굴자인 신희권선생의 처음 견해 즉 1차발굴보고서의 결론 고찰부분을 그대로 원용하고 2차인 동벽발굴보고서의 자료를 원용한듯한데 역시 판단 미스가 보입니다.. 그런데 최근 신희권선생도 그 내용을 많이 수정하여 풍납토성의 초축년대를 2세기로 내려 보고 있으나 개인적으로 신희권선생의 견해를 수용하나 학계는 박순발선생의 견해를 더 수긍하는 입장입니다.
????> 박순발 교수 견해를 말하는 것을 보니 서울경기고고학회때의 몇 년 지난 이야기와 연계된 내용으로 이야기하고 있군요. 그리고 마치 이게 대다수라서 대세이며 그래서 설득력 있다라는 식의 개념문장으로 가는데 ..잘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오해를 줄 수 있는 전후 상황이 빠진 말은 삼가해야 할 것입니다.
풍납토성 자체가 이병도에 의해 사성으로 터부시되어 오다 이후 김원룡교수도 사성개념으로 말하면서 방치되었고 다시 설상가상으로 몽촌산성ㅇ의 발굴로 마치 이곳이 백제의 왕궁이라는 개념이 펴짐으로 풍납토성은 이후 더욱 세간의 뇌리에 사라지고 엄청난 파괴의 몸살을 앓게 되는 수난사를 경험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단순히 이전 일제 이후 삼국초기의 백제사의 정치력에 대한 불신으로 지배되며 지지했던 보수 지지자 대다수의 견해를 마치 진실이며 설득력 있는 개념마냥 몰고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 그 많다는 지지자중에서는 실제 독특한 백제정복국가설을 내세우는 이도학 교수가 풍납토성 축조시기를 4세기 중,후반 근초고왕대로 보면서 이 일대에서 발굴 확인된 그 이전 시기 건물터는 선사시대'??것이라고 단정한 우스운 소리나 또 박순발 교수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성벽 발굴 현장설명회 자리에서 '풍납토성은 그 축조시기가 빨라야 3세기 초,중반을 넘지 않는다'고 공개표명한 적이 있는 게 고작인 반응수준.>
왜 판단 미스라 하는지 반론하겠습니다.
??????????>
주거지나 환호유적과 풍납토성사용시기나 초축년대등 직접적 관련성이 있다고 할만한 근거는 없습니다. 발굴자는 1차 보고서에서는 강한 표현으로 동시적이라는 말로 최하층이라 말하고 있으나 성벽의 최하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풍납토성내부에 있던 선주세력이 남긴 유구일뿐 현단계에서 풍납토성관 직접 관련된 유구라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직접적이라는 말 자체를 사용 할수는 없지요
아래에서고 박순발 교수의 견해를 지지한다느니 몽촌산성을 이야기 하는 걸 보면 박순발 교수가 몽촌산성의 연대축조를 어떻게 산정했는지 너무 잘 알겠군요.
-박순발 교수가 주도하여 몽촌산성 축조연대라는 것은 기본 산성내의 회유전문토기편을 근거로 3세기 이후로 추정.-
풍납토성은
Ⅰ층(서력기원 전후 : 풍납리식무문토기+중도식토기+삼중의 환호)
Ⅱ층(서기 1∼2세기 : 6각형 수혈집자리+회청색연질토기+낙랑계토기)
Ⅲ층(서기 3∼4세기 : 6각형 수혈집자리+회청색경질토기)
Ⅳ층(서기 4세기 이후∼475년 문주왕의 웅진 천도시까지 : 4각형방형 또는
장방형 수혈집자리+회청색경질토기) 등 적어도 4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슴.
기타 토기 산포지나 폐기장은 4,5세기 편년등 <삼국사기 문헌상의 한성백제의 존속시기와 대체로 일치하며 기원전후에서 5세기 까지 다양한 유적과 유물이 연계된 문화층으로 나타나고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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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니하면, 역사님이 언급한 경질무문토기나 타날문토기는 기원전 2-1세기로 볼수 있습니다. 타날문토기에 대하여는 더 살펴볼 필요가 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풍납토성 축조세력과 직접적 관련성이 있다고 단언할 근거가 있을까요? 없을 까요 . 현재로서는 견해가 엇갈리고 있습니다.(박술발선생과 신희권선생안). 누구 말이 맞는지는 더 지켜보거나 더 파봐아야 알수 있을 것입니다.
???>오타가 난것 같은데 박술발이 아니라 박순발 . 그리고 신희권뿐 아니라 선문대 이형구 교수같은 분의 발벗고 나선 노고에 오늘날 풍납토성이 그나마 나머지 절반이라도 보존되었지요. 왜 박순발 교수보다 이형구 교수의 내용이 더 설득력 있는지는 아래에서 좀 더 검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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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호가 주거지를 감싸고 있는 구조로 보아 발굴자는 주거지와 관련된 유구로 발굴자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또한 발굴자는 역사님과 달리 청동기문화의 환호라 하지 않고 청동기유적에서 발견된 예가 많았음을 애기할 뿐입니다..
????>저 환호가 청동기시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청동기문화에서 나오는 전형적 형태에 3중 환호형의 특징이 취락주변에 만들어져 있다라는 설명입니다.
1997년 발굴보고에서의
3중 환호에 대해 잠시 설명하면
1호 환호(폭 80cm 길이 20m 깊이 50cm) 가장 안쪽에 해당하며 상면 상당 유실
2호 환호(차례로 170 ,30, 70) 중간 지점으로 가장 양호( 풍납통식무문토기 계통 유물도 가장 많이 출토)
3호 환호(80,25,45) 바깥부분으로 상당부분 교란
쉽게 말해서 3중의 환호즉 3개의 도랑을 겹겹이 만들었다는 뜻이며 거의 동일 구조에
동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풍납토성 내에서 가장 이른 시기 취락 유적이며 가장 이른 시기의 풍납동식무문토기 유물이 대다수로 발견 -이런 환호유구는 남쪽으로도 계속 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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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발굴자는 환호와 관련 주거지가 발굴된 1차보고서에서는 환호보다 약간 후행하는 6각형주거지시기에 환호가 폐기된 직후 토성이 축조된것으로 판단하고 있으나 발굴자 역시 초축년대를 현재 수정하고 있어 최초 발굴보고서와는 다른 견해를 보이므로 환호와 주거지보다 풍납토성의 1차성벽을 늦은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1차 성벽 2차 성벽을 나누어 발굴자는 성벽절개 발굴결과를 설명하고 편년을 잡고 있습니다. 역사님이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 역시 판단 미스를 하고 있습니다.
역사님의 견해는
1차성벽에서 보이는 경질무문토기(이른바 풍납동식 토기)와 타날문토기에 대하여 기원전 2-1세기로 편년되어 진다는 점, 그리고 1차성벽에서 목탄의 카본데이팅으로 편년안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1차성벽(역사님의 표현으로는 토성 최하단부)에서 보이는 경질무문토기편이나 타날문토기편에 대한 해석의 차이인데, 이 유물들은 풍납토성의 초축편년이 이 유물보다는 앞설수 없다는 판단의 근거는 될수 있으나 하한을 설명해 줄수는 없는 것입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군요.- 여기서가 핵심적 부분이겠지요.
풍납토성의 초축편년이 이 유물보다는 앞설수 없다는 판단의 근거는 될수 있으나 > 이 말은 맞지만 하한을 설명해 줄수 없다> 이 부분은 정확한 지적이 아닙니다.
한가지 분명히 짚고 가면 우리나라가 토기분류로 연대 측정하는 식이 다른 나라 어느 학계보다 유독 강한데 세계 학계는 제대로 과학적인 절대편년 즉 탄소연대 측정이나 토기관련해서 열형광분석의 방법은 하나의 분명한 주류이며 이들 상호는 장단점과 정확한 연대사이의 오차는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중심연대를 잡아 설명합니다.
<왜 정확한 표현이 아닌지는 앞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풍납토성내의 풍납동식무문토기의 발전 양상이 이후 일반적 경질무문토기로 명명된 토기의 발전형태와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발전 차이는 타날문토기와 관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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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세기의 석축 산성에서 성벽을 절개해 보면 성벽뒤를 채운 보강토나 잡석들속에 무문토기편이 나오는 예도 있습니다. 즉 풍납토성의 경우 1차성벽축조시에 흙을 채취하여 성토하는 과정에서 이전 유적을 파괴하여 토취한 결과 경질무문토기편이 성벽내에 혼입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1차성벽내의 경질무문토기로 초축년대를 편년잡을때는 이보다 선행할수 없다는 기준은 될수 있으나, 어느시기에 초축되었을까를 판단할 자료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5-7세기의 석축 산성에서 성벽을 절개해 보면 성벽뒤를 채운 보강토나 잡석들속에 무문토기편이 나오는 예도 있습니다> 이러한 예가 있을 수 있죠. 당연히 성토과정에서 초축시기보다 선시기의 유적,유물이 있다면 들어갈 가능성은 부인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풍납토성의 경우는 성벽에서도 발굴되는 양상으로 보았을 때 이런 예로 표현하기 부적절합니다.
본격적으로 설명해드리죠.
먼저 풍납토성의 구조부터 잠시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초축의 정확한 설명을 위해-
잠시 인용하면-신희권, <풍납토성의 축조기법과 성격에 대하여>, 《풍납토성의 발굴과 성과》, 한밭대 향토문화연구소, 2001, 68~69쪽. 윤근일, <풍납토성 발굴과 그 의의>, 《풍납토성[백제왕성] 연구 논문집》, 동양고고학연구소, 2000, 51쪽.
< 발굴지역은 대상구역 중 동 - 서 폭이 가장 넓고 보존 상태가 양호한 지점으로, 성 내부와의 연결 층위를 조사하기 위하여 지난 1997년 발굴조사 한 현대아파트의 동북쪽의 위 지점을 A지점, 아래 지점의 것을 B지점으로 정하고, 동 - 서로 성벽을 절개하여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확인된 성벽의 축조 방법은 하단에 뻘을 깔아 기초를 다지고 하부 폭 7m, 높이 5m 정도의 사다리꼴 모양 중심토루를 쌓았다. 다음으로 안쪽에 사질토(Ⅱ 토루)와 모래(Ⅲ 토루), 점토다짐흙(Ⅳ 토루)과 뻘흙(Ⅴ 토루)을 위주로 한 판축(版築) 토루를 비스듬하게 덧붙여 쌓았다. 마지막 토루 상면에는 강자갈돌(姜石)을 한 겹씩 깔아 3단으로 만들고, 그 안쪽으로는 할석을 1.5m 이상 쌓아 마무리하였다. 이러한 석렬 및 석축은 토사의 흘러내림과 안쪽으로 밀리는 것을 방지하고 배수의 기능도 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A지점의 경우에는 뻘흙으로 이루어진 Ⅴ토루에 나뭇잎이나 나뭇가지 등의 식물 유기체를 얇게 깐 것이 10여 겹 이상이 확인되는데, 뻘흙을 10㎝ 정도 두께로 가져다 부은 후 식물 유기체를 얇게 깔고, 다시 뻘흙을 까는 과정을 10여 차례 이상 반복하여 토루를 쌓아 올렸다.
또한 식물 유기체 4~5겹에 한번씩 3단에 걸쳐 성벽의 횡 방향으로 각 <재목>을 놓고 <수직목>을 결구시켜 지탱한 구조물도 확인되었다
B지점은 Ⅴ토루 하단부 4단 째의 석축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성벽 종 방향을 따라 80㎝ 간격의 수직목이 확인되었는데, 구획선으로 추정한다.
중심토루 외벽으로는 경사지게 떨어지는 자연층 위에 판축벽으로 토루를 쌓고 내벽과 마찬가지로 상부에 할석 또는 강자갈돌을 깔아 마무리하였다. 내벽과 외벽의 석렬은 중심토루로부터 거의 동일한 거리에 축조되어 있다. 이상 확인된 규모로 보아 성벽의 폭이 약 40m, 높이가 9m가 넘는 규모이고, 조사 구간이 협소하여 내외부로 확장하여 조사하지 못한 것을 감안한다면 하부는 그 규모가 더 커질 것이다.>
기저부-기초 바닥- 정지 작업 후 뻘 흙으로 기초 다지고 중심부를 흙으로 쌓은 후 내벽과 외벽에 3-5차례 정도의 사질도-점성 성분이 있는 모래-와 모래, 점토로 다짐을 하고 흙으로 구성된 판축토루(흙 기둥)를 덧붙이고 마지막에는 성벽 양측의 기저부에 여러 단의 석력과 석축으로 마감한 형태입니다.
처음 접하여 글로 읽은 분들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내부 구조형태인데 풍납토성을 댐공법으로 비유하는 것도 오늘날 우리가 보는 흔한 돌이나 벽돌형의 성곽처럼 아래에서 위로 쌓아올린 형태가 아니라 기저부의 뻘 흙으로 지진이나 충격 흡수의 기초를 만들고 기본 중심 토루의 지지목 형태로 쌓고 이후 쉽게 설명하며 이런 벽에다 비스듬하게 나무를 기대어 나무위에 하나씩 다른 나무가 비스듬하게 쌓여 있는 형태로 구조가 사다리 꼴 모양으로 위층보다 아래층이 상당히 넓은 형태가 됩니다. 이런 이유로 풍납토성의 경우 폭의 넓이가 최대 70여미터에 이르는 구조가 된 것입니다.이런 형태는 댐에서도 보이듯 엄청난 충격흡수에 상당한 지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으로 오늘날에도 첨단 공법입니다.이와 같은 축조방법은 김제 벽골제와 부여 나성, 일본의 수성(水城)과 제방 유적에도 확인됩니다.
그럼 여기서 정확히 <초축구조>로 보는 형태는 어디까지인가?
<내벽 Ⅲ토루(모래) 하단에서 마지막 토루와 동일 성격의 석렬이 확인되어 이 구간까지도 초축으로 포함합니다>
이러한 성벽구조 확인은 2차례에 걸쳐 이루어 졌습니다.
1) 1999.(동벽)
700여M 구간에 300미터가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400여미터에서 조사가 실시.
앞쪽으로 2차 개천을 복개한 왕복도로가 있는데 이것이 해자로 추정됩니다.
북쪽 A지점과 남쪽 B지점을 동서로 관통 시켜 성벽 절개를 통해 내부 구조 확인에 들어감
확인 결과 폭 40미터 높이 9미터 넘는 규모
성벽 하단에서 고식의 심발형토기 출토, 판축토 내부는 풍납동식 무문토기(경질무문토기), 타날문토기, 회색무문토기, 그리고 토루 상당부와 퇴적층 경계사이에 장단형 토기, 동이편 유물이 출토
2)2003 서벽
중심부 하단의 개흙층과 점질토, 사질토 교대 성토층 및 외벽 점토 다짐층 등에서 <다량의 풍납동식 무문토기가 출토와 소량의 연질 타날문 토기 출토>
풍납토성 1기(기원전 2세기 전후)에 속할 가능성이 높으나 풍납토성 성벽 외부의 가장 깊은 곳에서 풍납동식 무문토기인 경질 무문토기가 출토.
<초축시기는 기원 전후>
여기서 성벽연대를 위해서는 출토된 풍납동식 무문토기및 타날 토기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것입니다.
앞서도 풍납토성이 4개의 문화층으로 이루어져 단계별 발전 양상의 특징을 보인바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것을 다시 토기류로 부가 설명하면
1층> 풍납동식 무문토기 유형이 <다수>, 연질 타날문토기, 연질 무문토기는 <소수>에 불과
- 기원전 2세기 전후 시기
2층> 풍납동식 무문토기 거의 소멸, 연질 타날문토기, 연질 무문토기 대부분 차지. 회색 경질토기로 소량 출토
=> 풍납동식 무문토기에서 타날문 토기로 바뀌는 양상이 다른 지역과는 달리 두층 사이에 시간적 공백이나 새로운 토기문화의 혁신적 가능성을 상정해야 할 만큼 본격적 연질 타날문 토기가 출토되는 시기에 풍납동식 무문토기는 급격히 소멸하는 것이 풍납토성에서의 매우 큰특징이며 성벽 축조에서도 주목해서 봐야 할 핵심부분이다.
3층>2층 단계의 토기문화와 연속성을 보임.기존 연질 타날문 토기와 연질 무문 토기중 일부가 경질화 도질화, 특히 고배 삼족배, 삼족반, 광구, 장경호, 장단형웅등 연질 무문, 회색 경질 토기, 회청색 도질 토기 유형의 새로운 기종이 출현
4층> 3층 시기에 바탕하여 다양한 형태의 기종 등장하나 이전 시기에 비해 큰 변화는 없는 양상
여기서 초축의 연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풍납동식 무문토기와 연질 타날문 토기에 대한
간략한 지식이 필요 할 것입니다.
<점토대토기 조각들>
경질 무문토기는 처음 김원룡 교수가 풍납토성 내에서 발굴하면서 <풍납동 무문토기>로 불리다 토기가 한강유역 뿐만 아니라 남부지역에서도 발견되어지자 이들을 경질무문토기(硬質無文土器)라 명명하게 되었습니다.즉 표면이 단단하며 무늬가 없는 토기의 의미로 불립니다. 이 경질 무문토기는 제작 온도가 거의 900도에 달하는 것으로 이전의 400-800도 시의 초보적 철기보다 높은 내구성의 철 제작을 가능하게 하는 측면에서 철기시대와 관계하는 토기입니다. 이와 함께 초기 철기의 제작 연대와 관계한 것이 타날문 토기입니다. 풍납동식 무문토기에는 제작기술상 기원전 5-3세기에 출현하는 <점토대토기> -토기 구연부에 점토띠 덧붙인 무문토기로 그릇의 기벽이 두꺼움. 이 토기의 의의는 비파형 동검에서 세형동검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나타나며 지석묘(고인돌)의 소멸과 함께 목곽묘 등장에서 함께 사용됩니다. 이른 철기사용시기와 맞물리며 단면 형태에 따라 크게 원형점토대토기와 삼각형점토대토기로 구분합니다. 한반도에서는 대략 기원전 3세기경에 들어와서 남부에서는 금강유역에서 처음 발견되고 영남권에서 다수가 발견- 에서 보이는 점토띠 쌓은 흔적이나 점토테 연결 흔적등이 관찰됩니다. 아직 녹로성형 단계로 보이지는 않으며 이전 무문토기보다 세련된 형태에 마연에 가까운 깎기수법을 채용하여 정면이 세련된 효과로 그냥 무문토기보다 좀 더 향상된 측면이 확인됩니다.
철기시대의 개시연대는 한반도 북부지역이 B.C. 4-3세기경으로, 중·남부지역은 B.C. 2-1세기경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단면삼각형 점토띠토기의 발생을 B.C. 2세기로 보고 있어 경질무문토기의 출현이 B.C. 2세기경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판단되고 군곡리 조개무지의 경우에 Ⅱ기층의 상한연대가 B.C. 2세기 말-1세기 초로 비정되어 일치하고 있다. 하한은 군곡리 조개무지의 Ⅲ·Ⅳ기층에도 계속 나타나고 있어 2-3세기경까지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것은 군곡리가 지리적으로 최남단에 위치하여 다른 지역보다도 늦은 시기까지 사용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욱이 제주도 곽지 조개무지의 경질무문토기는 3-4세기까지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토기문화의 파급이 빠르게 일어난 동남부지역에서는 1세기경 와질토기 및 적갈색연질토기로 대치되었을 것으로 확인
<경질무문토기>
다음으로 <연질타날문 토기>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는데 이 연질은 표면이 연한 질감으로 기벽이 얉은게 특징입니다. 즉 이전의 점토대토기는 기벽이 무겁기에 실생활에서 나름의 애로 사항이 존재했을 것을 짐착합니다. 이런 불필요함을 없애기 위해 기벽의 두께를 낮추고 이런 얇아진 기벽의 밀도를 높이기 위해 토기 표면에 <두드림 기법>을 이용하여 기포를 제거함으로서 강도를 높이는 효과의 기술입니다.이런 기술을 타날기법이라 하며 표면이 부드럽다고 해서 <연질타날문토기>라고 합니다. 연질의 경우는 이런 타날기법이 사용되지만 무문토기의 경우의 두꺼운 외벽에도 보령 교성리,관창리 유적등에서도 보이듯 타날기법이 추가로 사용된 흔적이 보이지만 거의 사용하지 않는 특징을 가집니다.
타날문 토기에 대해서는 기본 몇 개의 설이 있지만 확인된 바로는 요령성 ‘상보유적’에서 세형동검 검파 점토대토기와 함께 ‘승석타날문 토기’가 출토되고 있습니다. 이후로 중서부와 김해지역 구산동 유적에서도 원형점토대토기에 타날 흔적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춘천 중도 집자리에서는 경질무문토기와 함께 타날문토기가 등장하며 그 연대를 2세기로 보고 있으나, 중부지역의 다른 유적에서는 기원전후로부터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남부지역의 김해 지내동 독널무덤에서는 경질무문토기와 함께 타날문의 적갈색연질독이 발견되어 적어도 1세기경의 것으로 비정되고 있다. 고식 와질토기로 분류되는 것 중에도 이미 타날문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타날문이 등장하는 것도 1세기경으로 볼 수 있겠다. 따라서 타날문토기는 한반도 중·남부지역에서 기원전후에는 등장하였을 것으로 봄
< 타날문 토기>
=> 그럼 다시 정리하면
1.풍납동식 무문토기와 연질타날문토기는 초기 철기시기와 관계하지만 시기적으로 타날문토기가 좀 더 후대의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2.특히 풍납토성의 경우에는 연질타날문토기가 본격적으로 사용되는 시기에는 풍납동식무문토기는 급격히 소멸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3. 풍납동식 무문토기는(기원전 2세기 전후) 기본 선주세력의 토기양식의 특징이며 최소한 기원전까지 사용되다 기원후로 급격한 타날문토기 양식에 소멸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4.초기 다수의 풍납동식 무문토기에 소수의 타날문토기는 선주세력과 이주세력의 혼합된 양상을 보이고 있음을 뜻하고 이후 풍납토성에서의 본격적 타날문토기가 사용되는 시기에 맞물려 풍납동식 무문토기가 빠르게 사라진 특징은 이 신진세력에 의해 선진 기술의 빠른 습득과 자기방식화로 진행되어 발전했다는 것을 의미이며 <초축의 하한시기도 짐작게 합니다.>
5. 앞서도 언급했지만 성벽 중심부 하단의 개흙층과 점질토, 사질토 교대 성토층 및 외벽 점토 다짐층 등에서 <다량의 풍납동식 무문토기 출토와 소량의 연질 타날문 토기 출토>
풍납토성 1기(기원전 2세기 전후)에 속할 가능성이 높으나 풍납토성 성벽 외부의 가장 깊은 곳에서 풍납통식 무문토기인 경질 무문토기가 출토.
<초축시기는 기원 전후 시기로 볼수 있을 것입니다>- 이형구<백제도성>
6. 판축내에는 지지 목재로 사용된 부재가 있는데 이 탄소연대측정의 절대 연대의 측정결과 거의 기원후1-2세기에 집중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기타 풍납토성에는 토기 관련 절대연대를 위한 열형광분석도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7. 일련의 풍납동의 유적 유물의 발굴과 시기는 삼국사기의 백제 초기의 내용가 거의 일치합니다.
온조왕 즉위년(BC 18) 하남 위례성 위치 정하는 복택기사( 온조 ‘십제’)
온조왕 13년(BC 6) 천도왕궁 축조 기사, 5월 한강 남안에수도 9월에 성궐세움
14년(BC 5) 서북에 성을 쌓고 한성 백성으로 나누어 살게 함
- 하남 위례성을 한성으로 불린 것으로 추측 천도하고
15년(BC 4) 새로이 궁궐 축조
온조왕 41년(23년) 위례성 수리 (15세 이상에서 뽑음)
책계왕 (286) 장정징발 위례성 고침
이 사이 여러 차례의 수축 추정될 수 있음.
삼국사기
<BC2세기경 위만 조선시 십제 형성 ->BC2말에서 1세기초 소국병합한 백제는 BC 1전반 경기도 일원 소국 병합한 왕국으로 성장>
삼국지 한전은 소국의 난립, 삼한론은 남부일대를 소국 난립의 연맹왕국 수준의 미숙한 정치 발달사로 묘사. 문제점 많음.
8. 기원 전후로 보았을 경우 이 시기는 백제의 하남 위례성시기과 맞물리지만 다른 일각에서는 타날문의 변화 양상과 함께 위만이 준왕을 내쫓고 남부로 내려가 한왕이 된 세력의 변화 양상과 연관해서 설명하는 주장도 있습니다.-이건 풍납동식 무문토기의 상한을 기원전 3세기 중반까지로 보고 토착재지 세력의 강한 영향력하에 외래계문화의 교류로 보는 이홍종씨의 견해를 바탕으로 함-
9. 풍납토성뿐 아니라 백제가 초기부터 왕국으로 건재함의 다른 성곽유적들도 발견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정북동 토성> 정방형의 한반도에서 매우 보기 드문 방형 토성인데 후삼국시기로 보다
서문지의 바닥에서 채취한 목탄(木炭)을 미국 Geochron Laboratories에 방사선탄소연대 측정을 의뢰한 결과 B.P. 1820±90으로 나타나 백제 한성시대(漢城時代)와 연결되며 축조연대가 기원후 1-2세기경으로 추정되어 이미 백제 초기사에 대한 삼국지의 견해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외에도 외성벽 1,945m 내성 85m 234,50㎡의 <육계 토성>는 아직 정확히 말할수 있는 연구수준까지는 아니지만 김성태씨는 육계토성 인근의 임진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학곡리 적석총 등 일의대수로 이어진 백제적석총을 발굴한 주역. 그는 기원전후~1세기 적석총으로 보이는 학곡리 적석총에 대한 장문의 보고서를 통해 백제의 첫도읍지인 하북위례성이라고 보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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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보수 지지자들의 절대연대 측정 방법에 대한 편차 의구심에 의한 신뢰 의문에
탄소연대측정에 대해 비교적 많을 글을 발표한 바 있는 목포대 최성락 교수는 '탄소연대가 적어도 10개 이상이 어떤 연대를 중심으로 일정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면 믿고 싶지 않아도 믿을 수 밖에 없다'면서 '풍납토성의 경우 국립문화재연구소 측정결과를 신뢰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탄소연대측정치 12개의 격차에 대해서는 '같은 풍납토성이지만 각기 다른 곳에서,각기 다른 층위에서 출토된 목탄과 목재가 비슷한 연대를 보인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면서 '기원전후를 중심으로 한 탄소연대를 믿을 수 없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고 덧붙인 말을 새길 필요가 있을 것이며 보수지지자들이 몽촌산성의 축조시기도 편년을 어떻게 잡았는지 되새겨봐야 할 것입니다.
삼국시대 우리나라 도성의 특징은 평지성인 왕성에서 일상적 행정고 거주를 하고 전쟁시를 대비한 군사목적의 배후 산성을 쌓는 형태입니다.
국내성은 환도산성, 안학궁은 대성산성을 신라는 월성이라는 도성을 중심으로 명활산성과
남산산성을 그리고 백제의 경우는 평지성이라는 풍납토성을 중심으로 배후에 몽촌산성과 이성, 남한산성을 두고 있습니다. 후기 웅신성과 사비성 공주의 경우는 공산산성을 부여는 부소산성을 왕성을 중심으로 두는 공통분모형의 배치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금성-1420년 완공-은 현재 단일규모로 세계최대의 도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넓이 723,633평방미터,남북 961미터 ,동서 753미터
성벽의 높이 10미터, 성벽의 두께 7.5미터,둘레길이 3,428미터
해장의 폭은 52미터에 장방형이라 내부 면적은 넓게 사용
<백제의 초기 토성인 풍납토성은 길이 3.74km, 원래 높이 15m에 너비는 최대 70m입니다. 해자의 경우 최대 50~60m로 거대한 성벽을 가진 성으로 성벽의 길이나 너비는 가히 자금성 이상으로 아시아 최대의 토성이라는 수식이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님을 증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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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백제방에서 글을 먼저 보고 이글을 뒤늦게 보았습니다. 백제방에서 반론합니다. 그런데 풍납토성의 경질무문토기를 말하다가 왠 점토대토기인가요. 점토대토기가 풍납토성초축편년과 무슨 관계인가요? 연관성이 없는 점토대토기를 들고 나와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위 글에서도 보이듯 풍납동 무문토기에는 점토대토기의 큰특징인 점토띠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며 초기 철기시대를 대표하는 연질타날문토기보다 좀 더 선행 시기의 토기임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한번 읽어 보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