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주님만찬 성 목요일
✠ 요한복음 13,1-15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손길
예수님의 수난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배반도, 외로움도, 십자가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시간은 점점 마지막을 향해 흘러가는데, 제자들은 아직도 무엇이 더 큰지, 누가 앞자리인지에 마음이 머물러 있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말씀보다 더 강한 방식으로 마지막 가르침을 남기십니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 앞에 무릎을 꿇으십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는 일,
주인이 종의 발을 씻는 일,
하느님께서 인간의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오시는 이 장면은 참으로 충격적입니다.
세족례는 단순히 발을 씻는 예식이 아닙니다.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신 사랑의 사건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손길이 우리의 먼지 묻은 발에 닿는 순간, 하느님의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 됩니다.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1)
여기서 ‘끝까지’라는 말은 시간의 마지막만 뜻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줄 수 없는 데까지, 자신을 남김없이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세족례는 바로 그 사랑의 눈에 보이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발을 씻기신 뒤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
결국 세족례의 핵심은 예식이 아니라 삶입니다.
서로의 발을 씻어 준다는 것은 서로의 약함을 품어 주고, 상대의 먼지를 닦아 주며,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먼저 맡는 것입니다.
사랑은 높은 곳에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내려가 함께 짐을 져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은 화려한 말보다 얼마나 낮아질 수 있는가에서 드러납니다.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교회 안에서, 직책이 높을수록 더 많이 섬기고 더 먼저 허리를 숙여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장 높은 분이 가장 낮은 일을 하심으로써 사랑의 길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세족례를 묵상하며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누구의 발 앞에 기꺼이 무릎 꿇을 수 있는가?
나는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아직 내려가지 못하고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주님의 손길이 우리의 굳은 마음까지 씻어 주시어, 우리도 누군가의 삶에 따뜻한 손길이 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천 사비나 수녀님)
<주님 만찬 성목요일 강론>
(2026. 4. 2. 목)(요한 13,1-15)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만찬 때의 일이다.
악마가 이미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넣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요한 13,1-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겉옷을 입으시고 다시 식탁에 앉으셔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2-15)>
1)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에 하신 말씀은, 루카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과 ‘같은 가르침’입니다.
“사도들 가운데에서 누구를 가장 높은 사람으로 볼 것이냐는 문제로 말다툼이 벌어졌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4-27)”
최후의 만찬 때, 자리 배치 문제로 사도들이
말다툼을 벌인 것 같습니다.
사도들 사이의 서열이 확실하게 정해져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사도들이 서로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으려고 했기 때문에 생긴 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자기를 높이려고 하지 말고 낮추어라.
남을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섬겨라.”
그리고 이 가르침은 ‘새 계명’에 연결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이 가르침은 요한복음 15장에 다시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9-13).”
‘낮춤’과 ‘섬김’은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그리고 사랑한다면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남을 섬겨라.”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너를 사랑하니까, 나를 낮추고 너를 섬긴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2)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일은,
‘낮춤’과 ‘섬김’의 본을 보여 주신 일이기도 하고,
“벗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사랑”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신 일이기도 합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6-18).”
일 년에 한 번 세족례를 거행하는 것만으로는
예수님의 ‘새 계명’을 실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예식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3) 예나 지금이나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 흔히 내세우는 명분이 “평화를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 없이는 평화도 없고 정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침략 전쟁 가운데에 정의로운 전쟁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마태 26,52).
국가 사이의 일이든지 개인 사이의 일이든지 간에, 자기 살자고 남의 목숨을 빼앗는 자는
하느님의 심판대에 섰을 때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자기 목숨을 내놓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 실천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배반했다는 것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그의 발도 씻어 주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사랑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4월2일 [주님 만찬 성목요일]
루카 4,16-21
그 어떤 유언보다도 설득력 있고 값진 유언, 세족례(洗足禮)!
최후의 만찬! 그 광경이 화폭에 담겨 여기저기 볼 수 있기에 우리 눈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 생각만 해도 섬뜩하고 살 떨리는 표현입니다.
이제 이 식사가 끝나면 더 이상 지상에서는 식사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저녁 만찬이 끝나고 나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직 끔찍한 고통과 참혹한 죽음뿐입니다.
과거 사형이 집행되던 시절, 최고수들에게 ‘그날’이 확정되면, 교도소장이며 간수들이며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바라보는 눈빛에 뭔가 안쓰러움이 느껴지고, 갑자기 친절해지고, 특식도 제공해 주고...일종의 특별 대우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최고수들은 직감합니다.
드디어 때가 왔다는 것을.
어찌 보면 예수님을 위해 차려진 최후의 만찬도 일종의 특식이었습니다.
이 시간이 끝나면 이제 남아있는 것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골고타 언덕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외아들이셨지만, 동시에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지니셨던 분, 철저하게도
한 인간 존재였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어찌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초조와 번민이 밀물처럼 밀려왔을 것입니다.
그 극한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유혹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끝끝내 아버지의 뜻에 철저하게 순명합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혹독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합니다.
스승님께서 그토록 엄청난 고통을 겪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모습을 한심 그 자체입니다.
아직도 돌아가는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재정 책임자였던 유다 이스카리옷을 예수님을 팔아넘기기 위해 골몰하고 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지키지도 못할 헛맹세를 남발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예수님께서는 놀랄만한 광경을 연출하십니다. 이른바 세족례였습니다.
세족(洗足)은 무엇입니까?
발을 씻어주는 행위입니다.
통상 세족은 종이 주인에게, 신하가 임금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해드리는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왕 중의 왕이요, 인류 만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신하요 제자, 종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행하신 세족례는 그 어떤 유언보다도 설득력 있고 값진 유언이었습니다.
“주님이요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요한복음 13장 14~15절)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4월2일 [주님 만찬 성목요일]
요한 13,1-15
얼굴 닦아주는 부모, 발 닦아주는 부모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는 그 지극한 신비 안으로
초대받았습니다.
성목요일, 주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세우시기 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이 발 씻김 예식을 '부모와 자녀의 관계'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보고자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 발을 씻기시는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크게 두 부류의 부모 밑에서 자랍니다. 하나는 자녀의 '얼굴'을 닦아주는 부모이고, 다른 하나는 자녀의 '발'을 닦아주는 부모입니다.
먼저 얼굴을 닦아준다는 것은 자녀를 세상 사람들에게 "내 자식 이렇게 잘났어!"라고 보여주기 위해 다듬는 행위입니다.
얼굴은 세상에 드러나는 '자존심'과 '명예'를 상징합니다.
"너는 나의 자랑이야!"라고 말하며 자녀의 성적, 외모, 학벌이라는 얼굴을 반짝반짝하게 닦아
자신의 허영심을 채우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결국 불행해집니다.
모든 고통의 원인은 욕망인데, 결국 부모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영화 '오즈의 마법사'의 주인공 주디 갈랜드(Judy Garland)의 어머니 에델 검(Ethel Gumm)은
그녀는 딸을 최고의 스타로 만들기 위해 아홉 살 소녀였던 딸에게 '에너지 약'이라며 각성제를 먹였고, 밤에는 잠을 자게 하려고 수면제를 강제로 투여했습니다.
촬영장에서 지치지 않고 예쁜 '얼굴'을 유지하게 하려고 하루에 블랙커피와 묽은 수프만 먹이며
혹독한 다이어트를 시켰습니다.
딸의 건강이나 정서보다 영화사의 계약 조건과 수입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디 갈랜드는 평생을 약물 중독과 우울증에 시달리다 마흔일곱이라는 이른 나이에 화장실 바닥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습니다.(출처: 제럴드 클라크 『겟 해피: 주디 갈랜드의 생애』)
자녀의 얼굴을 씻는 부모는 심리학적으로 '자기애적 대리만족'에 빠진 것입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자녀를 통해 보충하려는 욕망입니다.
가지지 못한 배고픔으로 자녀까지 먹어 치우는 괴물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반면, 발을 씻어주는 부모는 자녀의 얼굴(자존심)이 아니라 발(욕망과 상처)을 봅니다.
발은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이며, 가장 낮고 더럽고 수치스러운 곳입니다.
그것을 씻어주고 닦아줄 때 세상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아이 가슴 속에는 자존감이 샘솟습니다.
"내 자부심이 되어라"가 아니라, "괜찮아, 네가 어떤 모습이든 너는 있는 그대로 소중하단다"
라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영화 '시네마 천국' (1988)의 알프레도(Alfredo)도 그런 인물입니다.
눈이 멀어 더는 일을 할 수 없게 된 영사기사 알프레도는 고아나 다름없던 어린 토토를 매몰차게 밀어냅니다.
그는 토토가 낡은 시골 마을에 남아 자신의 곁을 지키며 안주하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욕망을 가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토토를 위해 기꺼이 악역을 자처하며 마을을 떠나라고 매정하게 밀어냅니다.
"돌아보지 마라. 향수에 젖지 마라.
네가 하는 일을 사랑해라."
그는 토토가 가진 과거에 대한 집착과 고립이라는 '더러운 발'을 자신의 외로움으로 씻어준 것입니다. 알프레도가 죽은 뒤 토토에게 남긴 유산, 즉 검열로 잘려 나갔던 수많은 '키스 신'들을 이어 붙인 필름은 "너의 모든 불완전한 순간들이 실은 사랑이었다"라는 최고의 발 씻김이었습니다. 그 사랑 덕분에 토토는 죄책감 없이 세계적인 거장으로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출처: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 영화 '시네마 천국' 1988)
오늘 복음은 아주 중요한 비밀을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셨다는 것, 그리고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오셨다가 하느님께 돌아가신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요한 13,3)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수 있었던 이유는 그분이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음을 확신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께 다 받았다고 믿고 감사하는 부모는
자녀에게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내 잔이 넘치니 그저 흘려보낼 뿐입니다.
베드로의 발을 씻기신 주님의 행위는 그의 교만을 씻어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습니다. 하지만 유다와 달리 베드로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더러운 발을 만지시던 그 '겸손한 사랑'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통곡하며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위해 노예가 되셨던 그분의 '발 씻김'을 기억하며 그분이 나에게 '다 주셨음'을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감사한 것을 찾아내 다 주신 분이 계심을
믿을 때, 비로소 우리의 죄는 씻겨 나갑니다. 감사하는 자만이 깨끗해질 자격을 얻습니다.
여기, 감사의 힘으로 자신의 비극을 축복으로 바꾼 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베스트셀러 『천 개의 은총』의 저자 앤 보스캠프(Ann Voskamp)입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동생이 농장 사고로 트럭에 치여 죽는 광경을 눈앞에서 보았습니다.
그 충격으로 그녀의 삶은 분노와 공포, 결핍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녀는 자녀들에게도 늘 완벽을 강요하며 '얼굴 닦아주는' 엄격하고 신경질적인 어머니였습니다. 아이들이 우유를 쏟거나 진흙 묻은 발로 거실을 더럽히면, 그녀는 그것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 고함을 쳤습니다.
"빨리 안 닦아! 왜 이렇게 말썽이니!" 그녀에게 자녀는 자신의 완벽함을 증명해야 할 '얼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제안했습니다.
"감사한 일 천 가지를 매일 적어보게."
그녀는 처음엔 비웃었습니다. "내 인생에 감사할 게 뭐가 있다고!" 하지만 그녀는 억지로라도 적기
시작했습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아이들의 웃음소리', '부드러운 비누 향기'...
아주 사소한 것부터 하느님께 받은 것들을 찾아내기 시작하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깨달았습니다.
'아, 하느님은 이미 나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 계셨구나!' 감사일기를 통해 그녀가 '다 받은 사람'임을 확신하게 되자, 자녀들을 향한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실수로 바닥에 잼을 잔뜩 쏟았을 때, 예전 같으면 불같이 화를 냈을 그녀가 조용히 아들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들의 눈을 보며 웃어주었습니다.
"괜찮아. 우리에게 먹을 잼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니? 그리고 네가 건강하게 움직여서 이걸 쏟을 수 있다는 것도 축복이야."
그녀는 아이의 '얼굴'을 닦아 완벽하게 만들려던 강박을 버리고, 아이의 실수와 부끄러움이라는
'더러운 발'을 감사의 수건으로 씻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아이의 발치를 기쁘게 닦아낼 때, 아이는 비로소 엄마의 사랑 안에서 안식하며 정직하고 밝은 아이로 성장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할 때 부모는 비로소 기쁘게 노예가 되어 자녀의 발을 닦습니다.
(출처: 앤 보스캠프 『천 개의 은총』)
자녀를 키울 자격은 내가 얼마나 풍족한가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감사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께 다 받았음을 믿을 때만 타인의 허물을 덮어주는 여유가 생깁니다.
그러니 힘들더라도 감사할 것이 없다는 자신과 싸워 하루에 감사한 것 5개씩 쓰고 잠자리에 드는 기적의 5분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이 부유하다고 믿는 자는 남의 발을 씻기지
못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자신이 모든 것을 가졌음을 깨닫는 자는 기쁘게 노예가 되어 타인의 발을 닦는다.
부모가 무릎을 꿇을 때, 자녀는 그 무릎 사이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출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요한 복음 강론』)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