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 28일 늦은 저녁, 부산구덕산자락 바로 아래의 서대신동은 여느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무언가 분주하고 혼잡하며 흥분되는 분위기. 많은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들뜨고 설레는 느낌이 배어나왔다. 결코 낯설지 않았던 이날의 분위기는 바로 부산 아이파크와 알 이티하드의 AFC 챔피언스 리그 4강전 경기가 펼쳐진 구덕운동장으로 응집되고 있었다. 2002년 11월 13일 포항과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아시아드 경기장으로 둥지를 옮겼던 부산이 약 2년 10개월 만에 구덕운동장을 다시 찾은 이날, 부산축구의 ‘성지’ 구덕운동장은 자신이 뽐내야 할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부산의 근·현대 체육사를 장식한 부산 스포츠의 산실, 83년부터 2002년 까지 부산의 프로축구 팀과 함께 K리그 20년 역사를 함께 해 온 부산 축구의 성지. 바로 그 구덕운동장이 다시 살아 숨 쉬던 모습에 적지 않은 떨림을 느꼈던 사람은 비단 필자 뿐 이었을까?
그렇게 번화하지도, 또 그렇게 초라하지도 않은 부산 서대신동의 도심 한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구덕운동장. 11월 초 평일 한 낮의 구덕운동장은 한산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종합 운동장 내의 조그마한 주차장을 청소하시는 몇 분의 모습과 필요에 의해 그 주위를 지나가는 몇몇 행인들의 발걸음, 경기장내부의 트랙을 돌며 운동을 하시던 지긋한 할아버지 한 분의 모습이 눈에 띌 뿐이었다.
다소 촌스럽다고 느껴질 수 있는 경기장 외형과 조금은 허름해 보이는 부대시설들, 그리고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조그마한 야구장과 실내 체육관 건물에서는 구덕운동장이 겪어온 세월의 흔적들이 적지 않게 배어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은 80년에 가까운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 구덕운동장이 위치하고 있는 곳에 처음으로 경기장이 들어선 때는 저 멀리 1920년대의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0년, 지금의 구덕운동장 부지에는 조그마한 동물원을 곁에 둔 공터가 위치하고 있었다. 마을 운동회라든지 모임의 장소로 활용되던 이 자리에 처음으로 경기장이 건립된 시기는 1928년 9월, 부산 공설운동장이란 이름으로 부산 최초의 규격화된 체육시설이 들어선 것이었다. 이로서 1800년대 말 급격한 개화와 함께 도입된 근대스포츠들이 부산에서도 본격적으로 행해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사진출처: 구덕운동장 관리 사업소>
근대 스포츠를 위한 부산 최초의 규격화 된 경기장이었지만 그 외형이나 규모는 지금 젊은 세대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에 비해서는 상당히 초라했다.
“그저 평평한 맨 땅 바닥을 다져 그 위에 선을 긋고 그라운드를 만들고 허름한 스탠드 몇 개를 마련해 놓은 것이 전부였죠. 지금의 경기장들만을 본 사람들로서는 상상하기 조금 어렵습니다.” 구덕운동장 관리 사무실에 근무하는 한 공무원의 말이다.
하지만 그 모습이야 어떻든 이렇게 만들어진 공설운동장은 부산 스포츠의 산실로서, 부산 축구의 성지로서 자리 잡으며 부산스포츠 역사의 중심에 위치해 왔다.
1928년, 일제치하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지어진 만큼 부산공설운동장은 단지 근대 체육의 중흥을 위해서 뿐 아니라 식민 제국주의의 권고와 유지를 위해서 활용된 것도 사실이다. 군사관련 행사나 식민정책의 대규모 집회 장소는 다수가 부산 공설운동장이었다. 하지만 일제말기 국내최대규모의 항일 학생운동이 벌어진 거점 역시 부산 공설운동장이었다.
현재 구덕운동장의 입구에는 ‘부산 항일학생의거의 터’ 라는 이름으로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다. 이 비석에 새겨진 부산 항일학생의거란 바로 ‘노다이 사건’이라고도 불리 우는 항일 학생운동으로서 1940년 11월 23일 일본 장교 ‘노다이’의 지휘 아래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학생군사훈련 체육대회 과정에서 발생한 반일 운동의 하나이다.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 란 이름으로 개최된 이 날 행사에서 노다이를 비롯한 일본 심판들이 일본인 학교의 우승을 위해 민족차별과 편파판정을 일삼았고, 이에 동래중학과 부산2상 등의 한국 학생들이 판정과 차별에 대한 분노를 폭발 시키며 항일의거 시위를 벌이게 되었다. 이 학생들의 주도한 시위는 당일 저녁 1000여명이 참가하는 시가행진으로 이어졌고 노다이 관사습격과 같은 무력행동으로 까지 확대되었다. 비록 이미 노다이는 도망을 가고 없는 상태였고 일본 경찰들의 진압으로 많은 학생들이 옥고를 치러야 했지만 부산 공설운동장에서부터 비롯된 이 날의 의거운동은 일제말기 부산지역의 항일의식 고취에 큰 역할을 했다.
<사진출처: 구덕운동장 관리 사업소>
근대스포츠 정착의 토양으로서, 항일운동의 거점으로서 일제치하의 시대를 거쳐 온 부산 공설운동장은 6.25의 비극을 지나 1954년 7월 부산시의 관할 아래 부산공설운동장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2002년 월드컵 이후, 부산지역의 주요 스포츠행사는 사직동의 아시아드 경기장을 중심으로 개최되고 있지만 그 이전까지 그 역할을 담당했던 곳은 바로 부산 공설운동장이었다. 1953년 전국 체전이 개최되었고 1973년 전국 체전을 준비하면서 신식 시설로 개축이 되어 현재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현재 구덕운동장이라는 명칭은 1982년 6월 사직운동장이 완공됨과 동시에 종래의 부산공설운동장에서 구덕운동장으로 개칭되면서 불려지기 시작했다.
73년의 개축과 함께 구덕운동장은 부산 체육의 메카로서 더욱 빛을 발했다. 76년 전국체전, 86서울 아시안 게임 축구 예선, 88서울 올림픽 축구 예선, 97년 동아시아 경기대회, 2000년 전국체전과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까지. 구덕운동장은 부산체육을 언급하는데 있어서 결코 빼 놓을 수 없는 역사로 자리를 잡아나갔다.
부산스포츠의 산실로서도 큰 역사적 가치를 지니지만 구덕운동장은 부산축구의 성지로서도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해방을 맞이한 당시, 공설운동장을 제외하고는 딱히 공식적인 축구경기를 치를만한 장소가 없었던 필연적인 상황이 존재하지만 구덕에서 펼쳐진 축구경기들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는 이벤트로서 자리를 잡아나갔다.
물론 지금과 같은 프로리그 경기나 A매치 경기는 70년대에 접어들기 전 까지 부산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대신 공설운동장을 달구어 주었던 것은 부산지역 내 각급학교들 간의 불꽃 튀는 대항전 이었다. 특히 경남상고와 부산상고가 벌이는 자존심 대결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았고 경기 후에는 양 측 응원단들 간의 몸싸움까지 종종 벌어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1973년 운동장 시설의 개축과 함께 현대적인 시설이 들어서자 부산 공설운동장에서도 국가대표팀의 모습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종종 마련되었다. 1972년 1월 성인대표팀과 청소년 대표팀의 경기가 열린 것을 최초로 70년대에만 총 18차례의 국가대표팀 경기가 펼쳐졌다. 당시 큰 붐을 이뤘던 해외 명문 클럽들의 방한 경기들에는 어김없이 부산일정이 포함되어 있었고 보루시아, 상파울루, 맨체스터 시티, 볼로냐, 함부르크SV 와 같은 팀들이 부산 공설운동장을 무대로 한국 대표팀과 자웅을 겨뤘다. 1977년 에는 홍콩과의 월드컵 최종예선이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되며 구덕운동장 최초의 A매치로 새겨졌다 .
그렇게 부산축구의 구심점으로서 역할을 점점 키워오던 구덕운동장은 1983년 개막된 프로축구의 중요한 거점으로서, 그리고 프로축구 흥행의 보증수표로서 다시 한 번 거듭나게 된다.
첫댓글 예전 구덕운동장 지을때 사진에 우리학교가 보인다는 -_-ㅋ
트랙만 없앤다면 참 좋다... 광양이랑 비슷하네...
아오 진짜 이땐 부산경기 진짜 자주 보러갓엇는데.. 가까워서..에공 ㅠ 그리워라
구덕으로 옮겼으면 좋겠어요.....사직구장은 너무 찾아가기가 불편합니다. 시내버스로 57번, 103번....103번은 내년되면 노선이단축되기때문에 교통편은 더더욱 악화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