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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지도자 여호수아의 준비
민 27:12-23
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13 본 후에는 네 형 아론이 돌아간 것 같이 너도 1)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14 이는 신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할 때에 너희가 내 명령을 거역하고 그 물 가에서 내 거룩함을 그들의 목전에 나타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 물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이니라
15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와 이르되
16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하건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17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19 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들의 목전에서 그에게 위탁하여
20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
21 그는 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설 것이요 엘르아살은 그를 위하여 우림의 판결로써 여호와 앞에 물을 것이며 그와 온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은 엘르아살의 말을 따라 나가며 들어올 것이니라
22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여 여호수아를 데려다가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23 그에게 안수하여 위탁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더라
민 27:12-23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삼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모세야, 아바림산으로 올라가거라. 거기서 내가 너희 이스라엘에게 주리라고 약속한 그 땅을 바라보아라. 13) 네가 그 땅을 다 바라본 뒤에는 네 형 아론과 같이 너도 이제 이 세상을 떠나리라. 14) 신 광야에서 너희 무리가 내 명령을 우습게 여기고 따르지 않았을 때 네 형도 너도 내 말을 듣지 않고 내 힘과 거룩함을 그들에게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샘에서 있었던 일이다.' 15) 그러자 모세가 여호와께 여쭈었다. 16)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으시는 여호와 하나님, 이 무리를 이끌고 갈 사람을 세워 주소서. 17) 이 백성을 인도해 갈 수 있도록 지도자 한 사람을 세워 주셔서 공동체에게 문제가 생길 때마다 문제를 잘 풀어 나가며 식구들을 잘 이끌고 나가 목자 없는 양 떼처럼 이리저리 헤매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18) 그러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있지 않느냐? 그에게는 나 여호와의 숨결이 늘 머물러 있다. 그를 데려다가 머리에 네 손을 얹고 19) 엘르아살 제사장과 온 공동체 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네 후계자로 삼아라. 20) 네가 지니고 있는 위엄과 권위를 그에게 물려주어 온 공동체 식구들이 그의 말을 잘 따르도록 하여라. 21) 그가 나 여호와의 뜻을 알고자 할 때에는 엘르아살 제사장에게 나아가야 한다. 그러면 엘르아살 제사장은 우림과 둠밈으로 나 여호와의 뜻을 알아낼 것이다. 온 이스라엘 공동체 식구들은 여호수아의 말을 좇아 살아야 할 것이다.' 22) 모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여호수아를 데려다가 엘르아살 제사장과 온 공동체 식구들 앞에 세워 놓고 33) 그에게 안수하여 후계자로 삼았다. 여호와의 말씀대로 한 것이다.
자신의 사명을 다한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여호수아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웁니다.
너도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12-14)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보게 하시고 죽음을 예고하시어 준비하게 하십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원인을 정확하게 알게 하시므로 참회하게 하십니다(14). 이처럼 하나님은 모세 같이 큰 쓰임을 받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도 죄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십니다. 모세는 신광야 가데스에서 물이 없어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한 자들의 잘못을 처리합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어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냈어야 했지만 백성에 대한 혈기와 분노로 반석을 내려침으로 거룩함을 훼손합니다(민 20장). 하나님은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 절대적인 순종과 신뢰를 요구하십니다.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15-17) 모세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남은 여정을 무사하게 잘 마칠 수 있도록 인도할 지도자를 세워주시기를 여호와께 간구합니다. 자신의 기도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를 합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18-19) 여호수아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택하십니다. 그 기준은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령으로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분별하고 그 뜻에 순복할 줄 아는 믿음과 능력이 지도자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호와는 모세에게 백성 앞에서 여호수아를 위탁하고 자신의 존귀를 그에게 주어 백성이 모세를 섬기듯 여호수아에게 복종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설 것이요(20-21) 여호와께서 여호수아를 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세우라 명령하십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와 달리 그의 권위를 대제사장 아래 두어서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는 대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께 묻기를 명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더라(22-23) 모세는 끝까지 하나님의 부름심을 받은 자로서의 명령을 준행합니다.
적용: 당신 안에 성령과 더불어 살고 있습니까? 성령의 뜻을 올바르게 분별하며 순복하는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예배를 소홀히 하는 것은 하나님을 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예배는 단순한 요식이나 형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 섬기는 일을 싫어하거나 피하려 한다면 영적 죽음에 빠진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건강하려면 섬기는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교제이며 섬김입니다. 예배에 우선순위를 두고 최선을 다해 정성으로 예배합시다. 예배 시간을 잘 지킵시다. 그렇게 드리는 예배가 향기로운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 설 교 >
여호수아는 그는 ...
민 27:20 / 김우영 목사
오늘은 성령강림절인 동시에 웨슬리(J.Wesley)회심 264주년 주일입니다. 오늘의 교회에 문제가 생기고, 정체성을 잃어 버릴 때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함의 까닭은 하나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모여, 성령께서 원하시는대로 산, 성령 충만한 교회로서의 참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웨슬리목사는 목사 아들에 명문 옥스퍼드 출신이었지만 선교에는 번번히 실패했습니다. 허나 성령을 받은 후엔 성공의 계속이었고, 18세기 산업혁명으로 어두웠던 영국 사회에 횃불을 든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신, 곧 성령에 감동된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로 세움받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18절),” ‘신에 감동된 자’라는 히브리어 ‘이쉬 아쉐르 루아흐 보’는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행19:2)” 이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물은 말로서 “너희가 성령을 받지 아니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안되지 않느냐, 신앙생활을 바로 하려면 성령을 받아야 한다”라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을 받아야 그리스도인답게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그는 성령받은 사람이었고, 성령께 서 내재하고 계신 그는 보통인들과는 달랐습니다.
다름Ⅰ : 보는 눈
성령받은 여호수아는 보는 눈이 달랐습니다. 모세는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 12지파에서 한 명씩 열 명을 선발,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했습니다(13장). 헌데 그들의 정탐보고는 달랐습니다. 열 명은 아주 부정적이었고(민13장), 두 명, 여호수아와 갈렙은 매우 긍정적이었습니다(민14장). 이들 시각이 다름의 까닭은 열 명은 불신앙의 눈으로 보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신앙의 눈으로 봄입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 됨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누구입니까? 보는 눈이 다른 사람입니다. 인생관, 가치관, 생사관, 내세관이 세상의 사람들과 다른 자입니다. 신앙이란 육의 눈을 영의 눈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은 불가능 속에서 가능을 보고, 불확실에서 확실을 봅니다. 성령받은 사람은 신앙의 눈을 가졌기에 어떠한 장애물이 앞에 놓여 있을지라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나아가 생을 승리로 이끕니다. 다윗이 육의 눈으로 골리앗을 보았다면 명백히 패배했을 것입니다. 허나 그는 육의 눈을 가진 인간이었지만 영의 눈으로 골리앗을 보았기에 대적 골리앗을 능히 이긴 것입니다. 신앙인은 이기는 사람들이며, 신앙인의 생활은 이기는 삶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자는 세상에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의 눈을 가지고 있지만 영의 눈으로 보는 사람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십니다. 성령, 바로 나의 믿음을 시작케 하시고, 나의 믿음을 완성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대저 하나님께서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우리 모두는 정탐꾼의 생을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나의 눈이 열 명에 속해 있느냐 두 명에 속해 있느 냐입니다. 믿음의 눈은 성령의 사람이 가진 눈이요, 하나님의 약속을 보는 눈이며,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하는 눈입니다. 신앙의 축복이란 세상인이 말하는 운 좋은 횡재가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보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내가 할 일을 함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이 내게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의 눈이 없어 광야에서 범죄한 출애굽 1세대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죽었으나 믿음의 눈을 가진 여호수아와 갈렙은 들어갔습니다. 믿음의 눈은 긍정적인 눈입니다. 긍정적인 믿음의 눈은 생명을 얻고, 미래를 행복으로 소유합니다. 열 명이 정탐꾼으로 똑같이 선택 되었건만 보는 눈에 의해서 죽음과 생으로 갈라지고, 복과 저주로 나누어졌으며, 구원과 멸망으로 갈라졌습니다. 경영상태가 악화된 어느 회사의 사장이 경영진단사에게 기업진단을 의뢰했습니다. 그는 회사 구석 구석을 살펴본 후 전 직원을 집합시켜놓고, 큰 백지에 작은 흑점을 하나 찍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작은 흑점입니다.” “왜 여러분은 넓디 넓은 백지는 보지 않고 백지의 수천분의 1밖에 안되는 부정적인 흑점만을 봅니까? 여러분의 정신을 열등감, 부정적인 사고에서 탈출시켜 긍정적인 사고, 자신감으로 바꾸십시오.” 육체적 눈이 나빠도 사물의 식별이 불분명합니다. 영적 눈에 결함이 있으면 영적 분별력에 혼돈이 생겨 자신의 생이 벼랑으로 감을 보지 못합니다.
다름Ⅱ : 행동
성령받은 여호수아는 행동이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에 입주하기 위해 요단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단 강을 도하하라시는 시기가 모백을 거두는 시기였습니다. 이때는 요단 강이 범람하여 평상시 보다 더 깊고 더 넓어지며, 급격한 강의 경사 때문에 특별한 장비 없이는 강을 건너기가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제사장들에게 언약궤를 메고 요단 강을 건너게 했고, 그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물이 온전히 끊어졌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넜습니다(수3장).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함락함에 있어 하나님께서는 군사적 전술, 전략을 제시하지 않으시고, 정말 비정상적이고, 비과학적이며, 불합리한 방법을 명하시고, 그대로 순종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여리고 성을 6일 동안 돌라, 7일째는 일곱바퀴 돌고 백성들은 외치라’, 이스라엘 쪽이나 여리고 성쪽의 생각에 얼마나 어리석고, 무모하며, 해괴 망측하고, 우스꽝스러운 방법입니까?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을 어떻게 그러한 방법으로 무너뜨릴 수가 있습니까? 하지만 추호의 의심없이 아무런 불평없이 말씀대로 순종하니 여리고 성이 여지 없이 무너졌습니다(수6장). 여호수아가 믿음으로 행동함은 그의 안에 계신 성령께서 그로 하여금 보통인과는 구별된 행동을 하게 하심입니다. 난관에 봉착했을때, 불가능에 직면했을때, 바로 나의 인내, 순종, 믿음이 검증되는 시간들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제, 무엇을 명령하실지 모릅니다. 우리는 미련할 만큼, 말씀대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섭리를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내려서는 아니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함만이 내 개인의 성공이 되고, 공동체의 승리가 됩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에게는 기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실과 기적은 가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선 하나님의 말씀에 ‘yes’의 사람에겐 ‘yes’로, ‘no’의 사람에겐 ‘no’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취사선택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yes’의 순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어느 영국 귀족이 프랑스 왕을 알현했습니다. 프랑스 왕은 영국 귀족을 다음날 있을 만찬에 초대했습니다. 이튿날, 만찬에 참석한 그를 보고 왕이 말했습니다. “공이 어떻게 오셨소?” “아니, 폐하! 폐하께서 어제 오라고 하시지 않으셨나이까?” “짐이 공을 청했을때 공은 아무런 승낙이 없었지 않았소?” “폐하! 국왕의 초대에는 승낙이나 허락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복종만이 있을 뿐이옵니다.”
결과Ⅲ : 지도자로 세움 받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로 세움받음은 하루 아침에, 우연히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겐 우연이란 없습니다. 모세를 추종하고 섬겼고, 하나님의 신이 그의 안에서 그를 통치했습니다. 그는 자 기 소리를 내지 아니한 사람이 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귀울이고 말씀대로 행동했습니다. 자 기 소리를 내면 자기로 끝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소리만 듣고, 행함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따릅니 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자는 신분, 출신, 지식이 아닌, 절대 순종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이너스(-) 요인을 플러스(+) 요인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성령의 사람은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만드는 힘을 소유한 자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일곱 집사를 세움에 세상적 인 관점은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성령 충만함이었습니다(행6장).
하나님의 신이 내 안에 거하는 자가 되면, 어려울 것도, 못할 것도, 아니될 것도 없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신이시요, 능력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까닭에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이 귀히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 에녹, 바울, 엘리야, 웨슬리... 모두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 안에는 성령께서 거하셨습니다. 성령이 자기 안에 계시는 자는 모든 것을 확보한 사람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딤후1:14).” 그리스도인들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성령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이 내게서 나타남입니다. 순종 하는 사람은 성령받은 자요, 자기를 잘 되게 하고, 복되게 만드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삶의 한날, 한날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행동하며, 긍정적인 생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되는 것이 없다’의 사람이 아니라 ‘되는 것만 있다’의 사람으로 되어야만 합니다. 성령께서 내재하고 계신 사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삶의 어떠한 요단 강도 끊어지고, 어떠한 여리고 성도 무너지며, 사람이 무릎 꿇는 인물이 됩니다.
리더의 조건
민 27:18-20 / 이익한 목사(욥바교회)
‘뷰카(VUCA)’라는 말이 있다. 영어 단어의 앞글자를 조합해서 만든 신조어다. V는 Volatile, ‘불안정한’, U는 Uncertain, ‘불확실한’, C는 Complex, ‘복잡한’, A는 Ambiguous, ‘모호한’이란 단어에서 온 것이다. 뷰카(VUCA)는 4차 산업과 함께 펼쳐질 미래 환경을 가르키는 말로 씌이기 시작했다. 4차 산업과 함께 사회 각 분야에서 변화속도가 빨라지면서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고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시대를 함축하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더더욱 미래를 예측하기 힘든 시대를 맞이했다. 이러한 뷰카(VUCA) 시대에는 리더십의 중요성이 더욱 커진다. 불안정하고 불확실성이 커진 사회에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명확히 제시할 리더의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늘 토라포션에 나오는 상황도 상당히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다. 염병 팬데믹으로 이스라엘 백성 2만 4천명이 죽었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가나안 족속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었다. 그들을 이끌던 모세는 늙었고, 결정적으로 그는 가나안에 들어가는게 허락되지 않았다. 누가 이처럼 불안과 혼돈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이끌 것인가? 정말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모세는 기도한다. 민 27:16-17,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하건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그는 자신의 뒤를 이을 리더를 구한다. 그리고 그 결과 여호수아가 리더로 세워진다. 여호수아는 어떻게 해서 250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리더로 세워질 수 있었을까? 오늘은 그가 리더가 될 수 있었던 조건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혼돈의 시대에 우리는 어떤 리더로 준비되야 할지 지혜를 얻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여호수아에게는 그를 수식하는 말이 있었다. ‘모세의 부하(출 24:13), 모세의 수종자(수 1:1)’라는 말이다. 그것이 그의 스펙의 전부였다. 수종자는 히브리어로 ‘샤라트(שרת)’이다. 하인으로서 시중을 드는 사람을 말한다. 여호수아는 30대 후반에 모세의 수종자가 되어 40년간을 그를 따르는 팔로워로 살아간다. 여기서 리더의 조건, 첫번째는 리더 이전에 팔로워가 되야 한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경전인 ‘민수기 라바’에는 여호수아가 모세를 도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겼는지 나온다. 민수기 라바21:14, “여호수아는 당신을 많이 섬겼으며 당신에게 큰 경의를 보여주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당신의 회막에서 밤늦게까지 남아있던 사람은 바로 그였습니다. 그는 거기서 벤치를 정리하고 매트를 펴곤 했습니다. 그가 온 힘을 다해 당신을 섬겼음을 보면, 그는 이스라엘을 섬길 자격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상을 잃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선택하십시오. 이것은 잠언서 27:8절 말씀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고 자기 주인에게 시중드는 자는 영화를 얻느니라’”
아리스토텔레스는 “남을 따르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결코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좋은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리더를 따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적으로 모범이 되는 리더를 따르는 것은 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단점이 보이는 리더를 따르는 건 쉽지가 않다. 원죄 가운데 태어난 인간은 남들의 좋은 점을 먼저 보기보다는 부족한 점을 크게 보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리더의 단점을 보고 따르기를 멈추거나, 리더에 대항하여 투쟁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모세에게도 인간적인 약점이 있었다. 그는 말을 잘하지 못했다. 구스 여자를 아내로 취해 미리암과 아론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그의 리더십이 맘에 안들어서 고라와 250명의 지파 지도자들은 그를 반대하여 일어났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에도 여호수아는 묵묵히 모세의 수종을 들었다. 다윗도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울왕을 끝까지 섬겼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가 하나님께서 자기 위에 두신 권위자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리더라고 다 완벽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따라야 할 영역이 있다. 그래서 팔로워는 리더가 유능하기 때문에 그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족한 점이 보이더라도 그가 하나님이 내 위에 두신 권위자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다. 직장 상사나 여러분 위에 있는 사람을 대할 때 그들의 단점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 위에 있는 권위자로서 내가 따라야 할 영역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그 리더가 옳고 그른가가 아니라, 내가 그 리더를 잘 따라가는 자인가를 보시는 것이다. 즉, 그 밑에서 필요한 훈련을 내가 잘 감당하고 있는가를 보시는 것이다. 그것을 잘 감당할 때 나도 누군가를 이끄는 리더로 준비되는 것이다.
엘리사도 그가 북이스라엘의 대표 선지자로 활약하기 전까지 엘리야의 팔로워였다. 그는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부어주는 자로 소개되는데(왕하 3:11), 약 6년 정도 엘리야의 수종자로 그를 섬긴다. 그는 엘리야 이후 엘리야의 갑절의 영감을 받은 선지자로 활약하게 된다. 에베소 지역에서 목회를 감당했던 디모데도 바울의 팔로워였다. 바울은 디모데를 이렇게 평가했다. 빌 2: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자식이 부모를 섬기듯 디모데가 바울을 섬겼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진정한 후계자는 리더 이전에 팔로워였다는 사실이다. 육신적으로 자신의 리더를 잘 섬겼던 사람을 하나님이 때가 되었을 때 리더로 세우신 것이다. 그들이 팔로워로서 겸손히 배우는 시간들이 없었다면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리더로 세우실 수 없었을 것이다.
자 그런데 여호수아가 차기 리더십으로 세워진 가장 결정적인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영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모세가 자신의 뒤를 이을 한 사람을 세워달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민 27: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자, 여기서 리더의 조건, 두번째는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자가 되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의 아들이 모세의 자리를 세습하게 하지 않으셨다.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였던 여호수아를 이스라엘을 이끌 차기지도자로 세우셨다.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머물러있는가’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는 가장 중요한 리더의 조건이었다. 이것이 세상의 리더십과 하나님 나라 리더십의 차이다. 세상 리더십에서는 인간적인 능력과 조직을 장악하는 카리스마가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내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기꺼이 따르는 리더십이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영적리더십이다.
여호수아는 어떻게 영이 머무는 자가 되었을까? 그 비결은 회막에 있다. 출 33:11,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그는 회막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던 사람이었다. 그의 영성은 하루 아침에 탄생한 것이 아니다. 회막에서 40년 동안 빚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반드시 영의 사람을 통해 이뤄진다. 그는 인간적인 지혜와 능력으로 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인도하심을 기꺼이 따르는 자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적인 재주나 능력이 많은 자보다도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자를 지도자로 택하신다. 가나안 정탐을 할 때도 그는 인간적인 판단이나 합리적인 정세 분석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그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믿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머물고 있다는 증거였다. 하나님의 영이 머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게 된다. 하나님의 영이 머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은 리더의 조건, 세번째는 다음 세대를 준비시키는 자가 되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세의 리더십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민 27:22-23,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여 여호수아를 데려다가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에게 안수하여 위탁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더라” 모세는 하나님의 사명을 이어갈 한 사람을 구했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여호수아를 다음 리더십으로 세운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리더십을 이어받을 때 그는 매우 두려웠을 것이다. 그에겐 홍해를 가르던 모세의 지팡이도 없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내려와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던 그 모세의 카리스마도 없었다. 여호수아는 이제 조금이라도 맘에 안들면 얼마든지 원망하며 달려들 수 있는 250만 백성들의 리더로 세워지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모세는 여호수아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에게 안수함으로 아낌없이 그를 지원한다. 모세의 관심은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리더인가에 있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이 중단없이 다음 세대에도 이어지는데 있었다. 여기서 리더십은 내가 당대에 사용하는 권력이나 지위만이 아님을 볼 수 있다. 진정한 리더십은 내가 리더의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영향력인 것이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도 하나님의 뜻을 이어갈 사람들이 세워지도록 아낌없이 사람들을 세우고 지원하는 리더가 되야 하는 것이다.
오늘 설교의 적용점을 살펴보자. 첫번째 적용점은 ‘나는 능동적인 팔로워인가’라는 질문이다. 평사원에서 대기업의 임원이 되기까지 대략 20년이 걸린다. 20대 청춘에 입사해서 적어도 오십견이 올 때까지 우리는 누군가의 부하로 살아가는 것이다. 대한민국 직장인들에게 상사리더십에 대해 얼마나 만족하고 있는지 조사했다고 한다. 100점 만점에 44점이 나왔다고 한다. 학점으로 따지면 F학점이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상사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마지못해 따라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리더는 나의 선호도에 따라 섬김의 여부를 결정하는 대상이 아니다. 내 위에 권위자로 세워진 자이기에 전적으로 따라야 하는 대상인 것이다. 리더라는 말은 독일어 고어로 ‘참다, 고통받다, 견디다’라는 뜻이다. 반면 팔로워는 ‘돕다, 후원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팔로워란 리더의 고통을 돕고 후원하는 사람인 것이다. 리더는 한마디로 고통받는 사람이다. 더 큰 책임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팔로워들의 사명은 그 리더의 고통을 돕고 후원하는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이다. 그랬을 때 리더를 살리는 팔로워가 되는 것이다. 비판하거나 수동적으로 자기 업무만 하는 팔로워가 아니라 이왕 따르는 자라면 리더를 살리는 팔로워가 되야 한다. 팔로워로서 리더를 돕는 역할을 충분히 감당한다면 나중에 더 큰 책임을 지는 리더의 자리에도 능히 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두번째 적용점은 ‘나는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자인가?’라는 질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여호수아처럼 영이 머무는 자로 살 수 있을까? 잠언 1:23절을 보자. “내 책망을 듣고 너희가 회개하면, 내가 내 영을 너희에게 부어주고, 내 말들을 너희에게 깨닫게 해 줄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그냥 부어지지 않는다.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킬 때 부어지는 것이다. 죄란 하나님을 주인으로 따르지 않는 것이다. 죄에서 돌이켜야 하나님의 영이 부어지고, 하나님의 영이 부어져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말씀이 나의 삶에 기준점이 되는 것이다. 그래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 적용점은 ‘나는 지금 다음 세대를 준비시키는 리더인가?’라는 질문이다. 시대가 불안하다 보니 모두들 자신의 생존에 급급해 살아간다. 젊은 세대들도 자신의 생존에만 관심이 있지 좀처럼 그 이상을 생각하지 못한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도 생존이 아니라 공생(共生)을 이끄는 리더가 나오도록 기도하며 그들을 세우는데 아낌없이 우리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지금 세상은 급변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쓰시는 리더의 조건은 과거나 지금이나 그리 변하지 않았다. 지금 불안하고 혼돈스러운 세상은 자신들을 이끌어 줄 리더를 찾고 있다. 우리는 그러한 리더가 되기 위해 먼저 겸손히 내 위의 권위자들을 따라가는 팔로워가 되야 한다. 하나님의 영이 머물도록 기도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따라 리더들의 고통을 나누어 지는 자가 되야 한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팔로워로 살아갈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보게 될 것이다. 바라기는 우리의 섬김을 통해 이 불안하고 혼돈스러운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통치가 이루어지게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종말을 잘 준비하는 길
민수기 27:12-21 / 이한규 목사
< 종말의 때를 준비하라 >
나는 미국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외로움에 젖어 하나님과 교제가 깊어지면서 글을 쓰게 되었다. 그 원고가 1992년에 당시에 꽤 알려진 출판사에 의해 채택되어 처음 나온 책이 <하나님은 나의 전부>라는 책이다. 그러자 글 쓰는 일이 더 즐거워져서 그해 교회를 개척할 때부터 매일 새벽 설교까지 완전 원고로 설교를 준비했다. 그 원고들이 많아지면서 점점 오랜 영향력을 남기는 저작 비전이 생겼다.
그 비전을 위해 기도했다. “하나님! 저의 글이 천년 후에도 영향력이 있게 하소서.” 처음에 5권 책을 낼 때까지는 베스트셀러 욕심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처럼 하나님은 꿈의 씨앗을 꾸준히 뿌릴 때 늘 자신이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신다. 결국 그 작은 원고들이 차곡차곡 쌓여 마침내 2014년에 <월새기(월간새벽기도)>가 발행되었고 현재까지 약 85% 완성한 <성경전권강해>도 100%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언젠가 <월새기 영어판>도 발행되고 <성경전권강해>도 출판될 것이다.
초대 교회 때 한 유력자가 복음 전파의 비전을 품고 누가의 저작 활동을 후원했고 그렇게 해서 생겨난 저작물을 양피지에 필사해 곳곳에 널리 전달하는 비용도 댔다. 그때 생긴 저작물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었고 그 후원자는 데오빌로였다. 언젠가 하나님이 <월새기>와 <성경전권강해>가 지구촌의 많은 사람의 품에 안기도록 내게도 데오빌로를 붙여주실 것을 믿고 지금도 매일 작은 원고를 하나씩 완성해 나가고 있다.
현재의 작은 씨앗과 작은 승리를 중시하며 계속 땀을 흘리라. 때가 되면 하나님이 큰 승리로 이끄신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승리는 일시적인 승리로 끝나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빛난다. 결국 현재의 승리는 최종 승리가 아니다. 진짜 위대한 승리는 앞날에 남아 있음을 믿고 더 멋진 내일의 승리를 위해 기도하며 준비하라. 능력이 있어도 준비가 없는 사람보다 능력이 없어도 준비가 잘 된 사람이 더 쓰임 받는다. 항상 최악의 상황과 종말의 때를 미리 대비하라. 인간 역사에 선한 영향력을 남긴 위대한 인물은 모세처럼 종말의 때를 미리 잘 준비했던 사람이다.
< 종말을 잘 준비하는 길 >
본문 12절을 보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아바림 산은 모압 평지 근처의 아바림 산맥을 뜻한다. 왜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바림 산맥에 올라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고 했는가? 모세에게 죽음을 잘 준비시키기 위해서였다. 그처럼 종말의 때를 잘 준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인내와 평안을 추구하라
므리바에서 백성들이 물 문제로 모세를 원망하자 모세는 반석을 치면서 물을 내어 먹이게 했는데 하나님을 그 일을 거룩하지 못한 일로 여기셨다(14절). 아마 그때 모세는 속으로 분노와 짜증이 넘쳤을 것이다. 120세의 신실한 모세가 그런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 사람은 죽을 때까지 평생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때 모세는 짜증과 분노를 표출하기보다 백성들의 불순종 문제를 하나님께 다 맡기고 인내해야 했다. 살다 보면 짜증과 분노를 유발하는 무수한 사건을 만난다. 그때 인내와 평안을 잃지 말고 참고 기다려 주는 훈련을 하라.
사람마다 생각과 표현도 다르다. 그것을 이해하지 않고 기분 나쁘게 들린다고 바로 공격적으로 반응하지 말라. 타인 감수성을 키우라. 내가 생각하기에 이 색깔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남이 저 색깔이 좋다고 생각하면 그 생각을 인정해 주라. 그때 바로 반박하면서 “아냐, 이 색깔이 좋아.”라고 하지 말라.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를 할 때 아는 것보다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늘 여지를 두고 인내와 평안 가운데 기다려 주라.
조급하게 판단하면 쉽게 몸과 마음이 지친다. 인생은 장거리 경주다. 100미터 달리듯이 전속력으로 달리면 1분도 되지 않아 지치고 500미터도 가지 못해 주저앉는다. 그러나 천천히 걸으면 5천 미터 이상도 갈 수 있다. 인생을 단거리 경주하듯이 살면 더 탈진되고 비관적이 되고 삶이 힘들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여유와 여지를 두고 기다려야 평안과 희망도 넘치게 된다. 또한 그때 삶의 나날이 길어지는 은혜도 입고 종말의 순간이 와도 후회와 아쉬움이 덜하고 감사가 넘치게 될 것이다.
2. 후계자를 위해 기도하라
모세는 아바림 산맥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그곳에서의 삶을 이끌 후계자의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후계자가 삶의 모범이 되고 사랑이 넘치는 책임적인 사람이길 원하는 기도를 드렸다(16-17절). 리더나 부모가 좋은 길로 이끌면 팔로워나 자녀가 좋은 길로 갈 가능성은 그만큼 커진다. 가정에서도 사랑이 넘치는 아빠와 엄마를 잃지 않으면 대개 자녀도 사랑을 잃지 않는다. 극단적인 남성주의와 여성주의가 생기는 것은 사랑의 본을 보이지 못한 부모 책임도 크다. 영혼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이다.
어떤 여성주의자는 여성 인권 운동을 열심히 하면서도 남성을 여성을 억압하는 적으로 규정하거나 혐오하지 않고 오히려 남성도 사랑하고 존중하며 남성의 존재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다. 주변의 극단적인 여성주의자 선배들이 그녀에게 남자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려고 아무리 유도해도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녀가 천부적인 인권을 존중하는 아빠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자랐기에 비록 사회 정의를 위해 여권 향상 운동을 하면서도 남성 혐오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상이 증오를 심으려고 해도 사랑이 있으면 영혼을 든든히 지킬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다. 사랑으로 자녀와 후대를 키우라. 자녀에게 사랑과 믿음의 본을 보이고 좋은 후계자를 달라고 지금부터 기도하라. 좋은 자녀와 후계자를 통해 자신이 기초를 쌓았던 거룩한 꿈과 비전과 사역이 찬란하게 꽃 피면 얼마나 복된 일인가? 자녀와 후대를 좋은 믿음의 계승자로 키우고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삶을 힘써 가르쳐서 인간의 욕망으로 어둠이 짙어진 사회에 생명의 빛을 확산시키라.
3.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라
모세가 후계 문제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18절).” 영이 머무는 자란 성령 충만한 자를 뜻한다. 하나님은 성령 충만한 사람을 리더로 세우길 원하셨다. 복된 리더가 되길 원하면 성령 충만을 사모하라. 다만 성령 충만과 자기 충만을 구분하라. 성령으로 충만하면 마치 술에 취한 것 같은 모습이 나타난다. 그러나 술에 취하면 남을 배려하지 않고 타인 감수성이 떨어지지만 성령의 술에 취하면 남을 배려하고 타인 감수성이 넘치게 된다.
한 대학생이 방학 때 우연히 성령 충만 집회에 참석했다가 믿음이 뜨거워졌다. 새 학기가 되어도 그는 기숙사에서 밤에도 기타를 치며 뜨겁게 복음성가를 불렀다. 가끔 도서관 홀에서 친구들과 대화할 때는 남이 들으라고 큰 소리로 간증하며 복음을 전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조용히 믿는 친구가 생각했다. “자기 신앙을 부끄러움도 없이 저렇게 과감히 드러내는 그가 부럽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자기 신앙을 뜨겁게 드러내던 학생은 교회를 떠났지만 조용히 믿던 친구는 목사가 되었다.
성령 충만과 자기 충만을 잘 구분하면서 성령 충만을 추구하라. 자기가 충만하면 약하면서 강한 척 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하면 강하면서 약한 척 한다. 그래서 자기가 충만하면 본이 되는 행동이 없이 소리와 액션만 크고 말도 함부로 하지만 성령 충만하면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머리를 겸비하고 소리만 크기보다 행동하는 믿음이 있다. 성령 충만으로 굳은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점점 변하면 생명력도 넘치고 복의 기운도 넘치게 된다.
4. 하나님께 묻고 행동하라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리더로 세운 후 제사장 엘르아살이 우림의 판결로써 여호와께 물어서 전하는 말을 따라 여호수아가 행동하게 하라고 하셨다(21절). 모세는 율법의 제정자로서 대제사장 아론보다 권위가 높았지만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는 아론의 후계자인 엘르아살보다 권위가 낮아졌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대제사장 엘르아살을 통해 우림의 판결로써 하나님께 묻는 절차를 수행해야 했다. 우림의 판결이란 ‘우림과 둠밈의 판결’이란 뜻으로서 우림과 둠밈은 대제사장의 판결 흉패 안에 있는 제비뽑기 도구로 추정된다.
마침내 하나님의 명령대로 모세가 여호수아를 데려다가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에게 안수하여 위탁함으로 공식적인 리더로 세웠다. 그때부터 여호수아는 지혜가 필요하면 대제사장 엘르아살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사람의 지혜로운 도움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기도를 통해 묻고 행동하는 것이다. 살면서 너무 소심하게 살지는 말라. 다만 소소한 일에서도 기도하라. 하나님께 작은 일도 묻고 행동해서 소심한 사람이 되지 말고 세심한 사랑이 넘치게 되라.
남을 사랑할 때도 사려 깊게 사랑하라. 그런 사랑이 넘치길 원하면 소소한 일에서도 기도하는 습관을 키우라. 하나님을 소소한 일로도 귀찮게 하라. 그래도 하나님은 귀찮게 여기지 않으신다. 소소한 문제로도 수시로 기도하면 하나님과의 친밀감은 깊어지고 문제가 생겨도 감정을 잘 컨트롤할 수 있고 문제도 잘 풀리는 신기한 기적을 체험할 것이다. 내 안에 기도라는 최고의 우림의 판결 도구가 있음을 잊지 말고 힘써 활용하라. 그처럼 소소한 문제까지 기도해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길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이 되라.
지도자의 길
민 27:12-23 / 박봉수 목사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생활을 마칠 때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느덧 광야생활을 한 지 40년이 되었습니다. 저들이 요단 강 동편 모압 평지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아바림 산에 오르게 하셨고, 저 멀리 가나안 땅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세가 곧 죽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지난 날 므리바 물 사건 때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그 말씀을 듣고 보통 사람들이 하기 힘든 기도를 드립니다. 자기가 죽은 후 자기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갈 지도자를 세워달라고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모세에게 여호수아를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울 절차를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가 걸어야 할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영적 지도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청지기의 길
본문 12-13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본 후에는 네 형 아론이 돌아간 것같이 너도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제 지도자의 역할을 끝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세상에서의 삶도 그만 끝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말씀일까요? 지난 40년 오로지 가나안 땅만 바라보고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땅을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고 들어가지 못한다니 얼마나 안타까울까요?
그래서 신 3:24-25를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였사오니 천지간에 무슨 신이 능히 주의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그렇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끝내 거절하셨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지도자로서의 사역은 거기까지라고 못 박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된 것은 모세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출 3장에서 보듯이 나이 80의 노인이 된 모세, 40년 동안 모든 꿈과 야망을 접고 광야에서 양을 치며 살고 있던 모세는 갑작스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지도자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없기도 했고, 두렵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사양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요한 설득과 명령에 어쩔 수 없이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기는 원치 않았지만 지도자의 사역을 끝내야 했습니다. 더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도 했지만 하나님께서 단호하게 끝내라 하시기에 어쩔 수 없이 지도자의 길을 끝내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의 길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자기가 하기 싫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뿐 아니라 자기가 더 하고 싶다고 더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만 하고 싶다고 그만할 수 있는 것 역시 아닙니다.
이번 총선은 그야말로 이변이었습니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넉넉히 과반은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여당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분열로 19대 의석을 지켜내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던 야당은 기대 이상의 결과에 놀라고 있습니다. 정치 전문가라는 사람들, 여론조사 전문가라는 사람들, 언론 관계자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에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 있습니다.
이 결과는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요?
롬 13: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모든 지도자는 다 하나님께서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도자들의 권세도 다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겸손해야 합니다. 자기가 대단하기 때문에 권력을 얻게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택하셔서 권력을 일정 기간 위임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권력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내려놓아야 한다는 점도 명심해야 합니다. 그 권력을 더 오래 누리려고 저항을 한다면 크게 다치게 된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청지기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정 기간 하나님께서 주신 리더십을 위임 받아 섬기다가 때가 되면 뒤돌아보지 말고 내려놓아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의 길은 청지기의 길입니다. 맡겨주실 때
순종 하며 맡고, 거두실 때 역시 순종하며 깨끗하게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2. 섬김의 길
본문 15-17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와 이르되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하건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모세가 하나님께 지엄한 말씀을 듣고 드린 기도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을 듣고 드린 기도입니다. 이제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죽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드린 기도입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한 마디로 백성을 위한 기도입니다. 자기가 죽고 나면 백성들이 지도자 없이 헤맬까봐 자기를 대신할 지도자를 세워달라는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제 자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일 제가 이 상황이라면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 우선 제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를 드렸을 것 같습니다. 무사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주님 품에서 영원복락을 누리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렸을 것 같습니다. 두고 가는 제 아내와 가족들을 위해 기도를 드렸을 것 같습니다. 저 뿐 아니라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그랬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달랐습니다. 자신을 위한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두고 가는 가족들을 위한 기도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오직 지금까지 40년 간 섬겨왔던 백성들을 위해 기도를 드렸든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섬김에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지도자의 길은 섬김의 길입니다. 모세가 마지막 순간에도 마음을 다해 이스라엘 백성을 위했던 것처럼 지도자의 길은 섬김의 길입니다.
금번 중국선교 여행 차 하남성 개봉을 다녀왔습니다. 우리가 이 지역 농촌교회 사역자를 지원하고 있어서 어려운 교회사정을 돌아보고 그 사역자를 격려하기 위해서 일부러 이곳까지 찾아간 것입니다.
마침 개봉에 간 김에 ‘포공사’라는 곳을 들렸습니다. 이곳은 송나라 시절 유명한 판관 포청천의 사당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무려 1000년 전 사람을 사당을 만들어 기리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황제도 아니고 고관대작도 아닌 한 벼슬아치를 이토록 숭배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송나라는 부패가 만연하여 백성들이 살기 힘이 들었습니다. 특히 재판이 공정치 못해서 백성들에게 억울한 일이 많았습니다. 한 예로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고소하려면 반드시 아래 벼슬아치에게 고소문을 올려야 했습니다. 그러면 저가 보고 선별해서 판관에게 재판을 청하도록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벼슬아치들이 권세를 부렸습니다. 돈을 많이 주면 상소를 올리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묵살해 버렸습니다. 포청천이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들이 직접 북을 쳐서 고소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에 사회가 부패해서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만연했습니다. 그리고 판관들보다 높은 세도가들은 재판에 막강한 영향을 행사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억울함은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었습니다.
포청천이 새로운 제도를 마련하여 황제의 재가를 받았습니다. 사형을 실행하는 작두를 세 종류로 만들었습니다. 서민용으로 개작두, 권력자들과 가진자들 용으로 호작두, 그리고 황족들을 위한 용작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마다 재판 절차를 달리해서 부정부패가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했습니다. 예를 들어 황족들이 죄를 범했을 때 증거가 충분하고 증인들이 확실하면 일단 용작두로 처형을 먼저하고 재판기록을 추후에 남기도록 했습니다. 재판과정에서 황실의 입김이 작용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포청천이 추진했던 사법제도는 한 마디로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늘 그의 가슴에는 백성들을 위하려는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정말 백성들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그토록 존경과 사랑을 받았고, 오늘까지 저토록 추앙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는 늘 따르는 사람들, 자기가 섬기도록 위임을 받은 사람들 그들을 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저들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포청천이 한 때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부모님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간청과 나라의 부름을 받자 그는 다시 벼슬자리로 나왔다고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고사에 나오는 사자성어 한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선공후사’(先公後私)라는 말입니다. 공익을 앞세우고 사리를 뒤로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는 섬김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모세처럼 백성을 먼저 생각하고 온통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3. 끝까지 충성을 다하는 길
오늘 본문을 보면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한 가지 걱정이 생겼습니다. 지도자인 자기가 죽고 나면 이스라엘 백성을 누구 이끌고 갈 것인지에 대한 걱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기를 대신할 지도자를 세워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당시 모세는 모든 일을 끝내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갑작스럽게 명을 받았습니다. 게다가 더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청도 거절당한 상태에서 끝을 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끝내고 떠나면 그만입니다. 그 뒷일은 자기 소관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달랐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는 이 순간에도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했습니다. 특히 자기가 떠난 후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의 행군을 계속하도록 하기 위해 자기가 할 일을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후계자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모세는 지난 40년 동안 다음 지도자를 세우는 작업을 해 왔습니다. 출애굽 당시 모세는 젊은 여호수아를 차세대 지도자로 마음에 담아 두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르비딤 골짜기에서 아말렉과 전쟁할 때 이 백성을 이끌고 아말렉과 전쟁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홀로 시내산에 오를 때 여호수아만을 대동했습니다. 이미 지도자로 세우기 위해 훈련을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자기를 대신할 지도자를 세워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모세가 그동안 다음 지도자를 세우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 온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암묵적으로 동의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세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주의 사역은 마치 계주와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 사람이 바턴을 받아 자기가 달려갈 길을 잘 달리고 난 후에 다음 사람에게 그 바턴을 잘 이어주어서 계속 사역이 이어지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바턴을 받아 자기가 달려갈 길을 잘 달릴 뿐 아니라 다음사람에게 바턴을 절 전해주는 데까지 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신앙사경회 강사로 다녀가신 김동호 목사님께서 자랑삼아 하신 말씀이 제 마음 속에 남았습니다. 이분은 동안교회를 목회하신 일이 있는데 3대째 바턴터치가 잘 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송치헌 목사님이라는 분이 이 교회를 오랫동안 목회하시면서 부흥시키셨고, 당신이 바턴을 받아 이 교회를 더 크게 부흥시키셨고, 다음으로 김형준 목사님이 바턴을 받아 지금 목회를 하고 있는데 당신이 목회하실 때보다 교회가 더 크게 부흥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동안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교회도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창립할 때부터 주의 종들과 믿음의 선배들이 바턴을 잘 이어주셨습니다. 특히 고 주관준 목사님께서 교회를 부흥시키신 후에 최대준 목사님께 바턴을 넘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최대준 목사님께서 더 부흥시키신 후에 제게 바턴을 넘겨주셨습니다. 감사하게도 그 후에 교회가 부흥해왔습니다. 이제 이후로도 우리 교회가 계속 부흥하고 또 이 바턴을 잘 넘겨주어야 하는 과제가 우리에게 남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바턴을 잘 넘긴다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끝까지 충성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도중에 하차를 한다든지 다른 생각을 품는다든지 할 경우 바턴을 잘 넘길 수가 없습니다.
저는 성경의 인물 가운데 ‘데마’라는 사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성경에 세 번 그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그 이름이 나타날 때마다 이 사람을 소개하는 표현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몬 1:24에 그 이름이 등장합니다. “나의 동역자 데마”라고 되어있습니다. 당시 사도 바울과 함께 주의 일에 충성을 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골 4:14에 그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런 수식어가 없습니다. 그냥 “데마”라고만 나옵니다. 처음보다 그 충성이 약해졌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딤후 4:10에 그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때는 바울을 버리고 세상으로 도망한 배신자로 그 이름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모세는 달랐습니다.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부터 40년 동안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동안 한 결 같이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그 모든 짐을 내려놓는 순간까지 충성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도자의 길은 충성하는 길입니다. 그것도 끝까지 충성해야 하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오늘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교회에서 일터에서 크고 작은 지도자로 세움을 받습니다. 어떤 지도자의 길을 걸어갈 것인지 깊이 생각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세처럼 청지기임을 잊지 말고 섬김의 사역을 끝까지 충성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민수기 27:12-23
[찬송가] 212장 ‘겸손히 주를 섬길 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세대에게 가나안 땅을 분배하기 위한 2차 인구 조사를 명령하셨습니다. 인구 조사가 이루어지자 가나안 입성을 위한 준비가 급물살을 탑니다. 하나님은 먼저 아들이 없이 다섯 딸만 남기고 죽은 슬로브핫에게 할당될 땅을 누가 차지하느냐는 문제에 대해 답변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모세에게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리더십이 이양되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의 가나안 입성이 임박했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완전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줄 땅’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준 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시겠다는 약속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지기에 이미 그들에게 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바림 산은 특정한 산이 아니라 모압의 북서부에 있는 산지의 이름입니다. 동쪽으로는 완만하지만, 서쪽으로는 매우 가파른 지역입니다. 이곳에 오르면 서쪽으로 사해 북단의 가나안 지역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습니다. 느보 산(신 34:1)은 이 아바림 산지에 있는 최고봉을 가리킵니다.
아바림 산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는 모세의 심경은 어떠했을까요? 먼저 광야에서의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을 것입니다. 척박한 광야와 비옥한 가나안 땅이 오버랩되면서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을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 자손을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고백이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꿈에 그리던 약속의 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까우니, 자신의 두 발로 그 땅을 꼭 밟아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가나안 입성을 목전에 둔 시점이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해 주신다면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고 누구보다 먼저 그 땅에 들어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시 모세의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13) 본 후에는 네 형 아론이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사명을 분명하게 제한하십니다. 모세의 사명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하는 것이기에, 그에게 약속의 땅을 바라보게만 하십니다. 그의 형 아론이 그랬듯이 모세도 자기 사명을 마치고 조상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보여주신 것만 해도 은혜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조금 너무하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떨기나무 앞에서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지금까지 하나님의 충실한 종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이끌었던 모세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지금까지 잘 감당했으니, 한 번쯤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밟게 해주실 법도 한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14) 이는 신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할 때에 너희가 내 명령을 거역하고 그 물 가에서 내 거룩함을 그들의 목전에 나타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 물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모세는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물이 없어 자신을 비방할 때, 지팡이로 반석을 내리쳐 물을 냄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함을 백성들에게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바위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고 말씀하셨는데, 모세는 지팡이로 바위를 두 번 쳐서 물을 냈습니다. 하나님은 이에 대해 ‘이스라엘 자손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낼 만큼 나를 신뢰하지 않았다(민 20:12)’라고 평가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가나안 땅을 멀리서 볼 수는 있었지만, 그 땅에는 한 발짝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들었지만,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더하여 행동했습니다. 모세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행동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의 행동을 믿음 없음으로 보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그분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의 출애굽과 광야 여정을 위해 모세를 지도자로 들어 쓰셨지만, 모세의 잘못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책임을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지도자들에게 주는 경고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지도자들을 들어 쓰시지만, 그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평가하시고 책임을 물으십니다.
[(15-16)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와 이르되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하건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모세는 절망할 법도 합니다. 단 한 번의 불순종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또, 이스라엘 자손의 출애굽과 광야 여정을 이끈 자신의 노고가 물거품이 된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한마디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또, 자신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구하지 않습니다.
모세의 관심은 자신의 죽음 이후에 남겨질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자신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지만,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해 자신을 대신할 지도자를 뽑아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모세의 고백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형편과 능력을 다 알고 계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가장 적합한 지도자를 세워 주시기를 믿음으로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세와는 달리 우리는 어떤 자리에 필요한 사람을 세울 때 인간적인 조건이 뛰어나거나, 자신이 보기에 괜찮은 사람을 선택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일을 할 때라도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을 세우는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해야 합니다.
[(17)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17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보겠습니다.
[(17, 새번역) 그가 백성 앞에서 나가기도 하고, 백성 앞에서 들어오기도 할 것입니다. 백성을 데리고 나가기도 하고, 데리고 들어오기도 할 것입니다. 주님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 떼처럼 되지 않도록 하여 주십시오.]
모세는 지도자란 ‘백성 앞에서 나가기도 하고, 백성 앞에서 들어오기도 하는 자’라고 정의합니다. 이 표현은 전쟁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병사들을 선두에서 지휘하여 전장으로 이끌고 나가면서 “나를 따르라!”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전장에서 돌아올 때는 모든 병사의 안전한 귀환을 보장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영화 ‘위 워 솔져스(We were soldiers)’의 실제 주인공인 할 무어 중령도 베트남 전쟁의 투입을 앞두고, 그의 대대 병사들에게 이렇게 연설하였습니다.
“여러분 모두를 무사히 귀환시키겠다는 약속은 할 수 없다. 그러나 여러분과 전능한 하나님 앞에서 이것만은 맹세한다. 우리가 전투에 투입될 때 내가 가장 먼저 전장에 앞장설 것이고, 전장을 떠날 땐 내가 가장 늦게 나올 것이며, 누구도 남겨 두고 오지 않겠다. 전사했든 생존했든 우리는 모두 다 함께 고국으로 돌아올 것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보여 준 리더십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안위보다 이스라엘 자손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지도자였고,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까지도 걸 수 있는 지도자였습니다(출 32:32). 그래서 모세는 자신의 후계자로 자신과 같은 지도자가 세워지기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또,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도록, 목자의 심정으로 백성들을 쉴 만한 물가로 이끌 지도자를 세워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이렇듯 모세는 자신의 사명을 마치는 순간까지 이스라엘 자손만 생각하는 참된 지도자였습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지도자를 찾아보기 힘든 이 시대에,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그리스도인 가운데서 더 많이 세워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하나님은 모세의 간구에 응답하여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세우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에브라임 지파의 족장이었던 엘리사마의 혈통을 이은 눈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출애굽 당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는 이스라엘의 지휘관으로 전투에 임했고(출 17:8-16), 이후 모세의 부관으로서 언제나 모세 곁을 지키며, 모세와 뜻을 같이 하였던 사람입니다.
여호수아가 가장 돋보였던 순간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는 정탐꾼으로 파견되었을 때입니다. 10명의 정탐꾼이 가나안 정복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주장할 때, 여호수아는 갈렙과 더불어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다고 긍정적인 의견을 주장하였습니다(민 14:9). 이 사건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여호수아와 갈렙은 광야에서 모두 죽은 출애굽 1세대와는 달리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여호수아를 가리켜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새번역 성경은 ‘영감을 받은 사람’이라고 번역하는데, 여호수아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신적인 능력을 소유하였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함을 통해 그를 후계자로 임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의 안수를 통해 자연스럽게 리더십 배턴 터치가 이루어집니다.
[(19-20) 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들의 목전에서 그에게 위탁하여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로 임명된 것을 제사장 엘르아살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공식 천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로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했던 모세를 향해 이스라엘 자손이 복종하였듯이,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를 향해서도 이스라엘 자손이 복종할 것을 서약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새 시대의 지도자인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하나로 뭉쳐야 하는 것입니다.
[(21) 그는 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설 것이요 엘르아살은 그를 위하여 우림의 판결로써 여호와 앞에 물을 것이며 그와 온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은 엘르아살의 말을 따라 나가며 들어올 것이니라]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지만, 모세와 여호수아에게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여호수아에게는 이러한 대면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는 제사장 엘르아살의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간접적으로 전달받아야 했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신 하나님은 새 시대의 지도자 여호수아는 율법을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지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율법의 말씀이 하나님의 뜻을 규명하는 방법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성경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려주는 것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성경보다 소위 직통계시라고 하는 하나님의 음성, 꿈, 환상 등을 우선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멀리해야 합니다.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는 율법의 말씀을 통해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22-23)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여 여호수아를 데려다가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에게 안수하여 위탁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더라]
모세는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우는 모든 과정을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행하였습니다.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그에게 안수하며, 지도자의 권위를 부여하는 모든 절차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순종의 즉각성과 정확성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잇는 가장 튼튼하고 확실한 줄이 됩니다.
이로써 새 시대의 지도자로서 여호수아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모세가 살아있는 동안은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을 여전히 이끌고, 여호수아는 이전처럼 모세를 돕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후계자 임명을 통해 가나안 입성을 위한 이스라엘의 준비가 한 단계 더 상승했음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성숙자반>을 통해 인간의 죽음을 의미하는 퇴장은 퇴장만으로 끝나지 않고, 곧 재등장을 의미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 면에서 모세는 바른 퇴장의 정면교사입니다. 그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도 그 땅을 밟지 못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종으로 충실히 사명을 감당했기에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이 들 수도 있고, 지난 삶이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순식간에 끝나 버릴 이 세상의 삶을 바르게 살다가 깨끗하게 퇴장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우고, 자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준비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히 11:13, 새번역)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으며, 땅에서는 길손과 나그네 신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잠시 머무는 길손과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눈을 들어 본향을 바라보고, 주님이 약속하신 나라를 소망하며, 믿음을 따라 살다가 깨끗하게 죽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바른 퇴장을 통해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모세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이스라엘 자손을 이끌었던 자신은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세웠습니다. 모세는 바른 퇴장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재등장하였습니다. 우리의 나그네 삶도 모세처럼 바른 퇴장으로 마쳐지기를 소망합니다. 이를 위해 날마다 우리의 눈을 들어 본향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하지 않고, 전적으로 순종하고 있습니까?
2. 사람을 세울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인간적인 조건이 뛰어나거나, 자신이 보기에 괜찮은 사람을 선택하지는 않습니까?
3. 지도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필수 덕목은 무엇입니까?
4.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성경 외에 다른 것들을 더 의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5. 믿음을 따라 살다가 바르게 퇴장하기 위해 내가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광야학교의 리더십 이양
민 27:12-23 / 라종렬A 목사
아바림 산맥 비스가산 느보산 정상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하나님은 모세가 아론처럼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조상에게 돌아갈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에 모세는 회중을 향한 후계자를 요청하고 하나님은 예비된 여호수아를 회중 가운데서 모세가 직접 안수하고 리더십을 위탁 이양하도록 명하자 모세는 여호와께서 명하신대로 순종합니다.
12-15절 사명을 다하는 날이 삶을 마감하는 시간입니다.
마침내 약속의 땅이 보이는 곳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땅을 보게 하신 후에 모세에게 므리바 사건을 언급하시며 이제 아론과 같이 이곳에서 죽을 것이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다시한번 므리바에서의 불순종과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했던 죄를 상기시켜 주십니다.
애굽에서 40년, 광야에서 40년, 그리고 출애굽후에 다시 광야에서 40년을 지내고 도합 지난 120여년의 여정을 돌아볼 때 이제 그토록 그리던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두고서 그 땅을 밟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모세는 담담히 이 사실을 수용합니다. 자신의 사명이 출애굽과 광야 여정을 약속의 땅까지 인도하는 것, 바로 여기까지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순종한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있었습니다. 잠시 이 사명을 잊고 여호와께 불순종하고 여호와의 거룩을 드러내지 못하고 행한 므리바 사건은 모세에게 자신의 사명이 무엇이며 어디까지인지 깨닫게 해 주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금 므리바 사건을 통해 선고된 하나님의 뜻을 상기시키면서 자신의 사명이 여기까지라는 것을 인식한 것입니다
자신의 사명을 아는 것도 중요하고, 그 사명에 충성하는 일도 소중하지만 무엇보다 그 사명을 완수하고 난 후에도 중요한 일이 남아 있습니다. 사명의 완수에 대한 보상은 하나님께서 행한대로 보응하실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든지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맡겨주신 사명들이 있습니다. 삶이 굴곡진 자리에서 우리는 사명을 깨닫기도하고 동기부여도 받고 변함없이 충성해야 할 이유도 깨닫게 됩니다. 사명을 찾는 이들에게 그리고 그 사명을 부지런히 완수하기 위해 달려가는 이들에게, 그리고 사명을 마무리 해가는 즈음에 있는 이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응원을 보내고 싶습니다.
15-17절 지도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후계자를 세워야 합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고를 듣고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권을 가지셨음을 고백하고 이스라엘 회중을 위해 하나님께서 목자를 세워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먼저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을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고한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신 줄 믿는 고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일강에서 자신이 건짐을 받고 애굽의 궁정에서 자라고 미디안 광야에서의 삶의 여정에서도, 그리고 출애굽과 지난 40여년의 광야 여정에서도 하나님은 부족한 자신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워 사명을 주시며 사용하시고 놀라운 역사를 이루시고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다는 것을 감사하며 온전히 고백하는 표현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제 사명이 다해 죽을 것이라는 예고에 대해서도 담담히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어 여호와께 이스라엘 회중 위에 한 사람을 세워서 자신이 했던 사명을 그대로 이어서 회중을 선한 목자처럼 이끌 지도자를 세워달라고 요청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구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공동체를 생각하며 그들을 잘 이끌어갈 지도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후계자가 세워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 그 주권을 행하시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자신의 가장 측근에서 그리고 여러가지 사건들 속에서 이미 연단되고 검증되고 리더십의 과정들을 잘 견뎌온 여호수아가 있었지만 모세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인도와 역사와 공개적인 확정을 위해서 하나님의 주권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 앞에서 우리가 함부로 생명연장과 사명에 대한 재고와 하나님의 계획 수정을 요청하는 기도를 행하는 것은 무례한 일입니다. 곧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랑에 풍성하신 분이시기에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이미 아시기에 오래참으시고 교육하사 바르게 설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지도자 한 사람을 세우는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래도록 검증되고, 해당 공동체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거룩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세우는 일에 있어서 다른 것이 개입되거나 돈과 연륜과 힘에 의해서 좌우될 경우에는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부디 지도자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 합당한 이들이 세워질 수 있도록 부지런히 교육과 돌봄과 양육의 과정들을 오래도록 준비하고 정착해 가야 할 것입니다.
18-21절 리더십 이양은 투명해야 합니다.
후계자를 요청하는 모세에게 여호와께서는 성령충만한 여호수아를 지목하고 회중들 앞에서 모세가 그에게 안수하고 지도력을 위탁하고, 존귀를 그에게 돌리라고 명합니다. 그래서 온 회중이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고 합니다. 또한 제사장 엘르아살은 우림의 판결을 통해서 신앙적으로도 여호수아의 리더십을 인정하도록 명합니다.
영이 임하는 여호수아, 성령충만한 여호수아는 지난 40여년 동안 모세의 측근에서 각종 놀라운 일들을 완수합니다. 그의 삶의 여정을 민수기에서는 한마디로 ‘영이 머무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표현으로는 성령 충만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리더들을 세울 때에도 그가 성령충만한 사람인지를 점검하고, 공동체 속에서 오래도록 함께 하면서 그의 다방면에 덜친 모습들을 잘 살펴서 회중들이 바람직한 지도자들을 세워갈 수 있도록 투명하게 진행되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세워진 이후에는 회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모세가 안수하고, 제사장 엘르아살을 통해서 위탁하게 해서, 회중들이 그 권위에 온전히 복종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공개적인 의식을 진행하는 이유는 모세의 리더십이 여호수아에게 이양된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림의 판결(우림과 둠밈을 제비 뽑듯이 선택하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도하고 다른 방식으로 이 판결의 흉패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을 통해서 신앙적으로도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를 세운다는 선포의 의미도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마다 리더십의 교체에 몸사를 앓고 있습니다. 제사장은 세습하지만 예언자과 지도자는 모두 세습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도 자신의 아들에게 리더십을 이양 하지 않았습니다. 더 잘 할 수 있는 준비된 이가 리더십을 이양 받도록 한 것입니다. 제사장 된 우리 성도들 모두는 우리의 신앙의 유산들이 잘 세습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물려주어야 할 것은 다른 무엇보다 믿음이어야 할 것입니다.
동사제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의 리더가 교체되기 1-2년 전에 미리 다른 후계자가 함께 동역하게 하는 제도입니다(모세도 여기서 여호수아에게 리더십을 이양한 이후에 마지막까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여호수아와 동역합니다). 그런데 이 동사의 직임을 행할 사람은 다른 먼 곳에서 찾아 오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그 공동체 안에서 자라고 그 공동체를 누구보다 잘 알고,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인격과 신앙과 삶에 대해서 검증하고 인정하고 있는 사람이어야 더욱 바람직합니다. 그렇게 함께 동역하다가 앞선 리더가 은퇴하게 되면 큰 무리 없이 리더십이 이양되고, 그렇게 이양된 이후에는 선임자는 최대한 자신의 모든 권위를 이양하여 새로운 지도자에게 회중들이 잘 협력하고 인정하고 동역해 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더불어 세워진 리더는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 그리고 사명을 잘 이해하고 자신의 탐욕의 수단으로서 교회와 성도를 이용하지 아니하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곧 성령의 인도를 따라 섬기는 지도자, 선한 목자와 같은 지도자들이 세워져야 할 것입니다.
22-23절 단순하게 순종할수록 아름답습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를 제사장과 함께 온 회중 앞에 세우고 안수하고 위탁합니다.
온전한 지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되 끝까지 순종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은 다른 이의를 제기하거나 꼼수를 부리거나 핑계를 대거나 불평과 불만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단순하게 순종합니다. 이제 모세는 그렇게 온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리더십 이양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대로, 말씀하시자 마자 바로 단순하게 순종한 것입니다. 성숙한 자의 모습, 온전한 자의 모습, 성령충만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명령에 가감하거나, 핑계를 대거나, 미루거나, 외면하는 이들은 모두 불신앙에서 나오는 행동들입니다. 온전한 자는 여호와의 명령에 단순하게 순종합니다. 먼저 순종한 이후에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참 지도자이심을 믿고 우리는 다만 하나님을 대신한 관리자로서의 사명을 갖고 있음을, 우리가 가진 소유와 관계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신 맡겨서 관리하도록 된 것임을 늘 기억하며 살기 원합니다.
* 기도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사명 주심을 감사드리며
주님이 주신 사명을 잘 깨닫고
충성되이 순종하므로 잘 감당할 수 있기 원합니다.
나의 탐욕을 위한 간구가 아니라
공동체와 하나님나라를 위한 간구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 뿐 아니라 이 땅의 교회들이
리더를 세우고 이양하는 과정을
투명하게 진행하는 지혜를 주시고
온 회중이 함께 인정하고 세우고
함께 할 수 있는 리더십 이양과 세움이 있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하나님의 명령에
단순하게 즉각적으로 순종하게 하옵소서.
새 시대의 지도자 여호수아
민 27:12-23
오늘 말씀은 모세가 여호수아를 자신의 후계자로 세우는 과정입니다. 어제는 모세의 삶과 그의 마지막을 중심으로 살폈다면, 오늘은 여호수아가 후계자로 선출되는 과정과 그의 신앙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 여호수아라는 말은 신약 시대에는 예수라는 발음으로 불려졌고, 이 예수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사역은 예수님의 사역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듯이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나라로 인도하십니다.
오늘은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떤 사람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는가 본문을 따라가며 살펴봄으로써 은혜를 받았으면 합니다.
첫째, 여호수아는 목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17절)
모세는 자기 후계자가 필요한 이유를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목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 40년을 유랑하면서 깨달은 결론은 이스라엘 백성은 양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목자가 없으면 단 한시도 안심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목자가 없으면 이들은 마치 양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이리저리 몰려다니곤 하였습니다. 그곳에 이리가 있고, 그 길로 죽 가면 낭떨어지로 향하는 위험한 길인 줄 모르고 몰려다녔습니다. 실제로 모세가 하나님의 십계명을 받기 위해 호렙 산에 올라가 있는 그 40 일을 참지 못하여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던 백성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또한 그 입에 먹을 것이 없으면 연신 '매- 매-' 하며 불평하고 불순종하는 못된 양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물이 없다고 불평했고, 이빨 사이에 고기가 없으면 또 그 때문에 원망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모세는 목자의 심정으로 하나님께 간구하여 만나와 메추라기로 그들을 먹였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여 그들의 메마른 목을 적혀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 속에서 바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늘 불평하고 늘 하나님께 무언가를 달라고 간구하는 양 같은 존재들입니다. 이렇게 간구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좋은 것들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그것을 곧 잊어버리고 그것이 마치 자기의 업적인 냥 자랑하는 자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일이 잘 풀리면 천방지축 날뛰다가 매를 맞고서야 돌아오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런 신앙상태를 잘 알았기 때문에 양의 목자와 같은 지도자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또한 이런 형편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호수아와 같은 지도자를 미리 예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잇는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어서 양과 같은 존재인 이스라엘 백성 앞을 부지런히 출입하며 이들을 인도하며 율법으로 이끕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었듯이, 이제 우리의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들 앞을 부지런히 출입하시며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십니다. 목자가 양 떼들 사이를 지나가며 양들을 살피듯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 상태를 살피시며, 우리가 항상 풍성한 꼴로 배불릴 수 있도록 만드십니다. 이 아침, 목자되신 그리스도로부터 풍성한 생명 양식을 얻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자였습니다(18절)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로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은 곧 성령님을 말합니다. 성령님은 우리 마음 속에 계시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함을 전해주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머리 속에 거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깨닫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육체 가운데 거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었다는 것은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그 분의 뜻을 잘 헤아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한 자였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여호수아는 그랬습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다른 정탐군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잘 알았기 때문에 메뚜기처럼 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두려워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민14:7-9) 라고 담대히 외쳤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또한 산꼭대기에서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하는 모세의 기도에 힘입어 아말렉 족속들을 르비딤에서 도말했던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이 아침에 우리 성도님들도 여호수아처럼 하나님의 신으로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뜻을 잘 헤아리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덧입힘을 받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여호수아는 존귀를 받은 자였습니다(20절)
여기서 존귀라는 말은 귀중하다는 의미보다는 권위, 즉 authority 를 의미합니다. 여호수아는 권위가 있는 자였습니다. 이 권위는 모세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모세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고, 결국 여호수아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었습니다. 모세는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여호수아에게 안수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권위를 여호수아에게 이양합니다. 안수는 머리에 손을 얹음으로써 자기가 가진 것을 남에게 전가하는 의식입니다. 속죄 제사를 드릴 때에는 짐승에게 안수함으로써 자기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합니다. 축복할 때에는 안수함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을 대신하여 전달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런 안수 의식을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그 권위를 인정받게 됩니다. 이제는 모세에게 있던 그 권위가 여호수아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모세에게 그들이 복종하였듯이 여호수아에게 복종하여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여호수아처럼 존귀한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존귀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권위를 살려주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지 않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사람들의 머리가 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이 주는 직위나 권력은 여러분을 잠시잠깐 동안 존귀하게 만들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존귀는 일시적이며, 더 높은 권위 앞에서는 초라해지는 상대적인 존귀일 뿐입니다. 세상이 주는 그런 권위는 다만 눈앞에서만 허리를 굽히게 만드는 형식적인 존귀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존귀는 영원한 존귀요, 사람들이 그 마음으로부터 진실로 복종하게 만드는 절대적인 존귀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존귀한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넷째, 여호수아는 엘르아살과 그의 일을 분담하였습니다(21절)
모세의 리더쉽이 모든 것을 혼자서 도맡아서 하는 카리스마적 리더쉽이었다면, 여호수아의 리더쉽은 서로의 일을 분담하는 협동적 리더쉽이었습니다. 모세의 일을 비록 아론과 70인의 장로가 나누어 하였다고는 하지만 모든 것은 모세의 손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직접 말씀하셨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가지고 모세는 회막도 만들도록 지시하고, 제사를 드리도록 지시하고, 율법도 제정하였습니다. 또한 많은 기적과 이사들이 모세의 손을 통하여 일어났고, 광야에서의 수많은 전투도 모세의 지시하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여호수아 대에 이르러서는 일이 분담되기 시작합니다. 여호수아는 영적 전투만을 주로 수행하는 군사 지도자로, 엘르아살은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렇게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에게 전하는 영적 지도자로 세우심을 받습니다. 17절의 '그들 앞에 출입한다'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21절 하반절의 '그와 온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은 엘르아살의 말을 좇아 나가며 들어올 것이라'는 말씀은 모두 군사적인 행동을 묘사하고 있는 말들입니다.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이스라엘 백성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르아살은 하나님의 뜻을 묻는 예언자이면서 제사장입니다.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입는 사제복의 가슴 주머니 속에 항상 우림과 둠밈이라는 판결 도구를 넣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긴급한 일이 있으면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물었던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일을 나누어서 할 줄 압니다. 일을 나누어서 할 때, 그 일은 쉽고 가볍게 되며, 서로 나누어 일을 하면서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싹트게 됩니다. 일을 나누어서 할 때 그 일은 효율적이 되며, 그 결과도 풍성해집니다. 주위에서 보면 많은 일들을 자기 혼자서 지고 가려 하다 자기 자신도 쉬 지치고, 일도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들을 자주 봅니다. 우리는 일을 분담할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일이 무겁다고 생각되면 하나님께 간구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일을 나눌 수 있는 지혜와 동역자를 보내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모세의 후계자로 선택받은 여호수아는 목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자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존귀를 입은 자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일을 분담하여 하나님 일을 하였습니다.
모세의 후계자 임명
민수기 27장 12-23절 / 코너스톤교회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명하시고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때 모세와 아론은 이 일을 하는 가운데,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하고 말하며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고 짜증과 분노가 섞인 듯한 태도로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씩 내리치며 이적을 행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므리바 사건 입니다.
하나님꼐서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 므리바 사건으로 인해 이 두 사람도 출애굽 1세대와 같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미 아론은 민수기 20장에서 죽었고 그의 아들 엘르아살이 대제사장의 직무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세상에서 그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시며, 마지막으로 그에게 아바림 산에 올라가 저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가나안 땅을 보도록 명하십니다.
모세는 지난 40 여년 동안 성실하게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 왔습니다. 때로는 백성들이 하도 원망도 많이 하고 속도 많이 썩여서 그만 두고 싶었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중심에는 늘 그의 민족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애정이 가득 했습니다. 모세는 이제 곧 임할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며, 한 가지 걱정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누가 이 연약하고 또한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것인가?”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인해 찾아올 리더십의 부재를 걱정한 것이죠. 그리하여 모세는 하나님께 자신을 대신할 리더를 한 사람 세워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본문 15-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민 27:15)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와 가로되 (민 27:16)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컨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민 27:17)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어떤 분들은 평생 수 십년 동안 일한 회사를 퇴직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분이 있는가 하면, 퇴직하면서도 회사의 미래를 걱정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후자의 경우 자신이 하는 일에 회사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성실하고 충성 되이 일하신 분들이 그러합니다. 모세도 성실하고 충성 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야, 이제 그만 하면 됐다.”하고 사실상 그를 200백만 명을 이끄는 민족의 지도자라는 막중한 직무에서 해방시켜 주실 때가 되었던 것이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지긋지긋 합니다. 저 사람들 자기가 알아서 잘 먹고 잘 살겠죠”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세는 달랐습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세상을 떠난다 해도… 남아 있는 주님의 백성들은 어떻하죠? 저들 가운데 한 사람의 지도자를 세우셔서 저들을 인도하게 하시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이 이 광야에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모세는 진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그들의 안위를 걱정하며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을 돌보시기를 간구했습니다. 17절에 ‘출입하며’라는 말은 ‘드나들다’라는 뜻도 있습니다만, 가나안 입성을 위해 백성들을 영적으로, 정치적으로 준비시킬 수 있는 자를 의미합니다. 곧 지도자 없는 백성들, 목표도 없고, 위험에 취약하며, 죄악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이 백성을 이끌만한 사람을 한 사람 세워달라고 간구한 것이죠.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의 후계자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선택해 놓으셨습니다. 18절을 보면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신에 감동된 자’라고 소개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지도자의 자질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미 곳곳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하나님 계신 장막에 머물며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눈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모세의 뒤를 이를 후계자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과 매일 친밀하게 교제하는 사람 입니다. 즉 기도와 말씀으로 준비된 사람 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가 되는 길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주님을 가까이하여 주의 거룩함 안에 머문다면 주의 쓰심에 합당한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하여 보고자 하는 것은 모세의 기도 입니다. 16-17절 다시 보시겠어요? “(민 27:16)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컨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민 27:17)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는 오늘 이 모세의 요청이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해서 응답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본문 속에 기록된 모세의 간구는 훗날 오실 이스라엘의 참 목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 되었습니다. 17절 후반절 보십시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마태복음 9장 3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보시고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으로 인해 불쌍히 여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방황하지 않도록 인도하실 참 목자 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구약에서 모세의 후계자가 된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약에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여호수아라는 이름도 사실 예수와 같은 이름 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예수’라고 읽습니다만, 히브리어로 읽으면 ‘예수아’ 입니다. 여호수아와 같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모세의 뒤를 이어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것처럼, 참 목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인도하셔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또 다른 가나안인 하나님 나라, 즉 천국으로 이끄실 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양은 목자만 따라가면 됩니다. 마실 것도, 먹을 것도, 쉴 곳도 목자만 따라가면 목자가 다 채워 줍니다. 양의 행복은 좋은 목자를 만나는데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참 좋은 목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이 예수를 따라가면 가장 행복하고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라 가듯이, 오늘 주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십시오. 주의 음성에 순종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혜와 평강이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예수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으로 인도하실 수 있으십니다. 이 좋은 목자 되시는 예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살아가시는 오늘 이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 리더의 덕목들
민수기 27:12–23 / 스테이트 칼리지 한인교회
민수기 20장에서 모세의 형 아론이 먼저 하나님 편으로 떠났고, 이제 모세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모세는 자신의 리더의 자리에 여호수아를 세우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왜 모세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또 한 번의 언급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세우도록 인도하시는 장면이 그려집니다.
(12-14) 하나님은 정말 단 한 번의 실수로 인해서 모세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됨을 거듭거듭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세의 한 번의 실수인데,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었습니다. 그 문제를 모세가 죽기 직전에 다시 한번 기록함으로서 우리에게 그 죄의 무게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하십니다. 제 3계명이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마라라고 명령하셨듯이 하나님의 이름이 헛되이 사용되는 것 만큼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이 가려지는 것은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자신의 분(화)를 다스리지 못해서 하나님의 명령에, 은혜로 주어진 물이 분노의 샘물, 다툼의 샘물로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가렸던 것입니다.
· 생각하는 점: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사람, 하나님의 권한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태도를 더욱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더 깊이 관여할수록 자신의 뜻과 생각을 하나님의 뜻 보다 먼저 놓아서는안 되고,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전해지고 드러나게 하는 것에 집중을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따르며 사람들을 섬기는 자들이 가져야 하는 자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그대로 드러나며, 그안에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이 온전히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권한을 잘못 오해하여 남용한다거나, 혹은 자신의 기분대로 사용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화로 개인적 감정으로 하나님의 일을 망치는 것도 문제지만, 특히 정당해 보이는 이유로 (모세가 불신과 불만만 가득 찬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화를 내는 것은 한편으로 정당하다) 하나님의 뜻을 그르치는 것은 더 큰 잘못입니다. 모세의 사건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에 더 깊이 관여한 자들이 이런 일에 얼마나 더 신경을 써야 하는 지를 잘 보여줍니다.
(15-23)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시간이 다 끝나갈 때에 하나님께 자신의 후계자가 될 사람을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모세 만큼 지도자의 무게와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의 지도자를 뽑는 기준을 눈여겨 봐야 합니다.
첫째는 생명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는 지도자여야 합니다. 즉 하나님이 생명을 중요시 여기시듯 백성의 생명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 자여야 합니다. 16절에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 즉 모세는 자신의 삶이 이제 끝나가는 순간에 하나님이 참된 생명의 하나님임을 고백하며, 또한 그 분이 모든 생명을 주시며 이끄시는 분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또한 이스라엘의 생명을 책임져 주시는 분으로서 그 생명을 이끌 후계자에 대한 소망이 들어 있습니다. 생명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회중 위에 그들의 생명을 소중히 여길 한 지도자를 세워주소서라는간절한 바람이 들어 있습니다.
둘째는, 백성을 통솔하며, 가야하는 목적과 비전을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17절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사람이 행할 일이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며” 즉 이들을 조직적으로 이끌며, 이들을 인도해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끄는 일입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미리 가본 경험 또한 있습니다. 리더로 세워진 자의 임무는 너무 명확합니다. 그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부름 받아 백성으로부터 구별되어 훈련받고 나와서 다시 백성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삶 가운데 함께 하면서 그들의 삶을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지 않게 하는 것”이 그가 행할 일입니다. 양의 특징은 목자가 없으면 앞이 보이지 않아서 다른 길로 빠지고 서로 뭉쳐놓으면 털들로 인해서 엉겨 붙어서 똑바로 살아가지 못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양을 키우는 목자가 필히 그들을 세밀하게 돌봐주어야 양들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자를 뽑는 것이 모세의 마지막 임무입니다.
셋째는, 18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대답하신 것처럼, 그 안에 “나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사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리더십의 첫 번째 조건이 “영이 머무는 자” 여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영으로 백성을 인도하는 자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백성을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첫 번째 지도자의 조건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자입니다. “사마 이스라엘, 들으라 이스라엘아”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뜻을 바르게 분별하고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리더십에 필요한 여러 요건들이 있으나 언제나 첫 번째 조건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자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고 그 가치관으로 삶을 살아가는 자여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아직 모세가 가보지도 못한 땅으로 어떤 일이 일어 나는 지도 모를 곳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 있어서, 앞날에 대해서 말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진리의 영 되신 하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을 의지함으로 새로운 시간과 공간, 문화와 다양한 싸움의 현장에서 백성을 이끌고 나아가야 하는 용기와 담대함을 가진 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야기 하는 것처럼 그 받은 영이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며,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며 기쁨으로 그 길을 걸어가라고,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신 것과 같습니다 (디모데후서 1:7-8).
넷째는, 지도자는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나눌 좋은 동료와 함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세우고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칠 제사장을 두었습니다 (19-21). 엘르아살이 여호수아를 위하여서 하나님께 뜻을 구하게 함으로서 그가 하나님의 바른 뜻을 알고 살아가게 도울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것은 백성의 연약함과 죄를 막기 위한 중요한 방법이며 여호수아의 리더쉽을 바르게 인정하는 방법이기도 한 것입니다.
다섯째는 역사의 정통성을 이어 나가는 것입니다. 22-23절에 보면, 모세가 온 회중 앞에서 여호수아에게 안수하며 그가 이후의 세대를 자신을 대신해서 이끌어 나간다는 표시를 공식적으로 표한 것입니다. 모세의 자리를 이어 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행했던 모세의 일을 행하는 것이며, 모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 언약의 실현을 이뤄가겠다는 표시이며, 역사 가운데 모세가 가진 정통성을 이어가겠다는 표시입니다.
이스라엘의 리더로 세워진 여호수아가 아무 근거 없이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그는 모세의 종으로서 모세가 행했던 중요한 일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가 옆에서 오랜 시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해온 일을 지켜 보아 왔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동료들과 함께 약속 가운데, 주신 목적과 비젼을 백성들과 함께 나누며, 생명을 중요시하며, 모세에게 주어진 역사적 정통성을 이어 나가게 되는 역할을 이어 받는 것입니다.
· 생각하는 점: 우리는 교회 리더로서만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섬기는 자들로 훈련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주님의 제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할 수 있어야 하며, 생명에 대해서 소중한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진리에 따라 사람들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독단이 아니라 주변에 하나님의 말씀을 같이 나누며 그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을 같이 사귈 수 있을 정도로 편협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말씀과 삶에 대한 분별력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하나님 나라에 묶이며 살아가는 거룩한 삶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 암송: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민수기 27:17)
· 기도: (1) 교회의 덕과 건강한 공동체를 위해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제자로 세워지기를 위해서 (2) 여호수아가 가진 리더의 조건들을 갖춰 나갈 수 있기를 (3) 믿지 않는 가족과 친지, 친구들에게 복음이 증거되기 위해서 (4) 주일학교와 선생님들, 구역과 구역장들과, 교회 제직들을 위해서 (5) 주일 예배가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예배 되기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후계자를 위한 기도
민 27:12-23 / 김정훈 교수
3) 기도의 내용
모세는 자기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하였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의 장래를 위해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속 깊은 뜻을 이해하였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결정에 절도 있게 순종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16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하건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17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민 27:16-17).
이 짧은 기도에 두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첫째, 모세는 자기의 기도의 대상을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여호와”는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이 호칭에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언약하신 하나님, 당신은 이 민족의 끝없는 반역과 배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하시며 당신이 언약하신 대로 신실하게 여기까지 인도하셨나이다”라는 고백이 담겨있다.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에서 “하나님”(엘로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당신은 우주 만물을 지으신 분으로 모든 육체의 생명의 근원이시며 또한 주관자이십니다”라는 고백이 함축되어 있다.
기도자는 자기의 기도의 대상이 누구이며 그가 어떤 존재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자기가 어떤 신(神)에게 기도하는지도 모르고 기도하는 행위는 단지 마음의 염원을 비는 기복신앙적 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실체가 없는 대상을 설정해 놓고 막연하게 비는 것은 참 하나님을 잃어버린 타락한 인간의 가련하고 공허한 종교적 행위일 뿐이다. 바울은 믿는 자가 바른 신관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의 서신서 여기저기에서 강조한다. 그는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골 1:9)라고 간구한다. 이것을 원문으로부터 번역해 보면 “여러분이 모든 영적 지혜와 이해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게 되고”라는 말이다. 우리는 모든 영적 지혜와 이해력을 가질 때 하나님의 뜻을 아는 풍부한 지식에 이를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결핍하여도 믿음의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거짓된 환상이다. 때로 어떤 이들은 신앙의 지적 요소를 부인하는 듯한 발언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도전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지적 요소가 불필요하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책도 주시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이 우리의 신관을 형성하고, 신관은 우리의 신앙 형태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바울은 그의 목회서신 전반을 통해 “하나님”이 구원자이심을 강조한다(딤전 2:3; 4:10; 딤후 1:8-9; 딛 2:11; 3:4도 볼 것). 그는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소멸 불가하고, 불가시적이고,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왕이라고 진술한다(딤전 1;17. 딤전 6:15-16). 바로 이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시고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시다.
둘째, 모세는 일신의 명예와 권세에 집착하지 않고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 새로운 세대가 안정감 있게 정착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구한다: “원하건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 위에 자기와 같은 새로운 지도자 “한 사람”을 세워 달라고 간구하였다. 이 한 사람은 궁극적으로 오실 메시야를 가리킨다. 오늘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머리이심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통치자로 믿고 그분의 통치에 순종할 때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로서의 자신의 실체를 역사 속에서 실현하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향해 전진해 나갈 수 있다.
모세가 자기의 후임으로 들어설 새로운 지도자에게 거는 기대는 그가 이스라엘 백성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데리고 나가기도 하고 데리고 들어오기도 하는 지도력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모세가 바라는 후계자는 백성 앞에 부끄럼 없이 출입할 수 있는 자여야 할 뿐 아니라 그들을 데리고 나가든 데리고 들어오든 믿고 따를 만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세는 당장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자기의 뒤를 이를 지도자를 찾고 있었지만 사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장차 오실 메시야를 찾는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지도자의 유일한 원형이시기 때문이다.
모세가 백성 앞에 출입이 자유롭고 즐거운 지도자, 그 백성에게 나가야 할지 들어와야 할지를 제대로 가르쳐 주는 지도자를 구하는 목적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유리 방황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민 27:17하). 이는 모세의 마음이 오실 메시야의 마음과 같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훗날 예수는 자기에게 나아오는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는데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 때문이었다(마 9:36; 막 6:34). 애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나온 이후 40년 동안 모세의 마음에는 항상 그들을 크고 두려운 광야에서 갈팡질팡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지배했던 것 같다.
만일 새로운 세대가 요단강을 건너는 일부터 시작하여 목적지에 정착해서도 광야에서처럼 방황한다면 그것은 궁극적 하나님 나라 도래의 꿈을 상실한 채 소망 없이 표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히 6:19).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까지 떠돌이처럼 방황한다면 그것은 그 땅의 “젖과 꿀”과 무관한 어리석은 삶일 뿐이었다. 당시 역사 속에서 가나안 땅에 입성한 사람들은 궁극적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특별한 민족으로서의 기품을 가지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역사는 안타깝게도 그들이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고 크게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전개될수록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종말론적 기대가 상승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모세는 개인적 열망이나 명예보다 민족 전체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기도를 통해 참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4) 기도의 응답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기뻐 받으셨다. 하나님은 주저함 없이 그의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지목하셨다(민 27:18상). 여호수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민 28:18하)였다. 여기서 “영”은 하나님의 영을 가리킨다. 바울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고 선언한다.
사실 여호수아는 일찍부터 지도자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스라엘 군대가 아말렉과 전쟁을 벌일 때 직접 전선에 나가 용맹하게 싸운 군인이었다(출 17:13). 모세는 하나님이 처음 두 돌판을 주시려고 시내산으로 올라오라고 명하실 때 자기 형이며 제사장인 아론이 아니라 자기의 부관인 여호수아를 데리고 올라갔다(출 24:12-13). 이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 정치 지도자 역시 종교 지도자 못지않게 신령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시내산을 떠난 후 다베라에 이르렀을 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두 사람 엘닷과 메닷이 예언하는 사실을 알고 모세에게 보고했을 만큼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이었다(민 11:3, 26-28).
또한 여호수아는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12인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파견할 때도 그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10인 정탐꾼이 불신앙적 보고를 하며 백성을 낙담시키고 저항 세력을 부추길 때, 갈렙과 함께 담대하게 하나님이 동행하는 한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을 능히 이길 수 있다고 외쳤던 인물이었다(민 14:7-9). 하나님은 이 12인 정탐꾼 보고 사건 때도 이미 거역하는 백성을 향해 진노하시며 아무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며 모세 역시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여호수아와 갈렙은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민 14:26-30; 신 1:34-38). 하나님은 그때 모세에게 여호수아를 담대하게 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할 것이라고 귀뜸도 해 주셨다(신 1:38). 이는 모세가 이미 하나님께서 일찍부터 여호수아를 그의 후계자로 택해 놓으시고 훈련시키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놓고 자기의 나이가 120세나 되어 출입이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말하고, 하나님이 자기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지 않으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전하였다(민 31:1-2). 모세는 모인 백성에게 하나님이 먼저 요단강을 건너가셔서 다른 민족들을 멸망시키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여호수아가 백성의 선봉에 서서 건너갈 것이라고 말하였다(민 31:3). 그리고 그는 여호수아를 불러온 백성 앞에서 “7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 8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신 31:7-8)라는 말로 독려하였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영에 의해 사로잡힌 여호수아에게 안수하고 제사장 엘르아살(아론의 아들)과 온 백성 앞에서 모든 것을 위탁하여 백성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고 명령하셨다(민 27:18-20). 또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당신의 뜻을 알기 위해 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설 때 엘르아살은 “우림”의 판결로써 당신께 묻고, 여호수아와 모든 백성은 엘르아살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민 27:21). 제사장의 옷의 한 품목인 에봇에는 판결흉패가 달려 있었는데 이 그 안에는 우림과 둠밈이 있었다. 우림과 둠밈은 주사위와 유사한 것으로 우림은 “빛”을, 둠밈은 “완전”을 뜻하였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손을 넣어 하나를 택했는데, 그 중 하나는 “예”를 다른 하나는 “아니오”를 뜻하였다. 제사장은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하고,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그분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서 당신의 백성을 투톱 체제(지도자 여호수아와 제사장 엘르아살)로 다스리기를 원하시며, 하지만 최종 권위를 당신 자신에게 두시고자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여호수아를 엘르아살과 온 백성 앞에 세우고 안수하여 그에게 모든 것을 위탁하였다(민 27:22-23). 모세에게 안수를 받고 그의 후계자가 된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으로 충만하게 되었고, 이런 여호수아의 말에 백성은 모두 순종하였다(신 34:9).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
민 27:12-23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고 40년간 광야를 방랑하는 동안 이스라엘을 이끈 지도자 모세의 리더십 승계에 관한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의 주제로 말하자면, 이스라엘 리더십 승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여호수아가 리더로 세워지기 전에 하나님께서 모세의 죽음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장면이 먼저 등장합니다.
민수기 27장 12절, 13절, 1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본 후에는 네 형 아론이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이는 신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할 때에 너희가 내 명령을 거역하고 그 물 가에서 내 거룩함을 그들의 목전에 나타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 물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이니라” 아멘.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준 땅을 보라고 명령하십니다. 여기서 아바림 산은 어떤 특정한 산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압의 북서부에 있는 산지를 지칭하는데요. 이곳에 오르면 가나안 땅을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신명기에 나오는 느보산은 아바림 산지에 있는 최고봉을 가리키는 산인데요. 아바림 산과 느보산은 다른 지역에 있는 서로 다른 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지역에 있는 산을 가리킨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자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13절에서 모세가 조상에게 돌아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을 우회적으로 표현하신 것이죠.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4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신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할 때에 너희가 내 명령을 거역하고 그 물가에서 내 거룩함을 그들의 목전에 나타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내지 않았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의 역할은 출애굽부터 시작해서 가나안 땅 건너편 모압 평지까지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27장 14절 말씀은 민수기 20장에서 므리바 사건이 발생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서 직접 말씀하신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반복해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하나님의 뜻이 변할 수도 있지 않을까, 노하신 마음이 좀 누그러지지 않을까 싶은데, 하나님의 뜻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민수기 27장의 시점에서 아론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모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어떻게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매달릴 수 있었겠지만, 모세는 아무말 없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합니다.
민수기 27장 16절과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하건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돌이켜달라는 요청 대신에 자신의 역할을 감당할 지도자를 세워달라고 요청합니다. 여기서 모세의 성숙함이 나타납니다. 모세가 요청하는 내용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네 마네하는 문제로 하나님께 청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지도자를 세워달라고 요청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모세에게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은 어떤 존재입니까? 인간적으로 표현하자면,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에게 골칫덩어리이자 구제 불능입니다. 므리바 사건에서도 이스라엘이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신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면, 모세가 지팡으로 반석을 두 번 치는 일이 있었겠습니까? 없었겠죠. 이러한 점에서 모세는 충분히 억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을 듣게 된 것이죠.
이러한 점에서 모세는 자신의 임무를 다하기만 하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든 말든, 앞으로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어떻게 되든 말든 상관없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지도자를 세워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모세의 간구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두 가지의 역할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첫째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거룩한 전쟁을 치러야만 합니다. 민수기 27장 17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출입하며, 출입하게 하사. 이렇게 “출입하다”라는 표현이 중복해서 등장하기 때문에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를 살려서 읽으면, “그로 그들 앞에서 나가고 또 그들 앞에서 들어오며, 그들을 이끌고 나가고. 또 그들을 이끌고 들어오게 하셔서.”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어떤 일에 대한 업무 수행을 일컫는 히브리어의 관용적 표현인데요. 쉽게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이스라엘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가서 적들과 싸우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요단강 서쪽에 있는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전쟁에 앞서 나가 싸우는 역할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이어서 둘째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목자로서 이스라엘을 인도해야만 합니다. 17절 하반절 말씀을 보시면,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모세가 간구합니다. 여호와의 회중을 양으로 비유하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목자로 비유한 구절이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세의 간청을 받아들이시고 여호수아를 이스라엘의 목자로 세워주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아름다운 리더십의 이양은 모세와 여호수아의 사례를 제외하고는 이스라엘 역사에 반복해서 등장하지 않습니다. 또한 성경에서 목자 없는 양과 같다는 표현은 항상 부정적인 상황에 등장합니다. 열왕기상 22장 18절과 역대하 18장 16절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산에 흩어져있다고 기록되어있고,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는데요. 그 이유인즉슨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했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리더, 건강하고 바른 리더가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을 올바르게 인도하는 목자가 세워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 이렇게 모세가 하나님께 간구한 내용, 이스라엘 지도자의 중요한 역할 두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세의 간구에 따라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워주시는데요. 민수기 27장 18절 이하의 내용을 보시면, 모세가 여호수아를 데려다가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안수하여 위탁하는 것으로 내용이 마무리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향한 모세의 마음과 태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선 첫째로, 모세는 이스라엘을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므리바 사건으로 인해 모세의 역할을 제한하셨지만, 모세는 이 일로 이스라엘을 원망하거나 책망하지 않고, 끝까지 이스라엘을 사랑했습니다. 예컨대, 모세는 “어차피 내 역할은 여기까지니까 알아서 하겠지 뭐. 내가 40년 동안 매번 하나님 원망하고 불순종하는 니들 끌고 다니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니들 때문에 내가 가나안 땅 못 들어가는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이제 니들이 알아서 해.”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본인이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더라도,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후에 이스라엘을 신실하게 인도하는 지도자가 세워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 전심으로 간구하는 모세의 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임원으로 섬기다가 임기가 끝날 때, 또는 자신이 맡고 있던 어떤 역할을 타인에게 이양할 때, 이제 내 할 일은 끝났고, 이제 어떻게 되든 내 알 바 아니다. 알아서 해라. 이런 식의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마음을 품는 것이 아니라, 모세처럼 하나님께 간구하며, 다음 리더십이 온전히 세워지는 데 최선을 다해 기도하며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모세의 모습을 본받아야겠습니다.
이어서 둘째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표출하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말씀하시면 본인의 뜻을 끝까지 관철시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닌 것은 아닌 줄로 알고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라고 말씀하시면 그대로 순종한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여호수아를 세우라고 말씀하셨고, 모세는 그대로 행합니다. 민수기 27장 22절 말씀 상반절을 보시면,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23절 말씀 보시면, 그에게 안수하여 위탁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더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나의 생각과 마음을 먼저 주장하기보다,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님들, 모세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사명에 임하는지, 민수기 27장의 말씀을 통해 깊이 묵상하시면서, 공동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시는 모든 주님의 자녀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민수기 27장의 말씀을 통해 모세의 마음을 깨달아 알게 하시고, 사랑과 순종의 참된 의미를 기억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한 후에도 공동체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 마음을 쏟는 주님의 자녀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의 죄악된 본성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하고 우리 마음을 죄악으로 이끌지만, 깨어있어 기도하며 매일 같이 주님을 더욱 닮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온전히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새로운 지도자
민수기 27:12-23 / 김형익 목사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제거되어야 할 남은 장애물은 단 하나, 모세였습니다. 모세는 신광야 가데스의 므리바에서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내려치면서 백성을 향한 자신의 분노를 드러냄으로써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선언을 들은 바 있습니다(20:2~13).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를 지적하셨는데 하나는 ‘너희가 나를 믿지 않았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20:12). 이것들은 죄의 본질을 보여주는 두 가지 특성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않는 것,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온전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늘 여기에는 자기 의로움을 드러내려는 동기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이 일로 하나님은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님께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여기서 우리는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본문은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12~14). 모세는 아바림 산맥의 느보 산에 올라 거기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죽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은 실제로 모세오경의 마지막 책인 신명기 마지막 장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참 목자를 만들어가신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 (15~17)
모세는 이런 자신의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를 확증받으면서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가 보여주는 모습은 놀랍습니다. 그는 기도합니다. 물론 우리는 모세가 하나님께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주시기를 간구했었다는 것을 압니다. 신명기 3:23 이하를 보지요.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신 3:23~25).” 모세의 이 기도를 하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신 3:26~27).” 모세의 기도가 거절되었고 모세는 하나님의 확정된 뜻을 받아들입니다. 기도는 내가 하나님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 뜻을 하나님의 뜻 위에 관철시키는게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이라는 것을 모세의 태도가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모세의 또 다른 기도를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죽음을 선언하시자 모세는 기도합니다. 이것은 들여보내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가 구한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간구였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와 이르되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하건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15~17).” 여러분은 모세의 이 기도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모세는 이 기도로써 그가 이스라엘의 참 목자임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참 목자의 모습을 여기서 발견하지 않습니까? 자신이 지난 40년 간 인도해왔던 이 백성을 위해서 모세가 간구했던 것은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 자신을 대신하게 하사 이 백성이 목자 없는 양 같이 되지 않게 해 달라는 간구였습니다. 본문은 단순히 모세가 훌륭한 목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세가 이 자리까지 오도록 하나님께서 모세의 목자가 되어주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40년 간 이 백성을 인도하면서 속이 썩어 들어갔을 모세는 참으로 백성의 안위를 염려하면서 자신을 대신할 지도자를 세워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난 40년 간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모세를 세우셨고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그 백성을 통해서 모세를 만드셨고 빚어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위해서 우리를 희생시키시고 우리를 이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서 또한 당신의 사람을 빚어가시는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역사 속에 그 누구도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일은 언제나 나를 성화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였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자기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면서, 백성의 안위를 구합니다. 이제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단 하나,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점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소망을 가집니다. 이것이 또한 여러분의 소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목사인 저도 여러분을 통해서, 목회라는 버거운 소명을 감당함을 통해서 성장하고 성숙해갈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그런 목사와 함께 벧샬롬의 회중들 또한 성장과 성숙의 여정을 걸어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40년의 세월 동안 모세를 이런 참 목자의 자리로 인도하셨고 그를 빚어주셨습니다. 돌아보면 이것은 여든 살을 먹은 미디안 광야의 한 목자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명(18~21)
모세가 지도자를 세워달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지명하여 세우라고 명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18).” 지도자를 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교회에 지도자를 세우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세워달라고 구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이 사람이 가장 적합하다고 하나님께 추천하지 않았습니다. 지도자는 하나님이 세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세우시는 이유를 단 한 가지 언급합니다.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모세의 수종자로서 여호수아가 능력을 검증받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또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싸울 때 백성의 장수로서 나가 잘 싸웠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데스에서 가나안 땅의 정탐꾼으로 보냄을 받아 갈렙과 함께 믿음으로 용기있게 반응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판단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급하시지 않은 면모들로 여호수아를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가 입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성실하게 맡은 일을 감당할 수 있지만,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자임을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외적으로 대단한 업적과 성취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것이 성령의 사람이라는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사람은 한 때 믿음의 용기를 가지고 멋지게 반응할 수 있지만, 그것이 그 사람이 참된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임을 완벽하게 입증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속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새로운 지도자로 세우시기 위해서 여호수아에게서 보신 결정적인 것은 ‘그 안에 영이 머문다’는 내적이고 영적인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중심을 보셨고, 이것은 실패할 수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모세에게만 은밀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들의 목전에서 그에게 위탁하여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19~20).” 제사장 앞에, 그리고 백성 앞에 세우라고 하십니다. 백성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지도자직을 위탁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주셨던 존귀를 그에게 돌리라고 하십니다. 존귀는 다른 말로는 권위, 아름다움, 영광, 탁월함, 영예, 위엄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이 모든 것은 모세가 본래 가졌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백성의 지도자로 세우시고 그에게 주신 것들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여호수아에게 맡겨주라고 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안수는 이런 일을 행하는 상징적 방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존귀를 그에게 돌리라고 하시는 이유는 백성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였던 것과 같이 여호수아에게도 복종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고 배려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고 세우셔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제 여호수아를 백성의 지도자로 세우신다는 것을 공적으로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모세의 순종(22~23)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은혜를 구했던 모세의 기도는 거절되었지만, 백성을 위해서 지도자를 달라고 구한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호수아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에게 안수하여 자기에게 주셨던 존귀를 위탁합니다(22~23). 이제 새로운 세대는 새로운 지도자를 얻게 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교훈과 적용
지도자의 문제는 오늘날 모든 사회가 직면한 심각한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지도자를 잘못 세운 일로 온통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수없이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지도자의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우리는 솔직하게 이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당신의 백성을 위해서 지도자를 공급해주시는가?”
저는 우리 시대의 너무나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이 질문에 자조 섞인 의문을 표시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충분하고도 남는 우리의 쓰디쓴 경험에서 나오는 반응입니다. 이런 우리의 반응은 우리의 믿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자조 섞인 태도는 하나님께서 지도자를 공급해주시는 일을 신실하게 행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반증하기 보다는 우리의 믿음 없음을 드러내는 일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도자를 공급해주신다.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세대를 위해 새로운 지도자를 친히 공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위해서 그렇게 행하실까요? 여러분은 그렇게 믿고 계십니까? 물론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믿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해서 한국교회의 실상은 슬프게도 우리의 불신을 보여준다고 말해야 하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지도자를 공급하여 주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이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는 자기 뜻이 너무 강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자기 뜻을 따라 행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공동체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위하여 지도자를 주신다고 믿는다면, 그들은 모세가 했던 방식으로 기도할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기도하면서 자신들이 모든 결정을 내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모세는 여호수아가 대를 이을 지도자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께 자신의 생각과 뜻을 아뢰지 않습니다. 그는 그냥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세워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목회자 청빙 과정을 보십시오. 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회는 조건을 결정합니다. 이 조건은 거의 외적 조건들입니다. 그리고 조건이 결정되면 교계 신문에 광고를 냅니다. 그리고 이력서와 자기소개서가 들어오는대로 자신들의 기준으로 심사를 하여 소수의 인원을 추려냅니다. 이 과정에서는 더 나은 스펙 혹은 누가 아는 사람이냐 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추려낸 소수의 후보들에게 연락하여 와서 설교를 하고 면접을 보라고 날짜를 정해줍니다. 그리고 투표나 기타 방식으로 최종 선발을 합니다. 많은 성도들은 이것을 당연히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은 청빙이 아니라 고용이고 고빙이며, 교회의 타락을 보여주는 한 단면입니다.
여기에는 본문에서 모세가 보여주는 어떤 비슷한 과정이나 특징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교회에 지도자를 공급해주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런 방식을 거절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온 교회가 엎드려 기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위임 받은 당회나 위원회는 다시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들을 목양할 지도자의 영적 조건들을 성경말씀을 통하여 확인하면서 결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조건에 합한 자를 두루 찾는 과정이 이어질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에서 그들은 모세의 마음으로 기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조건에 합한 분을 찾았다면, 온 교회는 다시 기도하는 가운데 그분을 청빙할 것이고, 청빙 받은 분은 주의 뜻을 물어 가부를 결정할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도자를 공급해주신다는 것을 믿을 때 행해지는 바른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공급을 믿는다면, 일반 회사에서 사원을 뽑는 방식으로 목회자를 고용하는 천박한 방식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교회는 자신들이 청빙한 목회자를 통해서 목양을 받을 수 있게 되고, 그 목회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아름다운 본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모세와는 다른 지도자
또 한 가지,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지도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순종은 오늘날 교회가 잃어버린 치명적 결함입니다. 목사들의 비행과 이기적 성향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존귀를 스스로 다 무너뜨리고 말았고, 비성경적 청빙의 과정도 여기에 일조를 했다고 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 새로운 지도자에게 ‘복종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신명기 34:9도 이것을 강조합니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실제로 백성들은 새로운 지도자에게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백성들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모세와 비교할 때 여호수아는 현저하게 부족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하던 사람입니다(출 33:11). 모세는 지면에서 그와 같이 온유한 사람이 없다고 말할만한 사람이었습니다(민 12:3). 모세는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과 율법을 받았고 무엇이든 하나님께 직접 물어서 대답을 얻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권위를 부여받았다기 보다 모세에게 주셨던 권위(존귀)를 모세로부터 물려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직접 묻기보다는 대제사장에게 주어졌던 우림과 둠밈을 통해서 하나님께 여쭙고 답을 얻어야 하는 지도자였습니다(21). 백성들이 볼 때 이것은 매우 현저한 차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여호수아에게 순종했다는 것은 그들이 실제로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신 지도자로 여호수아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이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방황하지 않도록 세우신 지도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그들로 하여금 이 부족한 지도자에게 순종하게 했습니다.
여기서 제가 하나 현상적으로 언급하고 싶은 한 가지는, 우리가 지도자를 비교하는 기준과 관련한 문제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존경하는 은퇴하는 연로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후임자로 모셔야 할 지도자는 40대이거나 그 전후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 기준에서 보더라도 두 목회자의 비교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많은 세월 목회하면서 성숙해진 목회자와 젊은 목회자를 비교하는 것은 온당한 비교가 아닙니다. 이런 문제도 실제로 우리의 순종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곤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오늘날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모습과 비교해보십시오. 우리는 처음부터 잘못되었고, 과정에서도 잘못되었으며, 결과에서도 비참함을 많이 겪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목자 없는 양 같이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자기 백성을 위하여 지도자를 공급해주십니다.
양의 큰 목자 그리스도(히 13:20~21)
그러나 이 본문 속으로 우리는 조금 더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어 여호수아를 불러 세우셨습니다. 이런 일은 역사 속에서 거듭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 가리키는 지도자는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 13:20~21).”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완전하고 안전하게 인도하시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성취하시는 우리의 참 목자이십니다. 인간 역사에 하나님께서 세운 모든 목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부족함과 결함이 많은 사람들을 불러 세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인간 지도자들에게 순종을 보일 수 있다면, 그것은 양들의 큰 목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김없이 우리 모두를 인도하고 계심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칼빈이 기독교강요에 쓴 말씀을 인용하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겸손을 실천하고 훈련하는 가장 유용한 방법이 된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 때로는 우리보다 비천한 사람들을 통해서까지도 ? 주의 말씀이 전해진다 할지라도,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을 순종하는 일에 익숙하도록 만드시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말씀하신다면, 그 거룩한 말씀들을 모든 사람들의 귀와 마음이 지체하지 않고 귀하게 받게 된다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처럼 크나큰 위엄을 몸소 대하고서 놀라서 쓰러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토록 한량없는 영광스러운 광채 앞에서 혼란스러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름없는 연약한 사람이 티끌 중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을 전할 때에, 그 사람이 우리보다 나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의 가르침을 순전하게 받는다면, 바로 여기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경건과 순종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는 그의 하늘의 지혜의 보화를 연약한 질그릇 속에 감추어 두셨고(고후 4:7), 그리하여 그것을 얼마나 높이 기려야 하는지를 더욱 확실하게 보여 주고자 하신 것이다.”(강요 3.3.1).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친히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시며 부족하고 결함많은 사람을 세워 하나님의 기이하고 놀라운 역사를 보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