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가톨릭의대 신경정신과학교실의 교수 임 태 식(林泰植) 이라고 합니다.
소아 청소년 정신의학을 전공하였고,
어린이와 청소년의 신경정신과적 문제를 진단, 치료, 연구, 교육 하는 것이 평생의 직업입니다.
제가 의사가 되어서 만 12년 그리고 신경정신과 전문의가 되어서 만 7년을 대한민국에서 살아 오면서 느끼고 부딪힌 점을
특히 양의 탈을 쓰고 있는 병든 늑대와 같은 의료보험제도와 또
교각살우의 어리석음을 저지를 것이 확실한
정부의 의약분업안을 규탄하며,
조금 길어서 죄송하지만 이 글을 모든 경실련 회원님들께서 읽어 주시기 바라며 게시판에 올립니다.
I. 의료보험 수가(진료비)는 과연 정의로운가?
저질 진료가 강요되는 그 실례를 고발합니다.
오늘날 한국의 의료 환경의 여러 가지 문제들은
난마처럼 얽혀있어, 한 가지만 바꾸어 보려고 해도
나머지 수 십 가지 문제가 여기 저기서 드러나는
상황이 되어 버렸으며,
물질적 재정적 기반의 혁신적인 확충없이는
정부나 의사(의료공급자) 또는 국민(의료소비자) 중
어느 한 당사자 집단의 의지나 노력 또는 양보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한계 상황을 이미 넘어 섰다고 생각됩니다.
1977년 의료보험제도가 이 땅에서 시작되고
1980년대 말 전국민 개보험이 되어 오늘날까지
한국의료제도의 중추는 강제적 의료보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의료보험 제도가 건강하게 뿌리 내리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조건을 하나만 들어야 된다면
두 말 없이 건실한 보험 재정이 그 답이라고 생각됩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태의 근본에는
열악한 보험재정이 그 비참한 상태를 숨기고 신음하는 모습이
겹쳐져 있습니다.
재원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국민들의 인기에 영합하려고
무리하게 또 강제적으로 의료보험제도를 운영하다보니
진료행위에 대한 적절한 댓가를 보장할 수 없고
일선 의사나 병원들은 왜곡된 방향으로 유도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의 경우에도 소아정신과 의사가 하루에 몇 명의 환자를 보아야 적절한 양질의 진료가 가능한 지 고민을 많이 해보았지만, 오늘의 국가보험제도의 열악한 조건하에서는 외래진료 1 시간당 환자 6명을 진료하지 않고는 저는 구조 조정과 경영합리화를 외치는 병원장님 앞으로 사표를 써야합니다.
미국에서는 신경정신과 전문의(board certified psychiatrist)의 경우 정신치료(psychotherapy) 1 session (40-45 minute) 당 최하 $150 평균 $220 정도가 보장되지만,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당장 의료보험연합회나 보험공단에 전화 한 통화로 알 수 있듯이 심층정신치료 1시간에 21,800원($18, 개가 웃을 노릇이지요)으로 고시되어 있고, 그나마 이 것도 재원이 부실한 보험자 단체에서는 "건당 진료비"라는 희한한 논리로 이를 대부분 "과
잉진료"(뭐가 "과잉"인지 매우 궁금)로 규정하여 삭감(즉, 진료비를 못 받음)처리 하기 때문에 결국 "지지정신치료 10분당 6,560원 ($5)"의 항목으로 청구할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 면담치료를 하려고 해도 제도적으로 막아버리니
결국 그 다음에 선택할 길은 환자를 쉬지 않고 보는
즉 진료의 양을 늘리는 방법밖에 없지요.
그래서 한 시간에 6명씩 소아정신과환자 진료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점쟁이 인가요 아니면 하느님인가요? 어떻게 10분만에 아이 진찰하고 어머니 면담하고 진단에 필요한 검사에 대하여 결정을 내리고 예후에 대한 판단을 하고 어떻게 치료할 지 어머니와 상의하고...... .
다 무슨 코미디 아니면 악몽 같다고 생각합니다.
삼풍백화점 무너진 자리 지날 때마다 저도 가슴이 뜨끔합니다. 부실 공사는 건축물이나 토목공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제가하는 진료도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악덕 건설업자 욕할 자격이 없지요. 어찌 제가 건축 감독 소홀히 한 공무원들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오진하지 않고, 의료사고 일어나지 않고 만 7년째 정신과 전문의로 지낼 수 있었음은 오로지 천주님의 가호 덕이라 생각합니다.
미국의 예를 들것도 없이 우리 나라에서도 정신과의사도 아닌 아동상담소의 상담원이 1session 면담에 얼마를 받는 지 아시면 비유가 적절할 것 같군요. 원광아동상담소(02-561-2082)의 모 상담원(숙대 아동복지과 졸업)은 100,000원 받더군요.
(아마 현실적으로 이 정도의 진료비가 적정할 것 입니다.)
소아정신과 전문의는 21,800원도 과잉진료라고 경고장 날라와서 허파가 뒤집어지는데 그래서 6,560원도 감사히 받고 있는데...(소아과 진찰료는 2000원이니 그나마 위안이 됨).
경실련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
정신과 전문의가 정신분석치료 1시간 한 것에 대하여
그 알량한 21,800원도 아까와서
과잉진료 부당청구라고 누명씌워 삭감시키고
생각없는 머저리 언론에서는 "병의원 부당청구 1년에 얼마.. 도둑놈들 ..." 여론을 오도하고...
이 나라가 제 정신으로 돌아가는 나라인지를.....
너무 직접적인 비유를 하여 죄송합니다만
경실련 회원의 아드님이나 손자가 자폐증 환자인데
담당 소아정신과 의사가 10분 내에 모든 진찰 면담 병력조사 판단 그리고 결정까지 다 내린다면 진료비 싸다고 경실련은 만족하시겠습니까?
당연히 그 의사를 비난하거나 마음이 여린 부모라면
속으로 불만을 쌓아 두고 있을 겁니다.
경실련 회원님께서는 잠시 생각하시는 것으로 끝나지만 저는 이러한 고민이 은퇴하는 날까지의 매일 매일의 일상입니다.
의료보험 제도에 대한 특히 재정적인 뒷받침을 포함한 근본적인 수술이 시급히 시행되지 않고서는 결국 다 망해버리고 그 최종적인 피해는 고스란히 아무 것도 모르는 환자가 입습니다.
2. 정신과 환자의 의약분업
: 양두구육 탁상공론의 극치인 정부안
의약분업에 대하여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 나라의 독특한 의료 문화적인 배경에 비추어
국민들의 질병에 대한 인식 구조라든가 질병행동(illness behavior)이 과연 지금의 정부안으로 의약분업이
성공적으로 정착될 것인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셨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의약품 오/남용이나 병원의 의약품 거래와 관련된
부조리의 개혁과 같은 진료 상황 이외의 차원에서만
의약분업을 생각하시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됩니다.
세부적인 사안이라서 좋은 예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현재 정부안에 의하면 정신과환자 중에서는
정신분열병, 조울증 기타 자해 타해 등의 위험성이 있는 환자만 분업 예외로 되어 있는 데,
이야말로 대다수 정신과 환자들의 목을 조르는
독소 조항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신과에서는 정신병자만 치료받는 게 아니고
불안신경증 강박증 불면증 성기능장애 기타 노이로제 어린이신경정신질환 등등 실로 다양한 질환을 가진 환자들이 정신과 외래를 드나들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이들 환자들은 자신이 이러한 병에 걸린 것에 대하여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으며,
일부 흥미 위주의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들을
무슨 위험한 잠재적 범죄자처럼 그려낸 적도 있습니다.
집안에 정신과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일부 개인 기업에서는 취직도 시키지 않고,
심지어 제가 진료했던 어린이의 고모는
조카 한 명이 소아정신과에서 검사 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약혼자 집안으로부터 파혼을 당한 일이 있어
제가 큰 충격을 받은 일도 있었습니다.
제 외래에 다니는 어린이의 경우 상당수가
아버지나 시집 식구들이 소아정신과에 다니는 것을 모르게 하려고 엄마와 어린이만 다니고 있습니다.
어른 정신과도 비슷합니다.
제가 존경하던 모 교수님(역시 의사)은 재수하는 자기 딸이
우울증을 앓고 있었지만 혹시 소문이 무서워
우리 병원에서 치료받기를 거부하시고 자가용 타고 1시간 30분이나 걸리는 다른 병원에서 진료를 받게 하셨습니다.
경실련 회원님 같으시면 며느리 되실 분 구하는 맞선 자리에서 그 부모님이 정신과 약 먹고 계신다고 하면 흔쾌히 결혼시키시겠습니까?
그래서 자기 친구나 가족에게까지 숨기고 정신과에 다니는 나라가 우리 대한 민국입니다. 남녀노소 부자 가난한 자 배운 자 못 배운 자 다 똑같은 입장이 됩니다.
이제 금년 7월 1일부터 의약분업이 시행되면
저를 포함한 모든 정신과 의사들은 이들에게
병명 예를 들어 "자폐증" "마약중독" "알콜 중독" "성격장애" "조루증" "여성 성기능 장애"
등등 같은 진단이 적혀있고 특히 개인 정신과 의원의 경우
"임태식 정신과 의원"이라고 정신과 세 글자가
분명히 박혀있는 처방전을 손에 쥐어주면서
약국으로 보내어야 합니다.
이들이 과연 경실련 모 인사가 말하듯이
"편리하게 집 근처에 있는 동네 약국"에 갈까요?
제 생각에는 3분의 1이상은 그 날부터 약 조제 받기를 포기할 것이고, 나머지는 먼 딴 동네까지 버스 한참 타고 가서 약사에게 그 잘난 복약지도는 커녕 그 앞에서 얼굴도 못 들고 있다가 도망치듯이 집으로 돌아가겠지요.
그 환자분들 상당수은 정신과에 다니는 자신의 처지를 고민하다가 그 처방전 찢어버리고 보건복지부나 경실련 욕을 하면서 재발의 그 날을 기다리거나 ,
조금 영악한 일부 환자들은
그 처방전을 가지고 "정신과"라는 재수없고 불길한 이름이 안 붙은 의원에 - 예를 들어 먼 동네에 있는 신경외과나 내과 아니면 피부과에라도 가서 -
"원장님 제발 다른 병명으로 진단붙여서 이 것하고 똑같이 처방하여 주십시오"
사정하여 약만 타먹으면서 악화될 때까지 버티다가,
드디어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운 순간이 되면
정신과 병동에 입원하여 훨씬 더 많은 의료보험 재정을 축내게 되겠지요.(공갈처럼 들리나요?)
의약품 오/남용과 약품거래에 따른 비리를 막는다는 취지로 실시되는 좋은 제도가, 그들에게는 빈대 몇 마리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태우는 재앙으로 다가갈 지도 모릅니다.
모름지기 시민단체라면 이런 세부적인 사항까지도 충분한 생각을 하면서 주장을 하던지 비판을 하던지 해야합니다.
대부분의 젊은 정신과 의사들은 매우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눈으로 정부 의약분업안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너무나 순진하고 무책임한 의약분업안 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바른 말 좋아하는 경실련 대표 중에서 단 한 분이라도 가족 중에 정신과 치료받으러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면 이러한 안을 "현재로서는 가장 현실적이고 적절한 안"이라고 우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정말로 무책임한 소영웅주의자 이거나 아니면 똑똑한 척하는 머저리인지도 모릅니다.
제가 일본 북해도 대학에 근무하는 정신과 교수에게 들었는데 그 나라도 우리와 비슷한 질병관과 문화인데도 환자나 보호자가 조제 받을 곳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환자들이 고민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즉 임의분업을 하고 있나 봅니다.
우리 나라도 정신과 환자들에게는 임의 분업을 하도록 해야합니다. 만약 조제료 때문에 자기 병원에서 약 지어가라고 강요하는 일부 이기주의적인 의사가 있을 지 모르니까 이 경우의 조제료는 소액으로 책정한다면 헛똑똑이 경실련에서도 이의가 없을 것 같군요.
경실련 관계자 여러분, 환자는 한사람 한사람이 다 입장이 다르고 질병도 감기나 종기 축농증만 있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제도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가능한 것은 미리 미리 전문가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서 해야합니다. 정신과 의사의 의견이 배제된 채 어떻게 정신
과 환자의 권리가 보장되겠습니까?
현재의 정부안 의약분업은 정신과 환자에게
득이 되는 제도가 아니라 오히려 독이 되어
정신과 환자들을 막다른 골목에 몰아 넣고서는
"우리가 너희들을 약품 오/남용으로부터 구해내었다! 고맙지?"
하고 약올리는 것입니다.
3. 결론
끝으로,
의료보험도 의약분업도 필요한 재원을 확실히 (보건복지부 이종윤 차관님이 말씀하는 것처럼 막연한 예측이 아니라 확실하게) 확보하면서, 그리고 그 제도의 잘 보이지 않는 응달에서 울고 있는 환자나 가족은 없는 지 살펴보면서 이성적으로 진행시켜야 합니다. 재정적 토대 없이는 다 물거품입니다.
경실련은 경제정의를 실천하는 단체이니
무식한 의사인 저보다는 더 잘 아시겠지요.
경실련은 양심이 있는 시민단체이니까 의약분업안에 유성희 회장이 "국민에게 한 약속"(?, 저는 그런 약속한 적 없지만)한 것 지키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정부가 "의료보험 재정 50% 책임지겠다"고 한
국민과의 공약부터 지키라고 주장하세요.
민주적인 의료 질서를 강제적으로 무너뜨리고
저질 진료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든 대한민국 정부부터
정신차리라고 말씀해 주세요.
의과대학 교수되어서 공부만 하려고 했는 데,
일주일에 150명 어린이 환자와 그 어머니까지 모두
300명 만나고 나면 잠 잘 생각밖에 없습니다.
경실련님은 이해하시기 어려우실지 모르지만
저도 다음 규탄대회나 휴진 투쟁 때에는
아무래도 참여해야 할 것같습니다.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대안을 국민에게 제시하여야지
시위나 휴진 같은 극단적인 방법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 동안은 병원에 남아 있었는데,
정부의 대책이란 게
언발에 오줌누기 식의 너무나 근시안적이고,
언론의 논조도 결국 히포크라테스 정신 운운하는
아마추어 수준을 못 벗어나는 갑갑한 현실에서는 결국 demonstration과 protest 밖에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군요.
저도 자폐증 환자 한 시간에 한 명씩 진료하고 싶습니다.
그 죄 없는 어린이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보건복지부고 경실련이고 다 불질러 버리고
저도 같이 사라져 버리고 싶어요.
어차피 기능부전에 빠져 버릴 의료환경이라면
아니면 겨우 명맥만 유지해서 어제와 똑 같이
내일도 진료해야 한다면,
욕을 좀 먹고 몇 명 구속되더라도 조금 빨리
이 아유슈비츠 가스실 같은 현실을 세상에 알리고
국민들 모두가 한 번 쯤 의료와 건강에 대하여
그리고 의사는 과연 우리들의 나쁜 이웃이었는가
생각해볼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