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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 한국사 박진의 항전
제국의명장 추천 0 조회 916 09.02.26 13:11 댓글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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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2.27 06:13

    첫댓글 잘봤습니다 ^^

  • 09.02.27 11:15

    다 읽고 떠오르는 건 딱 한줄이네요. 박진-특기:도주 ~.~;;

  • 작성자 09.02.27 12:22

    그래도 박진의 군대가 임진년 초기 전투에서 일본군을 적극적으로 저지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박진에 대한 평가는 박진이 살았던 당대에도 엇갈렸습니다.

  • 09.02.27 17:05

    최소한 박진 정도면 그나마 책임감있고 현장 일선에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아둥바둥 노력하던 양장(良將)에 속한다고 봅니다. 실제로 후일 보면 경주성도 다시 탈환해내죠-ㅅ-;; 사실 군제가 저정도로 쉬발난 상태라면 저정도 대응도 결코 쉽지 않거든요. 거의 예비군 모아서 북한군 주력을 막는 수준인데-_-;;

  • 09.02.27 17:19

    스커미쉬 활성화했다고 생각해주세요

  • 09.02.27 23:10

    그래도 수군 다 말아먹고 항전도 포기한 채 도주한 박홍이나 원균 따위보단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드네요. 적어도 박진은 싸우기라도 했잖습니까. 박홍과 원균 이 두 놈은 조선수준의 주력인 경상도 수군을 싸우지도 않고 거의 대부분 말아먹었지요. 그 경상도 수군만 제대로 활약했어도 임진왜란이 그렇게까지 처참하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 작성자 09.02.28 02:56

    치우승천:박홍과 원균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박홍은 본영인 좌수영이 동래에 있어서 일본군의 공격을 개전 당일부터 겪었기 때문에 포항 흥해에 이르는 경상좌수군을 집결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가 도망치지 않았다면 육상에서 공격을 받아 육군으로서 싸우다 전멸했을 것이고 바다로 나가 일본군 수송단을 공격했다면 포격전이 아닌 등선육박전을 당해 전멸했을 겁니다. 원균은 초기의 행적이 단편적으로 남아있는데 무개념으로서 도망다닌 것 같진 않아 보입니다. 그가 개념없이 도망쳤다면 이순신에게 구원요청과 정탐보고를 하지 않고 육지로 달아났을 겁니다. 박홍에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원균처럼 함대를 끌고 바다

  • 작성자 09.02.28 15:43

    로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인데 좌수영 앞바다가 이미 포위된 상황이었는지,아니면 바다를 포기하고 육지에서 싸우려고 한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후자를 뒷받침하는 행적이 있긴 합니다.

  • 09.02.28 05:02

    명장 / 애당초 [섬나라 애들이니 수군이 쎄다. 그러니 육지에 올려놓고 육전 ㅇㅋ?]라는 마인드로 있던 조선군의 수뇌부(..)인데다가 개때 러쉬오면 바로 털릴 로스트템플 앞마당 멀티인 좌수영인 만큼 박홍의 행적은 어느정도 변명의 여지가 있겠습니다만-_-;; 앞마당 멀티 털리는 동안 언덕위의 시즈탱크로 지원사격도 못해준체 꼴아박은 원균은 좀-_-;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 작성자 09.02.28 13:27

    무장공비:원균의 경우,개전 당일에 바로 경상우수군을 집결시켰다고 해도 출동할 수 있는 무렵에는 김해방면으로 일본군 선단이 쳐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박홍과 달리 원균은 포격전을 할 수 있겠지만 수에 밀려 포위섬멸 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 원균이 부산으로 가는 일본군을 공격하려고 했다면 일본군이 점령한 낙동강 하류와 다대포와 서평포와 절영도를 지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원균은 숨어지내면서 일본군 소규모 함대와 교전하고 한편으로 이순신에게 지원요청하여 연합함대를 구성하자고 한 것 입니다. 원균이 비록 적극적으로 싸우는 것은 회피했지만, 정찰은 부지런히 했습니다. 그의 잘못은 그의 수군을 보존하지 못한 겁니다.

  • 09.02.28 19:03

    명장 : 원균이 소규모 교전을 했는지는 일단 불분명한 편이고 저도 원체 조선군의 준비상태가 쉬발났다는걸 아는지라 '원균이 전쟁 당일날 제대로 된 반격을 못 펼쳤으니 즐'하는 정도의 주장은 하지 않습니다-_-;; 명장님의 마지막 한문장으로 정리가 가능하겠군요. [그의 잘못은 그의 수군을 보존하지 못한 겁니다.] 간단명료입니다.

  • 09.02.27 12:46

    ㅌㅌ만 하는 것같지는 않군욧

  • 09.02.27 20:54

    역시 한줄로 찍 쓰고 말았더니 이런 오해가 생기는군요;; 끝끝내 살아남아서 역할수행을 계속 해주는 것 역시 중요한 장수의 덕목으로 생각하고 나름 찬사를 한건데 ㅎㅎ

  • 09.02.28 15:05

    원균이 일본의 소규모 함대와 교전을 했다지만, 증거가 부족해서 별로 믿을 바가 못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설령 했다고 해도 전체적인 전황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으니 그리 자랑으로 내세울 정도는 못됩니다.

  • 작성자 09.02.28 15:42

    원균이 일본군 소규모 함대와 교전했다는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뿐만 아니라 경상감사 김수 휘하 군관 이탁영이 쓴 [정만록]과 전라도에 있던 선비 오희문의 [쇄미록],전라좌수사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원균을 찬양하는 [원균행장록]에도 교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원균의 악행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긴 하지만 조그마한 공이라해서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개전 초기 원균이 있었던 낙동강 하류와 남해 지역은 일본군 선단이 수십에서 수백척씩 돌아다니던 곳 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원균의 초기 행적에 대해 비난만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09.03.01 12:45

    소규모 함대 교전은 원균이 스스로 자기 전공을 주장한 걸로 압니다만. 물론 소문은 돌았고요. 그리고 집결완료시 일본군 수군은 오지도 않았고, 수송선단들은 싸울 수도 없으며, 병력을 부지런히 실어나르느라 여력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경상우수군은 전라도 수군 전체를 합친 것에도 필적하는 거대 수영으로(전선이 70척.) 숫적으로 밀린다는 것도 말이 안되죠. 삼도수군 다 합처도 경상우수영 전체 수군과 엇비슷했던 적도 많았는데,(특히 정유재란당시.) 그리고 일본군 전선도 임란때의 숫자는 많은 편이 아닌데(숫자로 밀어붙이는 것 역시 정유재란당시.) 아무것도 못하고 날려먹은 원균은 답이 없죠.

  • 작성자 09.03.01 14:47

    일본군 수병이 동래성 전투에 참전했다고 프로이스 일본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4월 하순엔 거제 방면으로 일본군이 쳐들어왔다고도 합니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개전 초에 휘하에 군선 100여척에 군사 1만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일본군이 거제 방면으로 쳐들어올때 해산시켰다고 합니다. 4월 하순에 부산 방면에는 일본군 배 500여척이 정박해있었다고 원균이 장계를 올렸더군요. 소규모 함대 교전은 의심스럽지만 거짓이라는 근거를 아직 못봤습니다.

  • 09.03.01 17:23

    1군 고니시군을 수송한 350여 척, 전부 수송선입니다. 2군도, 3군도, 전부 수송선입니다. 제대로 된 수군이 넘어온 건 4군부터이며, 이때가 4월 25일이니 4월 하순이군요. 일본 수군의 활동도 이때부터입니다. 그리고 원균이 일본군의 침입을 확인하고 전라좌수영으로 공문을 보낸 게 4월 14일, 좌수영에 도착한 게 4월 16일이고 부산포 함락은 4월 15일입니다. 즉, 경상우수영 최서단 진포까지 늦어도 4월 16일까지는 공문을 보낼 수 있고, 수군은 인근 고을에서 인력을 충원하고, 숙련도도 높으므로(1년 2교대)즉시 소집, 4월 18~19일 사이에 집결이 가능합니다. 제 2군인 가토군의 부산포 상륙 시기는 4월 18일.

  • 09.02.28 21:35

    나름 완소남 박진!!

  • 09.03.01 17:46

    제길, 두번 쓴게 다 지워지다니... 어쨌든, 부산포까지 이틀 잡으면 4월 20일에는 도착 가능, 그때 부산포에는? 3군 맞을 준비 하고 있겠죠. 고니시군은 북상, 가토군도 4월 19일에 경주쪽으로 북상. 3군 맞을 준비 하고 있는 부산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아무것도 모르고 건너오는 3군을 때려잡을 수 있습니다. 350여척 숫자요? 전부 수송선이죠. 저항도 못하고 학살당합니다. 수군은 4군 소속이고, 우연히 3군과 같이 넘어온다 해도 최대 전선 70척, 협선 70척의 규모를 지니는 경상우수영에 별로 숫적으로 압도도 못하고(그때 일본 수군 다 긁어모아도 100여척 남짓이던가...) 병사들은 지처있으며, 질적으로도 경상우수영이 우위에 있습니다

  • 09.03.01 17:48

    정상적으로 돌아갔다면 임진왜란이 아니라 임진년에 일어난 부산포왜란 정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정상적으로 공문 보내고, 함대 이끌고 부산포로 나아가, 평범하게 싸워주기만 했다면요. 명장정도도 필요 없습니다. 유능할 필요도 없습니다. 평범한 장수만 됐어도 충분했습니다. 그정도였죠.

  • 작성자 09.03.01 18:41

    4월 13일 부산포에 나타난 일본군 선단은 최소 400여척 이상되는데 경상좌수영은 그곳에서 불과 20~30여리 떨어진 곳에 있고 경상우수영은 1~2일 걸리는 거제도에 있습니다. 조선 수군이 집결해있었다면 정말로 부산포대첩을 거뒀을지도 모르지만 조선수군은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원균이 담력이 있어서 거제도 수군만 이끌고 갔다면 4월 14일 저녁이나 4월 15일부터 부산 앞바다에서 일본군 수백척과 교전을 벌였을텐데요..., 그리고 수송선이라고 해도 일본수군의 전술인 등선육박전을 할 수 없다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 작성자 09.03.01 18:43

    또 기술되어 있는 병선 100척이라는 것이 모두 판옥선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협선을 포함한 수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순신이 첫 출정했을때 병선이 85척 이었지만 판옥선은 30여척에 불과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균이 경상수군을 집결시켰을 것으로 추정되는 4월 18~19일 무렵엔 일본군 3번대는 다대포를 거쳐 김해로 가고 있었습니다. 원균이 만약 조련된 수많은 전함과 병사들을 4월 하순에 단순히 겁나는 이유로 스스로 해체 시켰다면 잘못이라고 할 수 있지만 최소한 개전 당일부터 해체 직전까지 그가 스스로 잘못을 저지른 것은 없다고 봅니다.

  • 09.03.02 18:21

    전선=판옥선. 협선=협선입니다. 조선 수군의 전투 및 초계 함선은 판옥선과 협선만을 칩니다. 1차출동 이후 조선 수군은 협선은 전투에 그닥 쓸모 없다고 판단하고 판옥선 인력충당에 최대한 동원하지만, 그 이전이죠. 첫 출정 당시 전라좌수영의 전선과 협선 숫자는 24척(전선) - 18척(협선) 이고, 나머지 함선은 사후선입니다.

  • 09.03.02 18:39

    1군 고니시군 상륙이 4월 13일 밤에서 4월 14일 오전, 2군 가토군 상륙이 '4월 18일' 이고 4월 19일에야 기장현 경계를 넘어 경주로 올라왔는데 갑자기 구로다군이 4월 18일날 다대포를 거처 김해라니, 만단위 병력이면 상륙에만 하루 가까이 걸리는 데 그럼 4월 17일날, 먼저 도착해야 할 2군보다 무단으로 3군이 넘어왔다? 거기다가 4군은 4월 25일에 상륙했는데, 시간 잘지켜 상륙하던 일본군이 갑자기 한참 늦게 도착하는 군요. 3군 도하시기가 틀렸습니다. 그리고, 350여척이니 400여척이니 하는 숫자만 생각하지만, 그거 다 수송선이에요. 제대로 된 수군영주는 4군 소속이라니까요. 4월 25일이 일본군 수군의 도착시기고,

  • 09.03.02 18:44

    수군 활동도 그 이후입니다. 4월 말~5월 초 이전에 경상우수영 관할구역내로 넘어온 일본군은 육군과 수군 포함 한명도 없습니다. 그리고 5월 5일 전라좌수영에 합류한 경상우수영 함대는 전선 4척, 협선 2척이죠. 일본군 전투기록에도 안 올라와 있는, 조선 최대 수군을 격파한 전투? 전선 70척에 협선 70척이면, 일본군 계산에는 거의 1만명 수준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다이묘 쯤은 되야 동원할 수 있는 대병력인데, 그런 병력을 물리친 전투? 그런게 있다면 일본 기록에 안남을 리가 없잖습니까.

  • 작성자 09.03.03 00:17

    김해성 전투에서 설명했지만 부산-다대포를 거쳐 김해 죽도에 4월 19일에 일본군 3번대가 상륙합니다. 가토 기요마사군은 4월 18일에 상륙하였고 4월 19일에는 언양을 함락하고 경주와 울산 방면으로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규슈 나고야에는 함선이 2000여척이 배치되었다고 임란 직전에 명나라 사람이 증언한 적이 있었지요.

  • 09.03.02 18:51

    조선 수군이 분산되어 있다고 해도, 최서단까지 이틀이면 공문이 갑니다. 수군은 그 지역 고을 주민들로 충당하고, 1년 2교대니 훈련도도 높으며, 동원속도도 빠릅니다. 1년에 5교대 하는 육군과는 훈련의 양이 달라요. 2군 도착 시기인 4월 18일에는 이미 경상우수영 전 함대가 거제도에 집결이 가능하죠. 그리고 수송선으로 등선육박전이 불가능하진 않다라... 아니 뭐, 바다에서 싸워본 적이 한번도 없어 뱃멀미로 고생하면서 조총 한번도 못쏘는 육군이, 강제동원된 민간인이 운용하는, 내구도도, 속도도 전선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수송선을 타고도 억지로 시도할 수는 있겠죠. 그러나 그런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 09.03.02 18:57

    그럼 돌아오는 건 학살이란 걸 알거든요. 아무리 옛날이라고 해도, 수송선은 싸우기 위해 설계된 함선이 아닙니다. 어떤 배는 병력 있는대로 채우고, 어떤 배는 물자 있는대로 채우고, 방패판이나 사다리 같은, 해상전투용 물건은 싣지도 않았고, 속도도 느린, 오로지 물자 수송만을 위한 배입니다. 전투함처럼 방어력과 속도를 갖추고, 병력과 병기, 물자를 적절히 나눠 배분한, 그런 배가 아닙니다. 육군도 바다에서 싸울 수 있는 병력이 아닙니다. 해상전을 할려면 그에 따른 훈련이 필요한 법입니다. 수군과 상륙병력은 확실히 구분되어 있습니다.

  • 작성자 09.03.03 01:08

    확실히 공문은 이틀에서 사흘이면 도착합니다. 다만 함선이 더 느리고 병력과 무기를 동원하여 출항하면 집결은 빨라도 사흘이고 늦어도 6일 입니다. 4월 14일부터 4월 20일 사이 원균의 경상우수군이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술이 없습니다. 그리고 원균 휘하의 경상우수군이 정예였는지 속단하지 못하겠습니다. 훈련이 보통일 수도 있고 조선중기 사회상황을 따라 약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일본군 군함은 단기간에 빨리 제조하여 약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임란기 해전을 일본수군 9000명만 전적으로 담당하지 않았기에 많은 책들에선 일본육군이 수군으로 활용되기도 했다고 주장합니다.

  • 09.03.02 19:03

    스페인 무적함대와 영국 해군이 싸운 칼레 해전, 스페인의 전술은 등선육박전인데, 유럽 최강 지상군이 가득 타 있는 수송선은 전투에 참여 안하고 도망갑니다. 왜일까요. 명랑해전때 일본 수군 후방엔 수송선이 2~3백여척 가까이 병력 가득 태우고 대기했는데 전투 참여 안하고 철수합니다. 왜일까요. 칠천랑 해전때 부산포에서 삼도 연합수군은 바다를 건너오는 일본 수송선 천여척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이 천여척 수송선이 전부 다시 바다 건너 도망갑니다. 왜일까요. 개넨 수송선이고, 탑승한 병력은 수군이 아니라 육군이거든요. 해전에 참여같은 건 생각도 못하거든요. 일방적인 학살만 있을 뿐이란 걸 알거든요.

  • 09.03.02 19:13

    수송선과 육군 병력으론 해전 못합니다. 아, 물론 육군 병력에 해전 훈련 열심히 시키고, 수송선을 전선으로 개장한다면야 싸울 수 있죠. 노량해전때 시미즈군이 그런 케이스니까. 남해안 근처에 쌓은 왜성에서 거의 1년 가까이 해전 훈련을 시키고 있는 함선 전부 전선으로 개장했으니까 가능은 합니다. 그런데, 임란 첫해에? 해전 훈련 하나도 안된 인력으로 해전을? 불가능하죠. 원균이 우수영 함대를 다 모아왔든지, 아니면 간이 배밖으로 나와 거제도 본영의 함선만 이끌고 왔든지간에 결과는 마찬가집니다. 일본군 수송선의 일방적인 학살이죠.

  • 작성자 09.03.03 20:23

    부산포에서 일본군 선단 1000여척이 도망간것을 일방적학살을 두려워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봅니다. 전쟁은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하고 싸우는 것 외에 희생을 최소화 하기 위해서 싸우기도 합니다. 양측 함대가 전면전을 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다. 일본군 측에선 이기더라도 전면전에선 희생이 많을 것을 아는데 어찌 함부러 싸우겠습니다. 일본군 선단의 회피는 조선수군을 지치게 하는 술책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귀하의 판단이 전적으로 옳다고 어찌 장담하겠습니까.반면 임진개전 초기 원균이 수군으로 일본군 선단을 공격했을 때 그 선단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원균 함대를 수로 밀어붙였다면

  • 작성자 09.03.03 14:54

    승부가 어떻게 결판났을지 장담하진 못하겠습니다. 귀하께선 이순신처럼 포격전으로 일본육군이 탑승한 선단을 침몰시켜서 몰살시키거나 퇴각하게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상대측에서 어느 정도 손실을 각오하고 포위하여 접근전을 시도하면 어쩝니까. 그리고 당시 일본군을 실은 함선은 해전시에는 병선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 09.03.04 19:49

    어느정도 손실을 각오하고 포위하고 자시고가 불가능합니다. 해상 전투는 육상 전투와는 달라서 훈련이 필요하고, 그런 훈련이 되 있는 병력은 일본군은 4군 이전엔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해상전에 사용될 장비도 없고, 그런 훈련도 되 있지 않습니다. 등선육박전이요? 바다 위에서 제대로 싸울 수도 없는 육군과, 해상 전투용 장비가 구비되 있지 않은 수송선으로 등선육박전이 가능할 거라 보십니까. 대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로, 느릿느릿 달라붙었는데 사다리가 없어서 올라가지도 못하고, 뱃멀미나 할 육군으로 등선육박전은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불가능합니다. 상대가 가만히 있어주는 것도 아닌데요.

  • 작성자 09.03.04 23:36

    상륙하고나서 바로 공성전을 감행한 1군이나 3군은 사다리가 있었습니다. 또한 타국을 해상으로 침공한다면 어찌 수송선단에 호위선단을 붙이지 않겠습니까. 이런 군 상식을 생각한다면 개전 초기에 바다를 덮은 700여척이 일본군 선단이 모두 순수 수송목적으로 동원된 배들은 아닐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수백척의 위압감은 침략군에 대해 상세하게 알지못하는 상대방의 전의를 꺽는데 부족하진 않다고 생각됩니다.

  • 09.03.05 18:42

    해전용 사다리 말입니다. 그리고, 그 '호위선단' 이 존재하지 않기에 원균이 까이는 겁니다. 수군을 담당하던 영주가 소속된 건 4군부터 그 이전엔 수군 영주가 '없습니다.' 그리고, 애시당초에 부산포나 다대포가 넓은 것도 아니어서 수백척이 다 있지도 못하고 말이죠. 수백척의 위압감. 일본군이 가진 건 그게 전부였습니다. 원균은 거기에 놀라서 전 함대를 한달이 채 안되 전투 없이 말아먹었습니다. 뭘로 옹호하겠습니까.

  • 09.03.02 19:18

    그런데, 당시 조선 최대 최강 함대, 명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재건한 삼도수군 전체와 비교해도 크게 꿀리지 않는 거대 함대를 지휘하는 원균은 대체 어디서 어떻게 싸웠길래 일본군 기록엔 일언반구 없고, 조선 기록에도 원균 자평에만 나오는 전투를 벌이고는 함대를 다 날려먹은 걸까요. 싸우긴 한걸까요. 아, 소문으로 따지면야, 용인전투에서 조선군이 이겨서 한성을 수복했고, 히데요시는 조선수군에게 패해 목이 잘렸으며, 원균이 격침시킨 함선이 900척이나 됩니다만, 실제로 그렇던가요. 아니죠.

  • 작성자 09.03.04 01:12

    저도 옛 사람이 쓴 기록을 모두 확신하진 않습니다. 그런 확신이 없기에 저는 불확실한 부분에선 단정지어 기술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지금 남아있는 자료들을 종합하면 원균이 유능한 장수 였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다만 판단은 귀하께서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4월 13일에 원균이나 박홍이 수영에 있든 수군으로 단독 출정했다면 임진왜란을 부산포왜란으로 끝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나 그들도 장렬히 산화하여 전쟁이 일어났을지도 모릅니다. 그 시대,그 상황에 경험하지 않았고 그 상황은 기록으로 한정되어 있으니 현재 제 짧은 소견으로 단정 내리지 못하겠습니다.

  • 09.03.04 20:36

    아악, 제기랄, 어째서 계속 삭제가... 어쨌든, 물론 타고 온 함선도 해전시 병선으로 활용할 수는 있습니다. '준비만 하면' 말이죠. 내구도도 보강하고,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방패판도 준비하고, 그사이에 키잡이, 노잡이, 병사들을 해전훈련도 시키고 하면서 준비만 한다면야 해전도 할수 있죠. 그런데, 임란 초기엔 그런 준비가 되 있지 않습니다. 일본이 섬나라여서 해군이 강하다 생각할 지 모르나, 전국시대를 들여다 보면 해전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지상전이었거든요. 당연히 병력도 지상전 전문. 해전 준비는 안돼 있죠. 수군 영주들의 도착 시기는 4군 도착 시기인 4월 25일. 그 이전엔 해전은 생각도 못합니다.

  • 작성자 09.03.06 16:14

    그렇다면 개전 초기 일본군을 수송한 배가 순수한 수송기능만 하는 배였는지 아니면 수송기능+해전기능이 있는 배인지 알 수 있다면 개전 초기 수십척의 조선수군과 수백척의 일본군 함대의 전투가 어떻게 진행될지 알 수 있겠군요. 안타깝게 그들이 탄 배의 기능에 대해서는 당대 기록에 직접적으로 기술된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귀하가 일방적으로 일본군 함대를 학살한다고 확신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 작성자 09.03.04 23:42

    귀하께서는 임란 초기 전역(특히 해전)에 대한 관심과 식견이 많으신듯 합니다. 리플 답변으론 어느 정도 한계가 있으니 시간 되신다면 한번 채팅으로 이야기 해보고 싶습니다. 귀하가 가진 식견으로 제가 좀더 알고 제가 가진 짤은 소견이 귀하의 식견에 조금이나 보탬이 되는 기회가 있길 바랍니다.

  • 09.03.05 18:45

    지금 군대에 있고, 따라서 상황상 채팅으로 자유롭게 이야기할 상황은 못됩니다. 여기에, 무슨 이유에서인진 모르겠지만 리플을 연속으로 달면 하나 빼곤 삭제되기까지 하는 군요.(...)

  • 09.12.14 16:42

    박진도 나름대로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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