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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13일,밀양부사 박진(密陽府使 朴晉)은 일본군의 침입을 보고 받았고
뒤이어 동래부사 송상현의 지원요청을 받았습니다.
이에 박진은 밀양의 군사들을 모아 4월 14일에 동래성을 지원하러 출정 했습니다.
한편 경상감사 김수(慶尙監司 金睟)는 4월 15일에 진주에서 부산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이 일어나가 전에 경상도를 돌아다니며 성(城)을 쌓고 군진(群鎭)을 점검(點檢)하여
전쟁준비(戰爭準備)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1591년부터 경상도 군읍(群邑)들에 성을 쌓았고
1592년 3월 15일 부터 태천(態川),안골포(安骨浦),가덕(加德),천성(天成),제포(薺浦),
영등포(永登浦),거제(巨濟),옥포(玉浦),지세포(知世浦),조라포(助羅浦),경상우수영(慶尙右水營),
당포(唐浦),사량(蛇梁),가배량(加背梁),고성(固城),소비포(所非浦),삼천진(三川鎭),적량(赤梁),
미조항(彌助項),상주포(尙州浦),곡포(曲浦),평산포(平山浦),남해(南海),사천(泗川)을 순시(巡視)하고
4월 7일에는 진주(晉州)에 이르러 6일간 머무르며 진포(鎭浦-군진과 포구들)를 점검했습니다.
개전(開戰)날인 4월 14일, 그는 진주에서 일본군이 배 400여척을 이끌고 부산에 침입했고,
뒤따라 수없이 많은 일본군이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4월 15일에 진주성에서 말을 타고 부산(釜山)으로 가려고 했으나
진주 동쪽 경계인 반성현(班城縣)에서 부산이 함락되고
첨사 정발과 성 안의 모든 남녀가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어서
조정에 장계를 보내고 경상도 중부와 북부의 수령들에게 전령을 보낸 뒤에
동래(東萊)로 가기로 하고 함안(咸安)으로 이동하여 저물무렵에 도착하였습니다.
김수 일행은 그곳에서 말을 갈아타고 밤새워 칠원(漆原)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이때 김수의 일행 중 마부(馬夫) 한명이 도주(逃走)하려고 하다가 참수(斬首)되었습니다.
4월 16일, 김수일행은 칠원에서 영산(靈山)에서 서쪽으로 10리 떨어진 일문역(一門驛)에 이르러
동래성 함락소식과 동래부사 송상현,교수 노개방,양산군수 조영규,조방장 홍윤관,대장 송봉수,
동래성 안에 있었던 수천의 남녀가 죽임를 당했다는 보고 받았습니다.
또 이날 낮에 밀양에 이르러 양산이 공격 받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김수는 경상도 내의 모든 색군(色軍-예비군)을 징발(徵發)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한편으로 각지에서 분주(分駐--분산 주둔)하여 적세(賊勢)에 따라
서로 도우며 싸우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전라감사 이광(全羅監使 李光)에게 구원 요청을 하였습니다.
[구원을 계속해 달라는 부산ㆍ동래ㆍ양산이 이미 함락되었고 적이 또 밀양(密陽)에까지 범했는데,
그 병세(兵勢)를 보니 사세(事勢)가 버티어 나가기 어려워 또 함락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의 일은 정말 말할 수도 없는 형편이고 이 일을 생각하니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이는 개인(個人)의 화(禍)가 아니고 나라의 일이니,
귀도(貴道)의 군사 3000~4000명과 도의 군관 3~4명을 보내 주십시오.]
이날 김수 일행은 밀양으로 갔습니다.
1592년 4월 15일, 경상좌수사 박홍(慶尙左水使 朴泓)은 당황(唐惶)하고 있었습니다.
이날 박홍은 좌수영의 군사들로 동래성(東萊城)을 지원(支援)하려고 하였으나
일본군의 군세를 보고 싸우지 못하고 좌수영으로 돌아온 상태 였습니다.
그런데 동래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이 경상좌수영으로 쳐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이때 박홍의 경상좌수군은 흥해(興海)부터 동래(東萊)의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에 이르는
동해(東海)와 남해(南海)의 수군(水軍)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경상좌수사 박홍은 그들을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으나
일본군의 최초 공격지역에 본영(本營)을 두고 있었던 경상좌수군(慶尙左水軍)에게
방어를 위해 주어진 시간이나 여유는 많지 않았습니다.
(경상좌수영은 동래성에서 남동쪽으로 불과 10여리 거리 였습니다.)
이때 경상좌수군 소속 군관인 어모장군 권응수(禦侮將軍 權應銖)는 박홍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때 권응수가 정8품 훈련원봉사 였다는 기록이 많습니다.)
“좌수사 영감(營監), 이렇게 된 이상 좌수영 밖의 인가(人家)를 철거(撤去)하시고
거수(拒守-험준한 곳을 의지하여 굳게 지킴)하여 결사항전(決死抗戰) 해야 하옵니다."
권응수는 1589년에 군직(軍職)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생활하다가
1591년에 일본에 대한 소문이 수상하자 경상좌수영에 자진입대(自進入隊)하였고
경상좌수사 박홍의 직속 군관으로서 그해 가을에 진위장군(振威將軍),
겨울에 어모장군으로 승진(昇進)했었는데
그동안 사건(事件-일,상황,물건의 성질)에 따라 박홍에게 진언(眞言)을 올리곤 했었습니다.
이날 권응수가 올린 건의는 거절당하지 않았지만 시행되지도 않았습니다.
마침내 박홍은 현재 자신의 군세(軍勢)로는 일본군을 도저히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좌수영에 불을 지르고 전함(戰艦)들을 자침(自沈)시키고 병사들을 데리고 좌수영을 빠져나가니
권응수는 그와 더불어 함께 일할 수 없다고 여겨 사직(辭職)하고 좌수영을 떠났습니다.
권응수의 하인 2명이 짐을 챙겨 권응수의 뒤를 따라가는데,
박홍이 달려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박홍의 죄는 죽어 마땅하나
두어 괵(馘-적의 목)을 얻으면 저절로 풀려날 수 있으니
공(公)께서 나를 살려주길 바라오!"
동래성이 함락되고 얼마 안되서 일본군은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을 공격하였습니다.
(일본군은 박홍이 달아난 이후에 경상좌수영으로 쳐들어왔는데
난중잡록에 의하면 박홍이 경상좌수영과 경상좌수영의 전함들을 불태우고 달아난 날이
4월 16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박홍이 경상좌수영과 전함들을 불태우고 달아난 뒤여서
경상좌수영을 지킬 조선군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덕분에 일본군은 경상좌수영을 무혈점령(無血占領) 하고
약탈(掠奪)과 살육(殺戮)을 저질렀습니다.
한편 동래성을 지원하려고 했던 기장현감(機長縣監)은 군사를 모으던 도중에
동래성이 함락(陷落)당했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이 소식 듣고 기장현감은 군사들을 데리고 기장현 북동쪽 방면으로 퇴각(退却)하였는데
도중에 병사들이 도망쳐서 나중에는 하인 정팔동(鄭八同)만 현감을 호위(護衛) 하였습니다.
일본군이 기장현(機長縣)을 점령하고 기장현감을 잡으러 오니
정팔동이 기장현감을 구하려고 일본군에게 저항(抵抗)하였으나
결국 현감과 함께 생포(生捕) 되었는데
이는 일본군이 정팔동의 의리(義理)에 감동하여 사로잡되 죽이지 않는 것이라고 전(傳)합니다.
4월 16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 선봉대는 양산(梁山)을 향해 진격(進擊)하였습니다.
그러나 동래성 북쪽 소산역(蘇山驛)에 밀양부사 박진과 경상좌병사 이각의 조선군이 있었습니다.
경상좌병사 이각(慶尙左兵使 李珏)은 동래성 전투가 시작하기 전에 소산역에서 지원한다는 핑계로
동래성에서 빠져나온 후 이곳에서 주둔(駐屯)하고 있었고
(난중일기에 의하면 이각과 박홍은 이날 동래성을 지원하려고 했지만
일본군에게 밀려 지원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밀양부사 박진(密陽府使 朴晉)은 밀양의 군사 500명을 이끌고 동래성을 지원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일본군이 동래성을 포위공격(包圍攻擊)하여 지원을 하지 못하고
소산역에서 이각의 군대와 합류(合類) 하였습니다.
4월 16일 소산역에서 북상(北上)하려는 일본군과
그것을 저지(抵止)하려는 조선군이 접전(接戰)하기 전(前),
박진은 이각에게 말했습니다.
“이 소산역을 지키지 못하면 영남(嶺南)을 우리가 차지 할 수 없으니
제가 1진(鎭)으로서 왜군(倭軍)을 상대하면 좌병사께선 2진(鎭)으로서 뒤에서 기다리시다가
적의 뒤를 쳐주시길 바랍니다.“
이각과 약속한 박진은 군사들을 이끌고 고니시의 군대와 맞서 싸웠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박진의 군대를 압도(壓倒)하였고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이각은 전세(戰勢)가 불리(不利)하다고 생각하여
박진에게 퇴각한다는 말도 안하고 자신의 군사들을 데리고 언양(彦陽) 방면으로 달아났습니다.
결국 박진의 군사들만 소산역 전장(戰場)에 남아 일본군에게 격파(擊破) 당하고
박진은 남은 병사들을 수습(收拾)하여 밀양(密陽)으로 퇴각(退却) 하였습니다.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은 순조롭게 북상(北上)하여
4월 16일 밤에 일본군 선봉대가 양산(梁山)을 함락하고
다음날인 4월 17일엔 1번대 전체가 양산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양산군수 조영규(梁山郡守 趙英圭)는 양산의 군사들을 이끌고 동래성에 갔다가 전사했기 때문에
대장 영산졸 강효윤(代將 靈山倅 姜孝胤)이 양산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는 4월 16일에 양산성 북문(梁山城 北文)을 열고 도망쳐서
많은 양산의 백성들이 그 문을 통해 달아나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1592년 4월 18일,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는 일본군 제2번대가 부산(釜山)에 상륙(上陸) 하였습니다.
일본군 2번대는 총병력(摠兵力)이 22800명으로서
총사령관(總司令官)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등청정)가 10000명을 지휘하고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과도직무)가 12000명을 지휘하고
사가라 나가츠네(相良長每상량장매)가 800명을 지휘했습니다.
이들은 1번대가 함락한 부산진(釜山鎭),동래성(東萊城),양산(梁山)을 거쳐
언양(彦陽)으로 진군(進軍)하였습니다.
원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풍신수길)는 1번대 총사령관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2번대 총사령관인 가토 기요마사가 날마다 번갈아가며 선봉장(先鋒將)을 맡게끔 하게 하였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방침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경쟁의식(競爭意識)이 대단하였기 때문 이었습니다.
4월 18일 아침, 고니시 유키나가 군은 양산(梁山)에서 밀양(密陽)으로 북상(北上)했습니다.
이때 고니시 유키나가 군은 부산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영남대로(嶺南大路)를 따라
이동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양산과 밀양 사이의 황산(黃山)을 지나는 영남대로(嶺南大路)로
일명 황산잔도(黃山棧道)라고 불리는 길을 지나야 했습니다.
이는 황산의 지형(地型)이 좌측(左側)에 낙동강(落東江)을 끼고 우측(右側)에 산이 있어
강가로 좁게 길이 있었기 때문 이었습니다.
황산잔도 끝에 작원관(鵲院關)이 있었는데
좌측은 강이고 우측이 산인데다 작원의 길(황산잔도)은 좁아서
적은 병력(兵力)으로 대군(大軍)을 상대(相對)할 수 있는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때 작원관은 밀양부사 박진(密陽府使 朴晉)의 조선군 300명(혹은 500명)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박진은 소산역 전투에서 패해 밀양으로 돌아온 후,
밀양에서 군대를 재정비(再正備)하고
4월 17일에 다시 모은 군사들을 모두 데리고 작원관으로 가서 수비(守備)하였습니다.
이날 밀양에 있었던 경상감사 김수는 소산역에서 이각의 군대가 도주(逃走)하고
박홍이 수영(水營)에 불을 지르고 달아나고
일본군이 언양(彦陽)과 밀양(密陽) 방면으로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이때 김수는 밀양에서 계속 머무르다가 나중에 밀양이 포위(包圍)당하면
더 이상 호령(號令)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영산(靈山)으로 갔습니다.
4월 18일, 작원관에 도착한 고니시 유키나가군은 작원의 지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이 작원의 지형을 알 수 있었던 것은 포로들을 통해 정보를 알아낸 것인지,
아니면 수년간의 정탐을 통해 알아낸 것인지,
아니면 전쟁에서 즉흥적으로 발견해낸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먼저 일본군은 작원관 정면에 일부 병력(一部 兵力)을 보내어 조선군과 대치(待置)하게 하였고
별동대(別動隊)를 조직(組織)하여 작원관 우측의 황산(黃山)으로 올려 보내
높은 지점에 배치(輩置)하였습니다.
4월 18일 오전(午前), 밀양 작원에서 박진의 조선군은 정면의 일본군에만 신경쓰며
대치(對置)하고 있었는데
우측(右側)에서 일본군 별동대(別動隊)가 산꼭대기에서부터 밀고 내려오자 크게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본대로 하여금 정면으로 작원관의 조선군을 공격하여
전투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박진의 조선군은 붕괴(崩壞)되었고
박진 휘하의 군관 이대수(李大樹)와 김효우(金孝友)는 활을 쏘며 용감히 싸우다가
조총(鳥銃)에 맞아 전사(戰死) 했습니다.
산을 넘어 쳐들어온 일본군 별동대는 박진의 군대의 뒤를 끊어 포위섬멸(包圍殲滅)을 시도하였으나
박진은 얼마 남지 않은 조선군을 데리고 일본군의 포위에서 벗어났습니다.
(이 전투에서 작원관의 조선군을 지휘한 것은 박진이 아니라
박진의 군관 이대수와 김효유 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한편 감사 김수(金睟)는 박진을 돕기 위해 경상우도 고을들에서 지원군(支援軍)을 뽑아 보내게 했는데
그 지원군은 작원에서 전투가 거의 끝나던 무렵에 전장(戰場)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전투에 투입되자마자 일본군에게 겁을 집어먹고 도주(逃走)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낙동강(落東江) 방면으로 달아나서 결국 지원군 수백명이 강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박진은 밀양으로 달아나다가 배가 고파져서
부하들과 함께 어느 민가에 들러 요기(療飢)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박진이 들린 민가(民家)에서는 선비 3명이
(그 중 한명은 지역에서 이름있는 유생 이었습니다.)
일본군을 맞이하기 위한 잔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박진이 나타나니 두려워하였습니다.
이에 박진이 크게 분노(憤怒)하여 직접 그들의 목을 베어버렸고
이후 그는 선비를 만날 때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행(學行)으로 칭송된 자가 위급할 때를 만나 이 꼴이니
그 학행이라는 것을 내가 알 만하다!“
박진은 선비들을 참수(斬首)하고 다시 밀양성으로 퇴각했습니다.
박진이 밀양성에 도착하니 밀양성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박진은 밀양성에서 퇴각하기 앞서
관아와 병고(兵庫-무기 창고)와 창곡(倉穀-곡식 창고)을 불태우고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를 피난시켰습니다.
하지만 박진이 작원관에서 밀양성으로 와서 창고를 불태우고 퇴각하려는 동안에
일본군도 밀양성으로 쳐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박진이 밀양성을 빠져나가기 전에 밀양성 남쪽 영남루(嶺南樓)에 올라가보니
고니시 유키나가가 가마를 타고 비단 우산을 쓰고 밀양성으로 오고 있었고
일본군이 밀양성을 에워싸고 성 밖에서 방화(放火)와 약탈(掠奪),강간(强姦)을 하고 있었습니다.
박진이 밀양부의 신주(神主)를 챙겨서 밀양성을 나오니 성 밖에 일본군이 깔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박진은 용감하게 일본군의 포위망에 돌진(突進하여
일본군 2명(혹은 몇 명)을 베고 탈출(脫出) 하였습니다.
하지만 텅 빈 밀양성은 4월 19일에 일본군이 점령하였고
일본군은 이날 조선인 300명을 참살(斬殺)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밀양에서 빠져나온 박진은 경상감사 김수(慶尙監使 金睟)가 있는 거창 방면(巨昌)으로 가서
감사 김수의 일행과 합류 했습니다.
1592년 4월 18일 작원관전투상황도(鵲院關戰鬪狀況圖)
1592년 4월 15일~4월 18일 전역도(戰域圖)
노란색 선은 경상감사 김수(慶尙監使 金睟)의 이동방향(移動方向)을 나타냅니다.
빨간색 선은 일본군 1번대 총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의 진격방향(進擊方向)을 나타냅니다.
보라색 선은 일본군 2번대 총사령관 가토 기요마사의 북상방향(北上方向)을 나타냅니다.
파란색 선은 경상좌병사 이각(慶尙左兵使 李珏)의 도주방향(逃走方向)을 나타냅니다.
하얀색 선은 경상좌수사 박홍(慶尙左水使 朴泓)의 도주방향(逃走方向)을 나타냅니다.
초록색 선은 밀양부사 박진(密陽府使 朴晉)의 진격(進擊)과 퇴각(退却) 방향(方向)을 나타냅니다.
갈색 선은 기장현감(機長縣監)의 도주방향(逃走方向)을 나타냅니다.
회색 원은 김해부사 서예원(金海府使 徐禮元-김해)와 경상우병사 조대곤(慶尙右兵使 曺大坤)의 조선군 주둔을 나타냅니다.
참고자료:조선왕조실록(선조수정실록)
연려실기술
재조번방지
난중잡록
징비록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프로이스의 일본사)
정만록
임진전란사
기장문화원 홈페이지
국역 충의공권응수장군실기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홈페이지
대동여지도
전투도 제공:파워꼬레아 KDN 자주국방네트워크 권순삼(산하)
지도 제공: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홈페이지
첫댓글 잘봤습니다 ^^
다 읽고 떠오르는 건 딱 한줄이네요. 박진-특기:도주 ~.~;;
그래도 박진의 군대가 임진년 초기 전투에서 일본군을 적극적으로 저지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박진에 대한 평가는 박진이 살았던 당대에도 엇갈렸습니다.
최소한 박진 정도면 그나마 책임감있고 현장 일선에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아둥바둥 노력하던 양장(良將)에 속한다고 봅니다. 실제로 후일 보면 경주성도 다시 탈환해내죠-ㅅ-;; 사실 군제가 저정도로 쉬발난 상태라면 저정도 대응도 결코 쉽지 않거든요. 거의 예비군 모아서 북한군 주력을 막는 수준인데-_-;;
스커미쉬 활성화했다고 생각해주세요
그래도 수군 다 말아먹고 항전도 포기한 채 도주한 박홍이나 원균 따위보단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드네요. 적어도 박진은 싸우기라도 했잖습니까. 박홍과 원균 이 두 놈은 조선수준의 주력인 경상도 수군을 싸우지도 않고 거의 대부분 말아먹었지요. 그 경상도 수군만 제대로 활약했어도 임진왜란이 그렇게까지 처참하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치우승천:박홍과 원균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박홍은 본영인 좌수영이 동래에 있어서 일본군의 공격을 개전 당일부터 겪었기 때문에 포항 흥해에 이르는 경상좌수군을 집결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가 도망치지 않았다면 육상에서 공격을 받아 육군으로서 싸우다 전멸했을 것이고 바다로 나가 일본군 수송단을 공격했다면 포격전이 아닌 등선육박전을 당해 전멸했을 겁니다. 원균은 초기의 행적이 단편적으로 남아있는데 무개념으로서 도망다닌 것 같진 않아 보입니다. 그가 개념없이 도망쳤다면 이순신에게 구원요청과 정탐보고를 하지 않고 육지로 달아났을 겁니다. 박홍에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원균처럼 함대를 끌고 바다
로 도망치지 않았다는 것인데 좌수영 앞바다가 이미 포위된 상황이었는지,아니면 바다를 포기하고 육지에서 싸우려고 한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후자를 뒷받침하는 행적이 있긴 합니다.
명장 / 애당초 [섬나라 애들이니 수군이 쎄다. 그러니 육지에 올려놓고 육전 ㅇㅋ?]라는 마인드로 있던 조선군의 수뇌부(..)인데다가 개때 러쉬오면 바로 털릴 로스트템플 앞마당 멀티인 좌수영인 만큼 박홍의 행적은 어느정도 변명의 여지가 있겠습니다만-_-;; 앞마당 멀티 털리는 동안 언덕위의 시즈탱크로 지원사격도 못해준체 꼴아박은 원균은 좀-_-;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무장공비:원균의 경우,개전 당일에 바로 경상우수군을 집결시켰다고 해도 출동할 수 있는 무렵에는 김해방면으로 일본군 선단이 쳐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박홍과 달리 원균은 포격전을 할 수 있겠지만 수에 밀려 포위섬멸 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 원균이 부산으로 가는 일본군을 공격하려고 했다면 일본군이 점령한 낙동강 하류와 다대포와 서평포와 절영도를 지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원균은 숨어지내면서 일본군 소규모 함대와 교전하고 한편으로 이순신에게 지원요청하여 연합함대를 구성하자고 한 것 입니다. 원균이 비록 적극적으로 싸우는 것은 회피했지만, 정찰은 부지런히 했습니다. 그의 잘못은 그의 수군을 보존하지 못한 겁니다.
명장 : 원균이 소규모 교전을 했는지는 일단 불분명한 편이고 저도 원체 조선군의 준비상태가 쉬발났다는걸 아는지라 '원균이 전쟁 당일날 제대로 된 반격을 못 펼쳤으니 즐'하는 정도의 주장은 하지 않습니다-_-;; 명장님의 마지막 한문장으로 정리가 가능하겠군요. [그의 잘못은 그의 수군을 보존하지 못한 겁니다.] 간단명료입니다.
ㅌㅌ만 하는 것같지는 않군욧
역시 한줄로 찍 쓰고 말았더니 이런 오해가 생기는군요;; 끝끝내 살아남아서 역할수행을 계속 해주는 것 역시 중요한 장수의 덕목으로 생각하고 나름 찬사를 한건데 ㅎㅎ
원균이 일본의 소규모 함대와 교전을 했다지만, 증거가 부족해서 별로 믿을 바가 못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설령 했다고 해도 전체적인 전황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으니 그리 자랑으로 내세울 정도는 못됩니다.
원균이 일본군 소규모 함대와 교전했다는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뿐만 아니라 경상감사 김수 휘하 군관 이탁영이 쓴 [정만록]과 전라도에 있던 선비 오희문의 [쇄미록],전라좌수사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원균을 찬양하는 [원균행장록]에도 교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원균의 악행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긴 하지만 조그마한 공이라해서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개전 초기 원균이 있었던 낙동강 하류와 남해 지역은 일본군 선단이 수십에서 수백척씩 돌아다니던 곳 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원균의 초기 행적에 대해 비난만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규모 함대 교전은 원균이 스스로 자기 전공을 주장한 걸로 압니다만. 물론 소문은 돌았고요. 그리고 집결완료시 일본군 수군은 오지도 않았고, 수송선단들은 싸울 수도 없으며, 병력을 부지런히 실어나르느라 여력도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경상우수군은 전라도 수군 전체를 합친 것에도 필적하는 거대 수영으로(전선이 70척.) 숫적으로 밀린다는 것도 말이 안되죠. 삼도수군 다 합처도 경상우수영 전체 수군과 엇비슷했던 적도 많았는데,(특히 정유재란당시.) 그리고 일본군 전선도 임란때의 숫자는 많은 편이 아닌데(숫자로 밀어붙이는 것 역시 정유재란당시.) 아무것도 못하고 날려먹은 원균은 답이 없죠.
일본군 수병이 동래성 전투에 참전했다고 프로이스 일본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4월 하순엔 거제 방면으로 일본군이 쳐들어왔다고도 합니다. 경상우수사 원균이 개전 초에 휘하에 군선 100여척에 군사 1만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일본군이 거제 방면으로 쳐들어올때 해산시켰다고 합니다. 4월 하순에 부산 방면에는 일본군 배 500여척이 정박해있었다고 원균이 장계를 올렸더군요. 소규모 함대 교전은 의심스럽지만 거짓이라는 근거를 아직 못봤습니다.
1군 고니시군을 수송한 350여 척, 전부 수송선입니다. 2군도, 3군도, 전부 수송선입니다. 제대로 된 수군이 넘어온 건 4군부터이며, 이때가 4월 25일이니 4월 하순이군요. 일본 수군의 활동도 이때부터입니다. 그리고 원균이 일본군의 침입을 확인하고 전라좌수영으로 공문을 보낸 게 4월 14일, 좌수영에 도착한 게 4월 16일이고 부산포 함락은 4월 15일입니다. 즉, 경상우수영 최서단 진포까지 늦어도 4월 16일까지는 공문을 보낼 수 있고, 수군은 인근 고을에서 인력을 충원하고, 숙련도도 높으므로(1년 2교대)즉시 소집, 4월 18~19일 사이에 집결이 가능합니다. 제 2군인 가토군의 부산포 상륙 시기는 4월 18일.
나름 완소남 박진!!
제길, 두번 쓴게 다 지워지다니... 어쨌든, 부산포까지 이틀 잡으면 4월 20일에는 도착 가능, 그때 부산포에는? 3군 맞을 준비 하고 있겠죠. 고니시군은 북상, 가토군도 4월 19일에 경주쪽으로 북상. 3군 맞을 준비 하고 있는 부산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아무것도 모르고 건너오는 3군을 때려잡을 수 있습니다. 350여척 숫자요? 전부 수송선이죠. 저항도 못하고 학살당합니다. 수군은 4군 소속이고, 우연히 3군과 같이 넘어온다 해도 최대 전선 70척, 협선 70척의 규모를 지니는 경상우수영에 별로 숫적으로 압도도 못하고(그때 일본 수군 다 긁어모아도 100여척 남짓이던가...) 병사들은 지처있으며, 질적으로도 경상우수영이 우위에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돌아갔다면 임진왜란이 아니라 임진년에 일어난 부산포왜란 정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정상적으로 공문 보내고, 함대 이끌고 부산포로 나아가, 평범하게 싸워주기만 했다면요. 명장정도도 필요 없습니다. 유능할 필요도 없습니다. 평범한 장수만 됐어도 충분했습니다. 그정도였죠.
4월 13일 부산포에 나타난 일본군 선단은 최소 400여척 이상되는데 경상좌수영은 그곳에서 불과 20~30여리 떨어진 곳에 있고 경상우수영은 1~2일 걸리는 거제도에 있습니다. 조선 수군이 집결해있었다면 정말로 부산포대첩을 거뒀을지도 모르지만 조선수군은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원균이 담력이 있어서 거제도 수군만 이끌고 갔다면 4월 14일 저녁이나 4월 15일부터 부산 앞바다에서 일본군 수백척과 교전을 벌였을텐데요..., 그리고 수송선이라고 해도 일본수군의 전술인 등선육박전을 할 수 없다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또 기술되어 있는 병선 100척이라는 것이 모두 판옥선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협선을 포함한 수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순신이 첫 출정했을때 병선이 85척 이었지만 판옥선은 30여척에 불과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균이 경상수군을 집결시켰을 것으로 추정되는 4월 18~19일 무렵엔 일본군 3번대는 다대포를 거쳐 김해로 가고 있었습니다. 원균이 만약 조련된 수많은 전함과 병사들을 4월 하순에 단순히 겁나는 이유로 스스로 해체 시켰다면 잘못이라고 할 수 있지만 최소한 개전 당일부터 해체 직전까지 그가 스스로 잘못을 저지른 것은 없다고 봅니다.
전선=판옥선. 협선=협선입니다. 조선 수군의 전투 및 초계 함선은 판옥선과 협선만을 칩니다. 1차출동 이후 조선 수군은 협선은 전투에 그닥 쓸모 없다고 판단하고 판옥선 인력충당에 최대한 동원하지만, 그 이전이죠. 첫 출정 당시 전라좌수영의 전선과 협선 숫자는 24척(전선) - 18척(협선) 이고, 나머지 함선은 사후선입니다.
1군 고니시군 상륙이 4월 13일 밤에서 4월 14일 오전, 2군 가토군 상륙이 '4월 18일' 이고 4월 19일에야 기장현 경계를 넘어 경주로 올라왔는데 갑자기 구로다군이 4월 18일날 다대포를 거처 김해라니, 만단위 병력이면 상륙에만 하루 가까이 걸리는 데 그럼 4월 17일날, 먼저 도착해야 할 2군보다 무단으로 3군이 넘어왔다? 거기다가 4군은 4월 25일에 상륙했는데, 시간 잘지켜 상륙하던 일본군이 갑자기 한참 늦게 도착하는 군요. 3군 도하시기가 틀렸습니다. 그리고, 350여척이니 400여척이니 하는 숫자만 생각하지만, 그거 다 수송선이에요. 제대로 된 수군영주는 4군 소속이라니까요. 4월 25일이 일본군 수군의 도착시기고,
수군 활동도 그 이후입니다. 4월 말~5월 초 이전에 경상우수영 관할구역내로 넘어온 일본군은 육군과 수군 포함 한명도 없습니다. 그리고 5월 5일 전라좌수영에 합류한 경상우수영 함대는 전선 4척, 협선 2척이죠. 일본군 전투기록에도 안 올라와 있는, 조선 최대 수군을 격파한 전투? 전선 70척에 협선 70척이면, 일본군 계산에는 거의 1만명 수준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다이묘 쯤은 되야 동원할 수 있는 대병력인데, 그런 병력을 물리친 전투? 그런게 있다면 일본 기록에 안남을 리가 없잖습니까.
김해성 전투에서 설명했지만 부산-다대포를 거쳐 김해 죽도에 4월 19일에 일본군 3번대가 상륙합니다. 가토 기요마사군은 4월 18일에 상륙하였고 4월 19일에는 언양을 함락하고 경주와 울산 방면으로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규슈 나고야에는 함선이 2000여척이 배치되었다고 임란 직전에 명나라 사람이 증언한 적이 있었지요.
조선 수군이 분산되어 있다고 해도, 최서단까지 이틀이면 공문이 갑니다. 수군은 그 지역 고을 주민들로 충당하고, 1년 2교대니 훈련도도 높으며, 동원속도도 빠릅니다. 1년에 5교대 하는 육군과는 훈련의 양이 달라요. 2군 도착 시기인 4월 18일에는 이미 경상우수영 전 함대가 거제도에 집결이 가능하죠. 그리고 수송선으로 등선육박전이 불가능하진 않다라... 아니 뭐, 바다에서 싸워본 적이 한번도 없어 뱃멀미로 고생하면서 조총 한번도 못쏘는 육군이, 강제동원된 민간인이 운용하는, 내구도도, 속도도 전선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수송선을 타고도 억지로 시도할 수는 있겠죠. 그러나 그런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럼 돌아오는 건 학살이란 걸 알거든요. 아무리 옛날이라고 해도, 수송선은 싸우기 위해 설계된 함선이 아닙니다. 어떤 배는 병력 있는대로 채우고, 어떤 배는 물자 있는대로 채우고, 방패판이나 사다리 같은, 해상전투용 물건은 싣지도 않았고, 속도도 느린, 오로지 물자 수송만을 위한 배입니다. 전투함처럼 방어력과 속도를 갖추고, 병력과 병기, 물자를 적절히 나눠 배분한, 그런 배가 아닙니다. 육군도 바다에서 싸울 수 있는 병력이 아닙니다. 해상전을 할려면 그에 따른 훈련이 필요한 법입니다. 수군과 상륙병력은 확실히 구분되어 있습니다.
확실히 공문은 이틀에서 사흘이면 도착합니다. 다만 함선이 더 느리고 병력과 무기를 동원하여 출항하면 집결은 빨라도 사흘이고 늦어도 6일 입니다. 4월 14일부터 4월 20일 사이 원균의 경상우수군이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술이 없습니다. 그리고 원균 휘하의 경상우수군이 정예였는지 속단하지 못하겠습니다. 훈련이 보통일 수도 있고 조선중기 사회상황을 따라 약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일본군 군함은 단기간에 빨리 제조하여 약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임란기 해전을 일본수군 9000명만 전적으로 담당하지 않았기에 많은 책들에선 일본육군이 수군으로 활용되기도 했다고 주장합니다.
스페인 무적함대와 영국 해군이 싸운 칼레 해전, 스페인의 전술은 등선육박전인데, 유럽 최강 지상군이 가득 타 있는 수송선은 전투에 참여 안하고 도망갑니다. 왜일까요. 명랑해전때 일본 수군 후방엔 수송선이 2~3백여척 가까이 병력 가득 태우고 대기했는데 전투 참여 안하고 철수합니다. 왜일까요. 칠천랑 해전때 부산포에서 삼도 연합수군은 바다를 건너오는 일본 수송선 천여척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이 천여척 수송선이 전부 다시 바다 건너 도망갑니다. 왜일까요. 개넨 수송선이고, 탑승한 병력은 수군이 아니라 육군이거든요. 해전에 참여같은 건 생각도 못하거든요. 일방적인 학살만 있을 뿐이란 걸 알거든요.
수송선과 육군 병력으론 해전 못합니다. 아, 물론 육군 병력에 해전 훈련 열심히 시키고, 수송선을 전선으로 개장한다면야 싸울 수 있죠. 노량해전때 시미즈군이 그런 케이스니까. 남해안 근처에 쌓은 왜성에서 거의 1년 가까이 해전 훈련을 시키고 있는 함선 전부 전선으로 개장했으니까 가능은 합니다. 그런데, 임란 첫해에? 해전 훈련 하나도 안된 인력으로 해전을? 불가능하죠. 원균이 우수영 함대를 다 모아왔든지, 아니면 간이 배밖으로 나와 거제도 본영의 함선만 이끌고 왔든지간에 결과는 마찬가집니다. 일본군 수송선의 일방적인 학살이죠.
부산포에서 일본군 선단 1000여척이 도망간것을 일방적학살을 두려워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봅니다. 전쟁은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하고 싸우는 것 외에 희생을 최소화 하기 위해서 싸우기도 합니다. 양측 함대가 전면전을 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다. 일본군 측에선 이기더라도 전면전에선 희생이 많을 것을 아는데 어찌 함부러 싸우겠습니다. 일본군 선단의 회피는 조선수군을 지치게 하는 술책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귀하의 판단이 전적으로 옳다고 어찌 장담하겠습니까.반면 임진개전 초기 원균이 수군으로 일본군 선단을 공격했을 때 그 선단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원균 함대를 수로 밀어붙였다면
승부가 어떻게 결판났을지 장담하진 못하겠습니다. 귀하께선 이순신처럼 포격전으로 일본육군이 탑승한 선단을 침몰시켜서 몰살시키거나 퇴각하게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상대측에서 어느 정도 손실을 각오하고 포위하여 접근전을 시도하면 어쩝니까. 그리고 당시 일본군을 실은 함선은 해전시에는 병선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어느정도 손실을 각오하고 포위하고 자시고가 불가능합니다. 해상 전투는 육상 전투와는 달라서 훈련이 필요하고, 그런 훈련이 되 있는 병력은 일본군은 4군 이전엔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해상전에 사용될 장비도 없고, 그런 훈련도 되 있지 않습니다. 등선육박전이요? 바다 위에서 제대로 싸울 수도 없는 육군과, 해상 전투용 장비가 구비되 있지 않은 수송선으로 등선육박전이 가능할 거라 보십니까. 대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로, 느릿느릿 달라붙었는데 사다리가 없어서 올라가지도 못하고, 뱃멀미나 할 육군으로 등선육박전은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불가능합니다. 상대가 가만히 있어주는 것도 아닌데요.
상륙하고나서 바로 공성전을 감행한 1군이나 3군은 사다리가 있었습니다. 또한 타국을 해상으로 침공한다면 어찌 수송선단에 호위선단을 붙이지 않겠습니까. 이런 군 상식을 생각한다면 개전 초기에 바다를 덮은 700여척이 일본군 선단이 모두 순수 수송목적으로 동원된 배들은 아닐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수백척의 위압감은 침략군에 대해 상세하게 알지못하는 상대방의 전의를 꺽는데 부족하진 않다고 생각됩니다.
해전용 사다리 말입니다. 그리고, 그 '호위선단' 이 존재하지 않기에 원균이 까이는 겁니다. 수군을 담당하던 영주가 소속된 건 4군부터 그 이전엔 수군 영주가 '없습니다.' 그리고, 애시당초에 부산포나 다대포가 넓은 것도 아니어서 수백척이 다 있지도 못하고 말이죠. 수백척의 위압감. 일본군이 가진 건 그게 전부였습니다. 원균은 거기에 놀라서 전 함대를 한달이 채 안되 전투 없이 말아먹었습니다. 뭘로 옹호하겠습니까.
그런데, 당시 조선 최대 최강 함대, 명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재건한 삼도수군 전체와 비교해도 크게 꿀리지 않는 거대 함대를 지휘하는 원균은 대체 어디서 어떻게 싸웠길래 일본군 기록엔 일언반구 없고, 조선 기록에도 원균 자평에만 나오는 전투를 벌이고는 함대를 다 날려먹은 걸까요. 싸우긴 한걸까요. 아, 소문으로 따지면야, 용인전투에서 조선군이 이겨서 한성을 수복했고, 히데요시는 조선수군에게 패해 목이 잘렸으며, 원균이 격침시킨 함선이 900척이나 됩니다만, 실제로 그렇던가요. 아니죠.
저도 옛 사람이 쓴 기록을 모두 확신하진 않습니다. 그런 확신이 없기에 저는 불확실한 부분에선 단정지어 기술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지금 남아있는 자료들을 종합하면 원균이 유능한 장수 였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다만 판단은 귀하께서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4월 13일에 원균이나 박홍이 수영에 있든 수군으로 단독 출정했다면 임진왜란을 부산포왜란으로 끝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나 그들도 장렬히 산화하여 전쟁이 일어났을지도 모릅니다. 그 시대,그 상황에 경험하지 않았고 그 상황은 기록으로 한정되어 있으니 현재 제 짧은 소견으로 단정 내리지 못하겠습니다.
아악, 제기랄, 어째서 계속 삭제가... 어쨌든, 물론 타고 온 함선도 해전시 병선으로 활용할 수는 있습니다. '준비만 하면' 말이죠. 내구도도 보강하고, 방어력을 보강하기 위해 방패판도 준비하고, 그사이에 키잡이, 노잡이, 병사들을 해전훈련도 시키고 하면서 준비만 한다면야 해전도 할수 있죠. 그런데, 임란 초기엔 그런 준비가 되 있지 않습니다. 일본이 섬나라여서 해군이 강하다 생각할 지 모르나, 전국시대를 들여다 보면 해전은 거의 없고, 대부분이 지상전이었거든요. 당연히 병력도 지상전 전문. 해전 준비는 안돼 있죠. 수군 영주들의 도착 시기는 4군 도착 시기인 4월 25일. 그 이전엔 해전은 생각도 못합니다.
그렇다면 개전 초기 일본군을 수송한 배가 순수한 수송기능만 하는 배였는지 아니면 수송기능+해전기능이 있는 배인지 알 수 있다면 개전 초기 수십척의 조선수군과 수백척의 일본군 함대의 전투가 어떻게 진행될지 알 수 있겠군요. 안타깝게 그들이 탄 배의 기능에 대해서는 당대 기록에 직접적으로 기술된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귀하가 일방적으로 일본군 함대를 학살한다고 확신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귀하께서는 임란 초기 전역(특히 해전)에 대한 관심과 식견이 많으신듯 합니다. 리플 답변으론 어느 정도 한계가 있으니 시간 되신다면 한번 채팅으로 이야기 해보고 싶습니다. 귀하가 가진 식견으로 제가 좀더 알고 제가 가진 짤은 소견이 귀하의 식견에 조금이나 보탬이 되는 기회가 있길 바랍니다.
지금 군대에 있고, 따라서 상황상 채팅으로 자유롭게 이야기할 상황은 못됩니다. 여기에, 무슨 이유에서인진 모르겠지만 리플을 연속으로 달면 하나 빼곤 삭제되기까지 하는 군요.(...)
박진도 나름대로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