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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지루하겠지만, 끝까지 읽어 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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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의 엄마는 음악과 미술에 조예가 깊었지만, 소년은 집 안의 고양이를 손으로 스케치하려고 시도했을 때 자신이 별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림을 찢어버리고는 다시는 그리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대신에 그는 네덜란드에서 유년기를 동생과 공기놀이를 하거나 썰매를 타면서 보냈다. 하지만 주로 남들이 노는 모습을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한 저명한 육아 지침서는 아이를 마냥 돌아다니게 놔두면 아이가 상상에 <도취될> 수도 있으니 감독을 해야 한다고 조언하지만, 그는 몇 시간이고 홀로 돌아다니곤 했다. 폭풍이 칠 때도, 한밤중에도 돌아다녔다. 그는 몇 킬로미터를 걷다가 새 둥지를 지켜보면서 몇 시간 동안 앉아 있기도 했고, 개울에서 물속을 돌아다니는 수생곤충들을 따라다니면서 관찰하기도 했다. 그는 딱정벌레 수집에 푹 빠져서 하나하나 학명까지 찾아 붙이곤 했다.
열세 살 때 소년은 예전의 거대한 왕궁에 새로 설립된 학교에 들어갔다, 집에서 너무 멀어 그는 그 동네 가정에서 하숙을 해야 했다. 수업 때 그는 으레 딴 데 정신을 팔곤 했지만 모범생이었고, 쉬는 시간에는 시를 외우면서 시간을 보냈다.
미술 교사는 그 학교의 유명 인사였다. 디자인을 국가 경제 성장의 한 축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교육 선구자였다. 그 개혁 운동이 큰 호응을 얻자, 연방 정부는 모든 공립학교에서 프리핸드 드로잉을 필수 과목으로 지정했다. 그 교사는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칠판을 바라보고 앉도록 하는 대신에, 교실 중앙을 향해 앉도록 했고, 마치 뜨개질바늘처럼 그 사이로 구불구불 다니면서 한 명 한 명에게 주의를 기울였다. 학생들은 대부분 그를 존경했다. 그러나 그는 그 소년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소년은 어른이 되어서 원근법이 무엇인지 누구도 알려 준 적이 없다고 불평하곤 했다. 원근법 지식이 미술 교육을 확대하는 새 법률 조항에 포함될 정도로 그 교사의 핵심 주장이었음에도 그랬다.
소년은 낯선 이들과 살고 싶지가 않았기에, 열다섯 살이 되기 직전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 뒤로 16개월 동안 그는 오로지 야외에 나가서 마냥 걷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그렇게 살 수는 없을 터였지만, 소년은 달리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행히도 그의 숙부는 대단히 성공한 미술품 중개업체를 소유하고 있었고, 막 기사 작위도 받은 참이었다. 숙부는 조카에게 큰 도시에 일자리를 마련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소년은 그림을 그릴 생각은 없었지만, 그림을 판매하는 일에는 흥미를 느꼈다. 그는 자연에서 갈고닦은 관찰력으로 석판 인쇄물과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딱정벌레를 수집하면서 했던 것과 똑같이 자신이 보는 것을 분류했다. 스무 살 때 그는 중요한 고객들과 거래를 하고 있었고, 외국을 다니면서 미술품을 중개했다. 젊은이는 부모에게 다시 일자리를 찾을 필요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틀렸다.
그는 도시에 사는 시골 소년이었다. 상사와의 의견 차이를 매끄럽게 처리할 사회성이 부족했고, 고객을 이용해 먹으려 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협상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곧 고객을 직접 대하지 않는 런던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고, 스물두 살 때 다시 자리를 옮겼다. 이번에는 파리로 갔다. 그가 도착했을 때 프랑스에서는 한창 미술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젊은이는 사무실로 걸어갈 때면 점점 유명세를 타고 있던 여러 화가들의 화실을 지나쳤다. 그러나 미술 교사 때도 그랬듯이, 훗날 그의 전기를 공동 저술한 작가들은 그가 <어느 누구에게도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라고 썼다. 그는 새로 집착하게 된 것에 푹 빠져 있었다. 종교였다. 여러 해 뒤에 그는 동생과 이 혁신적인 미술가들에 관해 토론할 때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못 봤다>라고 말하곤 했다.
결국 중개업체로부터 해고되자, 그는 영국의 한 작은 해안 도시에 있는 기숙학교로 가서 보조 교사로 일했다. 하루에 열네 시간을 일하면서 프랑스어에서 수학까지 가르쳤고, 기숙사를 감독하고, 아이들을 성당에 데려가고, 만능 수리공으로도 일했다. 그 학교는 그저 소유주의 벤처 사업체일 뿐이었고, 젊은이는 값싼 노동력에 불과했다. 머지않아 그는 좀 더 나은 기숙학교의 강사 자리를 구했지만, 몇 달 뒤에 남미로 가서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부모는 아들을 말리면서, <욕망을 따르는 짓을 그만두고> 안정적인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충고했다. 모친은 아들이 뭔가 현실적인 일을 하기를 원했다. 그러면 <더 행복하고 더 차분해질>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부친의 길을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어엿한 자격을 갖춘 목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부친은 아들을 위해 서점 점원 자리를 구했다. 젊은이는 책을 좋아했고, 오전 8시부터 자정까지 일했다. 홍수로 서점이 물에 잠길 때, 그는 끈기 있게 쉴 새 없이 책들을 안전한 곳으로 나름으로써 동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목사 교육을 받고자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새로운 목표로 삼았다. 다시금 그는 그칠 줄 모르는 열정을 발휘했다. 그는 가정교사를 구했고, 모든 책들을 손으로 다 필사했다. 「눈을 뜨고 있는 한 앉아 있어야 해.」 그는 동생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는 <연습을 통해 완벽해진다>고 스스로 다짐했지만, 라틴어와 그리스어는 쉽게 와 닿지 않았다. 그는 근엄한 전쟁 영웅인 한 숙부의 집으로 이사했는데, 숙부는 그저 <계속해>라고 밀어붙이기만 했다. 젊은이는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기 전에 공부를 시작하고 그들이 잠든 뒤에야 마치기로 결심했다. 숙부는 조카가 이른 새벽에 책을 읽는 모습을 보곤 했다.
그러나 학업은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스물다섯 살 생일이 다가올 무렵에, 젊은이는 경제 혁명이 미술품 거래상인 자신의 숙부 같은 어떤 이들은 엄청난 부자로 만드는 반면, 어떤 이들은 지독한 가난으로 내몬다는 설교를 들었다. 그 복음을 더 빨리 퍼뜨리기 위해, 그는 대학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대신에 단기 교육 강좌를 듣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그 학교가 요구하는 간결하면서 정곡을 찌르는 설교를 능숙하게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 강좌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설교하겠다는 그의 의지는 아무도 꺾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감화를 가장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 석탄 광산이 있는 시골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한 젊은이는 거무튀튀한 하늘을 보고서, 렘브란트 그림의 명암에 비유했다. 그는 광부들이 너무나 억압을 받아서 갱도 위쪽의 세계를 <지옥으로 올라간다>고 표현할 정도라고 설교하곤 했다. 그는 자신의 옷과 돈을 내놓고 밤낮으로 병자와 부상자를 돌보면서, 늘 그랬듯이 열정적으로 영적인 봉사에 몰두했다. 그에게 그들은 신의 군대였다.
그가 온 직후에 일련의 폭발 사고가 일어나면서 광부 121명이 사망하고, 증기가 누출되면서 마치 땅속에 거대한 분젠 버너가 묻혀있는 것처럼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았다. 동네 주민들은 피해를 입은 가족들을 위로하려 애쓰는 젊은이의 인내심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런 한편으로 사람들은 그를 괴짜라고 여겼다. 아이들은 그의 말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곧 그의 임시 목사 생활도 끝이 났다. 그는 스물일곱 살이었고, 의기소침했다. 처음에 미술상으로서의 열정적으로 일을 시작한 지 10년 뒤, 그는 재산도, 성취도, 방향도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는 이제 평판 좋은 미술상이 되어 있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그는 뭔가 중요한 일을 할 때가 왔다는 것을 깊이 느끼고 있었지만 그 일이 무엇인지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어서 자신을 <쇠창살에 머리를 박아 대고 있는> 봄날의 새장에 갇힌 새에 비유했다. 「새장은 멀쩡하고 새는 고통스러워 미치지.」 또 그는 이렇게 쏟아냈다.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언제나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뭔가를 잘한다고 본능적으로 느껴! (……)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 (……) 내 안의 뭔가가 있어. 그런데 그게 뭐냐고!」 그는 학생, 미술상, 교사, 서점 점원, 유망한 목사, 순회 전도사였다. 시작은 유망했지만, 시도한 모든 길에서 화려하게 실패를 거듭했다.
동생은 그에게 목수나 이발사가 되는 것은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여동생은 그가 제빵사가 되면 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독서를 무척 좋아하므로 사서가 되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그러나 너무나도 절망한 가운데, 그는 분노의 에너지를 자신이 당장 시작할 수 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쪽으로 돌렸다. 그가 동생에게 보낸 다음 편지는 아주 짧았다. 「드로잉을 하다가 쓰는 중이야. 빨리 쓰고 다시 그리러 갈 거야.」 앞서 그는 드로잉을 사람들을 진리로 이끌려는 자신의 목표를 방해하는 활동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제 그는 드로잉으로 주변 사람들의 삶을 기록함으로써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이 때 자신의 그림 실력이 엉망이라는 것을 깨닫고서 프리핸드 드로잉을 그만두었으므로, 『드로잉의 ABC 안내서』를 읽으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 뒤로 몇 년 동안 그는 정식 교육을 받으려는 시도를 몇 차례 하다가 금방 그만두곤 했다, 화가인 사촌 남편은 그에게 수채화를 가르치려고 시도했다. 그 사촌은 훗날 그의 위키피디아 페이지의 <교육> 항목에 유일하게 들어가는 이름이 된다. 그러나 그는 수채화에 필요한 섬세한 붓놀림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한 달 만에 끝이 났다. 그가 미술상으로 일할 때 사장이었고 이제 미술계의 존경받는 유행 선도자가 되어 있는 숙부는 그의 드로잉이 판매용으로 전시할 가치가 없다고 선언했다. 숙부는 그에게 말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너는 결코 화가가 아니라는 거야.」 그는 단호하게 덧붙였다. 「너무 늦게 시작했어.」
서른세 살 무렵에 그는 미술 학원에 들어가서 10년 어린 학생들과 함께 배우다가, 몇 주 뒤에 그만두었다. 그는 학원의 드로잉 대회에 나갔는데, 심사 위원들은 그에게 초급반으로 가서 열 살 아이들과 함께 배우라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림을 그릴 때 그의 미적 열정은 이 분야에서 저 분야로 오락가락했다. 하루는 사실적인 인물화를 그리는 사람만이 진정한 화가라고 생각하다가, 자신의 인물 그림이 너무 형편없자 다음 날에는 풍경화를 그리는 사람만이 진정한 화가라고 여겼다. 어느 날은 사실주의에 몰두하다가, 다음 날에는 순수 표현주의에 빠졌다. 이번 주에는 미술이 신앙심을 알리는 매체라고 보았다가, 다음 주에는 그런 생각이 순수 창작을 방해한다고 여겼다. 어느 해에는 모든 진정한 미술은 검은색과 회색으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확신했다가, 다음 해에는 생생한 색채가 화가의 진정한 보석이라고 판단했다. 매번 그는 자신의 생각에 진정으로 푹 빠졌다가, 금방 빠져나오곤 했다.
어느 폭풍이 이는 날 그는 이젤과 유화 물감 – 거의 써본 적이 없던 – 을 들고서 모래 언덕으로 나갔다, 돌풍으로 모래 알갱이들이 흩날리면서 그림에 다닥다닥 들러붙었다. 그럴 때면 그는 캔버스를 재빨리 덮었다가 바람이 약해지면 다시 꺼내어 재빨리 물감을 찰싹 쳐대고 두텁게 발라댔다. 어쩔 수 없을 때는 물감 튜브를 캔버스에 갖다 댄 채로 짜서 발랐다. 끈적거리는 유화 물감과 모래바람 때문에 빨리 발라야 하는 상황 속에서 그는 완벽한 사실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애쓸 때 그토록 고생시켰던 미흡한 손놀림으로부터 손과 상상력이 해방되는 것을 느꼈다. 한 세기 남짓 뒤에 그의 결정판 전기를 쓴 작가들은 그날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경이로운 발견을 했다. 자신이 그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느꼈다. 「그리는 것이 엄청나게 즐거워.」 그는 동생에게 썼다. 「그림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덜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그는 한 미술 실험에서 다른 실험으로 계속 넘어갔다. 맹세를 했다가 그 맹세를 깨고, 그림에 햇빛을 포착하려는 시도를 노골적으로 비난하다가, 생각을 바꾸어 바로 그 일을 하겠다고 환한 햇빛 아래에 캔버스를 놓고 그리기도 했다. 더 깊고 더 짙은 감정으로 무채색 작품을 그리는 데 집착하다가, 한순간에 마음을 돌려서 생생한 색채로 완전히 돌아서기도 했다. 밤하늘을 묘사할 때에도 검은색을 쓰지 않을 만큼 철저히 돌아섰다. 그는 음악의 음색이 색조에 관해 뭔가 알려 줄까 싶어서 피아노 레슨도 받기 시작했다.
짧은 생애의 마지막 몇 년 동안 그는 지리적으로 미술적으로 이런 여행 편력을 계속했다. 마침내 그는 데생의 대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완전히 버렸다. 또 앞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주장했지만 결국에는 실패했던 모든 양식들을 다 내버리고 하나만 남겼다. 그는 새로운 미술 양식을 창안했다. 그 어떤 형식에도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막연한 무언가를 포착하려고 애쓰는, 색채가 분출하는, 물감을 충동적으로 두텁게 발라 대는 화풍이었다.(각주: 그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그 구절을 프랑스어로 적었다. <사라지는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그는 특권적인 교육을 받은 이들을 위한 오만한 작품이 아니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그리고 싶었다. 여러 해 동안 그는 인물의 비율을 정확히 포착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이제 그는 얼굴도 불분명하고 손모아장갑을 낀 것 같은 모습으로 나무 사이로 걷고 있는 인물을 묘사했다.
전에는 묘사할 모델과 베낄 그림이 필요했지만, 이제 그는 마음의 눈을 이용했다. 어느 날 저녁 그는 침실 창밖으로 멀리 굽이치는 언덕들을 바라보았다. 어릴 때 새와 딱정벌레를 바라볼 때처럼 몇 시간 동안 변해 가는 하늘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붓을 들었을 때, 그의 상상 속에서 소도시의 풍경은 작은 마을로, 높이 솟은 성당은 작은 예배당으로 바뀌었다. 앞마당의 암녹색 사이프러스는 바닷말처럼 율동하듯이 흔들리면서 밤하늘로 구불구불 높이 솟아올랐다.
열 살 아이들이 데생하는 반에 들어가라는 충고를 들은 것이 겨우 몇 년 전이었다. 그러나 그 별이 빛나는 밤은 그가 연이은 실패 끝에 고안한 새로운 양식으로 그린 다른 수십 점의 그림들과 더불어, 미술의 새 시대를 열고 미와 표현의 새로운 개념들에 영감을 주게 된다. 생애의 마지막 2년 동안에 이런저런 실험을 하면서 몇 시간 동안 열정적으로 그린 작품들은 역사상 가장 가치 있는 – 문화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 작품에 속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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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엡스타인이란 사람이 쓴 <늑깎이 천재들의 비밀>이란 책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이야기랍니다.
워낙 화가에 대해 모르고 있었지만, 그에게 이런 방황이 있었네요.
요즘 젊은이들이 직장 갈아치우기를 밥먹듯 한다기에 걱정을 했는데,
걱정할 일만은 아닌듯도 합니다.
첫댓글 그래도 부모 입장에서는 걱정되는 일입니다. 조금만 어렵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때려치우는 습관같은....
요즘 애들은 우리때처럼 한 직장에서 정년퇴긱 같은거, 전혀 바랄 수 없으니 세월이 그런가보다 하는거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