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생을 함께 갈 친구이자 라이벌, 구리 9단과 이세돌 9단 |
이세돌 9단과 구리 9단은 2004년 6월 중국 갑조리그에서 첫 대결해 2011년 5월 벌어진 한·중·일 바둑고수 초청전까지 공식대국에서 총 28번의 명승부를 연출했다. 세계 최정상을 다투는 '동갑 라이벌'답게 지난 결과는 14:14의 무승부였다.
두 기사의 승패균형을 무너뜨릴 줄 알았던 29번째 대결이 지난 9월 5일 중국 베이징에서 펼쳐졌다. 2012 삼성화재배 본선 32강 본선 2회전에서 각 1승을 얻어 '무패 16강' 진출을 노리며 대국장에 들어온 이세돌과 구리. (본선 32강은 더블일리미네이션 패자부활전으로 진행되었다. 각 조에 4명씩 배정되어 총 3회전이 치러지며 '2승자'와 '2승1패자'가 16강에 오른다.)
하지만 결과는 '4패 빅' 무승부였다. 한·중·일 삼국의 대국규정은 '3패 빅' 또는 '4패 빅'이 발생했을 때 양 대국자가 모두 패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를 하면 무승부를 인정해주고 있다.
'세계대회'에서 4패 빅의 상황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05년 벌어진 제10회 삼성화재배 최철한 9단과 뤄시허 9단의 준결승에서 '3패 빅'이 출현할 뻔은 했다. 당시 최철한 9단과 대부분의 해설자는 3패빅 무승부를 예상했지만, 뤄시허 9단이 과감히 패를 포기하고 대마를 죽이는 바꿔치기를 통해 승리하면서 역사의 기록에서 비켜나갔다.
과거 중국에서 위빈 9단과 치우쥔 9단의 명인전 대국에서 4패빅이 출현한 적이 있었고, 최근 한국에서는 2012 락스타리그 15라운드(9월 2일) 이재웅 7단과 김현찬 2단의 대국에서 4패빅이 나와 무승부를 기록하기도 했다.
또 이벤트 대국으로는 2005년 이창호 9단과 창하오 9단이 대결한 남방장성배에서 '4패빅'이 나온 적이 있다. 이때는 양 대국자의 의견을 물어 무승부로 처리하고 상금은 사이좋게 반씩 나눠 가졌다. 리그전이나 이벤트 대국과는 달리 이번 삼성화재배 본선은 16강 진출자를 가리기 위해 승패를 명확히 해야 했다.
9월 6일 자 보도에서 한 중국언론(现代快报)은 "무승부 대국 후 대국당사자와 관계자가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이때 구리 9단은 제비뽑기에 의한 추첨을 제안했다. 하지만 한국기원 상무이사 유창혁 9단이 '지난 수십 년간 한국기원에서 추첨으로 승부를 결정한 선례는 없으며, 이런 경우는 재대국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 각자 1시간 60초 5회의 연장전(?)을 펼치게 되었다"고 전했다.
이렇게 이뤄진 재대국에서 이세돌 9단이 졌지만, 다음 날(6일) 벌어진 장쉬 9단과의 3회전(패자부활전)에서 승리하며 결국은 구리 9단과 함께 16강에 진출했다. 이세돌 9단은 대국 후 중국 시나스포츠(新浪体育)와의 인터뷰에서 전날(6일) 재대국한 소감에 대해 "당시 추첨에 의한 승패결정은 별로라고 생각했다. 다만 재대국을 하더라도 제한시간은 더 짧게 설정하는 것이 서로의 체력안배를 위해 좋았을 것이다. 예를 들면 제한시간없이 바로 초읽기에 들어가는 방식 등이다."라고 말했다.
또 "오늘의 대국은 나에게는 최상의 결과였지만 상대에게는 아주 좋지 않았다. 사실 이렇게까지 두는 것은 너무나 잔혹했다." 라는 구리의 심경을 함께 전하기도 했다. 이 말을 마치고 구리 9단은 점점 멀어져가는 이세돌의 뒷모습을 보며 매우 미안해하는 안색을 내비쳤다고 한다.
바둑스타일과 기질이 비슷한 이세돌과 구리는 생일도 한 달 밖에 차이가 안 나는 '동갑내기 절친'이자 평생을 함께할 '라이벌'이다. 예전 구리 9단은 "이세돌 9단은 언제나 내가 따라잡아야 할 목표였다. 돌연 그가 사라지자 나는 목표를 잃고 방황했다."며 과거 이세돌이 휴직시에 성적이 곤두박질친 이유를 말하기도 했었다.
시대를 앞서 가 오히려 인정받지 못한 화가 빈센트 반고흐의 전기를 쓴 어떤 작가는 글의 말미에 이렇게 썼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운명적으로 평생 지기(知己)를 만나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은 천재에게 있어서 가장 큰 형벌이다."
※ 세계대회 사상 초유의 '4패 빅'이 만들어진 과정과 이세돌-구리의 2회전 재대국 내용 등은 집중조명코너에서 사이버오로 키르아 7단★의 해설로 상세히 소개할 예정입니다.
▲ 2회전 재대국 후의 이세돌 9단과 구리 9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