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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강철의 시대를 구현하고 대변한 이는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다.
1835년 영국 스코틀랜드 던펌린(Dunfermline)에서 가난한 직공의 아들로 태어난 카네기는 1848년 가족과 미국으로 이주해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의 슬럼가에 정착했다.
13세부터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카네기는 1853년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에 취직해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누리기 시작했다.
카네기는 1863년 키스톤 교량 회사를 공동 설립함으로써 철강 분야에 처음으로 뛰어든 뒤, 1867년에는 유니온 제철소, 1870년에는 루시 용광로 회사를 연이어 설립하며 사업의 폭을 넓혔다.
1872년에 영국의 헨리 베세머 제강소를 방문한 카네기는 그곳에서 독특한 방법으로 생산되는 강철의 놀라운 잠재력을 깨닫고, 1875년 미국 최초의 강철 공장인 에드거 톰슨 강철 회사를 설립했다.
그는 1881년의 프릭 코크스 회사 합병, 1886년 피츠버그 근교 홈스테드(Homestead) 제철소 매입 등과 더불어 석탄, 철광석, 광석운반용 철도, 선박 등을 수직계열화하는 철강트러스트를 구축하였다.
1915년 홈스테드 제철소의 모습. 카네기는 1886년 이 제철소를 매입했다. 추후 이곳에서 일어난 파업 사건은 카네기의 경력에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일생 가운데 정규교육을 받은 시기는 고작 4년에 불과했지만, 도서관의 책으로 독학을 한 카네기는 10대 시절부터 자주 신문에 기고를 하는 등 글쓰기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그가 다양한 주제로 8권의 책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카네기는 영국의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 매튜 아놀드(Matthew Arnold, 1822-1888), 미국의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 등 유명 지식인들과 끊임없이 교류하였으며, 특히 스펜서를 자신의 사부로 모셨다. “스펜서를 해독하기 전, 내 앞에 놓인 모든 것은 어둠이었습니다. 스펜서의 이론을 이해하고 난 후, 빛이 보였습니다. 그의 책은 진리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어떤 진리였을까? ‘적자생존’(適者生存: 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스펜서는 미국에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를 유포시키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친 지식인이었다. 스펜서의 저서는 1860년부터 1900년까지 미국 내에서 약 50만권이 팔렸는데, 이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수백만권에 해당하는 것이다.
스펜서의 ‘적자생존’ 개념을 가장 반긴 사람들은 미국의 부자들이었다. 스펜서는 빈부격차의 심화는 사회 진화 과정에서 불가피하며, 기업의 활동을 규제하는 것은 종(種)의 자연적 진화를 막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카네기는 1889년 6월 <노스아메리칸리뷰> 기고한 ‘부(Wealth)’라는 제목의 글에서 자선에 대한 세가지 방법을 밝혔다. 죽음을 앞두고 공공 기증을 하는 것, 가족에게 유산을 남기는 것, 그리고 평생에 걸쳐 박애를 실현하는 것. 그는 처음 두 가지는 이기적인 행위라고 규정하면서, 세 번째 방식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자선에도 기업경영과 같은 경영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기업경영에 성공했던 사람이 자선사업도 직접 해야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으며, 그걸 다른 사람들의 손에 맡기는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는 논리였다.
카네기의 자선은 1893년부터 도서관을 기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이 매우 빈곤했던 소년 시절 도서관의 책을 빌려 독학을 했던 경험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카네기의 도서관 기증을 반긴 건 아니었다. 이에 대해 카네기의 전기를 쓴 레이몬드 라몬 브라운(Raymond Lamont-Brow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카네기의 강철회사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임금을 올려주기는커녕, 노동자들의 밥값을 감축해서 남는 돈으로 도서관 자선사업 프로젝트를 운운하며 설치는 그가 영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리고 도대체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생계와의 전투를 뒤로 미루고, 도서관을 이용하겠느냐는 것이다.
임금이나 올려줘서 생필품이나 사도록 도와주지 않는 것인지, 노동자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카네기는 그들의 불만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카네기의 왕성한 기부사업은 1892년 홈스테드 제철소 파업 사건으로 빛이 바래고 말았다. 143일간 지속된 이 사건은 카네기의 노조 불인정 정책과 임금 삭감 때문에 발생했다.
카네기의 대리인인 헨리 클레이 프릭(Henry Clay Frick, 1849-1919)은 공장 문을 닫고 회사가 비노조원을 고용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핑커튼(Pinkerton) 탐정회사로부터 300명의 무장 요원을 불러들였다. 악명높은 파업 파괴자들인 이들은 1892년 7월 6일 바지선을 타고 강을 건너 공장에 접근했다.
파업 노동자들은 강물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인 다음 총과 다이너마이트로 맞섰다. 이 싸움으로 3명의 핑커튼 요원과 10명의 파업 노동자가 사망하고 다수가 부상했다.
이 싸움은 파업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노동자 부인들이 무기가 없는 사람을 몽둥이로 때리고, 돌을 던지고, 칼로 찌르는 등 과격 행동을 보인 것이 언론에 의해 대서특필되면서 노조의 명성에 치명타를 입혔다.
게다가 7월 23일에 일어난 알렉산더 버크만이라는 아나키스트가 노조원이 아님에도 프릭을 저격해 중상을 입힌 사건으로 인한 여론 악화는 노조에 마지막 일격이 되었다. 노조위원장 휴 오도넬(Hugh O'Donnel)은 “버크만의 총알이 곧바로 홈스테드 파업의 심장에 꽂힌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펜실베니아 주지사는 카네기 회사의 요청으로 약 8천명의 주 전체의 방위군을 홈스테드에 파견했고, 이에 진압당한 파업 노동자들은 군대의 보호하에 생산을 재개했다.
1892년 <일러스트레이티트 위클리>에 실린 홈스테드 파업 장면. 파업 노동자들이 승리했지만 과격 행동으로 인한 유혈사태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노조와 카네기 모두의 명성에 치명타를 입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카네기의 명성엔 큰 오점을 남겼다.
1892년 8월 <세인트루이스 디스패치>는 ‘카네기의 후회’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죽을 때까지 어떤 사람도 그가 행복하다고 판단하지 말라. 3개월전까지만 해도 앤드류 카네기는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동정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기질에 조금이라도 일관성이 있었다면 홈스테드의 직원들이 결성한 노조에 반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용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다움이 있었다면, 그는 적어도 자신의 비일관성으로 인해 초래된 결과를 직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카네기는 어떠했는가? 그는 너무나 연약해서 충돌을 피해 스코틀랜드로 도망갔다. 그는 말 한 마디로 그 유혈 사태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침묵했다…카네기 공공 도서관이 수만 개에 달해도 홈스테드 사태에서 발생한 직간접적인 불행을 보상하지는 못할 것이다. 적어도 프릭은 용감했지만, 카네기는 겁쟁이였다.”
그러나 카네기는 1893년에서야 뉴욕으로 돌아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 행동하면서 자신의 자선사업을 계속해 나갔다.
카네기는 1900년 [부의 복음(The Gospel of Wealth)]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1886년에서 1899년 사이에 기고한 글들을 묶은 이 책에서 그는 부유한 사람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의 모든 수입을 공동체의 선을 위해 쓰여져야 할 ‘신탁 자금’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인적 부는 공공의 축복이라는 생각이다. 그는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느니 “통장에 많은 돈을 남기고 죽는 것처럼 치욕적인 인생은 없다.”느니 “인생의 3분의 1은 교육에, 3분의 1은 돈 버는 일에, 나머지 3분의 1은 가치있는 대의를 위해 써라.” 등의 명언을 남겼다.
[부의 복음]이 출간된 그 해에 카네기 철강회사의 연간 생산량은 3백만톤으로 미국 전체 철강 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이는 영국의 전체 강철 생산량보다 많은 것이었다. 이제 이룰 만큼 이루었으니, ‘부의 복음’을 위해 헌신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걸까?
1901년 2월 25일 뉴욕의 한 호텔에서 카네기와 금융왕 존 피어몬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 1837-1913)이 마주 앉아 협상을 벌였다. 15분만에 끝난 협상의 결과 모건이 카네기에게 4억9,200만달러를 지불하고(당시 일본의 1년 예산이 1억3,000만달러) 카네기의 철강회사를 사들였다.
이제 카네기는 사업에서 은퇴해 자신의 재산을 본격적으로 사회사업에 쓰기 시작했다. 그는 공공도서관 건립을 지원하는 재단으로 1902년 카네기협회를 설립했는데, 이는 이후 나타나는 록펠러재단(1913년), 포드재단(1936년)의 효시인 셈이다.
카네기가 받은 정규 교육 과정은 고작 4년 남짓이었지만 독학으로 도서관에서 공부를 계속하였고 성공 후에는 재단을 설립하여 도서관 및 교육 관련 사업에 많은 투자를 했다.
1913년 금융왕 모건이 사망했을 때, 그의 유산은 6,830만 달러에 불과했다.
그가 남긴 유산이 다른 부호들의 유산과 비교해 너무 적다는 이유로 그의 위대함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카네기는 ‘보잘것없는 모건의 유산’에 대해 슬퍼하며, 생각해보면 “그는 부자가 아니었다”며 한숨 섞어 말했다.
하늘을 찌를 듯이 강렬한 인정욕구를 갖고 있는 카네기로선 ‘보잘것없는 모건의 유산’을 이해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카네기는 1919년 8월 11일 세상을 떠나기까지 내내 자선사업에 몰두했는데, 그는 자선사업도 철강사업을 하듯이 밀어 붙였다.
카네기가 기부한 공공도서관만도 3천개에 이르렀고, 교회에 다니지 않았지만 음악에 대한 관심이 깊어 7천 대가 넘는 파이프 오르간을 교회에 기증했다.
또 미국의 과학발전을 위해 카네기 멜론대학의 전신인 카네기 과학연구원과 기술원을 설립했으며, 시카고 대학 등 12개 종합대학과 12개 단과대학을 지어 사회에 기증했으며 각종 문화예술 분야에 거액을 쾌척했다. 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 90%가량에 이르는 3억6500만달러를 사회에 환원한 것이다.
미국 부자들은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는가?
오늘날 카네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어떨까? 논자에 따라 크게 다르다.
찰스 R. 모리스(Charles R. Morris)는 “카네기는 비범한 지성, 스코틀랜드인다운 실용성, 활력, 엄청난 매력, 거래에 대한 예리한 본능 등 모든 사람을 능가하는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카네기는 자신까지 속였다. 그는 어떤 짓을 해서라도 상대를 지배하려는 성격이었다. 아주 매몰찬 사람이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마치 자신의 본분이 사회복지 사업이라도 되는 듯 늘 인도주의적 이상가로서 버젓이 행세했다. 세계 최고의 강철왕이 되어서도 여전히 노동자에 대한 요구 강도를 높이고, 그들의 봉급을 삭감하면서도 친(親)노동자 성명을 발표하고 측근의 아첨을 받았다....카네기는 가장 충성스러운 동료들에게도 종종 무자비한 모습을 보였다. 아랫사람들을 파렴치하게 다루어 그들의 사소한 실수까지 집요하게 물고늘어졌고, 그들의 성공을 전부 가로챘다.”
카네기의 딸 마가렛은 전기작가 버톤 핸드릭(Burton J. Hendrick)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인생, 있었던 그대로를 써 주세요. 전 아버지의 산타클로스 행각에 지쳤습니다.” 그러나 카네기는 무작정 돈을 나눠주는 산타클로스는 아니었다.
카네기가 평화운동을 할 때에 그의 친구가 그런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조직을 만들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카네기는 이 제안에 반대하면서 “대중의 의지와 노력이 중요하다. 돈은 단지 조금 거드는 것일 뿐, 돈으로 그런 의지와 노력을 살 수는 없다.”고 했다.
카네기가 1913년 “백만장자에게 동정을 베푸소서. 박애주의의 길은 멀고도 험난합니다.”라고 말한 것도, 그런 어려움을 말하고자 했던 건 아니었을까?
레이몬드 라몬 브라운(Raymond Lamont-Brown)도 카네기는 단순히 선물을 나눠준 산타클로스가 아니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로맨티스트, 작가, 정치평론가, 여행가, 사회주의 운동가, 활발하면서도 사색적인 켈트인, 또한 인생 예찬자였다. 한 사람이 이 모든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경이롭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18세기 스코틀랜드 사고방식으로 19세기를 산 그를 사람들이 섣불리 21세기의 방식으로 평가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현대에서는 수용되지 못하는 행동들이 과거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카네기가 세운 자선사업의 전통은 오늘날 빌 게이츠를 비롯한 미국 부자들의 왕성한 기부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100년이라는 시차만 있을 뿐 게이츠는 카네기의 환생(還生)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런데 좌파들은 이에 대해 비판적이다.
예컨대,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은 게이츠의 기부 활동에 대해 "경제적 착취를 박애주의라는 가면으로 숨기려는 행동"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한국에선 그런 비판보다는 한국 재벌들에게 경고하기 위한 ‘카네기 예찬론’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예컨대, 이준호는 카네기와 한국 재벌들을 이렇게 비교한다.
“이런 그가, 동양 어느 나라에는 아직도 재산을 자식에게 몽땅 물려주고 미술품 사재기에 열을 올리는 재벌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뭐라고 할까?”
이미 답을 충분히 시사하긴 했지만, 이제 “왜 미국 부자들은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는가?”라는 질문에 답해보기로 하자. 카네기에서 빌 게이츠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대부호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개같이 돈을 벌어 정승같이 쓰는 두 얼굴을 보이고 있다.
왜 그럴까? 물론 답은 ‘인정욕구’에 있다. 점잖은 방법으론 미국 최고의 부자가 될 수 없다. 때론 악랄하고 잔인해져야 한다. 그렇게 해서 최고의 부자가 되는 인정 욕구를 충족시킨 뒤엔 그 돈을 남을 위해 정승같이 씀으로써 또 한번의 인정 욕구를 충족시킨다.
--지식백과에서옮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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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카네기의 성공 비법
사람의 마음을 얻는 다는 것 이름부터 기억 하기
좋은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