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회개부터 해야 합니다.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강론>
(2024. 9. 19. 목)(루카 7,36-50)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루카 7,37-38).”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카 7,48-50)”
1) 47절의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이 여자는 큰 사랑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로 번역할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
<두 가지 번역이 모두 가능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감사’를 뜻하기도 하고, ‘회개’를
뜻하기도 하는데, ‘회개’ 쪽이 더 비중이 큽니다.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로 번역하면,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크게 회개한 것이다.” 라는 뜻이 됩니다.
“큰 사랑을 드러냈기 때문에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로
번역하면, “크게 회개했기 때문에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뜻이 됩니다.
“용서가 먼저인가? 회개가 먼저인가?”를 물을 수 있습니다.
교리대로 말하면 하느님의 용서가 먼저이고,
우리가 회개하는 것은 ‘이미’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서는, 진심으로 회개하기 전에는
이미 주어져 있는 용서의 은총을 실감하지 못하고,
진심으로 회개할 때 비로소 그 은총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입장에서는 “용서받고 싶으면 회개해라.”가
틀린 말이 아닌 것이 됩니다.
2) 어떻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회개’입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용서’로 드러나고,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진실한 회개’로 드러납니다.
만일에 회개하지 않고 있다면, “나는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나도 하느님을 정말로 사랑한다.”
라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가 응답하는 방법도 회개이고,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도 회개입니다.
<회개 없이는 하느님 사랑도 없습니다.>
혹시라도, “나는 죄가 없으니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나는 회개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다.” 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죄가 없다면 용서를 청할 일이 없을 것이고, 용서를 청하지
않으면서도 주님의 기도를 바친다면 거짓 기도가 됩니다.
주님의 기도에 용서를 청하는 기도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일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이기
때문에, ‘나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나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되고,
그것은 십자가 은총에서 자기 자신을 제외시키는 일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구속 사업을 부정하는 일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거짓 믿음이 되어버리고,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이 되어버립니다.
3) 47절의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말씀과
“적게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말씀의 표현만 보면, 주님의
용서에 차별과 차이가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용서의 은총’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집니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차별과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용서로 드러나는 주님의 사랑에도 전혀 차별이 없습니다.
따라서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라는 말씀은,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생각한다.(믿는다.)”로,
“적게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말씀은, “적게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믿는) 사람”으로 해석됩니다.
똑같은 은총이 주어져도, 사람에 따라서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적게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받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지은 죄가 크거나 작거나,
또는 많거나 적은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용서의 은총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 깊이 감사드리고 더욱더 회개하는 생활을 할 것이고,
적게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게 감사드리고,
그만큼 회개도 적게 할 것이고, 안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감사드리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고,
주님께 서운하다고 항의하거나 불평할 것입니다.
<그런 차이는 왜 생길까? 신심의 차이일까?
수양의 차이일까? 성품의 차이일까? 알 수 없습니다.>
4) 온 세상에 똑같이 밝은 햇빛이 비쳐도 해를 등지고
서 있는 사람은 자기 그림자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자기가 해를 등지고 서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또는 인정하지 않고, 햇빛이 전혀 보이지 않고 어둡기만
하다고, 그림자밖에 안 보인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햇빛을 받고 싶다면 해를 향해서 돌아서야 합니다.
그처럼 ‘주님을 향해서’(또는 ‘주님의 사랑을 향해서’)
돌아서는 것,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리고 돌아선 다음에는 자만하지 않고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도 회개입니다.
- 송영진 신부님 -
첫댓글 하느님의 사랑은 ‘용서’로 드러나고,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진실한 회개’로 드러납니다.
‘용서의 은총’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집니다.
용서로 드러나는 주님의 사랑에도 전혀 차별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