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지개혁법이 통과하며 받은 땅값으로 토지주들은 일본인이 남기고 간 적산가옥, 기업체, 귀속재산 등을 취득해 산업화의 밑거름을 만들었다. 여기에 정부도 귀속재산 처분으로 얻은 재원을 보태 산업구조 변화를 시도할 수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초기부터 농지개혁을 통한 국유토지 내지 개인 농지정리로 받은 대금의 산업자본 전환을 계산하고 단행하였다. 자작농 구조로 전환하여 봉건적 사회구조의 변화와 농업생산의 증가를 기하는 일석사조의 조봉암 농지개혁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안고 어렵게 국회를 통과하였다.
농지개혁법은 1949년 1월에 국회에 제출, 동년 4월28일에 통과되어 6월21일 공포되었다. 그러나 막대한 준비자금(전국적인 농지 실태조사비, 필요한 선지급분 지가보상비) 부족으로 집행은 일 년 늦추어 행해졌다. 소출의 1.5배(연 30% 5년 지불)로 낮추어 지주에게는 지가증권을 발급하여 이를 기업에 투자하게 하여, 지주들도 일반 산업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비록 초기의 목적과 계획대로 농지개혁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전 세계 농지개혁 중 성공적인 개혁이라 평가받고 있다. 필리핀과 남미 제국들의 경우 오늘날까지도 산업화, 민주화가 이뤄지지 못한 원인을 볼 때 죽산의 농지개혁안과 이승만지도자의 결단을 우리는 높게 평가해야 한다.
구한말 많은 우국지사가 강화로 몰려들었다. 당시 강화에는 이건창, 이동휘 선생과 같은 애국지사와 3·1운동의 주체세력인 기독교 지도자들과 선교사들이 운집, 서울과는 다른 구국세력이 있었다. 인재를 키우기 위한 보창학교와 교회 설립 운동이 있었다. 강화에는 1896년 개교한 강화초등학교, 1901년 인천 내리교회와 강화 중앙교회, 존스 목사와 교인들이 설립한 합일 초등학교를 시작으로 강화학파, 향교, 개신교에서 세운 70여 보창학교, 감리교와 성공회 중심 개신교 60여 교회가 세워졌다.
죽산은 1910년 잠두교회(지금의 강화읍 중앙교회)에서 12살에 세례를 받고 20살이 되던 1919년 서울 YMCA 중학부에 입학 수업한다. 죽산이 갖게 된 평등한 세상과 민족주의는 기독교와 당시 강화도에서 쇄국의 울분을 토하고 개국과 개혁을 염원하던 우국지사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죽산은 그들로부터 신앙과 기개를 배워 일 원 한장 쥐지 않고 서울 YMCA중학교로, 중국으로, 일본(동경에서 엿장수로 학비를 번 유명한 실화)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농지개혁의 성공 여부는 아직도 학계의 이론이 있다. 필자는 죽산의 농지개혁을 통해 자본주의적 질서와 산업화가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는가를 보는 정치사적 연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농지개혁을 단행한 한국과 대만이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했다는 사실은 개혁을 일정 수준에서 완성하지 못한 아시아의 필리핀, 남미 제국의 상황을 보면 명확히 대비된다. 특히 죽산의 농지개혁은 위로부터 부르주아 개혁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소작인들의 꿈 농지주, 신분상승, 자식들에게 가난의 대물림을 끊을 수 있는 국가 정책은 당시 사회상에서 볼 때 혁명적인 조치였다. 이는 보수가 앞장서 개혁과 사회질서 개편을 단행했다고 평가한다.
죽산의 농지개혁은 이렇듯 누구도 개혁하지 못한 구질서와 신분사회를 일거에 혁신하고, 소련, 중공, 북한 공산당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식민주의, 해방, 건국으로 이어지는 신생독립국 건설을 굳건히 세울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나아가 토지주의 자금을 산업화 자금으로 유인 오늘 세계 8대 경제 강국 기반까지 구축했으니 우리는 모두 죽산의 만민평등사상,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민주 국가 건설의 꿈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박상은 죽산 조봉암 농지개혁기념관 건립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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