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어느 민속학자가 쓴 논문에 따르면 우리나라 속담 중 ‘말(言)’에 관한 것이 무려 70여가지가 넘는다는 주장이 있었다. 굳이 그 뿐만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매 살아가는 순간 순간마다 ‘말’과 관련이 없는 순간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 같다.
잘나가던 정치인이 말 몇 마디에 재기불능 상태에 빠져드는 경우도 있고,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연예인이말 한마디에 팬들의관심에서 멀어지는경우도 있다. 반면, 변변치 못하던 기업의 주식이 관련 정부기관장의 말 한마디에 연일 상한가를 기록하거나 ‘ 마누라를 못 버린다’는 말 한마디에 여성유권자 수십만표가 우르르 몰려선 거의 당락이 바뀌는 현실이고 보니, 눈만 뜨면 여기저기서 ‘말 잘하는 사람’이 대우받고,‘ 말을 잘해야 성공한다.’는 이야기가 당연한 진리처럼 울려 퍼지게 되고, 어려서는 웅변학원이나, 화술(스피치)학원 하나쯤 안 다닌 이들이 드물고, 나이가 들어서도 서점에 가서 ‘대화스킬(Skill)’이나, ‘프레젠테이션스킬’에 대한 책 한두 권 안 사서 본 이가 드물다.
그에 따라, 이제는우리 주변에 말 잘하는 사람을 찾기보다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 더 어려운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러한 세태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예가 있다.
지금은 EBS로 방송권이 넘어가서 언제하는지도 잘 모르는 비인기프로그램이 되어버렸지만,
지금 장년층의 학창시절만 하더라도 일요일 그 시간이 되면 온 국민이 함께 앉아서 즐겨보던
‘장학퀴즈’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후원을 하던 모 그룹의 공익광고성 기업광고 몇 편이 나온 뒤에, ‘ 빰빰빠빰~’하는 금관악기 소리가 흥겹던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 Eb장조 3악장이 흐르면 새벽 등산을 다녀온 아저씨도 휴일 늦은 잠에서 깬 아이들도 다들 TV 앞에 앉게 만들었던 인기 프로그램이었다.
그 프로그램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최종 단계인 기장원전에서 누가 우승이라도 하면 그가 다니던 학교에 플래카드가 나부끼는 것은 물론이고 동네 꽤나 시끄럽게 잔치판이 벌어지곤 했었다. 반면, 누가 방송에서 문제에 대해 엉뚱한 대답이라도 했다하면 두고두고 놀림감이 되곤했었다.
요즘 그와 비슷한 프로그램으로 모공중파 방송에서 인기리에 방영되는 프로로‘도전! 골든벨’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진행방식은 다소 틀리지만, 역시 고등학생들이 나와서 퀴즈를 풀어 최종 한 명의 우승자를 가리는 방식은 동일하다.
그러나,‘ 장학퀴즈’와 ‘도전! 골든벨’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전혀 다른 데에 있다.
‘ 도전! 골든벨’도 프로그램의 재미를 위해서 틀리거나 엉뚱한 대답을 한 학생을 붙잡고 진행자가 왜 그런 대답을 했는지 이유를 묻곤 하지만, 예전 ‘장학퀴즈’가 인기있던 시절에도 가끔 진행자가 잘못된 답변을 한 학생에게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묻곤 했다.
그러면, 그시절 ‘장학퀴즈’의 출연자들은 자기가 자신있는 답을 말했을 때는 당당하게 왜 그렇게 답했는지 이유를 댔지만, 만일 자신없는 답을 말한 것이거나 잘 모르는 답을 세칭 ‘찍었을’ 경우에는 얼굴이 벌개져서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요즘 방영되는 ‘도전! 골든벨’에 출연하는 고등학생들에게 그런 모습은 전혀 보기 힘든 풍경이다. 문제를 제출한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정답을 잘 모르는 시청자가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엉뚱한 대답을 적어놓고도 요즘의 우리 고등학생들은 말문이 막히거나, 수줍음에 얼굴 빨개져서 아무 말 못하고 고개 숙이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디서 들었는지 근거도 알 수 없는 얼토당토 않는 학설을 끌어다가 온갖 수사와 미사여구를 덧붙여서 ‘자기만의’ 고유한 주장을 설파하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방송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기성세대 조차도 그런 모습을 조장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굳이 예를 들었던 TV 프로그램만이 아니더라도 이제 ‘누가 얼마나 옳은 말을 하느냐?’가 중요한 시대가 아니라 ‘ 누가 얼마나 유쾌하고 유려하게 말을 하느냐?’ 가 중요한 시대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말 잘하는 사람 하면 떠올리는 스타급 대중 연설가나 명강사들에게‘어떻게 하면 말을 잘 할 것인가?’, ‘ 어떻게 하면 커뮤니케이션을 잘 할 것인가?’를 물으면 요즘의 ‘도전! 골든벨’에 출연하는 학생들보다는, ‘ 장학퀴즈’에 출연하는 학생들처럼 말할 것을 주장한다.
예를 들어 인권운동가이자 종교인이면서도 명연설가로 통하는 미국의 제시잭슨(Jesse Jackson) 목사는 ‘ 진실함만이 가장 흥미진진한 웅변’ 이라고 말했다.
즉, 말 한마디 한 마디 속에 자기 마음의 울림을 그대로 담은 진실함이 담겨져 있다면 굳이 중언부언 수식어를 갖다 붙이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몰입을 유도하는 멋진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뜻 일것이다.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히 인정하고, 자신이 저지른 일이면 자신이 한일이라고 진솔하게 고백할때,
그 진실함이 말속에서 묻어나와 다른 이들의 가슴을 울리게 되고, 그 울림이 어우러지는 순간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말이 통(通)하는’ 순간일 것이다.
또 하나, 명 연설가들은 이구동성으로‘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상대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할 것을 강조한다. 극단적으로, 세계적으로 이 시대 최고의 명 MC로 통하는 NBC‘ 투나잇쇼’의 진행자 제이 레노(Jay Reno)는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남들이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게 말 할 수 있죠?”라는 질문에, “ 이보시오. 이 세상 누구도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어요. 당신이 그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 수밖에”라고 했다고 한다.
즉,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해야 할 때, ‘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이 나로부터 듣고 싶어하는 말이 무언지’를 깊이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말 거의 모든 명연설가들이 꼽는 말 잘하는 비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경청’ 이다. 이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사후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명연설가인 데일카네기(Dale Carnegie)가 한 사교파티에 갔을때의 일이다.
카네기와 수 십분간 대화를 나눈 한 사람이 다음날 지역신문에 ‘역시 카네기는 세계 최고의 화술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라는 요지의 기고문을 실었다.
그 기사를 읽은 지인들이 카네기에게 몰려들어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과 수십 분간 막힘없이 대화를 나누며 더군다나 ‘세계 최고의 화술’이라는 극찬까지 얻을 수 있었냐고 물었다.
그러자, 카네기는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 내가 한 것이라고는 그가 다가왔을 때 한번 살며시 웃어줬고, 그가 말하기 시작했을 때 정성껏 들어 줬고, 가끔 내 의향을 물으면 진심 어린 답변을 해 주었을 뿐이라네”라고.
지금 이 시간에도 서점에는 ‘말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는 이들을 위한 비슷비슷한 책들이 수십 종씩 쏟아지고,
화술을 가르치는 학원에는수강하려는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다.
하지만, 정말 말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저 잘 듣고,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진실되게 말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임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