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늘을 그릴 수 있을까. 물론 누구나 어릴 적 하얀 도화지에 파란 물감으로 쓱쓱 거침없이 하늘을 그려본 일이 있을 것이다. 거기에 대략 흰 구름을 그려 넣으면 그럭저럭 어렵지 않게 하늘이 완성된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우리가 본 하늘일까. 우선 하늘은 파란색일까. 거기에 떠가는 흰색은 구름일까. 도화지는 넓디넓은 하늘을 담기에는 너무 작지 않은가.
산이나 바다, 사막 등 자연 속의 드넓은 공간이 다 그렇지만 특히 하늘이라는 공간은 인간의 눈으로 담기에는 너무나 광대하다. 하물며 그것을 한정된 캔버스 공간에 그리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한 무한한 공간을 앞에 두고 그것을 재현하려 할 때 대개의 화가는 무력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무력감은 곧 무한한 자연 공간에 대한 경외감에 따르는 침묵으로 나타난다. 그렇게 광대한 자연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을 미학에서는 ‘숭고미(the sublime)’라고 이르는바,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그러한 입장은 자연에 대한 가시적인 재현을 거부하는 태도로 나타난다.
자연의 재현을 거부한다는 것은 물론 전통적인 방식으로 입체 공간을 모방하기를 포기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바넷 뉴먼(Barnett Newman)은 사람의 시야를 압도하는 크기의 화폭 전면을 단일한 색면으로 뒤덮고 그것을 세로로 나누는 기둥을 세워 눈앞에 가림막처럼 제시한다. 이러한 그림을 보는 사람은 그림이 조성하는 시야의 확장 공간에 흡수되어 그림의 공간이 곧 자연의 공간이 됨으로써 자연과의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또한,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은 광대한 공간을 내다보는 한정된 공간이나 특별한 구조물을 구축함으로써 그러한 환경을 이상적으로 관망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한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성수희는 어떤 면에서는 그들처럼 굳이 거대한 크기의 캔버스라든가 구조물을 동원한 양적 방식을 거치지 않고도 그들이 의존했던 방식을 내적으로 터득하여 융합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리하여 다소 소박한 듯 보이는 화면 안에서 그녀는 광대한 하늘을 포착해내는 문제를 매우 조용한 음악이나 시처럼 해결해내고 있다.
성수희, A Geometric Sky 19-06, 2019
이를 위해 그녀가 구사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보인다. 우선 문틀이나 벽과 같이 화면을 기하학적으로 분할하는 선들을 블라인드의 간살처럼 가로지르게 하여 그 안에 하늘 공간이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오도록 하는 것이다. 다음은 흐르는 듯한 솜털 구름의 미세한 움직임이 일으키는 공간적 자장(磁場)을 통해 하늘이 자연스럽게 따라 흐르도록 한다. 이러한 공간으로 제시되는 그녀의 화면은 언뜻 보면 기하학적인 선들로 인해 어딘가 건조하고 차가운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건조하고 냉랭한 느낌이야말로 허공이 가진 무미한 속성이기도 하다. 지상에서 보이는 것과는 달리 하늘이란 원래 그 시각적 실체가 없는 허공이다. 비행기나 우주선을 타고 바라보는 바깥 공간은 어딘가 퀭한데 바로 이러한 공간이 지상에서는 파랗게 보이는 무미건조한 하늘이다. 그러므로 하늘 공간 자체는 투명하고 텅 빈 곳이다. 이는 바로 성수희의 기하학적 선 안에 들어온 하늘이 투명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바로 이 점이 그녀가 작품의 주제를 “기하학적 하늘 (A Geometric Sky)”이라고 명명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기하학적 하늘에는 다양한 시간이 교차한다. 단일한 듯하면서도 선들에 의해 다양한 공간으로 분할되는 하늘 공간은 그 안에 복합적인 시간을 품고 있다. 이는 그것을 보는 숱한 사람들의 시간을 투사한 것이기도 하고 작가의 특별한 시간을 겹겹이 쌓아 올린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그녀가 포착해낸 다소 차가운 듯한 공간은 오히려 어느결에 따스한 공간으로 뒤바뀌는 역설을 보여준다.
하늘은 투명한 대기로 아무것으로도 채워져 있지 않은 듯하면서도 무한한 공간의 펼쳐짐이 심리적 시야에 다양한 구성으로 들어온다. 맑은 날에는 깨끗이 펼쳐져 있으면서도 항상 무엇인가에 의해 분할되는 대기 공간은 늘 썼다가 지우는 우주의 칠판이나 캔버스와 같다. 그녀의 그림 속에서 하늘에 떠 있거나 조용히 또는 빠르게 흐르는 구름은 마치 둥둥 떠서 날아다니는 솜뭉치처럼 표현되어있다. 그 구름 뭉치의 실낱같은 끄트머리는 하나같이 미세한 기류에도 나풀나풀 미묘하게 반응하여 모습을 바꾸는 동시에 하늘 공간을 자신의 표정으로 점유한다. 그러한 솜털 구름에 반응하여 생성되는 기하학적인 선들에 나뉘는 공간은 어딘가 낯설고도 기이하게 보이면서도 아련하고 적요(寂寥)한 공간으로 나타난다.
작가에게 그 아련함은 개인적인 상실감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두 번쯤은 있게 마련인 경험이지만 그녀 역시 한때 애틋한 시간을 함께했던 반려견을 떠나보내야 했던 아픔이 있다. 삶에서 잠깐이지만 시간을 공유하고 동행했던 존재의 기억은 흰 솜뭉치 같은 구름으로 다시 나타나는 잃어버린 시간의 기억이자 다시 찾는 시간이 될 것이다. 물론 작가는 특정한 하나의 이미지를 위해 이러한 기억을 소환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다양하고 무수하게 지나온 시간이 중첩된다. 다만 작가의 시간은 이러한 익숙한 대상을 통하여 투명한 하늘 공간에 따스한 활력과 숨결을 부여한다. 그렇게 작가는 잃어버린 따스한 기억을 통해 두려울 정도로 넓고 크기에 숭고할 뿐이기만 하던 멀고 차가운 무한의 공간인 잃어버린 하늘을 자신의 것으로 되찾는다.
그녀가 지난 전시에서 ‘비의 선물’이라는 주제로 펼쳐 보였던 새로운 시간 구조를 환기하는 역할을 한 빗방울 대신에, 이번 전시에서 다양하고 신선한 각성을 펼치는 오브제는 솜털 구름이다. 구름이 일으키는 마술적인 각성은 광대무변한 하늘에 투사되는 개인적인 시간의 무늬로 쉬지 않고 변모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각각의 구름 속에는 다층적인 시간이 내재하여 정적인 하늘 공간을 끊임없이 변화하는 공간으로 만든다. 그녀의 이전 그림들은 수중과 같은 공간에 떠 있는 기억이나 추억의 사물들로 채워져 있었다. 또한, 공간들은 그것들의 흐름과 변모의 흔적인 듯이 미세한 파상 무늬가 나이테처럼 새겨져 있기도 했다.
그것은 아마도 당시 그녀가 이국에서 생활하며 느낀 고독감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고독한 시간은 대개 반추의 시간으로 채워져 지난 사물들을 하나씩 소환한다. 빗방울이라든가 장미, 고래, 고양이 등을 통해 그녀는 지난 시간을 더듬어보고 음미하여 그것들을 되살려냄으로써 지난 시간을 되찾으려 했을 것이다. 반면에 이번 전시의 그림들에 나타나는 기하학적인 하늘에는 맑고 투명한 시간이 다층으로 차곡히 녹아있다. 그녀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화면 속에 하늘을 복합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그 거대한 공간이 가진 다양성과 변화무쌍함을 자신만의 시간으로 구현한다. 달은 최초의 텔레비전이라고 백남준이 말했듯이 사람들이 올려다보는 하늘에는 수많은 시간이 투사되어 있을 터이다. 그만큼 성수희의 기하학적 하늘 공간은 색다르게 변화하는 시간을 다채롭게 담아내고 있다.
성수희의 그림 속 공간은 바라보는 시점을 가두어놓고 있는 듯한 벽의 너머로 멀리 높은 곳에 올려다 보이는 구성으로 안과 밖, 이곳과 저곳, 낮은 곳과 높은 곳의 대립구조를 보인다. 이는 하늘 공간을 더욱더 멀리 있는 공간으로 보이게 하여 복합적인 시간 구조와 병존하는 복합적인 공간구조를 보인다. 이는 또한, 보색의 면을 써서 이쪽과 저쪽의 공간을 과감하게 분리한 벽면 공간이나, 블라인드를 통해 먼 곳을 내다보는 듯한 화면 구성, 또는 원형의 창으로 밖을 내다보는 듯한 효과를 내는 원형의 캔버스 형태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이를 통해 먼 바깥 공간을 내다보는 듯한 시점처리는 작가의 내적 공간인 이곳과 저 먼 곳이라는 대립구조의 긴장 관계를 만들어 냄으로써 서로 다른 두 공간의 거리를 더욱 먼 것으로 강조하여 그곳에 대한 그리움의 강도를 더욱더 강화해준다.(서길헌 조형예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