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주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인 구약의 때에는 율법을 따라 죄악에 있어서의 제대로 된 한 번의 자복과 돌이킴까지도 결코 쉽지가 않았던 것으로 아래 본문에서와 같이..
평민일 지라도 흠 없는 암염소가 필요했고, 회막으로 가야 했으며, 그 속죄 제물에 안수한 후에 번제물 잡는 곳에서 잡아야 했고, 게다가 제사장이 없이는 안 되었으며, 진정 그 제사장이 엄격한 절차대로 속죄제를 반드시 드려야만 했던 것입니다..
물론 시기와 상황 등에 따라 언제나 그렇게 까다로우며 복잡했던 것은 아니었음도 구약 성경의 처음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는 것인데 특히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서는 절대 진리이자 하나님의 법인 말씀을 거역하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후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시 그러한 죄악의 시작이 되게 만들었던 뱀, 곧 사탄의 도구이자 상징으로 쓰였으며 어떤 면에서는 형상화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그 뱀을 책망하시고 정죄하시는 자리에 함께 있으면서 듣게 된 여자의 후손에 대한 계시가 그와 유사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고..
아벨에 있어서는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이 하나님 아버지께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역할로 열납이 되게 한 것이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등은 중간 중간에 제단을 쌓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갔는데 그 또한 근본적으로는 다르지 않은 역할이었던 것이고, 에녹,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과 같은 믿음의 선조들은 그 자체로 제사장이나 선지자의 역할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와 교통한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며, 다니엘의 경우는 이미 불타버린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하루 세 번씩 기도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도와 신앙과 삶이 하나님 아버지께 기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한 강렬한 은사와 응답과 이적과 승리들이 넘쳤던 것도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그러한 경우들 하나하나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담과 하와 때부터 미리 구주 예수님에 대해 보이시고 안내하시며 연결될 수 있게 하신 다양한 예표와 모형과 그림자들, 약속과 계시와 상징들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아담과 하와 때부터 모든 인생들은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깨어졌고 단절케 된 것이며, 본질적으로는 말씀을 잃어버린 것이고, 영적으로는 진노와 저주와 사탄과 음부와 사망과 심판들의 노예 상태에 빠진 것으로 그 자체로는 결코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고, 사실상 세상적으로는 그 어떤 방법과 통로들도 그러한 역할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것으로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안 되는 것인데..
곧 온 세상과 전 인류, 모든 시간과 공간보다 더 크신 성자 하나님이시자 구원자이시며 중보자이시고, 특히 아담과 하와 때부터 죄악과 진노와 사탄과 심판들의 영적 노예 상태에 빠진 우리 인생들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의 길과 통로와 접점 등의 위치와 역할의 구주로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모든 대속과 대신, 나음과 화평 등을 위한 값과 대가들을 대신 다 치르심과 함께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모든 구원을 다 이루신 구주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들이 사랑과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공의와 형평과 질서의 하나님 또한 아니실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께 다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과 방법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아래 본문을 위시해서 앞에서 예를 든 사례들 하나하나가 구약의 믿음의 선배들과 권속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고,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에 참예케 하는데 쓰였으며, 죄악들에 있어 사함과 돌이킴들이 가능하게 했고, 기도와 경배들의 응답과 열납들이 되게 했으며, 실제로 삶의 자리와 사역의 현장과 인류 역사의 상황들 속에서 하나님 아버지로 인한 온갖 역사와 이적들, 복과 열매들이 생생하게 나타나고 강렬하게 경험할 수 있게 했던 것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담과 하와 때부터 미리 구주 예수님에 대해 보이시고 안내하시며 연결될 수 있게 하신 예표와 모형과 그림자들, 약속과 계시와 상징들 등이 됨에 있어 그 자체가 방증이 될 수 있는 것이고, 정말 어떤 식으로든 구주 예수님과 직결되는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이며, 만에 하나라도 그렇지 않고서는 원론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로 인한 그러한 역사들 자체가 불가능이었음은 물론 아예 하나님 아버지께 제대로 나아가고 만나며 교통하게 되는 일부터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어쨌든 그렇게 구주 예수님에 대한 예표와 모형과 그림자들, 약속과 계시와 상징들 등으로 인해서도, 게다가 그 엄청난 시간과 공간들, 시대와 나라들을 뛰어 넘고 시공을 거슬러 하나님 아버지로 인한 모든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을 가능하게 했을 정도로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 목숨값 구원이 놀랍고 강력하며 초월적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하면 구주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과 전 인류, 모든 시간과 공간보다 더 크시고 온 우주보다 더 크시며 영원보다도 더 작으실 수 없는 성자 하나님이시자 구주로서 우리 인생들에 있어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세상 끝 날과 신령한 몸으로의 부활, 영원한 나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대속과 대신, 나음과 화평 등을 위한 값과 대가들을 대신 다 치르심과 함께 시대와 나라들, 시간과 공간들을 넘어 모든 구원을 다 이루신 분임이 아닐 수 없는 것인데,,
실상 그렇다고 그러한 구원의 일들에 있어서 그 예수님 단독이실 수는 없는 것으로 조금만 통찰해 봐도 그 위치와 역할 상 모든 주권과 통치와 섭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상상도 못할 사랑과 은혜와 능력으로 창세 전부터 계획, 약속, 준비, 진행하시면서 그의 시간에 따라 하나하나 나타내시고 누리게 하시며 성취해 나가심으로 인해 처음부터 가능한 것이었고 애초에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며, 게다가 직접적, 현실적, 경험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처음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분이며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뜻과 약속과 말씀들을 다 실행하시고 특히 그 한가운데 계신 구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다 이루신 구원의 일들을 시간과 공간들을 초월해서 믿음과 함께 말씀대로 모두 실제가 되게 하시는 성령님께서 정말 하나하나 모두 다 누리고 경험하며 나타나고 성취되어 지게 하시는 것이고, 그렇듯 근원적으로는 우리 인생들이 이 세상에서, 또한 세상 끝 날과 부활과 영생에 이르기까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의 중심, 근본, 실체이신 분인 것일 뿐 아니라 삼위일체라는 그 존재와 개념 상 구약과 신약 시대, 오늘날 우리들, 모든 인류 역사들, 심지어는 천지창조와 창세 전, 세상 끝 날과 영원에 이르기까지 잠시라도 분리, 별개, 변개이실 수 없는 반면 언제나 함께 이시고 그 역할에 따라 완벽하게 조화되시며 완전히 하나되시어 한 뜻을 이루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오늘날의 우리들은 그 어디에서든, 그 어떤 모양이든, 그 어떠한 죄악과 형편과 문제들 속에서든 굳이 예루살렘이나 회막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더군다나 돌로 제단을 쌓는다든지 짐승을 잡는다든지 하지 않아도 진정 그 있는 자리에서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수 있고 그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와 능력인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고, 실제로 그와 함께 상상도 다 못할 사함과 나음들, 회복과 역전들, 응답과 역사들, 이적과 복들, 열매와 부흥들 등이 함께 하고 예비되어 있는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이며, 정말 베드로를 통해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 한 번과 함께 성전 미문의 나면서부터 못 걸었던 자가 그 자리에서 일어서게 된 것까지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인데..
다만 그와 같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는 그 자체가 바로 말씀이신 것이고 오직 말씀으로 하나되시어 말씀과 함께, 말씀대로 모든 것을 실행하시며 다 이루시는 분인 것이기에, 무엇보다 구주 예수님께서야 말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대로 모든 구원을 다 이루신 분인 것이기에 죄악과 세속과 정욕들 등으로 잠자고 병들며 죽은 듯한 신앙이 아닌 말씀의 신앙, 말씀대로의 믿음, 절실하고 치열하며 뜨거운 말씀의 열정과 함께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고 부를 수 있는 것이, 그러면서 직접적, 실제적으로는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은혜들을 의지하고 갈망하는 것이 실질적인 면에 있어서는 생각 이상으로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평민의 한 사람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는데
그가 범한 죄를 누가 그에게 깨우쳐 주면 그는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그 범한 죄로 말미암아 그것을 예물로 삼아
그 속죄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제물을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요
제사장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번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제단 밑에 쏟고
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물의 기름을 떼어낸 것 같이 떼어내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롭게 할지니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레위기4:27~31)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4년 8월 2일(금)1부/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